꽝탄 언덕의 비명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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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2.21. 오후 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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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고경태의 1968년 못다 한 이야기]② 짜빈동 신화의 이면

옛 짜빈동 기지에서 만난 베트남의 비석들이 말하는 또 다른 진실


비석 세 개가 있다. 그 비석들은 베트남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 2㎞ 반경에 모여 있다. 제2화는 그 비석의 메시지를 따라가보았다. 고대사의 자취가 서렸다는 중국 만주나 임시정부가 세워졌던 상하이에서만 외국 유적이 발굴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베트남 중부 지역 곳곳에 세워진 수십 개의 비석이야말로 대한민국 현대사를 거울처럼 비쳐주는 외국 유적이자, 우리가 자부만 했던 과거를 뒤집어 보여주는 훌륭한 역사 선생님이라고 생각한다. 그 유적의 사실관계를 추적하고 검증하다보면 이야기는 더 풍부해진다. 짜빈동의 세 비석을 처음 발굴해 소개한다.


해병제2여단 11중대 등이 주둔했던 꽝응아이성 선띤현 띤토사의 옛 짜빈동 기지. 베트남에서는 ‘꽝탄 언덕’이라 한다. 그 남쪽 끝에 베트남에서 만든 ‘승전비’(가운데)가 세워졌다. 승전비엔 “남조선군에게 살해당했던 꽝응아이성 선띤현, 빈선현, 그 외 많은 지역동포에 대한 복수를 했다”고 적혀 있다.


무적 해병의 신화는 이렇게 쓰여 있다.

“(3소대) 이수현 소위는 원위치에서 지휘가 곤란하자 일단 예비진지로 물러나고 제1분대의 조정남 일병은 분투 중 적의 수류탄에 전신 파편상을 입고 위급한 상황에 처하였는데 이때 3명의 적이 교통호를 따라 접근하자 그는 죽음을 결심하고 그 자리에서 수류탄을 터뜨려 자신의 소총을 적이 사용하지 못하게 파괴하고 그들과 함께 폭사하였다. 한편 중상으로 행동이 곤란한 처지에 놓인 동 분대 이학현 상병은 교통호 양쪽에서 가까이 다가오는 적들을 보자 ‘적에게 죽느니보다는 차라리 내가 먼저 적을 죽이고 나도 죽겠다’라고 외치면서 수류탄을 터뜨려 그들을 죽인 다음 자신도 그 자리에서 산화하였다.”

“(1소대) 신원배 소위는 향도 임향근 하사에게 말하기를 ‘나는 이미 죽음을 각오하였다. 따라서 내 몸이 가루가 되더라도 한 조각의 심장이 뛰고 있는 한 어떻게든지 기어가서 기필코 적진지를 파괴할 테니 선임하사가 돌아오면 다행이지만 만일에 나와 같이 죽는다면 향도하사가 소대를 지휘토록 하라’고 비장한 결의를 보인 다음 대원들에게 ‘나는 지금 전방의 적진지를 파괴하기 위하여 떠날 테니 모든 병사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싸워서 반드시 이겨야 한다’라고 강조하고 특공조를 엄호사격할 것을 지시하고는 4명의 선두에서 비호처럼 돌진하였다.”

<파월한국군전사> 제2권의 해당 전투 묘사는 흡사 전쟁영화의 한 장면 같다. 기록에 따르면 장교와 병사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싸웠다. 1개 중대 규모가 조금 넘는 병력은 혼연일체가 되어 그 열 배 넘는 적 1개 연대의 기습을 물리쳐내고 완승을 거두었다. 12척 배로 133척을 거느린 왜 수군을 격퇴한 정유재란 때의 명량해전을 연상시킨다. 1967년 2월15일, 짜빈동에서의 일이다.

