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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VER 연예

멀고 긴 의식의 바다 - < 한여름 밤의 꿈 >

1

스페인의 정원(庭園)을

꿈속에서 거닌다

분수(噴水)는 풍작(豊作)을

투명한 女人들의 어깨 너머

神처럼 즐기고 섰다

기타 치는 밀짚모자 사내가

정화(淨化)된 달빛 아래서

마치 드뷔시다

잔(盞)에서 잔(盞)으로

혈액(血液)처럼 뜨겁게

속살거리는 유희(遊戱)

차라리 이방인(異邦人)은

영혼 너머 고야처럼

풍만한 눈길이다 못해

여체(女體)가 슬프다.

누구나 다 시인(詩人)이다

누구나 다 성자(聖者)다

누구나 다 악마(惡魔)다

포도주는 영주(領主)의

곳간에서 이 밤을 기다렸다

아 ­ 디오니소스여

막(幕)이 내리려 하는구나

아직은 그대의 시간 속에

머물고 싶은 그들이다

어저께는 연극도 없었다

오늘은 밭일도 없다

2

허허한 방에서 아버지의

해묵은 편지를 읽는다

사랑하는 내 아들아

시간은 항상 흐르는 것

마냥 새 옷일 순 없단다

그러나 아비는 ……

어쩌면 네 할아버지는

영주(領主)의 어질어 빠진

노예였을 지도 모른다

빛 바랜 견장(肩章)

무릎 댄 헐렁한 바지

욕정(欲情)의 냉정(冷情)

무덤 저편 괴괴한 언덕에서

한 아이가 울고 섰다

어저께 어구(漁區)에서

그물코 매만지던 노파는

아들도 남편도 잃었다

가래질하던 내 친구가

전장(戰場)에서 돌아 왔다

그러나 그 아내는 집 나갔다

망부사(望父詞)도 없는

오늘도 아낙들은 우물가에서

사내들을 입질한다

대안(代案)없는 회의(會議)는

사내들의 노닥거리

파편 맞은 사내가 팔뚝을

자랑타가 고깃배를 내렸다

3

기타 치는 밀짚모자 사내도

만선(滿船)의 꿈을 잃었다

나는 변변하게 한번도

여인을 소유한 적이 없다

언제나 먼발치서 그들을

탐음(貪淫)하는 포식자다

무소유(無所有)는 그들만의

포식(飽食)한 낭만(浪漫)이다

그래서 그 아비는 기약 없이

해도 달도 없는 지하철 타고

아이는 한겨울 길바닥에 납작

엎드리고 두 손바닥 벌린다

아 ­ 유감스럽게도 나는

이국(異國)의 정원(庭園)을

홀로 거닌다 이제는 집집이

밤 깊어 창문을 내리고

달빛만이 혼자 서성인다

나를 분석하는 지겨운 노릇도

따가운 여체(女體)의 시선도

아내 몰래 비밀스럽게 저축한

외도(外道)의 통장을 가슴속

깊이 품고 깊고 깊은 이 밤

먼 여행길을 나섰다

무도회(舞蹈會)의 가면(假面)도

이제는 끝나려 하는가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 그들은

쌍쌍이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4

역시 꿈속에서도 나는

음탐(淫貪)만 하는 포식자다

지적(知的) 오만(傲慢)은

자기발전(自己發展)이라 하지만

여름날 음악회에서 성장(盛裝)한

거만 앞에서는 왠지 그녀가 슬프다

프로이트 선생 선생의 文明史의

족적은 여인들에게 비만만 안겼소

아 무수히 그들이 떠난 자리는

어지럽고 적막만이 감돈다

건성건성 듣고 흘려 버린 라디오

연설이 이 밤 따라 서글펐다

아 ­ 권태로운 모습으로 매양

되돌아오는 아내의 시장바구니

프로이트 선생 나는 거기서

몸체가 두 동강 난 고등어

두 마리를 보았소 식구 수만큼

한 아내의 무의식적 고뇌였소

애초부터 나에게는

두 팔 벌릴 하늘이 없었다

어떻게 살아야 할지 그리고

아무도 말하지 않았다

남몰래 해바라기 사랑에

가슴앓이 하는 사춘기(思春期)

그것도 병든 노모(老母)에게

아낌없이 빼앗겼다

5

오동나무 잎사귀가

좋다 하여 오르다 떨어져

엉금엉금 밤이사 삽짝을

들어서 두레박 채로 들이켰다

초가지붕 위의 새하얀 박꽃이

어떻게나 예뻤던지 지금도

나는 처녀들을 천박(淺薄)해

차라리 요염한 양귀비라도

고개 돌린다 마치 사교(邪敎)

