박원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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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박원순(朴元淳)
출생일1956년 3월 26일 (60세)
출생지대한민국 경상남도 창녕군 장마면
본관밀양 박씨 규정공파
최종 학력단국대학교 사학 학사
혈액형A형
가족2남 5녀 중 여섯째
배우자강난희
자녀1남 1녀
종교무종교[1]
소속 정당더불어민주당
현직서울특별시장
약력춘천지법 정선등기소장
대구지검 검사
대한변호사협회 인권위원
한겨레신문 논설위원
참여연대 사무처장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역대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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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34대 오세훈
권한대행 권영규
35~36대 박원순(현직)

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시민 사회 운동가이자 현 정치인이며 광역자치단체장. 현재 서울특별시시장으로 일하고 있다. 그리고 19대 대선에서 더불어민주당의 유력 대권 후보로 거론되는 사람들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정계에 입문하기 전까지는 인권 변호사와 사회운동가로서 이름이 드높던 인물이었다. 대표적 시민 단체인 '참여연대'의 상징이자, 대한민국 시민 운동을 상징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참여연대를 설립했고, 부적격 정치인 낙선 운동, 소액주주 권리 찾기 운동, 결식 제로 운동 등을 추진하였으며, '아름다운재단'과 '아름다운가게'를 운영한 것으로 특히 유명하다. 다만 이건 관련 업계 내에서의 일이지, 일반인 기준으로는 박원순 당시 변호사의 인지도는 상당히 낮았다. 그가 본격적으로 대중적인 인지도를 지니게 된건 2011년 10월 서울시장 재보선을 앞두고 안철수 당시 교수와 단일화를 이루고 나서였다. 정치에 입문한 이후에는 이재명 성남시장 못지 않게 활발한 SNS 소통으로 소통하는 정치인이라는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후술할 비판 중에는 소통의 부재로 인한 병크가 상당히 있기에 단지 SNS를 좀 한다고 소통하는 정치인이라고 부르기는 힘들다.

인기 팟캐스트 방송인 '신넘버 쓰리'에서 박원순 서울시장의 출생부터 인권변호사로 성장할 때까지의 삶을 다루었다. 정리가 잘 된 편이니 참고해도 좋을 듯. 16분 35초부터 시작

2 인생

2.1 어린 시절

  • 1956년 3월 26일 경상남도 창녕군에서 출생하였다.
  • 1974년 경기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5년[2] 서울대학교 사회계열[3]에 입학하였으나 1학년 시절 유신 반대 시위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투옥되어[4] 제적된 뒤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입학[5]했다. 입학 전 면접에서는 역사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했으나, 입학 하자마자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그리고 젊은 나이에 법원사무관 시험에 합격하고, 2년 뒤에는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2.2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

박원순이라는 이름은, 참여연대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넓게 보면 한국 시민단체의 상징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 우석훈(경향신문 칼럼 <시민운동 몇어찌> 중)

변호사 출신으로서 시민운동에 천착하여 과거 학생운동 시절과 차별화된 선진적인 시민운동을 한국에 뿌리내리게 한 주역 중 한 명으로 꼽힌다. 특히 부패 정치, 재벌에 의해 왜곡된 자본주의 문화 정착[6][7], 불합리한 사회구조 개선 등에서 큰 성과를 거두었다. 2006년에는 시민 운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 받아 만해상, 막사이사이상 '공공봉사' 부문을 수상하였다.