<파월한국군전사>는 “종래의 5대 작전에 본 전투가 새로이 추가됨으로써 6대 작전의 하나로서 해병전투사에 길이 빛나게 되었다”고 말한다. 5대 작전이란 한국전쟁기의 통영지구작전, 인천상륙작전 등을 일컫는다. 추가된 짜빈동은 그중 가장 소규모 부대로, 가장 짧은 시간에, 가장 드라마틱한 승리를 연출한 작전이었다. 해병대는 짜빈동 전투를 베트남전의 전설로 선전해왔다.

2018년 12월30일, 그 짜빈동을 갔다.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다. 전투가 벌어진 지 52년이 흘렀다. 짜빈동은 도전을 받은 적이 없는 신화다. 국회도서관에서 키워드를 넣고 검색해봤더니 찬양 논문 일색이었다. 전쟁이나 파병에 대한 근본적 사유와 함께 다른 질문을 던지는 문헌은 찾아볼 수 없었다. 짜빈동엔 대승리의 신화와 교훈밖에 없을까.

승.전.비

1967년 2월15일 아침, 치열한 전투가 끝난 뒤 해병대원들이 적군의 주검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전투는 새벽 4시부터 아침 7시30분까지 전개됐다. 주검엔 북베트남 정규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병사, 지방유격대원들이 혼재돼 있었다. 대한민국 해병대-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족보


띤토사의 열사묘역. 500기 넘게 묻힌 이 묘역에는 짜빈동 전투에서 죽은 군인과 유격대원이 상당수 잠들어 있다. 한국군이 참호에 주검을 묻고 떠나는 바람에 철수 뒤 파헤쳤을 때는 누구인지 확인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베트남에 짜빈동(Trà Bình Đóng)이라는 공식 지명은 없다. 꽝응아이성(도) 선띤현(군)에 속해 있다는 기본 정보만으로 탐색을 시작했다. <파월한국군전사> 전투부도와 현재 지도를 연결해 파악해준 주변 전문가의 도움으로 그곳이 띤토사(읍)에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현지 인민위원회 관계자의 안내도 받기로 했다. 주민들은 짜빈동이 오래전에 존재한 띤토사의 마을 지명일 것이라 추정했다. 한국군이 왜 짜빈동이라 했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짜빈동은 1967년 해병제2여단(청룡부대) 3대대 11중대가 책임지던 전술기지다. 꽝응아이에서 북서쪽으로 12㎞, 여단 본부가 있던 쭈라이에서 남쪽으로 23㎞ 떨어진 지역이다. 청룡부대가 1968년 호이안으로 기지를 옮기기 이전 시절이다. 짜빈동은 표고 30m의 작은 동산으로, 둘레 800m, 남북 직경 300m, 동서 직경 200m의 달걀처럼 생긴 지형이었다. 11중대 말고도, 제1중대 1개 소대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80mm 박격포 1개반 등이 배속돼 총 294명이 기지를 지켰다.

오후 1시께 약속 장소에 나온 띤토사 인민위원회 관계자가 오토바이를 타고 앞장섰다. 인민위원회 앞에서 출발한 승용차는 곧 숲이 우거진 야산 지대로 들어섰고 10분도 안 돼 목적지에 도착했다. 양쪽에 키 큰 나무들이 도열한 15도 경사 시멘트길을 오르니 맨 끝에 비석 하나가 있었다. 2008년 이후 띤토사 인민위원회가 옛 짜빈동 기지 남쪽에 세웠다는 전투 기념물이었다. 뭐라고 써 있을지 궁금했다.

비석에 나온 주소는 선띤현 띤토사 트엉토촌 돈 마을. 이름은 ‘꽝탄 언덕 승전비’였다. 꽝탄 언덕(Đồi Tranh Quang Thạnh), 그리고 승전비(Di Tích Chiến Thắng). 둘 다 생소한 낱말이었다. 꽝탄은 이곳에서 2㎞ 떨어진, 습격이 시작된 지명이라고 했다. 그들은 낮은 곳에서 언덕을 올라 쳐들어왔다. 베트남은 이곳을 ‘꽝탄 언덕’이라 일렀던 것이다. 다음은 승전비. 해병의 승리 신화를 가슴 벅차게 품어온 이들이라면 ‘역사 왜곡’이라며 기함을 할지도 모르겠다.

