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매일시니어문학상] 논픽션-폭풍이 일어난 날 /이정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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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20.03.19. 오전 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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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실 씨


▶ 포성이 들리던 날

1950년 경인년(庚寅年) 유월 마지막 일요일 새벽, 햇살이 얇은 창호지 문틈을 뚫고 나의 눈을 부시게 하는 것을 느낄 수 있어 늦잠을 자는 것은 아니었다. 인정이 많고 다정하며 부지런한 봉서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어둑어둑한 새벽녘부터 안방은 물론 문지방, 대청, 부엌, 마당, 장독대 등 집안 구석구석을 빈틈없이 대청소한다. 이날도 그런 대청소를 하다가 봉서와 내가 잠자고 있는 방의 툇마루를 털고 닦으면서

"일어나라. 일어나라∼. 어서∼! 해가 동천에 훤하게 떴다"

고 큰소리로 다정스럽게 말하다가 연달아

"방문을 활짝 열고 맑은 공기로 바꿔라"

"꼬리 꼬리하고 퀴퀴한 총각냄새가 나지 않도록 해라"

고 한다. 그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앉았다가 봉서 어머니의 청소가 끝난 뒤에 잠자던 방을 봉서와 함께 청소했다.

나는 지난해 상경해 서울성북구돈암동 전차종점부근에 살고 있는 우리 집과 친분이 두터운 집에서 두 살 연하인 그 집 외동아들 봉서와 함께 한 방에서 기거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그런 인연으로 봉서 부모는 나의 후견인이 되어 있었다.

그날은 고향에서 하숙비와 잡비 등을 보냈다는 편지에 적힌 인편을 한국은행 사택에서 만나기로 약속된 날이다. 평소에는 우체국으로 보내던 것을 이번 달은 인편으로 보낸 것이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를 타고 종로 4가 전차정거장에 내렸다가 서울역으로 가는 전차를 갈아탔다. 서울역 전차정거장에서 용산구후암동에 있는 그 당시 국방부 앞을 거쳐 한국은행 사택에 갔다. 만나기로 약속해 둔 편지에 적힌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허탕만 쳤다.

돌아올 때도 갈 때처럼 국방부 앞을 지나왔다. 갈 때는 정문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많아 분주했다. 올 때는 갈 때와는 달리 정문 옆 출입구 한쪽에 바리케이드가 쳐져 있어 출입자를 제한하고 있었다. 또 갈 때는 정문 안쪽 기관총 사격대에 근무병이 없었는데 올 때는 완전무장한 두 병사가 앉아 있어 으스스했다. 그들은 언제라도 명령만 떨어지면 기관총을 사격할 태세도 갖추고 있었다.

국방부 앞을 지날 때는 정오가 막 지났고 올 때는 오후 1시쯤이었다. 불과 1시간도 안 된 사이에 국방부 주변의 모습은 달라도 엄청나게 달랐다. 그곳 주변에는 녹음이 우거진 한 그루의 노송이 있었다. 그 노송 밑은 그늘져 있어 바람을 쐬러 온 주민들이 여럿 있었다. 그중에는 삼팔선에서 일어난 이번의 국군과 인민군 충돌은 보통 때와는 달리 예사로운 일이 아니라고 소곤거리는 이도 있었다. 그 소리를 듣고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봉서 집에 기거하고 있는 방은 한낮이 되니 통풍이 신통치 않아 무더웠다. 이웃에 사는 두 급우 준병과 종록을 만나 시원한 바람이 부는 그늘진 곳에 갔다. 그곳에서 낮에 본 국방부 분위기와 그 지역 주민들이 소곤거리는 말을 들은 대로 말해 주었다. 인민군은 평소에도 남북의 경계인 남쪽 송악산 삼팔선에서 심심찮게 공격했다. 그때마다 국군은 수복하느라 가벼운 충돌이 있었다. 그들은 그 정도 충돌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 그들과 함께 서울 북쪽 경계인 미아리 고개로 오르는 대로에 연결된 돈암동 전차종점 길 건너편에 살고 있는 또 다른 급우 기환이를 만나러 갔다. 그 당시는 큰길에도 횡단로 표시가 없어 누구나 자유로이 길을 건너게 되어있다. 그런 것을 그때는 육군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건넜다.

저녁노을이 지자 외출이나 휴가 중인 군인을 실은 군용트럭을 비롯해 민간트럭, 시외버스 등 각종 차량들이 헌병의 수신호에 의해 미아리 고개로 쏜살 같이 달리고 있었다. 한편, 그 고개에서 내려오고 있는 차량 속에는 부상한 장병들이 신음하는 고통소리로 아비규환을 이루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는 시민들은 너나할 것 없이 또다시 인민군이 공격한 이번 삼팔선의 충돌을 끝으로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 날 월요일, 종로구혜화동 로터리 동쪽에 있는 동성고등학교 운동장 조회 때 단상에 올라선 교장선생님은 국군이 외출이나 휴가를 간 일요일 틈을 타서 인민군이 남침을 하고 있다. 국군은 실지를 곧 회복할 것이다. 별도지시가 있을 때까지 학교는 정상 수업한다. 추호도 동요하지 말기를 바란다고 말씀하셨다. 그 말씀을 듣고서는 인민군은 이제까지 알고 있던 국군과의 충돌보다 더한 대대적인 남침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교장선생님 말씀과는 달리 단축수업을 했다. 하교 때 학교 앞 전찻길 인도에는 간밤에 인민군에게 침공당한 경기도동두천지역에서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 쪽 인도로 걸어가고 있는 농민들이 띄엄띄엄 줄을 잇고 있었다. 그들은 시내에서 볼 수 없는 달구지를 몰고 있었다. 어떤 농민은 맨발로 핫바지의 아랫도리를 걷은 채 농기구와 봇짐을 지게에 지고 있었다.

언뜻 생각나는 것은 '수도 서울도 안심할 수 있겠는가?'

설마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그날이 지난 다음 날도 학교는 단축수업을 했다. 귀가한 대낮부터 봉서 집 동네는 포탄이 터지는 소리인지, 떨어지는 소리인지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쿠쿵∼쿵, 쿠쿵∼쿵'거리는 가느다란 소리가 미아리 고개 너머 먼 하늘에서 심심찮게 들렸다. 그 소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가깝고 크게 들리고 있어 몹시 불안했다. 한편, 라디오에서는 국군이 경기도의정부를 탈환했다는 대통령 담화를 뉴스 시간마다 방송하고 있었다. 의정부가 인민군 수중에 들어갔다는 보도를 들은 적이 없어 그 담화는 알쏭달쏭했다.

▶ 대피하러가던 날

여느 때보다 좀 일찍이 퇴근한 봉서 아버지는 정세가 신통치 않음을 지레짐작한 것인지 저녁을 빨리 끝내도록 했다. 그의 아들 봉서와 며칠 전 경북의성에서 다니러 온 나보다 한 살 연상인 봉서의 큰집 형, 주방 일을 맡고 있는 예쁘장한 아가씨, 나 등 네 명에게 남산기슭의 용산구용산동에 있는 어느 집에 있다가 총소리가 멎으면 돌아오라고 하면서 서둘러 떠나도록 했다. 봉서 부모 내외는 집을 지킨다고 했다. 용산동으로 가게 된 우리는 하루나 이틀 지나면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고 간단한 단봇짐을 꾸리고 봉서를 따랐다. 나는 이번 기회에 잠시 고향에 다녀올 생각을 했다.

우선 우리 일행은 종로로 가기 위해 돈암동 전차종점으로 갔다. 저녁노을이 질 무렵 밖에 되지 않았는데 떠나는 전차가 없고 도착하는 전차도 없었다. 차도에는 군인이 승차한 차량만 왕래하고 인도에는 전투복을 입은 군인이 통행인을 통제하고 있어 길거리는 썰렁했다.

전찻길을 따라 종로 4가로 가려던 방향을 바꿔 둘러가기로 했다. 꼬불꼬불한 언덕이 많은 서울 성곽 외부의 성북구안암동과 동대문구창신동 비탈길을 따라 동대문 전차종점에 도착했다. 보통 때 같으면 서울역행 전차가 한참 다니는 번잡한 시간대인데 그날따라 마지막 전차가 막 떠났을 때 도착했다.

어쩔 수 없이 종로구장사동과 관수동 청계천 쪽을 거쳐 수표교로 향해 걸었다. 청계천 천변 길을 걸을 때는 밤바람을 쐬러 길가에 평상을 내 놓고 앉아 부채질을 하는 주민이 많았다. 그들은 단봇짐을 지고 있는 우리들에게 국군과 인민군 충돌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미아리 고개 너머로 포탄이 떨어질 것 같은 요란한 폭음소리가 들려 하루나 이틀 동안 대피하러 가는 중이라 했다. 그때는 의정부를 탈환했다고 시간마다 방송하던 대통령 담화의 녹음방송은 30분마다 하고 있었다. 길가에 나와 평상에 앉아 있는 주민들은 라디오 방송에 귀를 기울이면서도 탐탁찮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수표교를 건너 중구을지로와 명동, 충무로, 남대문로를 거쳐 서울역 앞 광장에 왔을 때는 봉서 집에서 떠날 때처럼 잠시 고향에 다녀오리라는 생각이 들어 봉서와 헤어지려고 했다. 그러나 생각대로 될까? 하는 의구심으로 흥분됐다. 그것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전차가 두절됐고 동대문 전차종점에서 막차를 놓쳤기 때문이다.