그리고, 노무현대통령이 대우조선 노동자들을 변호하다가 집시법 위반으로 감옥살이를 했던 시절에 직접 변호인을 맡아서 도와줬던 인연도 있었다.#

2.2.1 참여연대 이전

  • 1978년 제2회 법원사무관 시험에 합격하여 춘천지법 정선등기소 소장으로 근무하였다.
  • 1980년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1982년 대구지방검찰청 검사에 임용되었지만 1년만에 그만두고 인권변호사로 일하며 사회운동가로 활동한 경력이 있다.
  • 인권변호사로 활동하며 부천 경찰서 성고문 사건, 부산 미국문화원 점거 사건, 서울대 우 조교 성희롱 사건 등의 변론을 맡았다.
  • 1986년 '역사문제연구소'를 설립하여 초대 이사장을 지냈다.
  • 2000년 12월에는 여성국제전범법정에 참여했다. 여성국제전범법정은 일본군의 전쟁범죄. 특히, 일본군 위안부 조직과 강제연행, 위안부 강간, 고문, 상해, 학대, 살인 행위를 비판, 검증하는 목적으로 세워진 국제법정이다. 1998년 처음 제안되어, 2002년 12월 8일부터 12일까지 열렸다. 심지어 장소도 도쿄 구단회관이다!!![8]
    • 개정 첫날에 남북한 공동검사단이 일본 덴노를 군 위안부 강제 성노동 착취 전범으로 기소하였는데, 대한민국 측 검사로 참여한 박원순은 "한반도는 10만 명 이상이 군대 위안부로 동원된 최대 피해국이였고, 식민지 지배가 그 배경이였다. 과거를 기억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잘못을 되풀이할 수 밖에 없다."면서 일본 덴노의 처벌과 배상을 주장했다. #기사 참고로 국제사법기구의 힘을 빌렸다거나 해당국가 정부가 공식 참여하지 않았으므로 법적 구속력은 없었고, 일본 정부 측 관계자는 모두 불참했다. 국제적 NGO 단체의 후원을 받았고, 전 세계에서 천 명이 넘는 방청객과 300명이 넘는 기자들이 참석했다. 총 9개의 검사팀이 참여하였다.
    •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구단회관 앞에서 일본 우익 단체의 가두선전차가 몰려 들어, '일본군 위안부는 강제로 동원되지 않았다'는 등의 현수막을 내걸로, 국제법정을 비난하는 가두방송을 계속 했다. 한 때 대회장 진입을 시도했으나, 경찰과 주최 측의 삼엄한 경비 때문에 구단회단 주변에서 가두방송을 계속 했다고. #기사

2.2.2 참여연대 설립 이후

참여연대 웹사이트

  • 1995-2002까지 참여연대의 사무처장을 맡아 일했다.
  • 1994년 9월 출범한 시민단체 참여연대의 설립에 기여를 한 주역이다. 참여연대 설립은 학생운동 출신의 운동권 그룹, 박원순 변호사를 비롯한 인권변호사들(민변 계열),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9]를 중심으로 한 한 진보적 학자 그룹 등 3그룹이 주도했다.# 그 후 1995년부터 2002년까지 참여연대 사무처장으로 활동했다.
  • 낙천낙선운동
박원순은 16대 총선을 앞둔 2000년 1월 12일 참여연대와 환경연합 등 420여 개 시민단체와 함께 '2000년 총선 부패정치 청산 시민연대'(이하 총선연대)를 구성, 단체 상임집행위원장 자격으로 낙천·낙선 운동을 이끌었다. 박원순은 후보 공천반대 인사 선정 기준과 적용에 대해, "병역사항·재산변동·부패혐의, 선거법위반, 헌정질서 파괴와 반인권 행위, 의정활동 성실성, 법안·정책에 대한 태도, 반의회ˑ반유권자적 행위"등을 적용했다고 밝혔다. 낙천·낙선운동이 벌어졌던 2000년 16대 총선에서 대상자 132명 중 72.3%인 102명이 낙선했다.
단 이 낙천낙선운동은 명백한 실정법(공직선거법 87조) 위반으로, 이에 대해서 많은 비판과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대법원은 낙선운동 대상자들이 제기한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낙선운동 민사책임 인정해서 원고 일부 승소 판결을 내렸으며, 2001년 헌법재판소는 낙선운동 금지를 규지한 선거법 87조에 대해서 시민단체의 낙선운동 금지는 합헌이라는 결정을 내렸다.
  • 소액주주 권리찾기운동
재벌들의 비정상적인 영향력 앞에 주주들의 권리가 외면받고 있다는 불만이 점점 거세지고 있던 와중, 참여연대는 재벌개혁의 일환으로 자본주의를 정상화시키기 위해 소액주주들로부터 위임장을 받아 소액주주 권리찾기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1997년부터 2005년까지 이어진 참여연대의 핵심 사업이었다. IMF 사태를 전후하여 한보철강을 시작으로 제일은행, 삼성그룹 등에 대하여 소액주주 운동을 시작했다. 참여연대는 재벌 일가를 상대로 한 주주대표소송에서 승소하기도 했고, 훗날 이건희 회장이 구속된 계기가 되는 전환사채 문제도 계속 제기했다. 또한 참여연대는 입법 및 정책입안과정에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여 주주의 권리를 확대하는 방향으로 상법이 개정되도록 힘썼다.