뒤이어 도착한 띤토사 인민위원장 응우옌반이(52)가 비석 앞에서 설명을 해주었다. “전투만 놓고 보면 한국군이 이긴 게 맞지요. 하지만 이곳은 동서를 잇는 전술적으로 중요한 지역이었고, 기습 목적은 한국군 철수였어요. 실제로 한 달 뒤 물러났고요. 전술적으로 졌지만 전략적으로 이긴 셈입니다.”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첫 번째 질문이다. 과연 승리한 것인가?

전투에 참여한 병사들은 모두 각종 훈·포장을 받고 일계급 특진했다. 대통령 박정희는 하루 뒤 ‘찬사와 치하’의 축전을 띄웠다. 병사들은 도회지로 나가 쇼공연을 관람할 기회도 얻었다. 하지만 적의 습격을 저지한 기지에서 오래 머문 것 같지는 않다. <파월한국군전사>를 뒤져보면 11중대가 이곳에 주둔하며 부근에서 작전을 한 기록은 더 이상 없다.

1968년 ‘뗏 공세’를 떠올려본다. 미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남베트남 전역에서 설 휴전 약속을 어기고 대대적 기습공격을 감행한 북베트남군과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 게릴라들을 패퇴시켰다. 하지만 ‘뗏 공세’에서 미군이 이겼다고 여기는 이들은 없다. 전투에서는 이겼지만 이후 세계 여론과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짜빈동 습격은 ‘초미니 뗏 공세’였을까.

이제 승전비의 비문을 읽어볼 차례다. “(앞 생략) 적군은 두 겹 참호(깊이 1.3m, 폭은 5m) 방어망을 구축했다. (중략) 1967년 2월15일 제5군구 2사단 1연대, 그리고 선띤현 부대와 띤토사 주민들이 서로 협력하여 꽝탄 언덕을 습격했다. 전투가 악렬하고 긴장되게 연속 3시간 동안 벌어졌다. 우리는 청룡여단에 속한 남조선군대의 한 소단을 소멸시켰는데 42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 (중략) 남조선군에 의해 살해당했던 꽝응아이성 선띤현, 빈선현, 그 외 많은 지역 동포에 대한 복수를 했다. 꽝탄 언덕의 승리는 제5군구 무장 역량과 꽝응아이성 주민의 적군에 대한 깊은 증오감과 결전의 정신을 생생히 증명해준다.”

‘적 420명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부분에서 눈길이 멈췄다. 한국 국방부 공식 기록에 한국군 전사자 수는 15명이다(북베트남군과 유격대원 전사자는 243명). 응우옌반이는 엷은 웃음을 띠며 고개를 저었다. 잘 모른다고 했다. 생존자를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유일하게 한 분이 계신데, 얼마 전 입원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전투에 참가한 이들 중 상당수가 타향 출신의 북베트남 정규군이었다. 그는 지방 유격대장으로 싸웠던 분의 제사가 마침 오늘이라고 했다. 그곳에 가보기로 했다.

너의 전설

띤토사 토떠이촌의 버짜이 논 학살 위령비.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주소가 적혀 있다.


51주기를 맞는 고인의 이름은 두 개였다고 한다. 응우옌꽝과 응우옌락. 1930년생. 띤토사 유격대장으로서 짜빈동, 아니 꽝탄 언덕 습격 작전 때 지방 유격대원들을 총지휘했으며, 길을 잘 모르는 주력군(북베트남 정규군)을 안내하는 역할을 했다. 전투에서 살아남았지만, 같은 해 다른 곳에서 한국군에 체포돼 잠깐 감옥에 갇혔다가 풀려난 뒤 또 다른 전투에서 전사했다. 제단 위 고인의 얼굴 사진은 양복에 빨간 넥타이를 맨 몸통 그림과 합성돼 이색적이지만 조악한 느낌을 주었다.