서울역 앞 광장에서 열차표를 구입하기 위해 매표소로 갈 때는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뛰다시피 걸었다. 그랬는데도 예고 없이 변경한 마지막 열차를 놓치고 말았다. 매표소에서 헤어지려던 봉서를 다시 따랐다. 국방부를 거쳐 간 용산고등학교까지의 도로변은 불빛이 비치고 있어 걷기에는 불편한 점이 없었다. 용산고등학교를 지났을 때부터는 꼬불꼬불하고 언덕진 남산기슭의 좁은 골목길을 걸었다. 달도 없고 불빛도 비치지 않는 캄캄한 골목길을 무디어진 걸음으로 봉서 뒤를 따르느라 어떻게 걸은 것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피란하러 간 집에 도착해 안내된 방에서 곤하게 잠든 자정이 지났을 무렵, 벼락 치는 굉음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들렸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위쪽 눈까풀과 아래 쪽 눈까풀이 저절로 떨어졌다 붙었다. 그와 함께 천장에는 불빛이 환하게 번쩍거리다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그 정도로 의식을 잃고 깊이 잠들었는데도 인민군은 벌써 이곳까지 점령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죽음이 코앞에 닥쳐 온 것 같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런데도 깊은 잠에 못 이겨 그 생각은 그때뿐 세상모르게 잠에만 폭 빠졌다.

▶ 점령당한 소식

자정이 지난 깊은 밤, 골목길에서 큰소리로 횡설수설하듯 짓거리는 노파의 목소리에 잠이 깼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 내 아들이 돌아왔다"

고 하며 미친 듯이 말하며 걷다가 걸음을 멈추고 한바탕 지껄였다. 자정 때 아들을 찾으러 서대문 형무소(교도소)에 갔다. 인민군 탱크가 잠겨 있는 대문을 닥치는 대로 부수는 것을 지켜보다가 남보다 맨 먼저 감방으로 들어가 아들을 만났다. 그 자리에서 풀려난 아들은 누구나 잘 살게 하는 공산주의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북한)을 위해 투쟁한 '테러리스트'였다고 자랑하면서 곧 '혁명가'로 추대될 것이라고 했다.

고향에서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 어느 월요일, 운동장 조회시간에 교단에 올라선 좌익계로 소문난 J주번선생의 훈화가 생각났다. 그 선생은 주훈과 실천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알아들을 수도 없는 어떤 이론을, 입에 거품을 물면서 거침없는 달변으로 연설을 했다. 중학교 1학년인 어린 나는 마이크 잡음이 심해 무슨 소리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힘찬 목소리로 뭉쳐서 붉은 피를 흘릴 수 있을 때까지 '투쟁'하자는 말만 어렴풋이 들렸다. 주번선생의 투쟁과 노파의 테러리스트는 공통점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을 실천하는 과정에서 무시무시한 폭력이 수반될 것이라는 예감이 들어 날이 새면 반드시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나 천 리나 되는 내 고향 경북포항을 걸어서라도 가리라 다짐했다.

노파가 지껄이던 말 가운데는 한강철교와 인도교가 폭파됐다는 내용도 있었다. 폭파된 순간에 한강인도교를 걸어가던 수많은 시민은 강에 떨어져 죽고 폭파가 끝난 뒤에 걸어가던 시민도 앞이 보이지 않아 수없이 죽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난 나는 피란한 집에서 깊은 잠에 빠졌을 때 들리던 굉음은 국군이 후퇴하면서 예고 없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노파의 말이 끝나고 자리를 뜨자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님이 궁금해졌다. 봉서의 성화로 총소리가 멎었으니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때 남산기슭에는 앞이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어두운 적막이 흐르고 있는 새벽이다. 통행인이 없는 새벽, 인민군 점령지역이 된 남산기슭의 골목길을 걷는 마음은 깊은 산속의 울창한 숲 속을 걷는 것보다 더한 지옥과 같은 곳에서 칼날 위를 걷는 것 같았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 왔을 때는 날이 밝기 시작했다. 통행인이 어쩌다가 있었다. 네거리 한가운데는 하늘을 향해 두 다리를 뻗고 벌렁 드러누운 채 입가에는 붉은 피를 흘린 자국이 있는 검정색 신사복차림의 시체가 있었다. 그 시체 앞가슴에 붓글씨로 무슨 글이 씌어 있는 흰 천으로 된 어깨띠는 붉은 피로 물들어져 있었다. 난생 처음 보는 피 흘린 시체라 무서워 몸 둘 바를 모를 정도로 벌벌 떨렸다.

국방부 앞을 지나 서울역 앞으로 가는 모퉁이를 돌기 전, 주택가 맞은 쪽 남산기슭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소총에 실탄을 장전한 이십여 명의 국군이 웃옷을 벗은 채 될 대로 되라는 듯 맥없이 앉아 있었다. 식검(式劍)을 길게 빼들고 사방을 이리저리 살피고 있는 웃옷을 벗은 장교는 부하들이 잠시라도 편안하게 휴식하도록 망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곳을 지나 서울역 앞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았다. 그러나 서울 역사(驛舍)는 보이지 않는 곳이다. 앞서 가던 통행인 무리가 앞을 보면서 뒷걸음으로 비실비실 거리며 되돌아오고 있었다. 겁에 질린 누군가 서울 역사에는 상당히 많은 인민군과 마차가 있다고 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사실을 노파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우리는 그 소식이 새롭지 않아 그들을 해치고 서울역 광장 못 미친 대로변 상가의 인도로 걸어가서 서울 역사를 바라봤다. 역사 밖으로 전등 불빛이 보여 인민군과 마차가 분명히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은 듣지 못했다.

남대문시장의 중간 정도쯤 되는 남대문로에 이르렀을 때는 쏜살같이 달리던 국군 스리쿼터가 인도 쪽에 급히 정거했다. 무장한 이십여 명의 헌병이 내리더니 부리나케 시장 속으로 사라졌다. 그것을 보니 서울 장안의 거리는 시민과 함께 인민군과 국군이 뒤죽박죽된 것 같았다.

남대문시장을 지나 그 시장 가까이에는 신세계백화점이 있다. 그 백화점은 그 당시 동화(東和)백화점이었다. 동화백화점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는 길에는 간밤에 피란 갔던 통행인의 왕래가 극심해 난장판이었다. 그 길 한가운데는 무전기를 들고 호루라기를 불면서 수신호를 하고 있는 순경(경찰관)이 있었다. 그는 통행인에게 인민군은 이곳까지 진입했다. 어서 안전지대로 대피하라는 말을 하면서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동화백화점 앞 인도에서 충무로로 건너가려다가 그 순경의 제지로 멈칫하던 순간, '타당, 타당'하는 총소리가 한차례 들렸다. 그 순간, 무의식적으로 재빨리 동화백화점 정문 쪽 외부의 네모난 굵은 기둥에 기대어 섰다. 내 뒤로 여러 명의 통행인이 줄을 서 듯 벽 쪽 쇼윈도에 붙어 섰다.

총소리는 바로 멎었다.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은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중상을 입은 중학생으로 보이는 학생이 피를 줄줄 흘리면서 그의 아버지 등에 업혀서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밖에 몇 사람의 사상자가 났는지 눈여겨보지 않아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리니 총을 발사한 곳이 확인됐다.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한국은행(화폐금융박물관) 쪽을 향해 교통정리를 하던 순경에게 발사한 기관포 소리였다. 그때 인민군의 잔인성을 보고 더 이상 걸어갈 용기가 나지 않아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 달라진 길거리

한낮이 가까워지자 한강로에는 수많은 인민군 탱크가 한강인도교를 향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질서 있게 늘어서 있었다. 그 행렬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도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남산기슭의 피란한 집에서 똑똑히 내려다 보였다. 탱크마다 인공기(북한기)가 꽂혀 있었다. 또 인민군 병사가 탱크 뚜껑을 얼어놓고 드나들고 있었다. 그런데도 붉은 천이나 인공기를 들고 그들을 환영하는 시민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만이라도 아니 하루만이라도 시민이 서울을 벗어나 안전지대로 대피할 수 있도록 한강인도교 폭파를 늦추고 국군이 서울 장안을 지켜주었으면 나는 고향엘 쉽게 내려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 생각이 들어 지난 밤, 걸은 것이 너무나 어굴하고 한심했다.

"에∼라! 모르겠다. 나의 운명…"

될 대로 되라가 되어 버렸다.

내 아들이 살아왔다고 지껄이던 노파가 골목길에 다시 나타났다. 마음 놓고 살 수 있는 세상이 됐으니 거리로 나와 인민군을 환영하라며 지나갔다. 노파의 말에 귀가 쏠려 창문을 열고 밖을 보니 한강로에 행렬해 있던 탱크는 보이지 않고 아침에 볼 수 없었던 붉은 천이 집집마다 매달려 있었다. 그러나 인민군을 환영하러 골목에 나온 주민은 한 사람도 없어 노파의 말은 믿기지 않았다. 그런데도 봉서는 부모님이 걱정되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새벽처럼 재차 재촉했다. 나는 우리 같은 젊은이들이 안전할지 의심스러워 좀 더 두고 관망하려고 했다. 그러던 중, 봉서의 성화로 '에∼라!' 모르겠다. 죽지 않으면 산다. 한방에 잤던 셋은 '이판사판이다'하고 골목길에 나왔다. 그때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도 옆방에서 뒤따라 나왔다.

용산고등학교 앞 네거리에는 새벽에 걸었을 때와는 달리 피란 갔다 집으로 돌아가는 봇짐을 진 통행인이 엄청나게 많았다. 그들은 네거리에서 새벽에 내가 본 시체를 알지 못한 듯 무심히 걷고 있었다. 나는 그 네거리에 이르기 전부터 한참 지났을 때까지 그 시체를 생각하느라 무섭고 불안했다.