2.2.3 '아름다운재단' 및 '아름다운가게'

  • 2001-2010: '아름다운재단' 상임이사
  • 2002-2009: '아름다운가게' 상임이사

2001년 '아름다운재단'을 설립해 1% 나눔 운동, 동아일보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게 돈쓰기" 공동캠페인, 인터넷 중앙일보와 공동으로 "따뜻한 세상 만들기" 온라인 캠페인, 작가들의 아름다운 나눔 인세 1% 기부운동 그리고 네이버와 기부포털사이트 해피빈 창립을 함께하여 기부문화의 대중화를 위한 활동을 하였다.

또한 아름다운재단을 통해 모인 기부금을 통해 한부모 여성 가장 창업을 지원하는 '희망가게 사업', 태평양제약[10]과 함께 독거 노인들에게 생계비 등을 지원하는 '노인지원 기금 사업', 미숙아의 치료비를 지원하는 '다솜이 작은 숨결 살리기 사업' 등의 사회적 사업을 실천하였다.

2002년 '아름다운가게'를 설립, 헌 물건을 기증받아 수선하여 되파는 형태의 재사용 나눔가게, 제3세계 저개발국 공정무역 윤리적 소비문화 운동, 재활용 디자인 사업, 국제구호를 위한 모급사업을 하였다.

2.2.4 희망제작소

희망제작소 웹사이트

  • 2006-2011: 희망제작소 상임이사

'희망제작소(The Hope Institute)'는 대한민국의 재단법인으로 2006년 박원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한 시민, 시민사회 활동가, 사회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범시켰다. 당시 '21세기 新실학운동'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창립한 희망제작소는 한국사회의 크고 작은 의제들에 대해 정책적 대안을 연구하고 실천하는 독립 민간연구소로 시민 참여를 바탕으로 한 지역과 현장 중심의 실용적인 연구를 지향한다.

간판문화 개선, 지하철문화 개선, 여성들을 위한 수영장 생리할인제도[11], ATM 수수료 사전 안내[12]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희망제작소는 현재 '사회혁신센터', '뿌리센터', '사회적경제센터', '시니어사회공헌센터', '교육센터', '재난안전연구소' 등의 연구 부서가 있으며 대안정책연수를 전문으로 하는 '공공연수'가 독립 법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2.3 정치인

시민사회에서는 명망이 높고 한국의 NGO 활동에 있어 많은 업적을 쌓은 인물이었으나 대중적인 인지도가 많이 낮았던 상황에서 서울시장 재보궐 선거에 무소속 후보로 출마하였다. 그러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을 일으켰던 안철수 당시 서울대 원장의 양보로 지지도가 껑충 뛰어오르게 되었고 그게 당선으로 이어지게 된다.

지금은 결별했으나 당시 안철수 원장의 측근으로 통하던 윤여준 전 환경부 장관의 말에 의하면, 서울시장에 나가는 것을 안철수 후보의 아버지가 반대했다고 한다. 그래서 양보하는 것처럼 포장이라도 하자고 해서 안철수 후보의 동의 아래 진행되었다고 한다.[13]

이것이 '아름다운 단일화'의 한 사례로 손꼽히면서 안철수 원장이 본격적으로 대통령 후보급 정치인으로 주목받게 된다. 어찌 보면 서로 윈윈한 셈이다.

서울시장 취임 이후 정책 추진 과정에서의 공청회 개회, 다수의 현장 방문, 정보소통광장 웹서비스(행정정보 공개) 등 시민과 소통하는 시장을 내세우고 있다. 다만 소통이라는 이미지에 함몰되어 오히려 과할 때가 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I.SEOUL.U 슬로건.