베트남 제삿날은 축제다. 여유가 있는 이들은 이웃들을 초청해 술과 고기 등을 대접한다. 오후 3시 넘어 제사 장소에 도착했던 터라 북적거리던 손님들이 빠지는 중이었다. 3개 테이블에 10여 명이 남아서 맥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그중에 띤토사 전 인민위원장 레탄하(64)도 끼어 있었다.

“짜빈동 전투가 한국군 해병의 전설로 알려져 있다”고 운을 뗐다. 전 인민위원장 레탄하가 받았다. “베트남에선 아주 작은 전투였을 뿐이에요. 꽝응아이성 선띤현에서야 기리겠지만 베트남전 전체에선 큰 의미가 없어요.” 한국에서는 중대급 해병부대가 연대 규모의 적을 격파한 걸 자랑스러워한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때 누군가가 불콰해진 얼굴로 술잔을 들고 일어나 소리쳤다. “우리가 미국을 이겼는데 작은 전투 하나 이겼다고 무슨 개소리냐!”

진지한 대화를 나누기 힘든 분위기였다. 취기가 오른 이들이 자리를 뜨지 않고 큰소리로 열을 올렸다. “한국군은 미군의 괴뢰군일 뿐이었어. 같은 아시아인으로서 싸울 필요가 애초에 없었지.” 베트남에서 이미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였다. 누군가 건배를 외쳤다. “우릴 침략한 건 일본 제국주의와 미국 제국주의야. 우린 친구야. 단결해야 해. 그런 마음으로 원샷!”

한 시간도 안 돼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도반(56)을 만나러 가야 했다. 띤토사 학살 사건의 생존자다. 앞에서 본 꽝탄 언덕 승전비엔 이런 대목이 있었다. “남조선군에게 살해당한 지역 동포에 대한 복수를 했다.” 도반 가족은 한국군에게 살해당했다. 그와 잡은 약속 시간이 다가왔다.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두 번째 질문이다. 부근 마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생존자 도반

띤토사 반호아촌의 녀ㅅ 할머니 집마당 학살 위령비. 한국군이 다른 마을에서 죄 없는 사람들을 차례로 끌고 와 이곳에서 손을 묶고 총을 쏴 죽였다고 적혀 있다.


19년 전인 2000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 후송됐던 참전 군인을 인터뷰한 적이 있다. 경남 마산에 사는 김영만씨였다. 11중대에 배속됐던 4.2인치 박격포 소대 출신이다. 그는 인터뷰에서 전투 이틀 전 11중대원들이 수색정찰 중 잡아온 30대 베트남 남자를 선임 병사들과 함께 아무런 절차도 거치지 않은 채 직접 총살해 묻었고, 이후 죄의식에 시달려왔다고 고백했다. 이런 식의 마구잡이 처형이 2~3일에 한 번씩 있었다는 증언도 했다.

개별적 처형을 넘어 짜빈동 기지 주둔 해병들의 집단 학살에 관한 생존자 증언이 나오긴 이번이 처음이다. 사건 당시 3살이던 도반은 오른쪽 다리에 총상을 입었지만 어머니 응우옌티뚜이(당시 46살)의 품에 안긴 덕분에 생존했다. 어머니를 포함해 함께 있던 누나(도티브우, 23살)와 형(도반라인, 8살) 모두 죽었다. 사건 당일 산으로 피신했던 아버지 도띠(1915~95)는 화를 면했다.

버짜이 논 학살 때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가 살아남은 도반쯔ㄱ . 총알이 스친 오른쪽 다리를 보여주고 있다.