서울역 광장이 보이는 모퉁이를 돌 때는 새벽에 봤던 언덕 위에서 허탈하게 쉬고 있던 이십여 명의 국군이 아롱거렸다. 그들은 인민군 추격에 일부는 전사하고 남은 병사는 포로가 됐거나 처음부터 싸우다가 전원 장렬히 전사됐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에게 노출되기 전 뿔뿔이 흩어져 숨어 버렸을 것이라 상상했다.

남대문과 남대문시장 입구 쪽 사이에는 도로를 겸한 자그마한 노상광장이 있었다. 그 광장에는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것을 '남조선해방'이라 하고 찬양하는 연설장이 생겼다. 일제강점기로부터 해방된 지 오년도 채 되지 않는 지금에 와서 또다시 해방이 됐다는 것은 무슨 뚱딴지와 같은 말인가? 당치 않는 소리로 들렸다. 오년 전 나는 초등학생이었다. 해방이 됐다고 동네 어른들을 따라 총칼 없는 거리를 태극기를 흔들고 '얼씨구절씨구 좋다'고 춤을 추면서 기뻐했다. 지금은 그런 점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무섭고 두려운 적막만이 흐르는 음침한 분위기가 되어 있어 그때와는 딴판이었다. 그냥 지나치려 했는데 누군가 손가락으로 연설장으로 유인하고 있어 본체만체하면 반동분자로 연행될 것 같아 참석했다.

연설자는 광장에 모인 백 명 안팎의 군중들로부터 뺑 둘러싼 가운데 있었다. 가무잡잡한 얼굴에 화장기라고는 하나도 없고 눈초리는 아주 매섭게 생긴 서른 미만으로 보이는 여성이었다. 입고 있는 치마저고리는 언제 세탁한 것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때가 꼬지지 배여 있는 허름한 차림이었다. 허리까지 내려온 머리카락은 빗질을 하지 않은 생긴 대로 흐트러진 산발(散髮)이었다. 그런 모습을 한 그녀는 발을 광대처럼 좌우전후로 오가고 있었다. 그때마다 머리카락이 펄럭거리는 그녀의 모습은 여자 귀신이 복수심에서 산발한 채 캄캄한 깊은 밤중, 골목에 휙 나타난 모습과 하나도 다를 바 없었다. 내 곁에 있는 지지하는 극렬분자는, 그녀는 서대문 형무소에 갇혔다가 새벽에 풀려난 투쟁심이 강한 여성동무라고 했다.

그 당시 남북한을 자유로이 왕래하던 삼팔선을 북한이 일방적으로 단절했다. 그 이전에 인권탄압에 견디지 못한 수십 만 북한주민들이 월남(탈북)해 용산동 해방촌, 만리동 뒷산 일대. 서울역전 도동(남대문로 5가)등 여러 곳에 파란 와서 판잣집을 짓고 난민생활을 하고 있는 세칭 '삼팔따라지' 동네가 생겼다. 나는 그녀가 그런 현실을 알고 있는지 의구심이 생겼다.

그녀의 연설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지하운동을 하다가 체포되어 감방생활을 하게 된 강인성만 자랑하는 내용이었다. 그런 내용을 반복하다가 치켜 올린 오른 손을 쳐다보면서

"함께 뭉쳐서 투쟁하자~!"

는 소리를 질렀다. 그와 동시에 몇몇 극렬분자도 그녀처럼 오른손을 힘차게 치켜 올리면서 "옳소~!"라고 동조했다. 군중들도 그에 따르면서 박수를 쳤다. 나는 '투쟁'이란 말이 귀에 거슬려 평화스러운 기대는 물 건너 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때로는 그녀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를 선창하자 군중들도 함께 합창했다. 또

"김일성 장군 만세~!"

를 선창해도 따랐다. 마이크가 없는 연설장 맨 뒤편에서 들은 나는 흉내만 내다가 감시가 소홀해진 틈이 생겨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 명동과 충무로 거리

남대문시장을 지나 동화백화점 정문 앞 도로로 갔다. 아침에 그 도로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교통순경이 남산에 진주한 인민군 탱크에서 발사한 기관포 사격에 희생된 시체는 어디로 치웠는지 보이지 않고 시민들만 웅성거렸다.

길 건너 충무로 서울중앙우체국 옆길을 거쳐 명동으로 갔다. 명동과 충무로 길거리는 서울에서도 가장 번잡하다. 평소에도 통행인이 많아 몸을 비빌 정도로 북적거린다. 그런데도 길 폭이 좁아 인도와 찻길의 구별이 없다. 간밤에 엉겁결에 단봇짐을 메고 대피하러 집을 나왔던 시민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총소리가 잠잠해 지자 서둘러 되돌아가고 있어 여느 때보다도 통행인이 더 많았다.

거리 한가운데는 전투모와 야전용 군복에 나무 잎을 소복하게 꽂은 완전무장한 인민군대열이 이십여 명씩 일정한 간격을 두고 두 줄 종대로 질서 있게 행군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비에트 연방공화국(소련)의 장총인 소련장총과 인민군따발총 총구 끝에 총검을 끼고 앞에총을 하고 있었다. 또 앞만 보고 행군하는 그들의 상체는 부동자세고 눈은 빛이 날 정도로 초롱초롱했다. 이처럼 완벽하게 훈련된 인민군 병사의 위엄은 칼날 같이 날이 선 듯 했다. 가까이에서 인민군을 처음 본 나는 국군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훈련된 것 같고 무장한 장비도 우수한 느낌이 들었다.

그런 인민군이 나와 반대쪽에서 행군했다. 소련장총은 총신이 길다. 인민군이 내 옆을 마주치면서 지날 때마다 나는 통행인 틈에 떠밀려 총신 끝에 낀 칼날에 찔릴 것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명동과 충무로 상가건물에는 외벽마다 북한의 대남선전용 벽보가 붙어 있었다. 벽의 규모가 여러 종류라 붙어있는 인쇄된 선전물도 여러 규모였다. 나는 통행인 틈에서 걸음을 재촉하는 데만 정신을 몰두하느라 벽보를 유심히 볼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발짝씩 걸을 때마다 똑같은 내용의 선전물이 밀집된 건물 벽에 부착되어 있어 곁눈질만 해도 어느 정도 알 수 있었다.

벽보 상단에는 인공기와 소련 국기가 똑같은 크기로 나란히 부착되어 있었다. 또 인공기 밑에는 김일성 사진, 소련 국기 밑에는 스탈린 사진이 부착되어 있었다. 그 아래에는 남조선해방에 대한 내용이 적혀 있었다. 맨 끝 하단에는 민족반역자로 지목한 십 명의 명단이 열거되어 있었다. 첫째는 대통령이다. 그 밖에는 미군정 때 치안을 담당했던 인사, 정부수립 후 질서유지에 공헌한 인사 등이었다. 그들은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해야 하고 그들을 제외한 모든 인민은 남조선해방 전선에 동참해 줄 것과 김일성 장군은 위대한 우리의 영도자라고 자랑했다.

종이로 된 선전물이 대부분이었으나 그 당시 명동국립극장(국립예술극장) 같은 대형건물에는 극장 프로 간판 규격의 크기로 된 대형도 있었다. 그런 큰 선전물은 천으로 되어 있었다. 인민군은 삼팔선에서 침략한지 삼일 남짓 되고 서울을 점령한지는 한나절 밖에 되지 않았다. 그 당시는 활판으로 인쇄할 때라 4색도로 제작된 인물사진은 전쟁을 시작하기 전에 인쇄해 두었을 것이다.

그 선전물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새벽에 부착한 것으로 들어났다. 그렇게 단정하게 된 것은 어느 누구도 부착하는 장면을 봤다는 소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 벽보는 북한이 먼저 남침을 시작한 확실한 증거로 확인됐다.

▶ 종로 거리

간밤에 피란했던 남산기슭의 용산동 집에서 종로구장사동까지는 어저께 돈암동에서 용산동으로 피란 갈 때와 정반대로 걸었다. 장사동부터는 동대문 쪽으로 가지 않고 질러가기 위해 종로 4가 네거리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 네거리도 명동과 충무로처럼 통행인이 북적거리는 번화한 지역이다. 그런 지역이 그날따라 너무나 한산하고 고요했다. 훈풍이 부는 유월 마지막 주의 청명한 대낮인데도 통행인이 뜸해 음침하고 서늘한 숲 속에 어두움이 닥쳐온 것처럼 적막만이 흐르고 있었다. 왜 그런 가 했더니 지난 새벽에 미아리 고개를 넘어 종로로 진격해 오던 인민군이 창경원(창경궁)에서 국군과의 전투를 했다. 그 전투를 거쳐 동대문경찰서(혜화경찰서)에서 순경과도 전투를 했다. 그 전투로 경찰서는 시커먼 흉물처럼 탔고 길 건너 맞은편 서울전매서(종로금은쥬얼리) 지하실도 까맣게 타버렸다. 이런 두 흉물을 본 나는 여태껏 인민군은 서울을 무혈로 점령했다는 인식을 달리 했다.