2.3.1 정계입문 계기

  • 대한민국 시민 운동의 대부격인 인물로 개혁성을 갖춘 전문가라는 평가와 함께, 1990년대부터 정치권(특히 민주당 계열)에서 계속 러브콜을 보냈으나 이를 거부하고 시민운동가로 계속 활동하였다.
  • 정치참여에 대한 그의 태도가 바뀌게 된 것은 이명박 정부 때에 들어와서였다. 2009년 6월 18일에 위클리경향[14]과의 인터뷰를 통해 NGO 활동에 대한 이명박 정부 측의 노골적인 방해와 불법적 민간 사찰 의혹을 폭로하면서관련기사 본격적으로 이명박 정부와 대립하게 된다. 국정원은 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고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이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지만 결국 법원은 박원순의 손을 들어줬다.
  • 결식제로 운동: 한편으로, 2010년 12월 8일 집권 여당인 한나라당이 국회 본회의에서 2011년 예산안을 강행 처리하며 급식 관련 예산 285억 원을 전액 삭감해 새해가 시작되는 일주일 뒤부터 당장 급식 지원이 끊기는 아이들이 나올 수 있는 상황이 되자 박원순은 즉각적으로 '결식제로' 운동을 시작했다.
2010년 당시 결식제로 운동을 선언하며 박원순은 "어떻게 밥 굶는 아이들의 급식비까지 깎아버린다는 말입니까", "국가가 책임을 지지 못하면 국민이라도 나서서 책임을 다해야 한다"며 "밥 굶은 아이들을 생각하면서 오늘부터 하루에 한 끼를 굶어 12월 중으로 4만 원(한 끼당 5000원×8끼)을 내놓으려 한다", "대한민국 정부가 버린 아이들 우리가 먹입시다"라고 말했다. 국민 100만 명이 참여해 400억 원을 모으면 결식아동 겨울방학 급식비를 해결할 수 있다는 아이디어다. 그의 제안으로 시작된 '결식아동 0 캠페인'은 개시한 지 일주일 만에 2000여 명 이상이 동참해 1억 원이 넘는 성금을 모았다.
부경대학교 이상윤 교수는 박원순이 2011년 오세훈이 무상급식문제로 서울시장에서 물러나자 보궐선거에 나온 것은 2010년 12월에 한나라당이 2011년 예산안 처리 과정에서 급식 관련 예산 285억 원을 전액삭감하자 나온 것으로 그런 점에서 자신의 결식제로운동의 연장선상이라 평했다.
  • 이 시기를 겪으면서 박원순은 이명박 정부 및 한나라당과 직접적인 대립 관계에 돌입하게 되고 결식제로운동의 연장선상에서 2011년의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당선되면서 그는 사회운동가에서 정치인으로 바뀌게 된다.