너무 어렸을 때라 도반은 기억할 수 없다. 아버지 도띠에게 들은 내용이다. 짜빈동 전투 4개월 전인 1966년 10월17일 아침 8시께, 띤토사 토떠이촌에서의 일이다. “짜빈동 기지에 있던 한국군이 전날 행군하다가 지뢰를 밟아 몇 명 죽었다죠. 그날 아침 주민들을 모았대요. 한국군이 지뢰에 관해 심문하면서 일부 주민을 때렸고 대검을 꺼내 한 여자의 몸을 찔렀나봐요. 다른 이들이 놀라 소리를 지르며 달아나자 일제히 사격을 했대요. 저는 살아나 죽은 엄마 배 위에 올라가 젖을 빨았다고 합니다.” 이날 그곳에서 20명이 희생됐다(다른 장소에서도 16명이 죽어 당일 희생자는 총 36명). 다음날 18일엔 2㎞ 떨어진 띤토사 반호아촌의 한곳에 모인 21명이 목숨을 잃었다. 당시 짜빈동 기지엔 1967년 2월15일의 전투를 치른 11중대가 아닌 9중대가 있었다.

1966년 10월17일과 18일, 하루 차이로 일어난 두 사건은 각각 ‘버짜이 논 학살’과 ‘
할머니 집마당 학살’이라 한다. 두 곳의 위령비는 50주기를 1년 앞둔 2015년에야 사건 현장에 세워졌다. 꽝응아이성은 1993년부터 이곳을 역사문화유적으로 인정했지만 예산 책정이 안 돼 위령비 건립을 계속 미뤄왔다고 한다. 버짜이 논 위령비는 이름 그대로 논 한가운데 있었다. 가운데 폭 1m 진입로를 흙을 쌓아 만들어놓았다. 내가 간 날은 비가 흩날렸는데, 신발이 푹푹 빠졌다. 비가 더 오면 완전히 잠길 듯했다. 진입로 포장은 주민들 숙원이라고 했다. 이 비석에는 도반 가족을 포함해 함께 희생된 20명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중 14명이 여자였고, 8명이 10살 이하였다.

할머니 집마당 위령비도 귀신이 나올 만큼 으슥한 숲에 숨어 있었다. 위령비 비문을 읽어보았다. “선띤현 띤토 학살. 장소: 반호아촌 동쪼이
할머니 집마당. 1966년 10월17일 꽝탄 언덕에서 남조선 용병들이 띤빈사, 띤히옙사, 띤박사까지 대규모 수색정찰을 했다. 그들은 마을을 불 지르고 파괴하며 죄 없는 민간인들을 잡아서 띤토사 반호아촌 동쪼이
할머니 집마당으로 몰아넣었다. 그들은 민간인들의 손을 묶고 총을 쏘아서 21명을 죽였다.” 희생자들은 이 마을 사람이 아니었다. 비문에 명단이 없는 이유다.

버짜이 논 희생자 유가족들은 2017년 음력 기일에 한국에서 처음 온 10여 개의 조화를 보며 위령비 앞에서 많이 울었다고 한다. 외면당해온 슬픔을 인정받은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도반은 말했다. “밀라이는 504명이 희생된 큰 학살이고, 여기는 기껏 20명 죽은 작은 학살이니, 그동안 관심이 없지 않았겠어요?”

도반은 요즘도 악몽을 꾼다. 지겹게 본 폭격과 미군-유격대의 전투 장면은 트라우마가 됐다. 하늘에서 포탄이 쏟아지다가 군인들이 사람을 모아놓고 쏴 죽이는 장면이 꿈속에서 되풀이된다. 화제를 바꿨다. 학살의 원수를 갚을 목적도 있었던 꽝탄 언덕 습격에 대해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뜻밖의 대답에 허를 찔렸다. “구글을 찾아보세요. 저도 구글에서 읽었어요.” 진지한 이야기 도중에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

오 일병, 김 수병

옛 짜빈동 한국군 기지가 있던 꽝응아이성 띤토사 지역 지도.


띤토사 지방유격대장 응우옌꽝(응우옌락)의 제단에 놓인 영정. 얼굴 사진에 양복을 입고 넥타이를 맨 그림을 합성했다.


베트남 취재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뒤, 19년 전 만났던 짜빈동 전투 참전자 김영만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당시 55살이던 그의 나이는 현재 74살이다.