초기에는 순경들이 인민군과 교전해 상당한 사상자를 낸 전과를 올렸다. 그 후 인민군 후속부대가 대거 도착했다. 전투할 병력과 장비가 부족한 순경들은 길 건너 전매서 지하실로 이동했다. 그러자 인민군은 전매서 지하실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순경도 굽히지 않고 대항했다. 화가 난 인민군은 지하실 출입구, 비상구, 환기통 등에 기름을 뿌리고 가연성이 있는 물질을 쳐 넣은 다음, 불을 질러 순경은 전원 희생됐다. 그런 말을 한 피란 가지 안 했던 그곳 주민들은 공포의 불안으로 간밤은 한잠도 자지 못하고 겁에 질려 꼼짝할 수 없었다고 한다.

동대문경찰서를 지나 돈암동 쪽 창경원 네거리에 이르렀을 때, 혼자서 히죽거리거나 히히거리는 마흔 안쪽으로 보이는 여성이 있었다. 한복차림을 하고 있는 그녀의 맵시는 남루하고 엉성했다. 답답해서 고쟁이를 벗어 버린 채 네거리의 모퉁이를 재빠르게 '왔다갔다'하고 있었다. 또 '느릿느릿' 걷기도 했다. 옷고름이 풀릴 듯 말 듯 하고 저고리의 앞섶이 벌렁 벌어져 한쪽 젖통이 덜렁거렸다. 그녀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것은 지난 새벽에 창경원 맞은쪽 서울대학교부속병원에 입원해 있다가 창경원에서 국군과 인민군이 전투하는 총소리에 놀라 뛰쳐나오다가 미쳐버렸다는 풍문만 들렸다.

서울대학교부속병원 북쪽 끝자락에 있는 영안실 상공에는 시커먼 연기가 바람이 불지 않아 흩어지지 않고 하늘을 가로막으면서 뭉게뭉게 떠 있었다. 그 연기는 오뚝이 모양으로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그 무리를 하얀 색으로 바꾸어 놓으면 여름철의 뭉게구름으로 착각할 수 있을 정도였다.

누군가 그 연기에서 품어낸 냄새는 병원에 입원했던 사망자를 비롯해 살아있는 환자 또는 간밤에 창경원과 동대문경찰서 전투에서 희생된 전사자, 부상자 등을 그 영안실 뜰에서 몽땅 태운 송장냄새라고 했다.

창경원 정문인 홍화문(弘化門) 앞뜰에 들어서자 국군 스리쿼터가 세 대 정차해 있었다. 그 차는 타이어가 펑크 났거나 엔진 등이 손상되어 가동하기가 불가능한 상태였다. 그중 매표소 쪽 스리쿼터 운전석 아래 땅바닥에는 군인 발목 한 개가 야전용 군화를 신은 채 떨어져 있었다. 그 발목을 본 순간, 내 발목이 떨어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불안했다.

그 부상병은 걷지 못해 포로가 됐다가 이곳 영안실 뜰에서 산채로 화장됐을 것이다. 또 창경원을 지나 혜화동로터리 쪽 서울여자의과대학부속병원(명륜 아남아파트)은 인적을 볼 수 없었다. 그곳 환자도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됐을 것 같아 인민군의 포악한 야만성에 몸서리쳤다. 나는 다행히 화장하는 장면이 지난 다음에 그 지역을 걸었기에 무섭기는 하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드디어 돈암동 봉서 집에 도착했다. 간밤에 집을 지키겠다던 봉서 부모도 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에서 따발총, 소련장총과 포탄 소리가 나드니 자정이 가까워 질 무렵부터 포탄이 지붕 위로 떨어질 것 같아, 무서워서 남산의 동쪽 기슭인 장충단공원 숲 속으로 피신했다고 한다. 돌아온 즉시 대문 옆 기둥에 붉은 천을 매달아 놓고 계셨다.

▶ 뒤바뀐 세상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다음 날부터 모든 직장은 올 스톱되고 학교는 언제 개교한다는 예고도 없이 자동 휴교됐다. 고향에 가려던 생각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강을 건널 수 없어 무모하게 되었고 생활비를 보냈다는 인편은 상경을 늦추어 만나지 못해 용돈마저 떨어지게 됐다. 그런 처지에 있는 나를 봉서 집에서는 봉서와 똑같이 대해 주어 다행이었다.

물가는 폭등하면서 싸전은 문을 닫았다. 매달 봉급을 수령하고 말쯤 양식을 마련하는 봉서 집에서는 월말이 가까워졌으니 비축해 둔 양식이 거의 동이 난 것 같았다. 또 봉서 집에서는 인사차 다니러 왔던 봉서 큰 집 형이 꼼짝할 수 없게 되어 식구는 평소보다 한 명 늘어났다. 그런 형편이 되어 있는 봉서 집에서는 점심은 굶고 아침저녁만 두세 숟가락 정도의 쌀이 들은 멀건 죽 한 대접으로 지냈다.

시청과 구청, 동사무소(주민 센터)는 인민위원회, 경찰서와 파출소(지구대)는 내무서로 바뀌었다. KBS 라디오 방송은 김일성 장군의 노래와 찬양, 충성, 그리고 인민군은 남조선해방을 위해 서울을 점령한 것은 정당하다고 방송했다.

미쳐 피란 가지 못한 고위직정부요원, 사회적지도자, 저명한 인사 중 일부는 연행되어 강제로 북한의 남침을 지지하는 성명을 육성으로 발표케 했다. 돈암동 인민위원에서는 그 방송을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대형 확성기로 내보내고 있어 할 일 없는 나는 봉서 집에서 하루 종일 싫증나도록 들었다.

중단 됐던 전차가 운행된 다음 날은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종로 쪽으로 갔다. 그곳에 간 것은 혹시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루트가 있는지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때만 해도 시민들은 집 밖을 드나들기를 꺼리고 있어 전차 속은 텅 비어 있었다. 종로구원남동 네거리에서 통행인이 많을 것으로 예측된 동대문을 향해 걸었다. 비스듬하게 경사진 길에는 서둘러 내 쪽으로 내려오고 있는 청소년이 있었다. 그들은 인민군과 좌익계청년들이 합동으로 젊은 통행인을 동원한다면서 서둘러 숨을 곳을 찾고 있었다. 나도 동원될 까봐 겁이 났다. 방향을 돌려 충신시장에 들어갔다.

그 시장은 텅 비어 있어 선들하고 으슥했다. 또 불쾌한 화약 냄새가 났다. 그 냄새는 시장창고에서 인민재판을 하고 총살한 탄약 냄새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되자 총살 장면이 떠올라 더욱 무서워져 얼른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며칠 지난 달 없는 캄캄한 밤, 봉서와 나는 아무런 영문도 모르고 빈민들이 밀집해 있는 꼬불꼬불한 창신동 언덕진 골목길을 봉서 어머니를 따라 어떤 싸전을 찾아갔다. 있는 자는 없는 자를 위해 내놔라 하고 있어 골목은 어수선 했다. 찾아간 싸전 주인은 봉서 어머니의 귓속말을 듣고서는 입을 손바닥으로 막고 "쉿∼!"하면서 봉서와 나를 점방 안으로 불러 들였다.

잠시 후 인적이 없는 틈을 타서 우리 일행에게 숨겨 놓은 쌀을 대두로 한 말 남짓씩 쌀자루에 담아주었다. 그 쌀자루를 어깨에 메고 되돌아오는 길에 내놔라 뒤지고 다니는 사람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숨찬 걸음으로 헐레벌떡거리면서 봉서 집으로 걸어왔다.

그날이 지난 후의 양식은 봉서 어머니가 주방 일을 맡은 아가씨와 함께 경기도광주에 가서 머리에 이고 날랐다. 돈암동 전차종점에서 동대문 전차종점까지는 전차로, 그곳에서 뚝섬까지는 기동차를 이용했다. 그 다음은 폭파된 광진교 가까이에 있는 광나루 나루터로 걸었다. 그 나루터에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그곳부터 광주까지 걸어가서 각자 대두로 두 말 정도의 쌀과 야채 등을 머리에 이고 돌아왔다. 이른 새벽, 집을 떠나 밤늦게 돌아온 어려움은 말로 다 할 수 없는 고통이었을 것이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리고 있는 봉서, 그의 큰집 형과 나 등을 동행하지 않는 것은 도중에 좌익계단체에 동원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 한다.

▶ 인민위원회 회의

7월 초순 어느 날,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돈암동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통지가 왔다. 봉서 아버지는 어느 누구를 지명하지 않고 있어 불참할 것 같았다. 반동분자 집이라는 낙인이 찍힐 것 같아 내가 회의 도중에 참석했다. 회의는 인민위원회 마당에서 몇 인민위원이 번갈아가면서 북한의 남조선해방은 당연하다는 연설만 했다.

지지자가 박수를 치면서 "옳소∼!"라 하면 동원된 참석자는 덩 달았다. 그렇게 하면 회의내용에 대한 이견이 있을 수 없게 된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서 회의한 모든 결의는 그렇게 한다는 것에 실망했다. 마지막 연설은 초등학교 3∼4학년 정도의 어린이가 했다. 원고 없이 달변으로 말한 그 연설은 막힌 점이 없어 신통했다. 그 연설의 마지막에는 '모든 애국청년은 인민의용군에 지원해 참전하자'고 했다. 그것은 어린이를 동원한 얄팍한 수작이라 생각됐다.

연설을 들으니 금년 8월15일까지 남조선을 해방시킨다던 전선이 심각해진 것 같았다. 어린이는 연단을 내려오면서 자진해서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에 따라 인민의용군에 지원하겠다고 연단 쪽으로 나가고 있는 청중은 7∼8명이었다. 그중 3명은 멈칫거리다가 지원했다.

나보다 한두 살 위로 보이는 누군가 다가와서

"동무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할 뜻이 없는가?"