2.3.2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15]~제 35대 서울시장

2.3.2.1 선거과정
  • 전임자였던 오세훈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에서 패배와 동시에 사퇴하자 서울시장 보궐선거에 출마했다.
  • 안철수 (당시 서울대 융합과학기술대학원장)가 출마 선언을 하지 않았음에도 여론조사에서 압도적인 선두를 달렸으나 이미 출마를 선언한 박원순 후보를 만나고 양보 및 출마 선언을 하지 않고 박원순 후보를 지지[16]하기로 하여 당시로서는 '아름다운 양보'라면서 큰 화제가 되었다.
  • 민주당박영선 의원 등과의 야권 단일화 경선에 승리하여 야권 단일 후보로 선출되었다.
  •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시장 선거에서 53.4%의 득표율을 얻어(2,158,476표), 한나라당의 나경원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제35대 서울시장으로 취임하게 되었다.
  • 개표 결과, 서울 25개 지역구 중 보수 성향이 강한 용산구강남 3구를 제외한 21개 지역구에서 당시 나경원 후보를 앞섰고 1,867,880표(46.2%)를 얻은 나경원 후보에 290,596표차(7.2%)로 승리하였다.
  • 이는 당시 집권 여당이었던 한나라당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한나라당은 2012년 열리는 19대 총선, 18대 대선의 승리도 낙관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 결국 홍준표 대표 체제는 붕괴되고 박근혜 비상대책위원장 체제가 들어서게 되어 지금의 새누리당이 탄생하게 된다. 민주당으로선 무조건 기뻐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으나[17] 야권 전체를 종합적으로 볼 때, 매우 오랜만에 非한나라당 계열의 서울시장이 탄생했고, 또 당시 차기 대권 주자 중 압도적으로 지지율이 높았던 박근혜에게 대적할 안철수라는 새 인물이 부상한 것은 긍정적 신호였다.
2.3.2.2 직무수행
  • 박원순 시장이 재보궐선거에서 승리하자 시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초등학교 5·6학년에 대한 무상급식 지원' 결재였다. #
  • 서울시장으로 재임하면서 서울시립대의 반값등록금을 실현하였다.
  • 2013년 전국철도노동조합 파업사건 당시 지하철 노조 측과 협상을 통해 파업을 철회시켰다.기사 관련 칼럼
  • 2013년 10월 28일 정부기관 중 최초로 법령상 비공개 문서를 제외한 모든 행정문서를 시민에게 공개하는 정보소통광장 웹서비스를 시작했다. 국내에선 모든 행정문서를 시민에게 공개한 첫 사례다. 서울시는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이 취임하면서 내건 ‘희망서울을 위한 공약’을 실천하기 위해 웹사이트를 만들었다. 당시 박원순 시장은 “열린시정 2.0 시대를 열겠다”라며 “모든 시정 정보를 공개하고 공유함으로써 공공정보의 가치를 더욱 높이는 열린 시정을 만들겠다”라고 밝힌 바 있다.
  • 서울시는 구청이 가지고 있는 공공데이터를 지자체 최초로 ‘서울 열린 데이터 광장’에 제공하는 서비스를 2013년 11월 1일부터 시작했다. 서울 열린데이터 광장은 서울시가 가진 공공데이터를 가공하지 않은 원문 형태로 시민에게 제공하기 위해 만든 웹사이트다. 2013년 5월 서비스를 시작해 2013년 현재 교통, 환경, 도시관리 등 10개 분야 95개 시스템, 1098종의 데이터를 개방했다.
  • 2013년 12월 13일 혜화동 공관에서 은평뉴타운 전세집으로 공관을 옮겨 현장시장실을 열었다.# 혜화동 공관이 한양도성 복원공사로 철거되고 새로운 공관을 마련할 때까지 미분양 때문에 골치를 앓던 은평뉴타운에 직접 임시공관을 마련해 미분양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한 것. 박원순 시장이 적극적인 정책을 펼치고, 부동산 경기도 살아나면서 은평뉴타운 미분양은 "완판"되었고, 박원순 시장은 가회동에 새 공관을 마련해 이전하게 된다.

