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지에 먹으로 박제된 `세월의 문향`을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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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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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고간찰연구회 `내가 읽은 옛 편지` 출간

유홍준 등 학자 29인 편저
단원에게 그림 부탁하는 간찰과
글씨 부탁 거절하는 추사 김정희
불교 시대정신 주장한 만해까지

중기 조선 문인·승려 편지에서
유배지 고뇌·지극한 예절 절절


불교사상가이자 독립운동가였던 만해 한용운이 친우인 도진호에게 쓴 간찰. 불교 개혁론인 `조선불교유신론`을 집필하던 시기에 쓴 것으로, 당대 만해의 심정을 엿볼 수 있다. [사진 제공 = 도서출판 다운샘]
17세기 정치가 윤이후가 유배객 신세로 전락한 '정신의 벗' 류명현에게 보낸 격정의 편지엔 거대한 얼룩이 선명하다. 유배의 처지를 달랜다.

"외딴섬의 위태롭고 괴로운 상황을 직접 보는 듯해 긴 한숨이 나왔습니다…."

유배지에서 쓰인 류명현의 시(詩)를 읽은 윤이후는 애처로운 심경을 저렇게 붓으로 써내려갔다. 윤이후의 장탄식엔 류명현의 작시(作詩)가 반대파에게 필경 오해를 부르리라는 우려의 마음도 담겼다. 이에 윤이후는 류명현 시를 차운(次韻)하며 답시를 보냈다. 편지의 후기엔 다음 문장도 함께 전해진다.

"구설수를 만드는 단초가 될 수도 있어 마땅히 좌하(座下·편지에서 상대를 높이는 호칭)께 경계의 말씀을 올려야 하지만, 좌하를 좇아 시에 화운까지 한 것은 시 짓기를 좋아해서가 아닙니다. 우리가 떨어져 있기에 만나서 전할 말을 시로 대신한 것뿐입니다…."

신민규 국립고궁박물관 연구원은 "권력에서 밀려난 자들은 시 한 수 짓는 것에도 노심초사했다. 엄혹했던 시절을 생각하면 편지에 번진 얼룩이 누군가의 눈물자국처럼 보인다"며 오래된 편지에서 절망의 기운을 발견해낸다.

수백 년 전 조선에서 보내진 쉰여덟 편의 간찰(簡札)이 막 도착했다. 안부, 소식, 용무를 적어 주고받는 편지를 간찰이라 한다. 창립 20주년을 맞은 한국고간찰연구회가 편저한 '내가 읽은 옛 편지'(도서출판 다운샘)에는 당대인의 우국과 충정, 고뇌과 실천, 현실과 이상을 아우르는 필체가 제대로 '글맛'을 돋운다.

유홍준 한국고간찰연구회 이사장(명지대 석좌교수)은 "초서(草書)를 공부하려 1999년부터 한 번도 거르지 않고 매달 말일 모인 연구회 모임이 올해로 20주년을 맞았다. 초서를 타파한다는 의미에서 '말일파초회(末日破草會)'라고 자칭하는데, 저 간찰에는 삶의 체취가 살아 있었다"고 연구회의 20년사를 회고했다.

쪽물로 흘려 만든 물결무늬 시전지가 독특한 미를 형성하는 18세기 문신 심염조의 칠언율시.
조선 후기 문신 심염조가 '아사(亞使)'로 호명된 인물에게 보낸 칠언율시는 먹의 내용보다는 먹이 스민 시전시(詩箋紙)가 탄성을 자아낸다. 쪽물을 닥지에 흘려서다. 물결치는 수면에 적은 듯한 몽환이다. 추상화단에서 비(非)정형에 집중했던 '앵포르멜(Informel) 회화'에 저 편지를 빗대며, 본질로서의 미(美)를 성찰한다.

단원 김홍도에게 그림 한 점을 청하는 18세기 성대중이란 인물의 편지는, 지극한 예술 앞에 고개를 숙이는 예(禮)의 진정성이 고개를 끄덕이게 한다.

흥해군수 시절의 성대중은 "단원께서 붓을 한 번 휘둘러 그려서 동호인의 마음을 드러내달라. 대중은 머리를 조아린다"며 그림을 청한다. "예물이 없을 수 없는지라, 삼가 못난 시 여덟 편을 써서 앞세웁니다"라고 했으니 당대에도 '공짜'는 없었나 보다. 성대중의 문(文)이 단원의 그림을 청하던 정성을 간찰은 일러준다.

이태호 명지대 미술사학과 초빙교수는 "직접 스케치한 파초와 연꽃 그림 화본(畵本)을 구체적으로 제시하며 그림을 요청하는 사례여서 흥미롭다"고 간찰에 담긴 조심스러운 마음을 헤아렸다.

부채에 글씨를 써달라는 지인의 부탁을 거절하는 추사 김정희의 글씨도 눈길을 끈다. 거절하는 글에서조차 범인(凡人)을 초월한 경지가 어렵지 않게 짐작 가능하다. 추사는 썼다. "저는 몇 년 전부터 일상의 부채에 쓰는 글씨는 필묵을 뚝 끊어 쓰지 않고 있습니다. 헤아려 용서하시기 바랍니다." 친분을 내세운 부탁에 추사는 정중하나 단호한 거절의 글을 보냈다. 김병기 전북대 중문과 교수는 "짐작건대 추사 선생께 부채를 보낸 게 한두 자루가 아닌 성싶다. 무례하게도 대략 열 자루쯤 보낸 게 아닐까"라며 웃음기 섞인 추측을 보탰다.

만해 한용운이 절친에게 쓴 간찰은, 한국 근대를 대표하는 불교사상가이자 절개를 굽히지 았았던 독립운동가의 완강한 의지와 대면케 한다. 1913년 불교개혁을 향한 일대 혁신을 기술한 '조선불교유신론'을 발행한 직후에 쓴 것으로 보이는 이 편지에서, 만해는 개인보다 민족을 앞세운다. 수신인과 조우하듯, 시대정신이 가득한 승려의 다짐은 완강하다.

"집안일이라는 것은 천하의 일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이므로 하나같이 던져버리고, 학문에 힘쓰고 처음 가졌던 뜻을 저버리지 말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일곱 번 넘어지고 여덟 번 거꾸러지고 했는데, 어찌 말로 다 할 수 있겠습니까?"

김제란 동국대 한문학과 교수는 "역사 현실을 외면한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한편, 불교 본연의 정신을 찾고자 하는 작업을 게을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후술했다. 연구회 소속 29인의 학자들은 이처럼, 간찰 한 장에서 정신의 지평을 확장해냈다.

[김유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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