라는 투로 말을 걸었다. 갑자기 질의를 받은 것이라 멈칫하다가 좀 시간을 두고 생각한 다음에 집에서 동의를 얻겠다고 응답했다.

"동무는 아직 교양이 부족하다"

"교양이 풍부해지면 스스로 지원하게 될 것이다"

라는 말을 남기고 다른 청소년에게 접근했다.

의용군에 입대하겠다고 지원한 7∼8명 중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만 별도로 분류하고 있어 정식 지원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각본에 의해 형식적으로 지원한 것이라 생각됐다. 멈칫거리다가 지원한 3명은 아무런 연고 없이 지방에서 상경한 하숙생일 것이다. 끼니를 해결하지 못해 인민의용군에 입대해 굶주림을 모면하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봉서 집으로 돌아오면서 생각나는 것은 나에게 다가와서 말한 '교양이 풍부해지면…?'이란 뜻에 의문이 생겼다. 그것은 인민의용군 지원을 강요하기 위한 강제성을 수준 높인 얄팍한 용어일 것이라 생각됐다.

인민군이 남침을 시작한 초기와는 달리 국군의 저항도 만만치 않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은 국군과의 전투에서 연전연승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침략자 편에 지원해 동족을 상대하여 싸우는 것은 어떠한 경우도 용납할 수 없다고 단정했다. 더구나 아무리 부강한 국가라도 인권을 무시하는 일당체제는 국민이 주권을 가진 민주주의국가라 볼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나는 인민의용군에 지원하라는 권유를 거절했다는 것을 봉서 부모님께 말했다. 봉서 부모는 '좋다. 나쁘다'는 말은 없고 앞으로는 어떤 회의에도 참석하지 말라고만 하셨다. 그 말씀은 내가 판단한 것을 잘했다는 격려를 조심해서 말한 것 같았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직장인은 소속 직장에 복귀하라고 독려했다. 경성전기주식회사(한국전력공사) 본사 행정직 사원인 삼십대 후반의 봉서 아버지는 직장에 복귀했다. 덩달아 나도 등교해 봤다. 선생님과 사무직원은 없고 본교생은 뜸했다. 낯선 청년과 학생이 들랑거리고 있었다. 그들은 좌익운동을 하는 것 같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새벽, 종교철학을 강의한 정진구 신부님이 학교에서 인민군에게 연행되어 교문 앞 혜화동로터리 한가운데 분수대에서 총살됐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시신도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날, 서울대병원 영안실 뜰에서 화장되었으리라 가상해보니 몸서리쳐 서둘러 봉서 집으로 돌아왔다

돈암동 인민위원회와 성북내무서는 집집마다 라디오 성능을 조사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인민위원회나 내무서에 보관토록 했다. 성능이 4구 이상은 남한방송을 들을 수 있다. 그것을 제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봉서 집 라디오 성능은 4구다. 발각되어 반동으로 낙인이 찍히게 될지라도 3구라고 신고했다. 봉서 부모는 그렇게 신고하고 몰래 남한방송을 듣고 있는 것 같았다.

▶ 폭격된 용산역 동원

7월 10일쯤, 유엔군 제트전투기가 수시로 북녘 하늘을 비행하고 있었다. 그 전투기는 처음으로 개발한 최신무기다. 귀가 쨍하도록 쌕쌕거리는 굉음은 천둥치는 소리와 비슷했다. 그 소리를 듣고 소리 나는 하늘을 쳐다보려는 눈 깜작할 사이, 그 전투기는 북녘 하늘의 창공을 뚫고 사라져 버리고 비행했던 하얀 줄무늬 흔적만 서서히 퍼지고 있었다. 그런 초음속으로 비행하는 목적은 알 수 없었으나 혹시 북한의 인민군 후속 병력과 군수품 수송 등을 차단하려는 느낌이 들었다. 그것으로 봐서 유엔군이 6⦁25전쟁에 참전하고 있다는 것이 확실히 확인됐다. 앞으로 어떠한 수난을 겪더라도 살아남기만 하면 인민군 점령지역을 벗어 날 수 있을 것이라는 한 가닥의 희망이 솟아났다.

그런 날이 며칠 연속되다가 여러 편대의 유엔군 폭격기가 서울 상공을 회전하면서 어떤 지역을 집중적으로 폭격했다. 창공에서 떨어뜨린 수많은 폭탄은 말똥처럼 뚝뚝 떨어지면서 '콰∼쾅쾅'거리는 맹렬한 폭음소리를 내는 순간부터 하늘을 검은 연기로 시커멓게 물들게 했다. 그 위치는 용산역과 그 주변인 것 같았다. 자세한 위치를 몰랐던 것은 내가 있는 돈암동과 폭격한 위치가 너무나 멀었기 때문이다.

다음 날은 더 많은 유엔군 폭격기가 그 지역을 재차 폭격했다. 연달아 이틀 동안 폭격이 끝난 저녁노을이 들 무렵, 돈암동인민위원회에서는 폭격당한 곳에 구명과 소화 작업을 할 인력을 각 세대마다 한 명씩 동원했다. 그 경우는 지난 번 인민위원회 회의에 참석하라는 성격과 다르고 고향으로 갈 수 있는 소식을 들을 수 있을지 알 수 없어 봉서 집 몫으로 내가 자원했다. 거주지역마다 동원된 수많은 시민들과 함께 인솔되어 도착한 목적지는 돈암동에서 예상한 대로 용산역과 그 주변이었다.

유엔군 폭격기는 용산역과 그 주변에 있는 기관고(機關庫), 조폐공사(造幣公社) 등을 폭격했다. 배치된 장소는 화염에 싸여 있는 조폐공사 창고였다. 그 창고에는 화폐제작용 특수종이가 불타고 있거나 연기만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용산역 기관차 급수탑에서 여성들이 날라다 준 양동이에 담긴 물을, 타고 있는 종이 더미를 향해 정신없이 던졌다.

이틀 동안 폭격당한 불은 양동이에 담긴 물을 쉴 틈 없이 던지고 던져도 꺼지지 않고 더 활활 탔다. 불씨가 잡히면 활활 타던 종이 더미가 내 몸을 향해 머리 위로 확 덮쳤다. 그때는 이리 비키고 저리 피하면서 불을 껐다. 그런데도 앞뒤와 좌우에서 꺼졌던 불이 되살아나 순식간에 불바다를 이룬 적도 있었다. 불길은 새벽녘에 겨우 잡혔다. 그래도 종이 더미를 휘저으면 불이 되살아나기도 했다. 그런 곳을 깊숙이 들어가 불을 끄던 중 날라다 준 양동이가 보이지 않아 창고 밖으로 나와 보니 아무도 없고 날은 훤하게 밝았다.

집으로 오려던 순간, 몸이 웅크려지면서 전율이 일어났다. 밤새도록 소화 작업을 했던 가까이에는 불에 타서 살갗이라고는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 하얀 해골과 뼈만 쌓아 둔 무더기가 있었다. 그것을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악!, 억!"하는 소리가 저절로 나오면서 몸서리쳐졌다. 해골은 모두 두 눈알이 빠진 채 전쟁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원망과 비관은 구천에 가서도 풀리지 않으리라 생각됐다.

유엔군 폭격기가 용산역 영내의 기관고와 이웃에 있는 조폐공사 등을 폭격한 원인이 들어났다. 인민군과 인민위원회는 점령한 지역의 각종 시설을 활용했다. 그중 용산역 영내 기관고에는 많은 기관차가 있다. 한강철교가 폭파되어 철교 이용은 불가능하지만 북한에 있는 상비병이나 군수물자 등을 서울까지라도 수송하려는 것을 유엔군은 단절시키려고 기관고를 폭파한 것 같았다. 또 북한에서는 인민위원회, 민족애국청년단. 여성동맹 등 좌익계단체와 공공기관 운영, 시민들이 남조선해방에 대한 협조 등을 위해 한국은행 화폐를 마구 발행하고 남발했다. 그로 인해 물가는 폭등하고 화폐가치는 떨어지며 민심은 흉흉해졌다. 유엔군은 더 이상 화폐를 발행하지 못하도록 조폐공사를 폭격한 것 같았다.

▶ 연행과 탈출

친하게 지낸 고향 친구의 집을 찾아가면 한 끼라도 푸짐하게 음식 대접을 받으리라 생각했다. 작은 누나와 절친한 친구의 결혼한 언니는 나를 만나면 친동생처럼 친절하고 다정하게 대해 주었다. 그 집은 서대문구충정로에 있고 생활이 넉넉하다. 양식은 농촌에서 철마다 조달되고 있어 사서 먹지 않는 가정이다. 돈암동에서 그 집까지 왕복하려면 한나절은 걸린다.

최근에는 기회가 잡히지 않다가 전쟁이 일어났다. 차라리 지금처럼 빈둥빈둥 놀고 있을 때, 그녀의 언니를 찾아보고 이 난리 통에도 피란 가지 않고 있으면 만나서 고독을 달래는 동안 차려 놓은 한 끼의 밥이라도 푸짐하게 먹으면 일시적이나마 배가 부를 것이라 생각했다.

7월 하순이 된 어느 날, 아침 일찍부터 그녀의 언니를 만나러 충정로를 향해 무심코 걸었다. 종로구안국동 어느 골목 모퉁이에서 좌익계청년들이 나의 발걸음을 제지시켰다. 그들은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남조선해방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긍정할 수 없어 침묵으로 대했더니 나를 '교양이 풍부'한 것으로 간주했다. 먼저 제지를 받고 대기하고 있는 청소년들과 함께 종로구수송동의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됐다.