인양 동화할 수 없는 유희

지금 나의 이 시간 좌표는

가진 것 그 아무 것도 아니다

단지 그늘 속 음탐만 하는

무자유(無自由)의 고뇌(苦惱)

그것이 살아가는 문제다

아 ­ 나는 이국(異國)이

수릿날 훨훨 창공을 날으는

춘향의 그네다

하나도 마음 없는 질서

지겹도록 외면할 수밖에

그렇게 태어났고 살아왔다 해서

내가 남일 순 없다

지금 이 밤 내일 아침은 이 나라

승전(勝戰) 기념일이다

단지 사자(死者)를 기리고 즐기는

축제가 아닌 그들만의 산 거울이다

6

제너럴 프랑코 만세 만세

빛 바랜 견장(肩章)을 윗 주머니에

넣고 노인은 묘지를 향한다

제너럴 만세 만세 萬萬歲

평소에는 클라라 같은 여자였다

장미 한 송이에도 무척 감동했다

바느질 하나로도 슈만을 잘도

노래했다 이 빠진 늙은 건반은

아내가 유언(遺言)처럼 들려준

구속이다 그처럼 노인이다

제너럴 만세 만세 萬萬歲

손바닥 거친 거미줄 지도로

묘비를 어루만진다

에게해 지중해의 소금 냄새가

지금도 은밀한 아내의 부분에서

아 ­ 프랑코 만세 만세 萬萬歲

싸움질 걸핏 잘도 하는 푸줏간

노파가 아내를 기억했다

노인은 녹슨 견장을 어루만진다

여보 프랑코 만세 萬萬歲야

달빛 요염한 알함브라 궁전에서

우리는 춤추고 키스했지 그것도

정원사(庭園師)인 그대 아버지가

철문을 활짝 열어 주어서였지

그런데 당신의 노마는 스텔라는

어디 집 나가고 소식 깜깜 없소

7

그래도 제너럴 프랑코 萬萬歲다

승전(勝戰) 기념일 축제(祝祭)날

원형 경기장 투우(鬪牛)하는

매표소 행렬에서 노마를 보았소

금방이라도 사라져 버린 당신의

그 아들 촌장(村長)의 질곡(桎梏)에

아 ­ 그래도 프랑코 만세 萬萬歲

그래 여기도 萬萬歲다 형편없는

놈들의 천국 용감해야 출세한다

절에서도 여의도에서도 그 행세

그까짓 것 누구나 나도 할 수 있다

팔려 가는 신부 아니 열 다섯 소녀

유식한 그 무식한 남편의 그 아내

오늘도 귀 눈 닫고 품위 주문하자

날름 백화점 차 날라 온다

사람이면 사람이고 여자면 여자지

웬 거북한 영부인(領夫人)인가

프랑코 만세 만세 여기도 萬萬歲다

영원한 권력 없다지만 그 자식 놈

독립군 비싼 집세 놓고 잘도 살더라

어젯밤 꿈에서 지명(知命)도

못 넘긴 친구가 나를 찾았다

天上에도 물가고(物價高) 있다던가

변변치 소주 한잔 못 권하고

내가 돌아섰다 내가 말이다

老人이 말한다 꿈이니 꿈으로

돌아가시오 당신의 山河로

8

나는 답했다 백년간의 고독이요

최소한 亡命者로 여기 살고 싶소

공기도 흙 냄새도 여인도 당신도

청신(淸新)하고 야만(野蠻)스런

구석이란 아직은 요원한 나라요

그의 망자(亡者) 세실리아가

포식하는 뱃사람의 전주(錢主)를

비난하고 나섰다 싸늘히 식은

구제소의 새벽 이슬 삼아 그녀는

묘석으로 잠들고 있지만 그때는

그들은 때 모르고 프랑코 만세였다

제기랄 프랑코 만세 萬萬歲다

오나가나 만세 만세 萬萬歲다

사람들은 그러는 가운데 榮華를

뒤로하고 흔적 없이 사라진다

오직 그만을 추종한 삶에

침묵하는 이유를 달지 않는

불안 초조로 그때의 우리들

곁을 허망한 대가를 치르면서

영욕(榮辱)의 족적을 잠재운다

더욱 가을이면 어리석었던

생시(生時)의 관계가 나를

연민(憐憫)의 일순(一瞬)으로

구속했다 떠나 버린 벗은

솟대가 되어 샤머니즘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9

하지만 내 곁 떠난 연인은

밤하늘의 시퍼런 강물을

머리에 이고 족쇄를 채운다

살아가는 모습들이 동서고금

다 그렇다던가

그래도 차마 내가 분해되어

몹쓸 족속이 거느리는

軍馬라니 차라리 異國에서

택시노릇 하는 고분(孤憤)을

나는 알겠다

아 ­ 정야(靜夜)의 달빛 아래서

노래를 부른다 부르고 싶은

노래가 연민(憐憫)의 일순(一瞬)