2.3.3 ~제 36대 서울시장

2.3.3.1 선거과정
  • 2014년 6.4 지방선거에서 서울시장 재선에 도전하였다.
  • 세월호 참사로 인한 영향과 경쟁자였던 정몽준 새누리당 후보의 막내 아들의 소위 '국민성이 미개하다'는 망언, 그리고 정몽준 후보의 네거티브 공세가 오히려 박원순 후보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였다.
  • 6.4 지방선거에서 보궐선거 때보다 득표율이 더 오른 56.1%의 득표율로(2,752,171표), 새누리당정몽준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어 서울시장 재선에 성공하였다.
  • 개표 결과, 서울 25개 지역구 중 용산구강남구, 서초구를 제외한 22개 지역구에서 당시 정몽준 후보를 앞섰고 2,109,869(43.02%)를 얻은 정몽준 후보에 642,302표차(13.10%)차이로 승리하였다.
    • 주목할 만한 점은 박원순 당시 후보가 서울의 대표적인 새누리당 강세지역인 강남 3구에서 보여준 득표율이다. 송파구에서는 아예 정몽준 후보를 이겼으며 강남구에서는 11개 동에서 승리하였다. 특히 정몽준 후보가 국회의원이던 시절 지역구였던 동작을에서도 정 후보를 앞질러 승리하였다.[18]
2.3.3.2 주요공약
  • 서울형 공공 어린이집 1,000개소를 확충하겠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2016년 예산안에 300개소를 신규 설립할수있는 예산이 반영되었다
  • 서울역 고가 공원화
  • 5대 창조거점[19], 3대 아시아지식기반허브[20], MICE복합단지 조성
2.3.3.3 직무 수행
  • 2014년 8월 6일, 소위 부정청탁 및 금품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에 대응하는 서울시 공직사회 혁신대책 ‘청사초롱[21] 서울’을 발표했다. 이 시행안에 따르면, 서울시 공무원은 단돈 1000원만 금품을 받게 되어도 처벌 대상이 된다. 관련기사
  • 2015년 5월 19일 "백제왕이 꿈 속에 나타나서 풍납토성 복원을 결심했다"는 내용의 글을 페이스북에 올려 논란이 되기도 했다. 어쨌거나 서울시는 진짜로 복원 추진 중.
  • 2015년 6월부터 대중 교통 요금을 인상하여 큰 비판을 받고 있다. 참고로 이땐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었던지라, '꼼수 인상'이란 비판도 받았었다.
  • 2015년 11월에 일정 자격을 갖춘 청년 실업자들에게 월 50만 원씩 지급하는 복지 정책을 발표했다.기사 박 시장의 성향을 생각해보면 예견된 절차. '이상적인 복지 정책'이라는 긍정적인 평과 포퓰리즘, 복지병이라는 부정적인 평이 양립한다.
  • 2015년 서울시의 음식물쓰레기 봉투 값이 폭등하였다. 심한 곳은 550%(서울시 동작구 기준 10L) 상승한 곳도 존재.
  • 청계천 재복원 의지가 있는 듯 하다. 자세한 사항은 문서 참조.
  • 2016년을 기준으로 서울시가 지고 있었던 빚을 무려 7조 원이나 줄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대중교통 요금이...
  • 공약인 서울시 고가 공원화 사업에 대해 찬반 양론이 뜨겁다.

3 비판과 논란

박원순/비판 및 논란 문서로.

4 선거 이력

당 내부 선거가 아닌 대한민국 선출직 공직자 선거 결과만 기록한다.

연도선거 종류소속정당득표수(특표율)당선여부비고
2011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서울특별시장)[22]무소속2,158,476 (53.4%)당선 (1위)민주당과 선거연대
2012.2 민주당[23] 입당
2014제6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새정치민주연합[24]2,752,171 (56.1%)당선 (1위)

