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gnoramus et ignorabimus.
우리는 모른다.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그러니까 Amor pati, 운명을 사랑하라.
“남자와 호텔에 온 이유가 뭐겠어요?”
“왜 나야?”
“나쁜 사람 같지 않아서요. 그리고…… 잘생겼잖아요.”
단 한 번만이라도,
정말 단 한 번만이라도 원하는 대로 살고 싶었다.
“나를 아니?”
“몰라요.”
“아는 느낌이 들어.”
“아저씨도 그랬어요. 처음 보는데 아는 사람처럼 봤어요.”
본심을 숨긴 채 절제만 하고 살아온 기태준.
인생이 타인에 의해 결정되어 자유가 없는 여자 나미유.
그들에게 주어진 단 한 번의 일탈.
“내가 두렵지 않아?”
“전혀요.”
“나는 네가 두려워. 모든 게 상상을 엇나가. 뭐가 기다리고 있을지 겁이 나.”
그림 속 여자에게 빠진 남자와 모델이 된 여자.
, 우릴 어디로 데려가는 거니?
◆이 책은
허순정 작가의 대표작 시리즈, 그에 담긴 미스터리.
허순정 화가는 생전 꽃을 배경으로 한 여자 초상화를 12점 발표했다. 로 통칭되는 이 시리즈는 동양의 라고 칭송받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다양한 꽃을 배경으로 한 소녀가 여자로 성장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데, 선과 악, 생과 사가 생생히 전달되어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강렬한 욕망을 품게 한다. 허순정 화가는 유명 인사부터 일반인까지 여러 인물을 그렸으나 시리즈의 모델만은 유일하게 밝히지 않았다. 허순정 재단이 만든 곡두 미술관 관장이자 허순정 화가의 손자인 기태준 관장도 유감스럽지만 모델에 대해서 실존 여부를 비롯해 어떠한 정보도 없다고 답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플로라는 살아 있는 사람이 아니야.
기태준은 광화문 한복판에서 외친다. 그러나 그림에서 튀어나온 듯한 여자는 다른 사람보다 두 배쯤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다. 꽃의 여신 플로라. 11월인데 그녀 혼자 봄을 통과하고 있다. 착각이다. 그림과 닮았을 뿐이다. 아니, 신기루다.
하지만 그의 몸은 이미 차에서 내려 그녀의 뒤를 쫓고 있었다.
낯선 사람이 가득한 거리에서 한 남자가 자신을 보고 있다.
복잡한 미로 한가운데에 선 듯 막막한 표정으로.
나미유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거리의 소음이 사라지고 시야에 그 남자만 남는다. 온기가 필요하다. 따듯한 팔로 그녀를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 이 남자는 두렵지 않다.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동질감이 느껴진다.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하는 선택은 이 남자다. 꼭 이 남자여야 한다.
“아저씨…… 나랑 자요.”
“그래,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