다음 날 오전 11시쯤, 소속 대열이 정해졌다. 그때까지 허기를 참고 있다가 얼금얼금 짜 놓은 긴 판자 위에 가지런히 얹어 놓은 주먹밥을 왼팔에 완장을 찬 여성동무로부터 한 사람당 한 덩이씩 배당받았다. 그 판자는 교실 밖에 별채로 지은 변소(화장실)에 갈 때, 밟고 다니는 발판이었다. 한여름 더위에 바짝 마른 발판을 걸레질만 슬쩍 훔친 인분은 그대로 말라붙어 있었다. 그 발판을 보고서는 그 위에 올려놓은 주먹밥에 손이 가지 않았다. 옆에 있는 연행된 동료들은 배당받은 주먹밥을 굶주린 이리처럼 단숨에 먹어버렸다. 그 꼴을 본 나도 시장기에만 몰두되어 순식간에 먹었다. 그것도 한 덩이만 더 먹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밤이 되자 수송초등학교에 수용된 동료들은 덕수궁 돌담을 따라 종로구정동에 있는 배재고등학교로 이동했다. 그곳에 수용되어 있는 수많은 동료와 함께 배정 받은 교실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그 다음날 아침, 연행된 동료들은 인민군이 인수할 때까지 이곳에 수용된다는 풍문이 돌았다. 인민군은 한 명도 보이지 않아 인수해 갈 때까지 며칠이 걸릴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인민위원회에서는 연행된 동료들이 잡념을 갖지 못하게 하려고 전원 운동장에 집합시켰다.

운동장 단상에는 마이크를 장치해 두고 밧줄로 포박한 삼십 안팎으로 보이는 청년 한 명을 세웠다. 인민위원회에서는 포박한 청년의 성명과 거주지, 나이, 직업 등 신분은 알리지 않고 미리 쪽지에 적은 죄질을 큰 소리로 또박또박 읽었다. 읽던 구절이 멈추어질 때마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은 우레와 같은 "옳소∼!"소리와 함께 박수를 쳤다.

포박된 청년의 죄는 좌익계애국청년을 연행한 일, 뇌물을 받은 일, 계집질을 한 일, 빌린 돈을 갚지 않은 일, 첩을 둔 일 등이었다. 단상에 포박된 청년에게는 한 마디도 변명할 기회를 주지 않아 그 사실은 확인되지 않았다. 운동장에 연행된 동료들의 옳소 소리와 박수 치는 소리는 그의 비행과 범죄를 심판하는 절차다. 변명이나 반대 의견이 나올 수 없고 나올 기회도 주지 않아 동료들은 조목마다 만장일치로 찬성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형을 하자∼!"

는 말에 더 큰 우레와 같은 옳소 소리와 박수로 동의했다. 어느 누군가 그것을 '인민재판'이라 했다. 인민재판은 그들이 만든 각본대로 처벌하는 재판이었다. 법률적인 지식이나 상식이 없는 강제로 연행된 동료가 판결한 것이다. 그날따라 인민재판을 하게 된 것은 앞으로 어느 누구도 불만과 불복하면 이같이 처벌한다는 으름장인 것 같았다.

앞이 한 치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그날 밤, 수용된 교실 바닥에 옷도 벗지 않고 누운 채 낮에 있었던 인민재판의 광경이 떠올라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았다. 운동장 단상에서 인민재판을 받은 청년은 벌써 시체로 변해 세상을 하직했을 것이다. 그는 억울함을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고 원망만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에 잠겨 있던 중, 옆에 누워 있던 몇 살 위로 보이는 키 크고 날씬한 동료가 혼자서 들릴 듯 말 듯 나지막한 소리로 "도망쳐야지∼!"라는 말을 한 순간, 그의 발가락 끝이 나의 장딴지를 긁적거렸다. 캄캄한 밤중에 본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의 의견을 슬그머니 손잡고 동의했다.

순찰하는 감시가 소홀한 자정쯤, 슬그머니 잠자리를 빠져나와 변소에 가는 체 하고 운동장의 한쪽 귀퉁이 벽돌담 밑에서 그를 만났다. 담 높이가 높아 발판이나 사다리 없이 혼자서는 넘을 수 없을 정도였다. 그의 양어깨를 두 발바닥으로 짚고 담 위로 올랐다. 한쪽 다리는 담 밖으로, 다른 쪽은 담 안으로 덜렁거린 채 펑퍼지게 앉아 그의 오른쪽 손을 양쪽 손으로 꼭 잡고 힘차게 당겼다. 그는 순식간에 담 위에 올라앉았다. 담 위에 올라앉은 우리 둘은 담 밖을 내려갈 때는 숨을 죽이고 운동장 외벽에 손바닥과 배를 바짝 붙여 수직으로 미끄럼 타듯 했다.

콩알만큼 작아진 뛰는 가슴은 오랫동안 숨차게 했다. 숨찬 소리를 멈추게 하는 것도 벅찬 일이었다. 한밤중의 숨소리는 보통 때보다도 크게 들린다. 혹시 순찰 다니는 감시원이 숨소리를 듣고 의심을 품으면 또다시 연행된다. 숨을 죽인 채 그와 한마디도 하지 않고 수신호로 헤어졌다. 헤어지고서도 통행인을 피하기 위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면서 봉서 집에 돌아 왔을 때는 훤한 아침이었다.

▶ 작심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지나도 국군이 수복할 기색이 보이지 않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 고향을 가야 한다.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가야 한다. 가다가 살지 못하고 죽는 한이 있더라도 가야 한다. 죽어도 동족을 살상하고 침략하는 인민군 행위에 협력자가 안 되는 것이 떳떳하다. 봉서 어머니가 양식을 조달하러 광주로 갈 때, 광나루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도강한 코스로 서울을 떠나기로 작심했다.

뜻이 맞고 마음에 드는 동행할 고향친구를 규합해야 한다. 그들이 거주하고 있는 집을 찾아가야만 상의할 수 있다. 도중에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지 않는 묘책이 필요하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지금까지 상황을 내 나름대로 참작했다. 아침저녁과 전차 속, 번화한 길거리는 연행하지 않고 한적한 골목에서만 연행한다. 친구가 거주하고 있는 집이 골목에 있으면 반드시 앞서가는 젊은 남성 통행인의 뒤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좌익계청년이 골목에 나타나 앞서 가는 통행인을 연행하려 설득할 때 뒤 따르던 나는 번화한 도로로 도망칠 여유를 갖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동기생 규태는 그의 누님 집이 있는 종로구효자동에 거주하고 있다. 효자동 전차종점은 전차에서 내리면 오른쪽은 경복궁의 높은 담이 있어 통행인이 뜸하고, 반대쪽은 꼬불꼬불한 좁은 골목길이 많은 고전적인 한옥이 옹기종기 붙어 있다. 그러나 비교적 한산하다. 또 전차종점의 북쪽 자하문 밖은 북한산이 막고 있다. 그런 특징이 있어 다른 정거장에 비교하면 하차하는 승객이 적다. 그 점을 염두에 두고 만나러 갔다.

규태를 만나러 전차종점에서 내릴 때, 좌익계청년과 학생이 나보다 먼저 내린 학생들을 연행하고 있었다. 그중 한 청년이 나를 손짓으로 불렀다. 그 순간 '걸렸다'는 생각이 들어 앞서 내린 학생 뒤를 따르는 척하다가 부리나케 효자동 골목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단거리 선수처럼 달리면서 뒤 따라 오는 좌익계 청년과 학생을 따돌리고 반대쪽 통의동 큰길로 도망쳤다. 그 길을 따라 통행인이 많은 체부동, 내자동, 내수동 큰 길을 거쳐 번화한 광화문전차정거장에 갔다. 그 정거장에서 우연히 고향 친구 호진을 만났다. 그와 함께 고향에 갈 것을 약속받았다. 또 내가 거주하고 있는 봉서 집 동네와 이웃한 안암동에는 고향 동기생 영구가 거주하고 있다. 그를 한밤중에 찾아가 동행할 것을 약속했다.

이들과 약속했을 때의 풍문은, 인민군은 추풍령과 문경새재를 향해 진격하고 있었다. 고향에 도착하기 전, 인민군은 내 고향을 진격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 생각을 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 봉서 집 가족과의 작별

8월1일 오전, 간편한 피란민 차림으로 단봇짐을 지고 정들었던 봉서와 그의 큰 집 형과 헤어지고 안채로 통하는 대청 앞 디딤돌 위에 서서

"아주머니 ! 안녕히 계십시오. 고향으로 갑니다"

고 하직 인사를 퉁명스럽게 했다. 직장에 출근 중인 봉서 아버지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해 죄송하다는 뜻도 표했다. 아무런 반응이 없어

"전쟁이 끝나면 다시 오겠습니다"

고 하자, 봉서 어머니는 안방에서 듣다가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앞마당에 맨발로 내려 오셨다. 무뚝뚝한 나의 얼굴을 보고 의아스러운 표정으로

"아무런 상의도 없이 혼자서 어떻게 그 먼 길을 갈 수 있겠는가?"

고 하셨다. 차편이 없어 뜻이 맞는 고향친구 호진과 영구와 함께 걸어서 간다고 짤막하게 대답했다. 정이 담뿍 들었던 봉서 어머니는 나의 오른쪽 손바닥과 팔목 사이를 두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굶어도 같이 굶고 죽어도 같이 죽자 !"

면서 눈물을 훔쳤다. 나도 그 고마움과 앞으로의 두려움이 겹친 눈물이 한꺼번에 흘러 얼굴을 흠뻑 적셨다. 헤어지는 마지막 작별인사 때 봉서 어머니는 서울이 인민군에게 점령당한 뒤로 제대로 된 식사를 차려주지 못했던 것을 안타까워하셨다.