5 이야깃거리

  • 2009년 100분 토론의 손석희 고별 방송 때 영상으로 출연했는데 이때 손석희에게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손석희와 나이가 동갑인데도 나이가 많이 차이나 보인다며 손석희의 동안의 비결이 뭐냐고 질문했는데 이에 대해 손석희의 대답은 "굳이 답변을 드리자면, 제가 동안이라기보다는 박 변호사님이 노안이십니다."[25] 물론 분위기상 손석희와 박원순 모두 가벼운 농담을 한 것이다. 이후 JTBC에 특별출연 했을당시 또 같은 이야기가 나왔는데 이땐 "나는 나이에 맞는 외모고 손 사장이 비정상인거다"라고 해명하기도 했다.
  • 2015년 6월 14일, 영국 가디언지에서 세계 거대도시를 이끄는 시장 5명 중 1명으로 박원순 시장을 소개 했다. 다만 가디언지의 공식 선정은 아니다.
  • 워커홀릭으로 유명하다. '희망제작소'와 '아름다운재단'에 몸담았던 시절에는 실무자들 사이에서 악명이 높았는데, 보고서를 읽다가 궁금한 것이 있으면 새벽 2시에도 불쑥 전화를 걸어 실무자들이 멘붕했다고 한다. 종종 사석이나 인터뷰에서 농담조로 과로사했으면 좋겠다는 말을 자주한다고(...)
정의당의 공식 팟캐스트 방송인 노유진의 정치카페 시즌 2에 출연해 했던 인터뷰에서, 서울시장이 된 후에도 앞서 말한 방식으로 일을 했더니 서울시 공무원들이 줄줄이 병원에 실려간다는 하소연이 많아, 지금은 일하는 스타일을 바꾸어 칼퇴근을 하는 등 아랫 사람들에게 숨 쉴 틈을 최대한 열어주는 쪽으로 스타일을 바꿨다고 한다. 21분 21초부터
  • 그의 아들 박주신 씨의 병역 복무 관련해 명예훼손 및 허위사실 유포 사건으로 일베 유저 16명을 고소한 것으로 보아 기사 박원순 서울시장 측에서도 일베를 모니터링하는 것은 사실로 보여진다. 심지어 일베에서도 비교적 관심을 받지 못했던 게시글도 비슷한 죄목으로 고소당했다고 한다.
  • 새누리당이 가장 싫어하는 인물 중 한 명이다. 새누리당의 거물급 의원을 4명씩이나 골로 보냈으니 당연히 싫을 수 밖에. (...)
    쭉 나열해보자면
또한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舊 새누리당)은 여론악화 때문에 당명을 바꿔야하는 상황까지 가게됐으니 박원순에 의한 피해가 얼마나 컸는지는 말안해도 짐작할 수 있다.
어찌나 싫어하는지 기회만 잡히면 제대로 조지려고 벼르는 중이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보수측은 박원순의 약점을 찾으려고 혈안이 되어있다. 반면 진보 진영에서는 박원순을 새누리당 킬러, 스나이퍼 박이라고 부르며 칭송하는 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이쪽으로.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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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8월 31일 서울시 친환경 학교급식 홍보대사로 위촉된 APRIL걸그룹과 기념촬영하는 모습. 에이프릴의 미니 2집 앨범을 선물받았다. 시장님도 입덕??
  • 일베저장소 등지를 중심으로 박원순 사진을 올리고 특정 욕설을 붙이는 드립이 있다. 박원순 시장의 표정과 욕설이 절묘하게 들어맞는다며 특정 커뮤니티들 내에서 유행을 타고 있다.#