나를 구속한다

동네 가게에 빚진 소주 값이

불안 초조로 나를 내몰아

허약한 사내 되어 그 구실도

못 한다 좀처럼 내색 않는

아내는 마땅한 의미가 없다

제기랄 제너럴 만세 萬萬歲다

보시오 산 호세 노인장(老人丈)

사는 낭만(浪漫)인 멋과 여유를

좀 배웁시다 당신의 의식까지도

지금은 그렇기까지라도 불안한

나의 自我란 말입니다

10

생존에 대한 원초적(原初的)

대답 대신 회의(懷疑)의 진찰에

골몰하는 이 어리석음을 도대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가진 것에 초탈하는 사후(死後)의

아내를 더욱 끔찍이 사랑하는

공시성(共時性) 학문 없이 당신의

지혜(知慧)를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是非)하지 않는 여기 世上이

참으로 당신이 부럽습니다

익숙하고 평화스런 요리솜씨도

아내의 체취가 그대로 간직된

식탁보 이 빠진 건반 위 슈만

하찮은 하루일 품삯에도 거만하지

않는 市長 그리고 그 이웃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은 사후(死後)를

예비(豫備)한 당신을 사랑하는

아내의 천박한 몹쓸 이데올로기가

아닌 그 이데아였소

아 ­ 밤도 무척 깊었다 나그네는

나그네인데 발길이 나를 재촉하지

않는구나 밀밭 언덕 마리아의

집에서 새는 아침부터 타작이

바쁘다고 산 호세 노인은 새벽잠도

마다하고 무릎 댄 헐렁 바지를

사회주의 아내와의 시절처럼

예사스러이 뇌까린다

제기랄 제너럴 프랑코 萬萬歲다

11

아 ­사람의 영혼과 육체가 하나가

아니구나 이 밤 골방에 초라하게

눕혀진 이 육신에 나의 영혼은

그 동안 삼갔던 화려한 외출을

감행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육신을 동반하지 못한 반쪽

그것은 숙명적 자조적(自嘲的)인

비극 아니 배반의 얼굴이다

도대체 한량(限量)없는 화려한

영혼을 어디까지 육체가 뒤미칠

수가 있단 말인가 그렇다면

이 밤 나에게 걸맞은 모습은 분명

내가 아닌 또 다른 나다

그렇다 이 밤 여행길 나는 그를

동행해야 한다 기필코 멈출 수 없는

시종 여행의 대미(大尾)를 내가

아닌 그가 장식해야만 한다

산 호세 노인장 그것이 바로 당신과

당신 이웃들의 정녕 사람 사는 바른

의식이 아니겠소 당신의 빛 바랜

견장(肩章) 무릎 댄 바지 평소에

클라라 같은 당신의 세실리아가

남겨 놓은 이 빠진 건반 진정

애틋하고 아끼고 사랑스러운 것이

절대값을 지닌 미(美)의 본질이오

노인장 당신은 부럽게도 이데아가

아닌 그러한 현실 속에 살고 있소

12 사람 사는 아름다움

사람 사는 아름다움에 道理를 벗어난 그런 아름다운 삶은

없을까 살고 살다 속고 이제는 지쳐서 어차피 무작정인데

뜨락에 발갛게 매달린 감나무 새벽 이슬이 전설도 아니고

내가 아니다 한여름 타오르는 그림자에 눈 한번 붙이지도

못하는 도시의 감람나무 아 선량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채찍말 타고서 광야로 내달리는 선구자는 못 될지라도 그

