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N기구 첫 여성 수자원과장 "'여성=덜 전문적' 편견 해외도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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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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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경부 한강홍수통제소 김휘린 박사
UN 산하 세계기상기구에 발탁돼
수자원 분야 첫 아시아인·여성 과장
"늘 스스로를 '증명' 해야 했지만,
늘 최선을 다해 준비했다"
9일 한강홍수통제소 상황실에서 인터뷰중인 김휘린 예보팀장. 김정연 기자
“합격 발표 메일이 스팸 함으로 들어가서 하마터면 못 갈 뻔했는데, 전화로 연락이 왔어요. 기대를 안 했기에 얼떨떨했죠.”

9일 오전 서울 서초구 한강 변에 위치한 한강홍수통제소에서 만난 예보통제과 김휘린(42) 연구사(예보팀장·수자원공학 박사).
그는 지난 5월 세계기상기구(WMO) 수문예보‧수자원과장직에 발탁됐다.

지금까지 기상 분야 과장에 중국인이 있었지만, 수자원 관리 분야에서는 아시아인은 물론이고 여성 과장도 없었던 WMO에서 김 연구사는 최초 아시아인, 최연소 여성 수자원과장이다.

김 연구사는 "오는 17일에 스위스로 출국해 월요일부터 바로 출근한다"며 "일이 바빠 비자도 방금 대사관 가서 신청하고 왔다"고 했다. 빽빽한 일정에도 그의 얼굴은 피로보다 기대감으로 밝았다.

WMO는 기상‧수자원 분야를 담당하는 UN 산하 전문기구다. 대기와 물 분야에서 전 세계 현황 파악과 계획 수립 등을 하는 곳이다. 김 연구사는 각종 행정 절차를 거쳐 오는 17일 출국, 19일부터 스위스 제네바 WMO 사무실에서 근무한다.

"마감 직전 밤새 쓴 원서… 가능성을 봐준 것 같아"
지난 6월 10일 열린 18차 WMO 총회에서 국가대표로 발언 중인 김휘린 연구사. [김휘린 연구사 제공]
김 연구사는 "사실 이번 과장직에 추천을 받았지만, 원서를 안 쓰려고 하다 마감 며칠 전에서야 '후회를 남기지 말자' 싶어 밤새워 썼다"고 했다.

지난 5월 5일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도 그는 국내에서 열리는 수자원 관련 국제행사에 참석 중이었다.
그는 “지원자 중 쟁쟁한 사람이 많다는 걸 알고 있었고, WMO 관련 경력도 짧은데 될 거란 생각을 못 했다”면서도 “부족하지만 그래도 가능성을 봐준 게 아닐까요?”라며 웃었다.

김 연구사는 “그간 수자원 쪽은 유럽‧미국‧캐나다 위주였는데, 아시아 인구도 많고, 물난리도 크게 많이 나서 WMO가 할 일이 많은 지역이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했다.

이메일 주소 ‘hydro', 물을 좋아한 물 소녀
김 연구사는 지난 6월 제 18회 WMO 총회에서 수문의회 토론 좌장을 맡았다. [김휘린 연구사 제공]
김 연구사의 이메일 주소는 ‘물’을 뜻하는 ‘hydro'다.
그는 “아버지가 유조선을 모는 1급 선장이어서, 어릴 때부터 물과 가까웠고 관심이 많았다”며 “그래서 해양공학을 배웠고, 계속 공부해서 교수나 연구원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수자원공학으로 석사학위까지 마친 뒤 국토교통부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고, 2005년부터 한강홍수통제소에서 수자원정보센터 일을 하다 올해 3월 예보통제과로 자리를 옮겼다.
2016년부터는 WMO에서 192개 나라의 수자원을 관할하는 수문위원회 위원으로도 활동했다.
한강홍수통제소는 지난해 정부의 물관리 업무가 통합되면서 현재는 환경부 소속 기관이다.