7 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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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문의 한국현대사 : 야만시대의 기록 (총 3권) - 역사비평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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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순은 1년 안에만 2~3권 씩을 써내면서 정치인 중에 제일 다작을 하는 축에 든다. 중화민국리덩후이 전 총통(1.5년에 1권 꼴)을 이겼다(...)
  1. 다만, 고등학교 재학 시절에는 불교학생회에서 활동했었다.
  2. 재수를 하였다. 원래 빠른 56년생
  3. 당시엔 서울대가 과별 모집이 아니라 큰 단위의 계열별로 모집해서 2학년 올라갈 때 과를 정하는 광역선발체제였다. 박원순이 입학한 사회계열엔 법학과, 사회대 학과들, 경영학과가 소속되어 있었고, 1학년 마친 뒤 이 학과들 중에 하나로 전공진입을 하게 되는 시스템이었다.
  4. 김상진 열사 추모식에 참가했다가 긴급조치 제9호 위반으로 4개월간 투옥되었다. 당시 박원순은 이화여대생들과 미팅을 앞두고 타임지로 공부하던 중이었는데 유신 반대 시위가 한창 열리는 것을 보고 가만히 있어서는 안되겠다고 생각해서 참여했다고 한다.
  5. 유신체제하에서 정보기관은 이른바 운동권 출신 학생의 입학을 거부하라고 일종의 ‘지침’을 내리던 시절이라 대부분의 대학이 운동권 학생의 입학을 꺼렸음에도 불구하고 단국대에 입학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장충식 총장의 영향이었다. 장충식 총장의 아들(현 장호성 단국대 총장)이 박원순과 경기고 동기동창이다.참고
  6. 소액주주운동이 대표적인데, 장하성 교수와 함께한 이 운동은 사실 진보 진영내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왔다. 5%도 안되는 지분을 가지고 순환 출자를 통해서 수많은 계열사들을 황제처럼 관리하는 재벌 총수 가문의 횡포를 견제하고 주주의 권익을 보장한다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칙을 다시 확립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있지만, 반면에 주주 이익 극대화를 최대 목표로 삼는 미국식 기업 경영 즉 주주자본주의 개념을 무분별하게 도입해서 장기적인 기업 안정성을 해칠 뿐더러, 실제 목표대로 주주 중심 경영 원칙이 확립되도 결국 모든 수익은 주주들(대부분 해외투기자본)만 가져가고, 노동자와 하청기업 그리고 소비자한테는 아무런 결과물이 없다는 비판도 함께 존재한다. 게다가 장하성 교수와 참여연대는 국내 재벌 총수 가문의 횡포를 견제한다면서, 출처가 불확실한 해외 투기 자본하고 손을 잡는 등의 행태를 보여주면서, 결국 해외투기꾼들한테 놀아난 것이라는 비아냥이 나오기도 했다. 일명 SK-소버린 사태로 당시 소버린을 포함한 해외 금융사만 엄청난 투자 수익을 올리는 것으로 상황이 종결되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개혁적 경제학자들과 진보 정당과 비제도권 좌파 그룹 내에선 이 소액주주운동이 노동자와 서민들의 권익과는 상관없는 '있는 자들만의 리그'라는 식의 비판이 나오기도 했다.
  7. 2000년대 초반 벌어진 이 소액주주운동을 둘러싼 논란은 한국 경제에서 재벌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며, 어떤 방향으로 재벌을 개혁할 것인가를 둘러싼 진보 성향 경제학자들 간의 첨예한 논쟁의 한 부분이다.
  8. 도쿄 구단 지역은 일본 우익의 대표적인 중심지이기도 하다.
  9. 2014년 지방선거에서 서울시 교육감에 당선되었다.
  10. 화장품으로 유명한 그 태평양이 맞다. 현 아모레퍼시픽 계열사, 지분 일부를 기부 받아, 처분하는 형태로 탄력적인 기부금 운용이가능했다.
  11. 여성들이 생리하는 날에는 수영장에 갈 수 없음에도 남성들과 같은 액수의 수영장 이용료를 낸다는 점에 대한 민원을 받고 착수했다
  12. 당시만 하더라도 ATM 수수료가 미리 안내되지 않았었는데, 당연히 이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이 많았다.
  13. 사실, 안철수는 당시에 대권이 더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지 않을거라는 전망이 더 많았다.
  14. 경향신문에서 발행하는 격주간시사잡지.
  15. 서울특별시장 보궐선거에 출마
  16. 단일화라고 표현하지 않는 이유는 당시 안철수는 출마 선언을 하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두 '후보'가 경선, 여론조사등의 어떤 방법을 통해 한 명의 후보가 사퇴하고 나머지 한 명을 지지하는 것을 말하는 '단일화'하고는 차이가 있다.
  17. 이명박정부의 지지율도 낮고, 오세훈이 무상급식투표에 시장직을 걸었으나 결국 투표율 미달로 투표함도 열지 못하고 사퇴를 해서 책임론이 불 수 있었는데도 어떤 변화를 바라는 국민의 지지는 민주당이 아닌 당 밖의 새로운 인물들(안철수,박원순)에게 모아졌고,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도 패배하였으며, 선거 결과도 야권단일후보를 지원한 서울특별시장 선거를 제외하고서는 만족스럽지 못하였다...
  18. 그동안 야권이 단 한 차례도 여권을 이기지 못했던 강남권(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에서도 정 후보를 상대로 근소하게 승리했다.
  19. 구로, 홍대, 상암, 동대문, 개포
  20. 마곡,창동, 홍릉
  21. 청렴, 사랑, 초심, 롱런
  22. 전임자 오세훈 2011년 8월 26일 사퇴. 무상급식 주민투표 패배 책임
  23. 2012년 총선에는 민주통합당으로 당명이 바뀜
  24. 더불어민주당
  25. 그리고, 손석희가 저 발언을 한 뒤에 곧바로 노회찬 전 의원을 가리키면서 "여기 노회찬 대표님도 저랑 동갑이십니다."라고 강제인증해버렸다.
  26. 단 엄밀히 말해서 이 당시 강용석은 새누리당 소속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