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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윤도현밴드 5집 노래중 "이땅에 살기 위하여"에 대하여(10)
hyos**** 조회수 4,201 작성일2003.07.21
윤도현 밴드 5집의 수록곡 중 "이 땅에 살기 위하여"라는 노래가 있잖아요...

언뜻 가사를 보면 어떤 시위에 대한 내용인 것 같은데....

어떤 시위에 대한 내용인지 아니면 이 노래 가사와 그 때의 사회적 배경이 어떠하였는지 알고 싶어요..

------------이 땅에 살기 위하여--------------
- 윤도현 밴드-
찬 시멘트 바닥에 스치로폴 깔고
가면 얼마나 가겠나 시작한 농성
삼백일 넘어 쉬어 처진 몸부림에도
대답하나 없는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일본 땅 미국 땅까지 원정투쟁을 떠나간다

이 땅에 살기 위하여 살기 위하여

이 땅에 발딛고 설 자유조차 빼앗겨 빼앗겨
지상 수십 미터 아찔한 고공농성
지하 수백 미터 막장 봉쇄농성
식수조차 못 먹고 말라 쓰러져가며
땅 속에다 허공에다 울부짖는다 울부짖는다

이땅에 살기 위하여 햇살 가득한 거리에 숨어
수배자로 쫓기고 쇠창살에 갇혀가며
우리는 절규한다 기꺼이 표적이 되어
뜨거운 피를 이 땅위에 쏟는다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온 이땅
우리의 노동으로 일궈 세운 이땅에
사람으로 살기 위하여 사랑으로 살기 위하여
저 지하 땅끝에서 하늘 꼭대기까지
온 몸으로 투쟁한다 피눈물로 투쟁한다
이 땅에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땅의 주인으로 살기 위하여 이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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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 답변
1번째 답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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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jys****
영웅
한국사, 국어 어원, 어휘, 불교 분야에서 활동
본인 입력 포함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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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징역까지 받았던 노동자 시인입니다.
1991년 한국을 발칵 뒤집었던 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사노맹)사건으로 무기징역을 받았습니다.
1998년 광복절 특사로 석방되었지요.

우리의 80년대는 어떠했는지는 386세대들은 잘 알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최절정기였으니까요.



아래는 박노해 시인에 대한 참고 자료입니다.


박노해 시인은 1957년 전라남도 함평에서 출생하여 고흥, 벌교에서 자랐으며. 그곳에서 선린상고를 졸업하고 섬유,금속, 운수 분야에서 노동자 생활을 하면서 1983년 '시와 경제' 제2집에 '시다의 꿈' 외 6편을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였다.

1984년 시집 '노동의 새벽' (풀빛. 1997년 해냄 재출간)을 간행한 후 '참된 시작'(창작과 비평사,1993년), '겨울 꽃핀다'(해냄,1999)시선집 머리띠를 묶으며(미래사,1991년), 산문집 '우리들의 사랑 우리들의 분노'(노동문학사,1989년) '사람만이 희망이다'(해냄,1997년),'오늘은 다르게'(해냄,1999년) 등을 간행하였고 1991년 사노맹(남한사회주의노동자연맹) 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하다가 1998년 8 .15 특별 사면으로 석방되었다.

그리고 제1회 노동문학상(1988년)을 수상하였다. 박노해는 1980년대 산업분야 노동시의 기수이다. 박노해의 시는 '우리'와 함께 한 것이기에 특히 주목된다. 그의 '노동의 새벽'에 실린 총 42편의 작품 중에서 '우리'라는 주체적 대명사가 나오지 않는 작품은 '한강', '그리움', '바겐세일', '시다의 꿈', '봄', '떠다니냐' 등 6편이다.

이 작품들이 초기의 것이라는 사실을 감한 한다면 박노해의 시세계는 단적으로 '우리'의 삶을, 즉 노동자의 삶을 추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신경림, 김지하 등의 앞 시대 민중시에도 '우리'라는 주체는 많이 나타나지만 지식인 시인들의 동정심이 내포된 것과 박노해의 주체적인 '우리'와는 차별되는 것이다.

박노해의 시세계는 첫시집 '노동의 새벽' 단계와 1988년 '노동해방문학' 단계, 그리고 사노맹 사건 이후의 단계 등으로 구분된다. 그에 의해 지식인 위주의 민중시가 노동자가 창작 주체가 되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아무나 시인이 될 수 없는 우리의 문단 풍토를 누구나 시인이 될 수 있는 것으로 바꾸었고, 좋은 시의 기준으로 여겨오던 비유, 상징, 운율 등의 형식적인 면분만 아니라 내용도 중요함을 인식시켰다. 또 시가 텍스트의 대상을 넘어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운동의 매개체로까지 유용함을 갖게 하였다.

박노해의 시는 구체적인 노동 현장성을 확보한 데다가 시대의 문제로 집중 시켰기 때문에 시대인들로부터 공감대를 샀다. '포장마차, 손무덤, 신혼일기, 지문을 부른다' 등의 작품이 그 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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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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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문자가 채택한 답변입니다.

  • 출처

    문학동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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