옛날 목련꽃 그늘 아래의 베르테르의 편지는 잊지 말아야

하지 않는가 그래 그래 아무러나 어차피 세월은 흘러가지

그러나 영혼만은 나는 시들지 않는다 그 어떤 사치스러운

언어 화사한 빛깔로도 따르지 못하는 이 세상 교목들이여

거북살스런 축제 아닌 조촐한 잔치 한마당 벌립시다 절제

억제에서 당신들끼리 격앙되었던 그 목소리 단막극이라도

막 올려 즐깁시다 지성은 무대 뒤편에서 쪼그리고 가슴을

죄는 밀러요 지식은 갈채받는 몬로다 따지고 보면은 둘은

흡사 서로에게 사이비다 오로지 애초 군더더기 없는 知가

진정한 사랑이다 그야말로 자연 물이 흐르는 이치요 자식

사랑하는 어버이일지다 노인 노인장 산 호세 노인장 저가

지금 지껄거리는 말에 괘념 마시오 하도 서러워서 괜스레

괘꽝스럽게 늘어놓는 것뿐이오 난 말입니다 코리아하고도

그 남단 조그만 항구에서 청소년기를 한여름 밤의 꿈처럼

얼른 결에 보냈습니다 그래요 멘델스존의 한여름 밤의 꿈

요정들이 속살거리는 인생세간의 동경 그 꿈처럼 나는 그

시절 항상 아름다움만 꿈꾸는 친한 벗이 있었습니다 아주

빼어나게 노래를 잘 불렀던 그리고 유독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에서 공주는 잠 못 이루고 그 아리아를 평소에도

