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묵상

[말씀묵상] 내 눈동자에 주님을 담는 ‘행복’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
입력일 2019-08-06 수정일 2019-08-06 발행일 2019-08-11 제 3157호 1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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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9주일
제1독서(지혜 18,6-9)  제2독서(히브 11,1-2.8-19)  복음(루카 12,32-48)

무엇인가를 집중하여 바라보면 바라보는 대상이 눈동자에 고스란히 비쳐진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깨어있는 시간 내내, 주님을 기억하고 바라보는 마음으로 지낸다면 내 눈동자에도 뚜렷이 주님의 모습이 새겨져서 모두에게 주님을 보여 줄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을 했더랬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그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에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기억할 수만 있다면, 틀림없이 우리 눈동자에는 주님의 모습이 뚜렷이 비쳐질 것이라 싶었던 것입니다.

루카 사도는 오늘 말씀이 수많은 군중이 모여들어 서로 밟힐 지경으로 혼잡했던 상황에서 “몇몇 제자”들에게만 들려주셨다는 사실을 굳이 밝힙니다. 이를 통해서 주님께서는 온 세상을 향하여 당신의 말씀을 선포하시지만 우선 ‘받아들일 만한’ 신앙인의 마음 밭에 집중적으로 말씀의 요지를 심어 주려하신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주는 듯합니다.

때문에 말씀을 듣는 마음을 단정히 추스르고 싶습니다.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살아갈 몇몇 제자에게만 들려주시는 내밀하고 소중한 내용을 마음을 모아 정중하게 새겨듣고 싶습니다. 당신께서 알려주신 ‘의무사항’을 꼼꼼히 챙겨서 오직 그분께만 집중하여 그분만을 바라보며 그분을 고스란히 눈에 담고 싶습니다.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는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말씀하지 않았습니다. 세상의 변방, 이스라엘의 작은 촌락을 오가며 몇몇 고장에서만 하느님의 뜻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을 직접 뵙고 그분의 말씀을 들었던 모두가 전부, 하느님을 믿고 삶이 변화되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사라지지 않고 수천 년을 이어져 오고 있습니다. 쉼 없이 오늘 이 시간까지 말씀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지금 우리를 통해서 온 세상에 당신의 외침이 전해지기를 고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역시 모든 인류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다만 간절히 자신의 처지가 변화되기 원하는 몇몇 사람에게 주님 말씀의 능력이 임할 것입니다.

외젠 뷔르낭의 ‘기다리는 종들’.

복음을 거푸 읽으며 강론을 준비하는데 야릇하게도 자꾸만 마음이 2독서에 딱 한 번 언급되는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에게 쏠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이야말로 2독서의 주제인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이 되는 믿음을 제대로 살아냈다는 사실이 마음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던 겁니다. 어쩌면 이야말로 모든 신앙인들이 꿈꾸는 로망일 테니까요. 무엇보다 아브라함의 삶이 오직 “믿음으로” 그분의 뜻을 실행하기에 거침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바탕에는 사라의 내조가 일조했다는 사실에 마음을 점령당한 느낌이었달까요? 오래오래 생각을 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을 철저히 믿었기에 정든 고향을 등지고 타향에서 나그네처럼 살기로 작정한 우직한 남편 아브라함의 결단에 사라가 전혀 군소리 없이 따랐던 모습을 말입니다. 나아가 주님께서 “사라는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부르며 그에게 순종하였습니다”(1베드 3,6)라시며 사라의 삶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셨다는 사실도 기억났습니다.

솔직히 창세기가 전하는 사라의 모습은 우리가 인식하는 현모양처와는 거리가 있는 듯 보입니다. 외려 자기주장이 매우 강하여서 양순한 남편 아브라함을 좌지우지하는 듯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렇게 남편을 쥐락펴락하는 부인, 변덕도 죽 끓듯 하여 도무지 덕스러워 보이지 않는 사라를 하느님께서는 칭찬하십니다. 의외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를 들어 남편 아브라함에게 자신의 여종 하갈과의 동침을 권해 놓고서는 싹 안면을 바꾸고, 하갈을 구박하는 것도 모자라서 하갈이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미워하며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을 보면 속이 좁아터진 아낙의 모습일 뿐이니 말입니다. 드디어 아브라함에게 집에서 쫓아낼 것을 요구하는 걸 보면서 저절로 ‘이런 악처가 있나’ 싶을 지경이니 말입니다.

무엇보다 그냥 넘길 수 없는 것은 이렇게 극성맞은 사라의 주장에 하느님께서 역성을 들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자기 핏줄을 쫓아낼 생각에 마음이 산란하고 언짢아진 아브라함에게 오히려 “사라가 너에게 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어라”(창세 21,12)고 하시다니, 과연 하느님의 정의는 무엇인가 싶어집니다. 그럼에도 사라는 평생 동안 ‘남편에게 순종하였다’고 단언하고 계시니, 진정 아이러니라 싶은 겁니다.

그런데 곰곰이 따져 생각하면 하느님의 관점을 이해하게 됩니다. 부인인 사라가 사사건건 아브라함이 내린 믿음의 결정에 대해서 바가지를 긁으면서 툴툴대거나 ‘못 살겠다’며 고향에서 눌러살자고 고집을 부렸다면 어떠했을지? 제아무리 믿음이 굳센 아브라함이라도 한결같이 믿음의 여정을 걸어내기 힘들었을 것이라 싶은 겁니다. 그러니 사라는 믿음의 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헤아렸던 현명한 분이라 깨닫게 되는 겁니다. 남편이 나아가는 하느님을 향한 길이 험하고 힘들어도 마다치 않고 오히려 격려했던 지혜의 소유자였음을 느끼게 됩니다.

때문에 오늘 주님의 말씀을 교회에 들려주는 보편적 가르침으로 듣습니다. 서로를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아브라함을 향했던 사라의 마음으로 교회를 섬겨달라는 당부라 싶습니다. 우리 모두가 사라처럼 지혜롭기를 기대하시는 것이라 싶습니다. 마침내 당신의 교회인 우리 모두가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섬김의 관계를 형성하라는 뜻이라 새깁니다. 오늘 주님께서 사라의 이야기를 통해서 모든 아내들에게, 특히 그리스도의 신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당신이 원하는 부부의 모습을 살아달라고 당부하신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주님의 아내가 되었으니 신랑이신 주님의 뜻을 이해하고 따라 달라는 음성이라 듣습니다.

사랑은 그리움입니다. 그러기에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늘 주님을 그리워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도 우리와의 만남을 기대하며 마음이 설레실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주님의 그리움의 고백입니다. 우리와의 해후를 기다리는 설렘의 기록입니다. 때문에 성경에는 참 행복의 모습이 스케치 되어 있습니다. 그분께 보여드릴 삶이 어여쁘도록 최선을 다했던 인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리고 “믿음이 없이는 하느님 마음에 들 수 없습니다.”(히브 11,6)라고 믿음인에게는 “세상이 가치 없는 곳”(히브 11,18)이었음을 분명히 밝힙니다. 믿음이야말로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고 기다리는 사람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오직 믿음으로써 “약속의 공동 상속자”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몇몇 제자’들의 눈동자에는 주님의 모습이 선명하게 아로새겨져 있었을 것입니다. 그처럼 저와 교우님들이 모두, 주님을 향한 사랑의 그리움으로, 눈동자에 주님을 담고 지내게 되시길, 하여 이웃에게 주님을 뚜렷이 보여주는 축복의 삶을 살아가시길 간청합니다.

장재봉 신부 (부산교구 월평본당 주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