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사법재판소 '페리니사건'은 무엇

"법원(ICJ)은 개인청구권에 대해 판결할 필요없다"

2019-07-26 11:37:58 게재

국제사법재판소 결론에 명시, 소수의견이 판례 잘못 인용

아베 "국제법 상식에 어긋났다" 발언 배경도 페리니판결

강제징용사건을 국제중재로 가면 우리나라가 불리하다는 근거로 사용되는 사례가 이른바 '페리니판결'이다.

지난 2004년 이탈리아 대법원은 이탈리아 전쟁포로였던 루이지 페리니(Luigi Ferini)가 독일정부를 상대로 제기한 배상 소송에서 원고승소 판결을 했다. 그러자 독일 정부는 이에 불복해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2012년 국제사법재판소는 독일의 편을 들어주는 판결을 했다. 그 판결이 이른바 페리니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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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석진 변호사는 "페리니사건은 독일이 국가로서 이탈리아 법정에 피소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소위 국가면제의 법리에 대한 사건이지, 조약에 따른 개인의 청구권 유무를 논하는 판결이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박찬운 한양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도 "국제사법재판소 페리니판결을 청구권협정 해석에도 원용될 수 있다고 하면서 중재로 가면 불리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다"며 "독-이 협정과 한일청구권협정은 유사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독-이 협정에선 전쟁과정에서 독일의 불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청구권이 명확하게 언급돼 있지만 우린 그렇지 않다"고 지적했다.

◆이탈리아 법원, 독일 전쟁범죄를 추궁 = 국제사법재판소의 2012년 2월 페리니판결문에 따르면, 1940년 6월 이탈리아는 독일의 동맹국으로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다. 하지만 1943년 9월 무솔리니를 권좌에서 축출한 후 이탈리아는 연합군에 항복했고, 다음달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 독일은 이탈리아 영토의 많은 부분을 점령하고 주민들에게 잔혹행위를 자행했다. 여기에는 민간인의 대량학살과 강제노동이 포함됐다. 게다가 독일군은 이탈리아군 포로들을 강제노동으로 사용하기 위해 독일과 독일 점령지역으로 추방했다.

전쟁에서 패배한 독일은 1961년과 1963년 두차례에 걸쳐 이탈리아와 '국가사회주의(나치) 박해 조치의 대상이 되는 이탈리아 국민에 대한 보상' 협정 등을 맺고 이탈리아 국민에 대한 보상을 했다.

1998년 9월 전쟁포로였던 루이지 페리니씨가 이탈리아 법원에 독일 정부를 상대로 배상소송을 제기했다. 1944년 8월 체포돼 독일로 끌려갔던 페리니씨는 전쟁이 끝날 때까지 군수공장에서 구금돼 강제노동을 했지만 배상을 받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2004년 3월 이탈리아 대법원은 "국제범죄에 대해서는 (국가간) 면책특권이 적용되지 않는다며 (이탈리아가 독일에 대한) 사법권을 갖고 있다"고 판결했다.

◆페리리판결문은 개별 청구권 판단안해 = 이탈리아 대법원 판결에 불복한 독일정부는 2008년 12월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2012년 2월 판결을 내렸다.

판결문 결론(Conclusions) 부분은 "법원(국제사법재판소)이 당사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 길게 논의된 많은 질문들을 고려할 필요는 없다"며 "특히 법원은 이탈리아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국제법이 개별 피해자에게 무력충돌의 법률위반에 따른 배상청구권을 직접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권리를 주는지 여부에 대한 판결을 내릴 필요는 없다"고 지적했다.

전 변호사는 "국제사법재판소가 국제법상 개인의 청구권이 있는지는 판시하지 않는다고 명시한 것"이라며 "대법원판결 소수의견이 지적한 대로 개인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지적은 어디에도 없다"고 지적했다.

이어 페리니판결문은 "독일이 주장한 바와 같이, 평화조약 제77조 제4항 또는 1961년 협정의 조항이 이탈리아 절차의 대상인 청구권의 구속력 포기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해서는 규정이 필요하지 않다. 물론 이러한 질문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이 현재 사건의 한계안에 있는 결정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이 저지른 전쟁범죄와 반인륜적 범죄와 관련해 여전히 이탈리아, 즉 개별 이탈리인에 대한 책임이 있는지는 독일의 면책특권에 영향을 줄 수 없다. 마찬가지로 면책특권 문제에 대한 법원의 판결은 독일이 어떤 책임을 지더라도 영향을 미칠 수 없다"고 적시했다.

◆대법 소수의견과 같은 아베의 주장 = 전 변호사는 "이 판결이 주권면제를 판시했다고 해서 그밖의 점에 있어서의 독일의 책임에 대하여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지적 한 것"이라며 "이런 페리니판결의 명시적 내용에도 불구하고 이 판결이 개인의 청구권이 소멸되는 것으로 처리됐다고 판시한 것은 명백한 허위사실에 기초한 판시"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어 "강제징용 대법원 판결은 아마도 번역되어 일본에도 제공되었을 것이고, 일본에서는 이 소수의견을 읽고 우리나라 대법원이 국제적 기준에 어긋나는 판결을 했다고 분개해 '한국 대법원 판결은 명확한 국제법 위반에 해당한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아베총리가 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을 '국제법 상식에 어긋난 것'이라는 취지로 비난한 것도 대법원 소수의견에 기초한 것일 가능성이 있다"며 "소수의견을 낸 권순일 대법관이 이를 점검하지 못하고 기재한 것은 대한민국 사법부의 수치"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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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병호 기자 bhjang@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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