영구 집에서 만난 우리 셋은 경기도광주와 이천, 충북충주, 경북안동 등으로 걸어갈 계획을 세우고 하루 지난 다음 날 새벽에 출발해 광나루 나루터에 갔다. 그 나루터에는 먼저 온 수많은 시민들이 무거운 봇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었다.

인민군은 서울을 해방시켰다고 선전한지 한 달을 넘겼다. 그런데도 시민들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피란 가느라 좌왕우왕하는 모습을 보고 만감이 교차하면서 나룻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서울을 떠났다. 그날이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고 한 달 엿새 된 날이었다. ※

[참고] 국군이 서울을 9⦁28수복하자 봉서 집 가족도 그의 고향 경북의성으로 피란 갔다. 피란 가던 중, 봉서 부모는 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듣고 전쟁으로 파괴된 우리 집에 찾아오셨다. 만난 자리에서 내가 서울을 떠난 뒤, 봉서 아버지는 성북내무서로 두 차례 출두했다. 두 번째 출두했을 때 반동분자로 낙인이 찍힐 것이라 짐작했는데 다행히 담당 조사원이 급성맹장염으로 부재중이었다. 다시 출두하게 되면 귀가할 수 없게 될 것 같아 감시가 소홀한 캄캄한 깊은 밤중에 가족과 함께 집을 나와 광주지역 산속에 피신해 죽음을 모면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일찍이 고향으로 내려간 나의 용단이 재치 있는 판단이었다고 말씀하셨다. ※

폭풍이 멎은 날

▶ 귀향길 첫날 아침

북한의 인민군이 남침하여 시작된 1950년 6⦁25전쟁이 일어난 날, 나는 우리 집과 친분이 두터운 서울성북구돈암동 전차종점 부근의 봉서 집에서 그와 함께 한방에서 기거하면서 하숙하고 있는 고등학생이었다. 인민군이 남침한 삼 일 후, 국군은 예고 없이 한강철교와 인도교를 폭파하고 후퇴했다.

서울시민은 한강인도교가 폭파되어 남으로 피란가지 못했다. 나는 종로구안국동에서 좌익계청년에게 강제 연행되어 어느 청년을 사형하자는 인민재판장에서 박수를 쳤다. 그리고 인민의용군에 입대되기 전 탈출했다. 그 후부터 그들에게 쫓기는 겻 같아 불안했다. 그러던 중, 함께 귀향할 향토 출신 고등학생 호진을 성북구안암동 영구 집에서 만나 귀향하기로 결의했다.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한 한 달 지난 팔월초삼일 캄캄한 이른 새벽, 영구 집 앞 골목길에서 큰길로 나올 때까지 살금살금 걸었다. 그렇게 조심했는데

"야∼, 이놈∼! 반동분자야∼! 어디로 도망치려는가?…"

라는 소리가 귓전에서 울리면서 덩치가 크고 힘찬 좌익계청년이 넙죽한 손바닥으로 등을 탁 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철렁하다가 등이 오싹해질 정도로 겁이 났다. 뒤돌아보지는 않았다. 누가 봐도 쫓기지 않고 태연한 척 하기 위해서다.

큰길에 나와서는 돈암동 전차종점까지 숨 돌릴 틈 없이 걸음만 재촉해 새벽 첫 전차를 탔다. 덜커덩 덜커덩 소리를 내면서 레일 위로 달리고 있는 전차 속의 승객은 우리일행 호진과 영구, 그리고 나 이외에는 몇 명 되지 않았다. 우리일행 셋은 종로4가역에서 환승하여 동대문역에 내렸다. 그 역에서 기동차에 갈아타고 왕십리를 거쳐 뚝섬에 도착했다. 그때 귓속에서는

"더 이상 도망치지 말고…, 거기에 서 있으라"

라는 소리가 울리고 있어 내 가슴은 계속 쫓기고 있는 심정이었다. 그런 심정으로 한강변을 따라 동쪽을 향해 한참 걸어 광나루나루터에 갔다.

그 나루터에는 먼저 온 수많은 피란민들이 웅성거리고 있어 시골 장날을 연상케 했다. 그들의 모습은 각양각색이었다. 그늘이 없는 나루터인데도 무거운 봇짐의 멜빵을 어깨에 걸쳐놓은 채 땅바닥에 펑퍼지게 앉아있거나 밀짚모자로 얼굴의 햇볕을 가리고 한잠 자고 있는 사람, 앞가슴을 헤친 채 어린 아기에게 젖을 먹이면서 축 늘어진 젊은 새색시, 더위를 이겨내지 못하고 울음을 터트리는 어린이와 유아를 달래는 보호자 등이 있었다. 그 밖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무거운 봇짐을 지고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는 피란민도 있었다. 모두 여기까지 오느라 하루 이틀이 아닌 것 같았다.

그 많이 운집해 있는 피란민 중에는 내 또래나 나보다 몇 살 위로 보이는 기동력이 있는 젊은 남성은 통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인민의용군에 동원되는 것이 두려워 이곳 나루터에 오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니 우리일행이 이곳에 온 것만 해도 다행인 것 같았다. 그러나 우리와 같은 젊은이에게는 감시가 심해 앞으로 걸어 갈 길이 큰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한강을 건너는 나룻배 삯을 내고 나니 용돈마저 한 푼 없이 떨어졌다. 강을 건너 광진교 교각 밑 그늘진 백사장에 앉아 간밤에 영구 집에서 준비한 꽁보리주먹밥을 먹고 휴식을 취했다. 휴식을 취하면서 건너 온 광나루나루터를 되돌아보니 피란민들은 그때까지도 무거운 봇짐을 지고 인파에 비비댈 정도로 우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인민위원회에서는 한 달 넘도록 날마다 '서울은 해방되었다'고 대대적으로 자랑하던 선전은 실감이 나지 않고 거짓을 진실로 도배한 오만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 무질서한 피란민행렬

피란민 중에는 걸음이 빨라 앞질러 가는 사람, 지쳐서 느릿느릿 걷는 사람, 그늘진 곳에서 한잠 자고 있거나 쉬고 있는 사람들로 무질서했다. 그 당시 서울, 부산 등 전국의 모든 도로는 비포장이고 넓지도 않았다. 더구나 지방도로는 울퉁불퉁하고 구불구불했다. 그런 길을 걷고 있는 피란민행렬은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와 달리 반대 방향으로 걷고 있는 농민도 있었다. 그중에는 아낙네도 있었다. 그 아낙네 머리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시커멓게 물들인 수건 위에 똬리를 얹어놓고 그 위에 양곡을 이고 있었다. 한쪽 팔은 양곡 자루가 흔들리지 않도록 떠받쳤고 다른 쪽 팔은 업힌 어린이가 허리에서 내리지 않도록 아이의 엉덩이를 누르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서울로 가려고 앞만 보고 걷는 데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봉서 어머니도 양식이 떨어지면 부엌일을 맡은 아가씨와 함께 이 거리를 그 아낙네처럼 양식을 조달했기에 봉서 집에서 죽이라도 먹을 수 있었던 혜택을 생각하니 그 고마움은 이루 말할 수 없음을 다시 한 번 느꼈다.

해질 무렵에는 경기도광주읍내에 가까운 어느 도로변 농촌 마을에 도착했다. 마침 저녁상을 차려놓은 농가가 있어 구걸해 볼 생각으로 각자의 의견을 타진했다. 그러나 이 마을에서는 피란 가는 통행인이 북적거려 말을 붙여 봐도 거절당할 것 같아 첫날밤은 굶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잠잘 자리를 마련하려 피란 가서 돌아오지 않고 있는 빈집을 물색했다. 먼저 걸어 온 피란민들이 차지해버려 어느 빈농가의 마당에 누워서 잠이 들려고 할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기 시작해 그 집 외양간에 갔다. 소는 없고 그 대신 피란민들이 발 디딜 틈도 없이 드러누워 있었다. 그들은 우리를 보고 잘만한 곳이 없으니 다른 곳에 가보라고 했다. 그 소리를 듣고도 드러누운 사람 틈사이로 비벼서 꼬부려 앉았더니 나도 모르게 쓰러져 깊은 잠이 들었다. 한잠 자고 깬 후로는 제정신이 났다. 옆 사람이 코 고는 소리, 헛소리와 땀 냄새, 쇠똥냄새 등으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었다. 다행히 소는 인민군이 점령한 즉시 그들의 식용으로 도살되어 그 집 외양간은 한 달이나 비어 있어 쇠똥냄새가 그다지 심하지 않아 그날 밤의 피란민 합숙소가 됐다.

다음날 아침도 굶지 않으려면 구걸해야 한다. 구걸하려면 어디서 어떻게 어떤 요령으로 해야 할 대안과 용기가 나지 않아 간밤처럼 굶었다. 주변에는 감자밭이나 과일이 열려 있는 과수원은 눈 여겨 봐도 보이지 않아 뱃속을 채울 것이 없어 논두렁 물로 대신했다. 피란민은 조금씩 줄면서 농민의 인심은 차츰 후해지는 것 같았다. 자꾸 걸어가면 인심 좋은 농가가 있겠지….

'설마 굶어서 죽기야 하겠나?'

