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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박열 의사가 3.1 운
경북 문경의 박열 의사가 3.1 운동에 참여한 게 맞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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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9.05.29 조회수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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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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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열의사가 3.1운동에 참여한 것이 맞습니다.

아래는 박열의사에 대한 자세한 설명입니다.

박열(1902~1974)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큰 족적을 독립운동가와 관계인물 가운데 해방이후 이데올로기 대립과 납북된 사실, 그리고 일본인이었다는 이유 등으로 제대로 조명 받지 못한 인물이 있다. 바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이다. 두 사람의 활동이 눈길을 끄는 이유는 1920년대 초반, ‘대역사건’으로 일제의 매스컴을 떠들썩하게 만든 장본인이었으며, 적진 한복판이라 할 수 있는 일본 동경에서 온몸으로 일본제국주의와 ‘천황제’에 맞서 싸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 청년과 일본인 여성이 함께 활동을 이어 나갔다는 점에서 굉장히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박열은 1902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경성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하여 3ㆍ1만세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 사회주의자들 및 아나키스트들과 교유하고 아나키즘 사상에 공명하면서 흑도회ㆍ흑우회 등 사상단체를 조직하여 이끌었다. 한편 가네코 후미코는 1903년 일본 요코하마에서 태어났으며, 어린시설 부모로부터 버림받아 무적자의 삶을 살면서 온갖 학대와 고통 속에서 살아온 인물이었다. 그리고 할머니 손에 이끌려 1912년부터 7년 동안 조선에서 생활하면서도 학대와 식모살이로 얼룩져 있었으며, 1919년 3ㆍ1만세운동을 직접 목격하면서 조선인과 자신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은 동질성을 느끼게 된 인물이었다.

그런 두 사람이 함께 동지로서 인연을 맺은 것은 1922년 2월이었다. 박열은 ‘일제’라는 권력에 대해 강한 저항 정신을 담은 「개새끼」라는 한편의 시를 청년잡지에 기고하였고, 이를 읽은 가네코 후미코는 깊은 동감을 하며 함께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이후 두 사람은 한국의 유학생 및 일본인 사상가들과 함께 흑로회ㆍ불령사 등의 사상단체를 조직하는 한편, 제국주의의 부당성과 ‘천황제’의 악랄함에 대해 사상잡지 「후테이센징」ㆍ「현사회」등을 발간하여 통렬하게 비판하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일왕 부자와 지배계급을 폭살시킬 계획을 은밀히 추진하고 있었다.

한편 일제는 1920년대에 들어서면서 안팎으로 큰 위기에 직면해 있었다. 먼저 ‘평등’과 ‘자유’ 의지를 강하게 품은 사회주의와 아나키즘 사상가들의 활동이 크게 늘어나 제국주의 국가의 뿌리를 흔들고 있었으며, 3ㆍ1운동 직후 다양하게 변화하여 성장한 한국의 독립운동세력들이 본토에 들어와 활동을 이어가고 있었다. 특히나 두 세력이 함께 사상적으로 연합하여 큰 위협이 되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그러한 면에서 1920년대 초반 일제에게 위협을 가하는 가장 대표적인 중심인물이 된 것이다.

이러한 위기 해결의 과제를 안고 있는 일제는 1923년 9월 1일, 40만 명에 달하는 사상자와 실종자를 낳은 관동대진재가 일어나자 변화의 계기로 삼고자 하였다. 혼란에 빠진 일본 국민들의 공격심을 한국인들에게 돌리기 위해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그 와중에 한국과 일본의 사상가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잡아들인 것이다. 이렇게 일제가 날조하여 일으킨 것이 이른바 ‘관동대진재 조선인대학살 사건’과 ‘사상가들에 대한 보호검속’이었다.

1923년 9월 3일,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보호검속의 명목으로 일제에 붙잡혔다. 이어진 경찰과 검찰의 조사에서 4차례에 걸친 폭탄의 구입시도들이 밝혀지게 되었고, 그 사용처에 대해 두 사람은 일왕을 폭살하기 위함을 당당히 밝혔다. 일제는 한국인 학살에 대한 국내외의 여론과 들끓는 비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두 사람을 ‘대역사건’의 죄인으로 몰아가면서 정치적인 도구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1923년 10월부터 2년이 넘는 시간동안 각각 21회와 23회에 걸친 혹심한 신문조사를 받았다. ‘대역사건’이란 엄청난 죄목에 비해 확실한 물증이나 증인을 확보하지 못한 일본 사법당국은 두 사람의 진술에 의존해야 했던 것이다. 두 사람은 조사 과정에서 일본 ‘천황’이 일본 민중과 한민족 전체에게 끼친 막심한 폐악을 폭로하고, 폭탄 구입에 대한 과정을 당당히 밝히는 등 재판과정을 항일ㆍ반천황제 투쟁의 장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특히 두 사람은 한국인 대표로서 법정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한국의 전통 옷을 입고 일제 침략의 부당성과 잔혹성을 재판장에서 당당히 밝힌 점은 굉장히 주목되는 부분이다.

법정투쟁에서 보여준 두 사람의 투쟁정신은 한국은 물론 일본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특히 가네코 후미코의 경우 일본인이지만 박열을 만나면서 개인의 자유를 넘어 자신과 동질성을 가진 ‘억압민족의 해방’이라는 목적을 함께 한 것에 대해 높이 평가할 만하다. 국가와 민족을 넘어서서 일본 동경 한 복판에서 펼친 두 사람의 반천황제ㆍ반제국주의 투쟁은 일제의 모순을 여실히 드러낸 대표적인 활동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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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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