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21년 전인 1592년 4월,
조선 사람들은 전쟁이 일어날 줄 모두 알았다…
임진왜란은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오늘날 이순신과 거북선, 의병과 한산도 ㆍ 행주 ㆍ 진주의 ‘3대 대첩’으로 기억되는 ‘자랑스러운’ 외세 극복의 역사 임진왜란. 과연 임진왜란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인가? 2011년 《조선 지식인의 위선》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은둔하던 ‘사림’ 세력이 중기 들어서 어떻게 조선의 정치질서를 뒤집고 ‘주류’로 우뚝 서게 됐는지, 또 그들이 어떻게 조선을 바꾸었는지를 힘 있게 그려내 호평 받은 저자의 두 번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제목에서 밝혔듯이, 저자는 우리의 상식 내지 믿음과 달리 임진왜란은 부끄러운 역사라고 말한다. 전작에서 조선 최고의 사상가이자 큰 스승으로 존경받는 퇴계와 율곡 등 유학자들이 조선의 정치를 어떻게 망쳤는지를 보여 주었다면, 이 책 《임진왜란 비겁한 승리》에서는 그 참혹한 결과물이 바로 임진왜란임을 제시한다.
전쟁이 일어날 줄 모두 알았다
흔히 ‘임진왜란’ 하면 당시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건너간 황윤길과 김성일의 엇갈린 보고를 먼저 떠올린다. 황윤길은 “필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한 반면에, 김성일은 “그러한 정상은 발견하지 못했다”며 전쟁 발발 가능성을 일축했다. 그런데 황윤길은 광해군을 세자로 추천하여 선조의 미움을 받은 서인西人이고, 김성일은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동인東人이었기 때문에 김성일의 의견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결국 16세기 말 조선이 무방비 상태로 왜란을 당하게 된 원인을 ‘당쟁’에서 찾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는 이것이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고 주장한다. 오히려 당시 조선의 임금과 조정, 지배층과 일반 백성은 모두 일본이 곧 쳐들어올 것임을 알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은 왜 아무런 방비도 없이 앉아서 외세의 침략을 당했을까?
주자학이 조선에 불러온 폐해
이것이 바로 저자가 전작에서부터 줄기차게 제기한 ‘주자학이 조선에 불러온 폐해’이다. 조선 중기에 은둔하던 사림이 조선 정치의 전면에 나서면서, 그들이 신봉하는 주자학적 대의명분에 따라 조선의 사회 분위기는 더 보수화되고 중국 중심의 사대주의가 심화되었다. 천하대의天下大義와 명분을 앞세운 공허한 정치 행태, ‘충절과 의리’를 관념화하고 개인적인 차원으로 끌어내려 결국엔 회피하는 위선, ‘요순시대의 정치’를 이상화하여 국가의 권위와 기능을 축소한 어리석음, 그리고 신분제의 꼭대기를 차지한 왕실과 사대부의 탐욕…. 그 변화의 기점이 선조 시대(1552~1608)였고, 선조 25년에 일어난 임진왜란은 선조 이후 조선의 정치체제가 의존한 성리학적 패러다임이 불러온 참화라는 것이다.
권력을 위해 백성을 버리다
전쟁이 일어날 줄 모두 알았지만, 아무도 안다고 말하지 않았다. 안다고 하는 순간, 전시동원체제로 들어가야 하고, 그것은 바로 조선의 전면적 개혁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지배층의 특권을 제한하고, 주자학적 패러다임도 바꾸어야 했다. 그러나 조선의 어느 누구도 이 같은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루어낼 자신이 없었다. 조선을 지배하는 사림의 반대를 극복할 자신이 없었다. 제아무리 임금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세상을 바꾸는 개혁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준비 없이 침략을 당할 것인가? 조선 지배층은 후자를 선택했다. 나라와 백성이 아닌, 손에 쥔 권력을 지키는 쪽을 선택했다.
항복한 일본 군사로 조선 백성을 죽이라는 임금
전쟁이 7년이나 계속되었지만, 조선군은 전쟁이 일어날 때도 없었고 전쟁이 끝날 때도 없었다. 전쟁이 일어났으나 조선 어디에도 군사가 없었다. 군사를 가지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돈을 내려고 하지 않았다. 전쟁 전에도 그랬고, 전쟁 중에도 그랬다. 임금은 제 백성이 두려웠고, 제 나라 군사가 두려워 군사를 기르지 않았다. 전쟁이 소강상태에 빠졌을 때 자강책을 세워 조선군을 건설하자고 했으나, 임금은 따르지 않았다. 그러면서 굶주린 백성이 도적이 되자, 임금은 항복한 적군을 시켜 제 나라 백성을 죽이라고 했다.
중국의 ‘울며 겨자 먹기’
적군이 나라의 반 이상을 점령하여 나라가 곧 망하게 생겼는데도, 임금과 사대부 어느 누구도 자기가 가진 것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 조선은 군사를 만들 수 없었다. 나라가 망하든지, 누군가가 도와주든지 해야 했다. 조선은 중국에 기댔다. 중국은 그런 조선의 행태가 미웠지만, 일본군을 그대로 두었다간 중원이 위태로웠다. 조선의 앵벌이식 안보전략이 성공하는 순간이었다. 중국군이 조선반도에 들어오자, 조선 조정은 의병마저도 해산해 버린다. 의병이라는 무장 세력이 백성의 손에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조선은 제 나라 안보를 완전히 중국에 의존해 버린다.
이순신을 바라보는 불편한 눈초리
그런 조선에 예외적인 군사가 있었다. 바로 이순신의 수군이었다. 이순신의 군사는 조정의 지원으로 건설한 군사가 아니라, 이순신이 스스로 마련한 돈으로 건설한 군사였다. 그렇게 하여 이순신은 전체 조선군의 반이 넘는 최정예 군사를 거느렸다. 그런데 이순신은 서울에 붙잡혀와 고문을 받고 죽기 직전에 풀려났다. 그런 사람이 감옥에서 풀려난 지 40일 만에 완전히 패몰한 조선 수군을 재건하여 남해에서 일본군을 쳐부수고 제해권을 되찾는 기적을 이루어냈다. 조선의 온 백성이 ‘장군’을 우러렀다. 그런 이순신을 보면서 임금과 조정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이순신이 남해에서 거둔 승리를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