즐겨 불렀습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는 오십을 갓 넘긴

지명에 우리들 곁을 떠났습니다 60년대 지지리도 못 살아

우울했던 그 땅에서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살다가 갔습니다

13 돛배

에메랄드 빛 지중해의 길목

파아란 바람을 타고 돛배가

물살을 가른다 옛 이집트로

꿈을 싣고 공주를 맞이하러

한껏 가슴 부푼 에딘버러공

지금쯤 잔치가 한창인 성밖

숲속 마르지 않는 샘가에서

물동이 이고 돌아서서 눈물

흘리는 처녀사 차라리 물정

어둔 그 아비가 원망스럽다

저기 묵묵히 가래질만 하는

저 농부는 세상살이 꿰뚫어

농사일 걱정에 여념이 없다

어차피 인생만사새옹지마다

그 아비가 원망스러울 까지

그럴 까닭이 있겠는가 마는

다 속썩이고 돌아오지 않는

그대 오라버니 탓도 아니다

지금 그대의 아비는 쓰라린

가슴 안고 그대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다 살아온 나날의

회한이 아닌 젊거나 늙었든

사내들만의 그 눈물이 있다

죽는 순간까지 자기인 이드

그것은 한평생 지니고 마는

순수 열망이요 쾌락 자조다

14 아버지와 아들

자욱한 담배 연기 속 플라멩코

춤추는 집시 여인의 유독 검은

속눈썹이 노마는 몸서리치게도

떠나 버린 그녀만 같아 오늘도

일 내팽개치고 또 술을 마신다

마음 속 검은 그림자 짙을수록

더해 가는 분노의 광기는 영락

없이 그 아비를 닮았다 자신에

엄격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리다

그러나 잘못은 용서가 안 된다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닌 것을

그도 혼란스러워 지근지근하다

단지 같이 있어야 할 여인이다

같이 살다 있다 의미의 차이를

정확히 짚어 낼 수는 없지마는

분명 떠나 버린 그녀의 탓만이

아니다 세대간 문명 충돌 아니

구습 세대 사이 인습 충돌인가

세월이 흘러 그 시대가 변해도

매양 그 모습 그대로인 남녀의

본질 아아 고뇌하는 이 청년을

나는 안다 촌장의 딸인 질곡에

정작 이다지도 마음 쓰린 자는

자식 효도 부모 사랑에 미칠까

마는 그 아비인 노인장 당신을

15 세상 동정

산 호세 노인장 노인장께서도

이 밤 늦도록에 잠 못 드시고

계시군요 혹 노마 걱정입니까

아니면 그 스텔라 소식이라도

자식은 애물단지다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군요 눈감아야

말일이지 끝끝내 애간장 태울

것이 뭐란 말입니까 주제넘게

내가 위로하는 말에도 노인은

묵묵부답 미동도 없이 창가에

드리운 그림자만 보고 앉았다

며칠새 말수가 적어졌고 부쩍

침울한 것이 옆에서도 마음이

편하지가 않다 평소 예사로이

뇌까리는 그 제기랄 제너럴도

신명이라도 날 때이지 지금은

영 아니다 사람 사는 그 동정

이치는 어디나 같기 마련인가

나도 예전에 당신께 그랬었다

수없이 많은 불면의 나날들을

철모르고 당신께 안겨 드렸다

당연한 것으로서 당신의 걱정

따위는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그것이 이제 와서는 뉘우쳐도

소용없어 한평생 죄인이 되어

차마 저 하늘을 볼 수가 없다

16 딸 아이의 편지

제기랄 늙어서까지 이게 뭐란 말인가

노인은 그런 자신이 허망했다 요즈음

들어서는 아내가 꿈에 자주 나타난다

고생만 하다 일찍 갈 것을 왜 살았지

가련하다 못해 더욱 그가 원망스럽다

공간 구석구석 정결한 아내의 손결이

닿지 아니한 곳이 없건만 왠지 텅 빈

가슴 안이 오늘따라 예사롭지가 않다

좀처럼 내색 않는 그였다 그렇지마는

요 근래부터는 달랐다 밭일도 나가지

않을뿐더러 마을 다니는 것도 삼가고

주막에서 마을꾼들과 술 마시는 일도

금했다 아무래도 딸아이의 그 편지가

마음에 걸린다 그에게 시집와서 좋은

세월 못 보내고 떠난 어미 같은 생이

되어선 안 된다 하고 바라는 그 딸이

아비 마음을 저민다 뭐라고 말하여도

아비는 안다 노인은 의자에서 일어나

집밖으로 나갔다 밤 공기가 싸늘했다

문득 주둔지가 떠오른다 조명탄이 밤

하늘을 휘황하게 수를 놓았다 전쟁이

아름다울 수야 없지만 흡사 축제날의

쏟아져 내리는 그 불꽃처럼 신기하고

찬란하고 처절했다 매캐한 포연 숱한

가슴 찢는 비명 그 순간 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달도 별도 사라지고 없다

17 말

동서고금 사람 사는 내력이야 어디나

매한가지 왜 이다지도 마음이 쓰릴까

여행 떠날 임시만 하더라도 기대되어

들떴던 그 마음이 어느새 간 곳 없네

혹시나 내 정체성이 송두리째 하늘로

증발해 버리지 않았나 하는 쓸데없는

걱정 때문이 아닌지 몹시 혼란스럽고

황당하기조차 하다 저 노인장 탓만도

아니다 어눌한 내 에스파냐 구사에서

나도 모르게 매사에 주눅들어 기분이

영 아닌 탓일 게다 매사 언어 소통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서툴다 보면 그런

상황에서는 누구나 그런 사람이 된다

흄 볼트는 말은 곧 그 사람이다 했다

말이 어눌하다 보니 기분까지 그렇다

그러나 반드시 그럴 필요까지는 없지

않은가 언어의 구사가 정확하여 모날

지경이라면 차라리 그렇지 못한 편이

둥글지 않겠는가 아이들의 말이 바로

모나지 아니한 증거다 그래서 그들은

어눌한 이방인인 나를 그토록 반기지

않는가 아무러나 일리가 있기도 하다

따지고 보면 사람의 정체성은 언어다

아 그래서 공자는 知를 知한 그 知를

그렇게 설파했던가 학문 없는 인생의

무가치 그러나 그러한 학문도 언어를

깨치지 아니하고서는 성취할 수 없다

18 성당 짓는 노인

마드리드 안토니오 가우디 가(街)

한 노인이 사재를 바쳐 지금껏

사십 년 간 혼자서 묵묵히 성당을

짓고 있다 하기에 기분도 전환할

겸 오수(午睡)에 그리로 거리를

나섰다 이곳 사람들은 하루 일과

중 만사를 제치고서라도 느긋이

낮잠인 시에스타를 즐긴다

매사가 그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다 성당 하나 짓는데도 이삼백

년씩 걸린다 대대로 증손자 대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두고두고

혼신을 다하여 정성을 쏟아 붓는다

성급한 결과보다 진척되는 과정의

즐거움을 소중하고 값진 것으로

참으로 그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성취동기가 없다 보니 성취인도

없다 위 아래 남녀고 영역이고

구분도 없이 너도나도 앞다투어

뒤질세라 미친 듯이 한탕주의다

선각 유길준 선생은 서유견문록

14장에서 그런 그들을 야만의

종락(種落)이라고 정의했다

오늘도 묵묵히 성당을 짓고 있는

노인 그야말로 남루했다 하지만

스스로 가난하기에 행복하다고

사람들 앞에서 활짝 웃어 보인다

19 우울한 블루

노인장 달이 무척 밝습니다 보름이 아직

며칠이나 남았는데도 기다려졌나 봅니다

지금 이 순간 내 고향에서도 저 달을 볼

수 있을까요 아마 산골아낙이 저 달빛에

지금쯤 목욕재계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부정한 것을 씻어 내고 간절히 소원하는

우리네 여인들의 고풍스런 전통입니다만

그 내면은 인고의 나날들이 응어리진 채

그들의 가슴을 쓸어 내리고 있습니다 그

한(恨)이라 이르는 우리 민족정서입니다

나는 이 나라 사라사테 집시의 달에서도

그 같은 정서를 느끼고 눈물지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요 이 세상

모든 삶의 고유한 정서 누구나 공유하는

보편적 가치가 한(恨)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보름달은 둥급니다 세상모서리를

