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의 15일 제69주년 광복절 경축사는 향후 국정운영의 두 축인 경제활성화와 통일 준비 방안 등을 망라하는 수준이었다. 경제활성화 필요성과 이를 위한 각종 조치, 남북 간 각종 협력사업 제안에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하지만 획기적인 내용은 없었으며, 기존 방침들을 재확인하는 수준에 그쳤다. 북의 반발만 산 ‘드레스덴 구상’ 같은 거대담론보다는 남북 간 환경·문화 협력 등부터 시작하는 ‘작은 통일론’을 새롭게 꺼냈다.
국정운영 방향으로 국가적 적폐 해소와 혁신을 강조했지만, ‘세월호 참사’는 없었다. 박 대통령은 윤모 일병 폭행 사망사건 등과 함께 “잇따라 발생한 사건·사고들”이라고만 지칭한 뒤 “우리 사회에 오랫동안 쌓여온 비정상적 관행과 적폐를 낱낱이 보여주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 무능력과 무책임 등 국민들에게 국가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하는 사건이었지만, 국정 최종·최고 책임자다운 진단과 해법은 보이지 않았다. ‘세월호특별법’ 제정을 요구하며 한 달여 동안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세월호 유가족들에 대한 위로의 말도 없었다.
▲ 경제활성화·통일 준비 망라 “남북관계 작은 사업부터 추진”
획기적 내용 제시는 없어
세월호 대신 “잇단 사건·사고” 비정상적 관행·적폐 탓만
■ ‘중대 제안’은 없었다… 작은 통일부터
박 대통령은 북한을 향해 “공동발전을 위한 작은 통로들이 모인다면 생활공동체를 형성할 수 있다. 작은 사업부터 하나하나 추진해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남북 하천·산림의 공동관리, 남북 문화유산 공동발굴 사업, 내년도 광복 70주년 행사의 공동기획 및 준비 등 구체적인 남북 간 사업을 제안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문화·생태 쪽이 강조돼 있는데, 안보·군사 위주 접근보다는 소프트파워 위주 협력에 초점을 둔 것 같다”며 “ ‘작은 발걸음 정책’을 원용해 실현 가능한 것부터 하겠다는 것”이라고 평가했다. 작은 발걸음 정책은 동독 동방정책의 핵심이다.
그러면서 북한이 반발하는 ‘드레스덴 구상’이나 대북정책의 근간인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언급하지 않는 등 대북 유화 제스처 흐름을 이어갔다.
하지만 이날 제안이 남북관계 전환점이 될지는 미지수다. 5·24 대북 제재조치 해제, 금강산관광, 6자회담 재개 방안 등 민감하고 굵직한 남북 간 현안은 모두 피해갔기 때문이다. “핵을 포기한 카자흐스탄과 개혁·개방을 선택한 베트남, 미얀마 등은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다”며 북핵 포기만 거듭 강조한 것도 북한 반발을 부를 수 있다.
대일관계를 두고는 “군대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이 살아 계시는 동안 그분들이 납득할 수 있는 전향적 조치를 요구해왔다. 이런 문제를 올바르게 해결할 때 한·일관계가 건실하게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3·1절 기념사에 이어 8·15 경축사에서도 처음으로 거론하면서 현 시기 한·일관계 개선 핵심은 위안부 문제 해결이라는 입장을 재확인한 것이다.
다만 “일본 일부 정치인들은 오히려 양 국민의 마음을 갈라놓고 상처 주는 일을 하고 있다”면서도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 등에 대한 공격은 피했다. 내년 한·일 국교정상화 50주년을 앞두고 관계 회복 필요성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이를 위한 일본 정치인들의 결단을 촉구한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한·중·일 원자력 안전협의체를 제안한 것도 한·일관계를 중국·몽골 등 주변국을 포함하는 동북아 평화협력 구상 틀 안에서 풀어나가려는 뜻으로 풀이된다.
■ 내수경기 활성화에 올인
박 대통령은 “경제활성화에 국정역량을 집중해 침체와 저성장의 고리를 끊어낼 것”이라고 밝혔다. 재정·세제·금융 등 정책수단을 총동원해 내수경기를 살려낼 것이며, 내년 예산도 최대한 확대기조로 편성하겠다는 방침을 밝혔다. 지난해 경축사에 없었던 ‘성장’이라는 말이 10차례나 등장했다. ‘경제’는 21번, ‘혁신’은 16번 썼다.
박 대통령은 “경제법안들이 발이 묶여 어렵게 일궈낸 경기활성화의 불씨가 언제 꺼져버릴지 모르는 위기감에 싸여 있다. 여와 야가 따로 없다. 정치권도 국민을 위한 국가혁신에 동참해달라”고 말했다. 분양가상한제 폐지를 담은 주택법 개정 등 경제활성화법의 국회 통과를 다시 요청한 것이다.
반면 대선 핵심 공약이었던 ‘경제민주화’는 지난해 경축사에선 ‘원칙이 선 시장경제’로 포함됐지만, 이번엔 아예 자취를 감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