김 연구사는 한강에서 일한 경험이 WMO 활동에도 큰 도움이 됐다고 말한다.
그는 “한강은 홍수‧갈수가 번갈아 생길 정도로 변화가 큰 강이고, 6~9월에 비가 집중돼 물관리가 어려운 조건인데 그 까다로운 조건을 반복적으로 겪으면서 단련이 됐다”며 “한국은 태풍위원회에서 물 관리 기술을 지원받다가 기술을 지원하는 국가로 바뀐 유일한 사례”라고 자랑스럽게 말했다.

"여성이 덜 전문적이라는 시각 해외도 마찬가지"
지난 6월 7일 WMO 18차 총회에서 토론 전 러시아 정부대표단과 회의중인 김휘린 연구사. [김휘린 연구사 제공]
수자원은 토목 분야에 해당해 워낙 여성 전공자가 적다. 현재 홍수통제소의 전공자 중 수자원 연구사는 2명, 기상연구사 1명만 여성이다.
김 연구사는 “학교 다닐 때부터 쭉 여자가 드물었고, 석사 때도 유일한 여학생이라 성별이 보이지 않는 벽처럼 느껴졌다”며 “항상 나를 증명해 보여야 하는 삶이었다”고 했다.

고령의 남성 전문가가 대부분인 학계 회의에 가면 “처음엔 ‘뭐 알겠어, 어린 애가? 공무원으로 왔나 보다’ 하다가 뒤늦게 ‘아, 전문가였구나’ 하는 경우가 아주 많았다”고 했다.

여성 전문가 수가 적다 보니 해외에서도 벽이 느껴진다고 한다.
그는 “WMO에서도 여자면 좀 덜 전문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며 “아시아인은 더 어리게 보고 ‘몇살이냐’ 질문을 한 사람도 있었다"고 했다.

여성이 드문 수자원 학계에서 그는 “여자이기 때문에 몇 배는 노력해야 하는 게 분명히 있지만, ‘이거 하나는 내가 제일 잘한다’ 하는 특기를 만들려고 했다”며 그동안의 마음가짐이 어떠했는지를 내비쳤다.
김 연구사는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면 미리 준비돼있어야 한다고 늘 생각했다"며 "박사학위도, WMO 수문위원도 ‘과장’이라는 목표를 두고 한 건 아니지만 (그런 하나하나가) 결과적으로 경쟁력이 됐다”고 했다.

WMO 과장, "나라마다 기본기 키우고 싶어"
WMO 홈페이지에 등재된 '동적 물자원 평가 도구(DWAT)'. [WMO 홈페이지 캡쳐]
WMO 홈페이지에 등재된 '동적 물자원 평가 도구(DWAT)'. 김 연구사가 주도적으로 개발한 방법이라 우리나라 환경부, 한강홍수통제소 표식이 붙었다. [WMO 홈페이지 캡쳐]
그가 주도해서 2012년부터 만든 ‘물 관리 기술’ 매뉴얼은 올해 대한한국 환경부‧한강홍수통제소의 이름표를 달고 WMO 홈페이지에 등재됐다.
그는 “최초로 물 관리 기술을 시스템으로 만들었고, 기술이 부족한 곳도 이 매뉴얼만 다운받아서 참고하면 바로 쓸 수 있도록 하는 게 목표”라고 밝혔다.

김 연구사는 "기술이 부족한 곳의 '기본 능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고 싶다"며 "필리핀의 경우 일본과 미국에서 다 기술전수를 했지만 사라졌다. 그들의 기본 능력을 키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관측소도 없어서 데이터, 인프라 자체가 없는 나라도 많은데, (관측이라는) 기본 재료가 좋지 않으면 예보 결과물이 좋을 수가 없다"며 "지금까지 분석 '툴'에만 신경을 많이 썼던 WMO가 앞으로는 각 나라에 맞게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밝혔다.

김정연 기자 kim.jeong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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