깎고 또 깎고 하여 마침내 둥근 그 품에

포용하는 달관 그처럼 한(恨)은 차 오른

인간고가 승화된 순수 결정 그 자체로서

소중한 체험인 발라드입니다 그 한 시절

애증(愛憎)에 불타올라 세월을 불사르고

고통 속 불면의 밤을 마치 전부인양으로

고뇌했습니다 그때는 새까만 먹구름으로

뒤덮여 앞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세상 눈

그마저도 외면하고 멀리했습니다만 그새

그 모든 것이 우울한 블루로 변했습니다

우울한 블루 그것은 그 한의 빛깔입니다

20 알함브라 궁전에서

열사(熱砂)에서

모래바람

새하얗게 휘날리며

바다 건너

미와 사랑을

오묘(奧妙)히

잠적한 자국

달빛 아래

멈춰 서서

마냥 그 앞에

섰는 것이

모래바람

열사(熱砂)에서

공명(共鳴)하는

코란을 듣는다

21 보헤미안

아 한여름 밤의 꿈

꿈에서도 목이 타는구나

제 발로 여기까지 왔건만

갈 길이 여간 멀지를 않다

바삐 뒤돌아볼 새가 없는

우리네 인생이건만 이다지도

아쉽고 미련 남는 것이

나그네 가을 하늘 빛을

닮아 그토록 애달다

산 호세 노인장

이제 나는 남쪽 안달루시아

그곳으로 가려 하오

플라멩코 춤에 듬뿍 취해

말라게냐 노래부르며

뮤즈의 여신 아니 집시의

여인에게 정열적인 키스라도

해야겠소 그 검은 눈동자

집시 바이올린이 내가 그랬듯

언제나 마음 애잔했소

한번쯤은 똑똑한 사유에서

해방되어 어리석기까지 하고

그 끓어오르는 감정 주체 못

하리만큼 나를 만끽하고 싶소

그것은 누구나 자유로운

혼자만의 여행에서나 가능한

노릇이오 그래서 사람들은

여행을 즐기나 보오 그때마다

미련남고 아쉬워하면서까지

22 안달루시아의 걸인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마찬가지

이곳 안달루시아에도 걸인이

있다 헐벗고 굶주린 행색이 아닌

자발적 가난인지라 그 얼굴에

평화스런 미소와 여유까지 있어

보인다 혹시 집시의 후예일지도

나는 그냥 지나치지를 못하고

그에게로 다가갔다 가늠하기는

어려우나 중늙은이쯤 된 사내

그 모든 자유 그 중 가난도

소중한 나의 자유다

그렇게 그는 거리 한 모퉁이를

차지하고 오후의 풍광(風光)을

느긋하게 즐기고 앉았다

이른바 무소유란 행위철학인가

거리엔 그런 그를 능멸하는 자도

없다 아예 단속하는 말단도 없다

그도 당당한 시민이란다

그러나 최소한의 생활도구 외에

안경 너머 책 한 권이 그의 손에

들려 있다 아마

희랍인 조르바 그 아니면

백년간의 고독 그쯤 되리라

어떻든 자기 감정에 충실한 멋진

보헤미안이라 여기면서 그에게서

앤서니 퀸의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 우리도 걸레스님이 있지

그새 입가엔 빙긋 미소가 흐른다

23 산마데오 축제

노인장 사람의 행복은 어디서 오는 것일까요 딱히 물리적 기준이

있는 것도 아니면서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런 잣대로써 저울질하며

때로는 남의 불행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것이 곧 바로 자기

행복인양 자족합니다 그만큼 세상살이가 쉽지 않다는 그 증거라고

이해할 수밖에 없는 현실의 한 단면이 아니겠습니까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지금 나는 행복합니다 산마테오 소몰이축제에 와 있습니다

매년 구월 이십 일일에 열리는 꾸에까의 지역축제이건만 오늘에는

세계적인 관광상품거리로 수많은 여행객들로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습니다 투우와는 다른 긴장감과 흥분을 만끽하는 그들이

참으로 행복해 보입니다 과연 전통의 소중함을 체험으로써 느끼고

배우는 학습장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날만이 아니더라도 그들만이

아니더라도 축제는 보편성을 지향하는 인간의 영원한 삶의 향수인

것 같습니다 지금 그들이 아니 내가 정말로 행복합니다 왜 그런지

묻지 마십시오 행복은 혼자만의 것이 아닌 같이 더불어 누리는 것

을 이제야 실감하고 있습니다 아 그 동안에 나는 상대적 박탈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안겨 주었는지 모릅니다 반드시 우월해서

