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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과김상헌관계
최명길과김상헌 관계조사 해서발표하는게 수행평가인데 도와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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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2017.06.03 조회수 19,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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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ngmar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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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호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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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인

#강사 #복지관

한국사 12위, 한컴오피스 36위, MS워드 29위 분야에서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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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에서 김상헌(1570 - 1652)과 최명길(1586 - 1647)의 대비는 상당히 놀랍다. 김상헌은 지조와 절개의 화신으로 묘사되는 반면, 최명길은 실리주의로 국가를 되살린 사람으로 기억된다. 병자호란의 남한산성 농성 때 최명길의 국서를 김상헌이 찢은 에피소드와 말년에 둘 다 심양으로 잡혀가 벽 하나를 두고 서로 화해하고 서로를 인정한 이야기는 한 폭의 미담으로 후세에 가르침을 주려는 듯하다.

 

청음 김상헌은 명문가의 자제로서 훗날 안동김씨의 세도집권자들의 조상1이 되는 인물이다. 원래 안동김씨는 그런저런 가문에 지나지 않았는데, 김번이 세조한테 총애를 받은 학조대사의 친조카로서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기반을 쌓았으며, 김생해가 왕실의 사위가 되면서 명문가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김상헌 역시 본인의 능력과 광해군 부인의 이종사촌 오빠라는 배경 덕분에 남들보다 일찍 출세할 수 있었다. 혈연이나 인맥으로 보면 대북이나 소북이 되어 집권층에 들어가도 이상하지 않을 포지션이었지만, 그는 서인의 일원으로 활약하면서 광해군의 파행적인 정국 운영에 비판적인 언행을 보였고, 이에 권력에서 멀어졌다.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광해군 부인의 친오빠였던 유희분 등이 목이 잘렸다. 김상헌은 이 소식을 듣고 주위의 만류를 뿌리치고 곡을 하였다. 비록 유희분이 권세를 탐해 불행해졌지만, 자신은 친척 사이의 인연은 끊을 수 없다고 하였던 것이다.

 

가문에 대해서 논하자면 최명길은 김상헌보다 더욱 보잘 것 없었으나, 개인의 능력으로 이를 만회하였다. 그는 만 19살이었던 1605년에 생원시, 진사시, 문과를 스트레이트로 급제하여 승문원에 배속되었다. 이는 대입수능, 사법고시, 연수원고시를 1년 만에 마스터한 것과 비슷하다 하겠다. 대단한 수재였던 그는 처음에 승문원에 배속되었다. 당시 같이 배속되었던 조익, 장유, 이시백 등과 벗하였으며, 4인을 일컬어 세상에서는 '사우(四友)'라 하였다. 하지만 광해군 시절에 북인의 권력독점을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야인으로 지내면서 학문에 전념하였다. 이후 최명길은 장유 및 이시백 등과 함께 인조반정을 모의하였고, 최명길은 1등 공신이 되었다. 이후 그의 경력은 탄탄대로를 달렸고, 각부의 판서직을 역임하고 병자호란 후에는 영의정이 되었다. 사실 그가 없었다면 인조는 강화도로 가려다가 중간에 청군에게 생포되거나, 또는 연락루트 자체가 단절된 채 청나라로 압송되거나, 또는 대명전쟁을 지휘하는 청나라에 20만곡을 그대로 갖다 바치는 등의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어찌되었던 간에, 김상헌과 최명길을 비교해보자. 나이는 최명길이 김상헌보다 16살이나 어렸다. 또한 김상헌은 절개와 학문으로 당시 후배들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처지였다. 얼핏보면 김상헌이 최명길보다 사회적인 위치에서 우위를 점했을 듯하나,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최명길은 인조반정의 1등공신이었고, 정치적인 파워, 관위 등등 모든 면에서 김상헌은 최명길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또한 김상헌은 당시 또래 관료들보다 출세가 늦은 편이었는데, 그 이유를 살펴보자면 오랫동안 이조에서 경력을 쌓은 '인사권자'인 최명길의 혐오를 받았기 때문이라고도 얘기할 수 있다.

 

출처 http://blog.naver.com/virapasas/220122612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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