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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급작스런 관심 왜?... 개성·평양·원산 등에 여러 학교 설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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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독립운동가' 이동휘 급작스런 관심 왜?... 개성·평양·원산 등에 여러 학교 설립




'7월 독립운동가'가 이동휘 선생이 25일 포털에서 화제다

이동휘 선생은 8세 때부터 향리 대성재(大成齋)에서 한문을 수학했다. 18세 때 지방관장의 잔심부름을 하다가 서울에 올라와 이용익(李容翊)의 소개로 군관학교에 입학, 졸업 후 육군 참령(參領)을 지냈다.

1907년 7월 한일신협약에 의해 한국군이 강제로 해산될 당시까지 참령으로서 강화진위대(江華鎭衛隊)를 이끌어 왔다. 일제의 강압에 의한 군대해산에 분노, 1909년 3월 군대동지 연기우(延其羽)·김동수(金東秀) 등과 더불어 강화도 전등사에서 의병을 조직할 계획을 세우다가 잡혀 유배되었다.

그러나 미국인 선교사 벙커(Bunker,D. A., 房巨)의 활약으로 10월 초순경 풀려나왔다. 같은 해에 이동녕·안창호 등과 신민회 산하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물색하기 위해 만주 일대를 답사하였다. 또 신민회 간부로서 개화운동과 항일투쟁을 벌였다. 1911년에는 윤치호)·양기탁 등과 105인사건에 연루, 투옥되었다가 무혐의로 석방되었다.

한편, 이동휘는 무관 출신이긴 했으나 교육문화 사업에도 적지 않은 활동을 하였다. 강화도진위대장으로 있으면서도 미국인 선교사 벙커와 박능일(朴能一) 목사를 움직여 강화도에 합일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성·평양·원산 등지에도 여러 학교를 설립했다.


온기동 글로벌이코노믹 기자 16990@g-e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