그런 내가 아니더라도 아내는 물론 자식에게까지 그리고 이웃친지

친구 동료에 이르기가 헤아리기조차 너무도 어리석었던 내가 얼굴

부끄러워 들 수가 없습니다 지금 나는 집 떠나 여행길에 있지마는

여행지에서 보고 듣고 느낀 일반(一斑)도 사람의 道 아니겠습니까

시가지가 한눈에 확 들어오는 이곳은 깎아지른 낭떠러지 절벽에다

세운 중세수도원을 개조한 그 베라도르엘 호텔입니다 그렇게 정성

들여 다듬고 다듬은 그들의 뜻을 정확히 짚을 수는 없으나 옛것을

사랑하고 보존하는 그들의 전통의식을 한눈에 읽었습니다 아아 이

밤 눈 아래 펼쳐진 바깥 세상이 평화롭고 행복해 보입니다 하지만

길떠난 나그네는 객창에 잠 못 이루고 이 밤 내내 전전반측입니다

24 소몰이 축제

산마테오 소몰이축제에 열광하는 그들이

나는 참으로 행복합니다

밭에서나 바다에서 그리고 집으로 향하는

그들의 발걸음이 노을진 산비탈 아래 옹기종기

그렇게 수백 년을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

그 할아버지 그 손자가 음유 시인처럼 삶을

노래하고 낭만을 구가하는 뜨락의 그네에서

나는 정말로 그들이 행복했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마음에서 정열로 바쳐지는

몇 마리의 소야 어쩔 수 없지만

삶의 향기 진한 그 감동은 원시(原始)에 닿아

차라리 나는 그들이 인간적 순수입니다

항상 거울 속에 비쳐지는 모습들이

타인의 것으로만 서로들 멀뚱한 그 무미건조가

예전 우리 할아버지는 그렇지를 않았습니다

그렇건만 엉덩이의 뿔이 그새 귀화식물처럼

멋대로 자라 성시(成市)를 이루고 있어

나는 정녕 우리 앞이 슬프고 걱정입니다

우르르 달렸다 와르르 무너지고 쫓고 쫓기는

흥분의 도가니가 천지를 진동시키고 그때마다

상기한 얼굴들이 서로를 포옹하고 입맞춥니다

그새 축제의 하루가 저물고 나도 저뭅니다

25 안도라 공화국

어쩌면 이곳이 마지막 여행지가 될지도 모른다 지금 나는 지리산

청학동을 찾아 나서듯 프랑스와 스페인의 국경지대인 피레네산맥

깊숙이 암탉이 알을 품고 봄볕을 쬐고 있는 소국 안도라공화국을

향하고 있다 케이블카에서 내려 관광버스로 갈아타고 구불구불한

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서 마침내 발을 딛을 수 있었다 인구 육

만의 작은 도시국가로 나무로 셈치면 연리지(連理枝)로 존립하는

낙원 그들 지혜의 소산이다 교황청이나 산마리노 같은 소 국가는

더러 있지만 오늘의 안도라가 있기까지의 지정학적인 에피소드가

돋보이는 그런 곳은 찾기 힘들다 이곳 피레네 산간지대에는 그들

말고도 여태까지 독립을 외치고 줄곧 항쟁하는 바스크 족이 살고

있다 그들은 스페인 프랑스 같은 라틴계와 다른 민족으로 오히려

아시안 쪽의 성향을 지닌 것으로 알고 있다 집집마다 마늘꾸러밀

주렁주렁 메달아 놓고 일상으로 즐겨 먹는다 하니 그들이 외치는

자주성 그 뿌리를 짐작할 만도 하다 마을로 들어서니 하나같이들

미소가 흘러 넘치고 친절하다 산간지대라서 원목이 풍부해서인지

가옥들이 거지반 목조로 지은 전원주택이다 거기다 자주 눈에 띈

회벽의 흰 집들이 그 앙증스러운 아름다움을 더하고 있다 어디나

사람 사는 곳은 나무가 자라야 한다 무성한 수목들과 호흡하면서

살다 보니 이치가 필요 없이 그렇게 동화되어 버린다 그래서인지

남녀노소 없이 대하는 사람마다 티없이 맑고 밝다 바람이 불면은

고개 숙여 흔들리기도 하고 햇볕 따라 얼굴 돌릴 줄도 안다 그저

자연 그대로가 삶의 지혜요 평화요 곧 그들의 행복이다 산업화란

말이 무색하리만큼 이곳에는 시멘트나 아스팔트가 띄지를 않는다

수 백년 묵은 로마식 포도(鋪道)가 드높은 하늘 아래 고색창연을

발하여 나그네의 발길을 정감에 푹 빠지게 한다 나무가 자라지를

않는 그 공간 겨울날 차디찬 시멘트 여름날 끓어오르는 아스팔트

그 길을 걷는 나는 그를 닮아 표정이 굳고 광포할 수밖에 없었다

26 검은 눈동자

아 밤이 점점 깊어간다 마침 모꼬지에서 돌아오는 여인이

있어 허술한 감정을 단단히 동여매지 못한 일말의 불안을