그날에 관해 물었다. 1967년 2월14일 밤에서 15일 새벽으로 이어지던 중요한 순간들에 관해 다시 듣고 싶었다. <파월한국군전사>에 따르면, 14일 밤엔 안개가 자욱하고 보슬비가 내렸다. 밤 11시께 적의 1차 공격 시도가 있었지만 아군은 4.2인치와 81mm 박격포 공격으로 간단히 제압했다. 기지 철조망 15m 정도가 찢어진 수준이었다. 적은 한 명의 주검을 남긴 채 후퇴했다. 김영만씨는 “날이 밝으면 적 시체를 확인하러 가자며 승전의 기쁨으로 소대원들끼리 교통호에서 술을 마셨다”고 회고했다. <파월한국군전사>에는 나오지 않는 이야기다. “병사들 사기 진작을 위해 미군 헬리콥터로 술, 담배, 식빵을 엄청나게 보급해주던 때였어요. 술은 최고급 양주 조니워커였죠. 그날 밤에도 새벽까지 조니워커를 마셨고, 4시께 적의 2차 공격으로 다들 술이 깼죠.”

그는 부상당하기 전 교통호에서 양주잔을 기울이며 후임병과 나눈 이야기를 기억한다고 했다. “평생 잊힐 수 없는 말을 남겼지요. 서울서 대학 다니다 온 오아무개 일병이었어요. 나한테 그랬거든요. ‘김 수병님, 우리 비겁하게 싸우다가 용감하게 귀국합시다.’ 목숨 보전해서 고향에 꼭 가자는 말을 함축한 거지. 근데 몇 시간도 안 돼, 저세상 사람이 됐어.”

김영만씨는 새벽 5시께 적의 위치를 육안으로 관측해 거리를 재기 위해 교통호 밖에서 서성이다가 포탄 파편에 얼굴을 맞았다. 한 바가지 피가 울컥 솟아오르는 순간, 쓰러지면서도 이런 생각이 먼저 머리를 스쳤노라고 과거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다. ‘장가도 못 가고 죽는구나.’ 요즘도 가끔 언론사에서 짜빈동에 관한 인터뷰 요청이 들어온다고 했다. “웬만하면 응하지 않아요. 자꾸만 눈물이 나서요. 세월이 흐르면 기억이 멀어질 줄 알았는데 자꾸 더 생생히 살아나면서 말을 잇기 힘들어져요. 그러고 나면 몸이 아파요.”

짜빈동 신화를 향해 던져볼 만한 세 번째 질문이다. 누구를 위한 영웅 신화인가.

짜빈동의 주인공은 <파월한국군전사>에 거룩하고 용감하게 그려진 해병들만이 아니다. 학살 뒤 주검 더미에서 거짓말처럼 살아나 죽은 엄마 젖을 빨던 3살 아기, 젊은 베트남 남자라는 이유만으로 체포되자마자 한국군 기지에서 총살된 포로 아닌 포로, 외세와의 투쟁이라는 거대한 명분 아래 한국군이 점거한 꽝탄 언덕을 기어오르다 비참하게 죽은 북베트남 정규군과 지방 유격대원, ‘비겁하게 싸우다 용감하게 귀국하고 싶었으나’ 허망하게 폭사한 오 일병, 피를 쏟으며 쓰러지면서도 장가도 못 가고 죽는다는 걱정을 했던 김영만 수병, 그리고 조국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죽고 싶지 않아 두려움을 이기며 참호에서 육박전까지 불사한 끝에 생존에 성공한 수많은 해병 병사들.

절대적인 남성성의 세계, 전쟁 미화의 세계, 무적 해병의 짜빈동 신화는 꽝탄 언덕을 수놓았을 수많은 비명(悲鳴)들과 함께 다시 기록돼야 한다. 싸움 실력을 자랑하기 앞서 싸움의 의미부터 묻는 보편적 이성의 눈으로.

띤토(베트남 꽝응아이)=글·사진 고경태 <1968년 2월12일> 저자 humank21@gmail.com

취재협조 한베평화재단, 후원계좌 KB국민은행 878901-00-009326, 문의 02-2295-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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