안고 그에게 다가갔다 애연한 그런 눈빛이랑 통하지 않을

뿐더러 그저 달빛 아래에서 온 세상이 하나로 어우러져서

내가 이방인일 수가 없다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미소짓는

여인이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울 수가 그 검은 눈동자가

그녀의 아름다움에 순결함을 더했다 그것은 모체본능에서

빛을 발하고 있는 나의 원초적 향수일까 그렇게도 목말라

구가하던 감추어진 내밀 안이 이제야 고개를 내민 것인가

그렇다면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다고 해야할지 지금 나는

기존의 관념의 틀을 깨뜨리고 모처럼 오랜만에 내가 된다

억눌려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그 자아가 형형색색으로 그

요란스런 모습을 띠고 태동한다 그 동안 무지로 흑백논리

아니면 회색 분광의 소자로서 실팍한 것이 제법 똑똑하고

잘사는 것으로 뽐내며 내 나름대로 살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지 않고 매사에 그 언어가 확실했다 흑백오류가 아닌

이분법이 확연한 언행이다 좋고 나쁨 긍정 부정이 분명한

그리고 회색빛깔의 소자는 뿌리를 내릴 수조차 없는 그런

전반적인 의식구조다 사람의 말은 곧 그 사람이다 그만큼

말은 쏘아 놓은 화살처럼 거둘 수 없어 곧 사실로 굳어져

확정된다 말은 구속력이 개인에서 사회전반에 이르기까지

그 힘이 막강하다 나는 여인에게 매우 아름답다고 말했다

그녀는 경계하는 기색도 없이 감사합니다를 연발하기까지

하면서 편안한 숙소로 친절하게 손수 나를 안내해 주었다

또한 다음날 자기 집 저녁만찬에도 곡진히 나를 초대했다

27

아 ­ 이 밤 다하려는 꿈이구나

한여름 밤에 꾸는 꿈이 그것도

도시의 소음 속에 무슨 신선함이

있을까마는 연민에 동반하는

그 실체가 부인할 수 없는 내다

보는 것마다 경이롭고 풍물 따라

번지는 사념의 머리 곱게 물든

저녁 노을 되어 한 폭의 그림이

될 때까지 나를 정복하련다

깨고 나면 망연할 수밖에 없는

초라함에 눈감을 일은 아니지만

바다를 걷고 하늘을 나는

정령(精靈)이 나를 에워싸고

밤마다 찾아주는 반가움에

낭만적인 한여름 밤이다

그래 자유 자유다 제도로 얽맨

장식도 장치도 관념은 더욱 아닌

자유 차라리 시장바닥의 외침이

봄이면 씨뿌리고 가을걷이하는

촌부의 일상이 훨씬 자유다

인습의 멍에 간교(奸巧)를 밑천

삼아 치국하는 그것도 자유인가

우매하다 여기지만 밤마다 꿈을

찾는 그들이 정녕 치자(治者)다

28

지난 밤 그 초대에 정이 다사롭기

온실 같아서 그 동안의 여독이

말끔히 씻긴 듯 기분도 상쾌하다

배낭을 베고 누워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싱겁게도 베드로인양

내가 아닐 가능성을 저울질해도

몸은 만리타향(萬里他鄕)이지만

등전만리심(燈前萬里心)이라

세 번 아니 열 번이라도

나를 부인할 수가 없다

그래 돌아가야 할 내 나라다

그렇건만 왠지 선뜻하지를 않다

꿈이거니 생각하면 그럴수록

아쉬움만 더하고 애틋한 감정에

연민만 인다 왜 그래야만 할까

무작정 이민 수치스런 해외입양

한탕주의 해외도주 재산도피

아이를 잃고 훈장을 반납한 여인

안에서 본 내 나라보다

밖에서 바라본 내 나라가

훨씬 증상이 심하구나

아 ­ 이 밤 내가 그랬듯이 그래서

나그네는 근심 떠날 날이 없는가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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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연예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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