라는 막연한 희망만 생각하면서 정처 없는 나그네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광주읍내에서 국도로 진입하기 전, 어느 양지 바른 농촌마을 입구에 왔을 때 왼팔에 좌익계여성 완장(여맹)을 두르고 머리댕기를 길게 내려뜨린 검정색 무명치마를 입은 그 마을 여성이 다가왔다. 나이는 어려보이고 순박한 것 같았다. 저런 어린 여성에 이르기까지 좌익계운동을 하게 한 인민위원회가 한심스러웠다. 그러나 그녀가 접근하는 목적이 미심쩍어 겁이 났다.

가까이 와서는 국도에 진입하려면 폭파된 큰 다리 밑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는 무장한 인민군병사가 피란민의 시계만 보면 빼앗는다고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듣고 시골 인심은 아직도 순박하다는 것을 느꼈다. 그 당시는 시계가 귀한 때라 일종의 귀중품이다. 이미 지나간 피란민에게 빼앗은 시계를 양팔에 끼고 있다고 한다. 그 말을 듣고 시계를 감추어 빼앗기지 않았다. 그러나 앞으로 피란민들의 신분이나 피란 가는 목적 등에 대하여 자주 조사할 것이다. 어떤 조사든 지방에서 서울로 유학하고 있는 학생은 어디론가 연행될 것이라는 느낌이 들어 불안했다.

어느덧 지방도로에서 국도로 진입했다. 밀짚모자와 이마 사이로 흘러내린 땀을, 목에 두른 수건으로 닦으면서 눈을 지그시 감고 은은히 들리는 먼 남쪽 산 너머로 포탄이 터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걸었다. 호진이는 그의 홀어머니 생각과 고향을 그리워하는 노래를 서글프게 부르면서 걷고 있었다.

그가 즐겨 부르는 노래는 지난 해 발표된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고향 만 리'를 현인이 부른 유행가였다. 그는 1절과 3절을 불렀으므로 나도 1절과 3절만 기억하게 됐다. 그 노래의 첫 가사는 '남쪽 나라 십자성은 어머니 얼굴…'이다. 동해의 남쪽 항구의 지방도시에서 성장한 나의 귀향길에는 그 가사가 가슴 깊이 심금을 울려 주었다.

허기진 시장기를 참으면서 예쁘다고 소문났던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린 수유기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마음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엄격하신 아버지의 두터운 사랑과 새어머니의 성의 있는 뒷바라지도 마음속 깊이 떠올랐다. 희망과 포부를 갖고 상경했으나 맨주먹으로 귀향하는 불효자식이 되어 너무나 원통했다. 그런 심정이 되어 맥없이 경기도이천 쪽을 향해 걸었다. 자주 내렸던 장마로 움푹 파인 길에 고인 물 위에는 소금쟁이, 물속에는 방개 등이 놀고 있었다. 수많은 잠자리와 나비, 벌 등이 논에서나 길 위에 즐겁게 날거나 앉기도 했다. 개구리는 눈을 굵게 뜨고 길 위로 폴딱 폴딱 뛰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들끼리는 인간과는 달리 지극히 평화스러워 보였다.

'인간은 왜! 저렇게 살지 못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 것인지…?'

참으로 안타까웠다.

가끔 먼 산 너머 내 고향산천을 생각하다가 움푹 파인 곳을 헛디뎌 운동화가 물에 젖기도 했다. 길바닥에 깔린 돌멩이를 밟았다가 넘어지지 않으려고 비틀거도 했다. 땅에 박힌 돌을 찼을 때는 발가락에 피멍이 들기도 했다. 피멍이 든 곳은 쓰리고 아팠다. 또 자갈 위로 미끄러지는 경우도 있었다. 메리야스 천으로 만든 여름용 얇은 흰 체육복 엉덩이 쪽은 누런 황토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동행하게 된 미모의 여인

경기도이천 지역의 국도변에는 야트막하고 자그마한 언덕이 여럿 있었다. 그중 어느 언덕 위의 소나무 그늘에는 농민 부부가 장국밥과 농주를 팔고, 피란민은 그 음식을 먹거나 마시고 있었다. 우리는 나무그늘에 앉아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침을 삼키고 있었다.

피란민 중에는 이십대 후반으로 보이는 미모의 여인이 있었다. 그녀는 우리가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는 것을 보고 농주 세 대접을 주문해 한 대접씩 권했다. 술을 한 번도 마셔본 적이 없는 나는, 한 달 남짓 서울에서 아침저녁으로 멀건 죽만 먹었다. 피란 가기 시작해서는 꽁보리주먹밥 한 끼만 먹은 굶주림으로 이백여 리나 되는 먼 길을 걸어 허약해질 대로 허약해졌다. 그런 몸으로 농주 한 모금을 마신 순간, 머리가 '핑' 돌면서 어지러워 더 이상 마실 수 없었다. 남겨 놓은 농주는 술 마신 경험이 있는 호진이가 마셨다.

미모의 여인은 우리에게 어디로 가느냐고 물었다. 우리는 동시에 경상북도로 간다고 했다. 그렇게 동시에 나온 똑 같은 말은, 혹시나 장국밥을 얻어먹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해 본데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그 말이 단초가 되어 그녀는 우리가 굶은 것을 알고 혀를 "쯧쯧"거리다가 장국밥을 주문해 주어 각자 한 그릇씩 먹었다. 피란 가고 있는 낯선 피란민에게 식사를 대접받은 것은 상상할 수 없는 뜻밖의 일이었다.

장국밥을 먹는 동안 그녀를 자세히 관찰했다. 모가 나지 않는 그녀의 뽀얀 얼굴은 길거나 둥글지 않고, 피부는 짙게 화장해서 우아하게 아름다웠다. 그 모습을 보면 볼수록 동화집에 나오는 예쁘장한 선녀나 공주와 같았다.

그녀의 일행은 건장한 장정 다섯과 평범하게 생긴 처녀가 있어 모두 일곱이었다. 그중 세 명의 장정은 모두 그녀와 비슷하거나 한두 살 위로 보이고 처녀만 나보다 두세 살 위인 이십을 갓 넘은 것 같았다. 그 밖에 남자 두 명은 저녁 때 만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녀의 일행이 떠날 때 우리도 떠나기로 했다. 그들의 행선지도 우리처럼 경상북도였다. 그녀의 봇짐은 그들 일행과 우리들 봇짐보다 부피가 크고 무게도 더 무거워 보였다. 그런 큰 짐을 지고 피란을 가느라 이미 지쳐 있었다. 그녀는 짐을 지고 일어날 때, 멜빵을 왼손으로 잡고 지팡이를 오른손으로 쥐면서 땅을 힘차게 눌렀다. 그 순간 동행하던 남자가 뒤에서 떠받쳤다. 그렇게 해서 간신히 일어났다. 몇 걸음 걷더니 비실비실 넘어질 것 같았다.

장국밥을 얻어먹은 미모의 여인에게 보답을 하고 싶었다. 내가 그녀의 봇짐을 질 것을 제의했다. 그녀는 나를 힐금 보더니 서슴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나의 단봇짐은 그녀의 봇짐에 매달았다. 그녀는 봇짐을 나에게 맡겨 홀가분해졌으나 우리보다 며칠 먼저 피란 가기 시작했던 것인지 절름발이 걸음처럼 찔뚝찔뚝 걷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이십 리 정도 걸은 다음에 휴식했다. 충분히 쉬면서 그녀를 기다렸다. 지루할 정도로 기다려도 나타나지 않았다. 기다림이 지루해 나의 단봇짐과 그녀의 봇짐을 휴식하고 있는 동료에게 맡겨 두고 십 리나 되는 곳까지 되돌아가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지팡이를 짚고 넓은 밀짚모자와 찡그린 얼굴 사이에 흐르는 땀을 연신 닦으면서 한 걸음 한 걸음 걷고 있었다. 또 걸을 때마다 길바닥에 박힌 자갈과 돌을 피하느라 절뚝거린다. 그녀의 팔을 잡고 걸음을 도왔다. 그 정도로는 속도가 나지 않았다. 생각다 못해 그녀를 나의 등에 업힐 것을 제의했더니 친동생처럼 쾌히 승낙했다. 등에 업힌 선녀처럼 아름다운 그녀의 몸무게는 그녀의 봇짐보다 훨씬 가벼웠다.

나는 그녀를 업고 걷는 시간만은 선녀를 업고 걷는다는 생각이 들어 지쳐지기는커녕 오히려 상쾌했다. 십 리 길을 쉬지 않고 단숨에 걸어도 내 발바닥에는 굳은살이 박혀 있어 피로를 느끼지 않았다. 그녀는 계속 업혀 가기를 기대 하듯 날씬하게 쭉 뻗은 몸통을 나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애를 썼다. 두 다리와 머리를 제외한 온 전신을 나의 등에 찰싹 붙이면서 양팔로 나의 목을 휘감았다. 나는 그녀가 등에서 떨어지거나 미끄러지지 않도록 양팔로 허벅지를 꽉 잡았다. 매끈하고 통통하며 탄력 있는 보들보들한 젖가슴은 나의 등에 찰싹 붙어졌다. 그녀의 몸이 쳐졌을 때마다 치켜 올리는 순간에 그녀의 피부가 나의 등에 살짝 닿았다 떨어지면서 스치는 촉감은 내 정신을 짜릿하게 했다. 숨 쉬는 심장의 고동은 한층 더 전율을 느끼게 했다. 그럴 때마다 느껴지는 촉감은 크나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낮선 객지에서 고향사람도 아닌 피란민과의 대화는 상대 성분을 알지 못해 조심한다. 목적지가 전선을 넘는 경우는 더욱 그러하다. 미모의 여인도 동행하고 있는 처녀에게만 이따금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말할 뿐, 처녀는 듣고 시인하는 고개만 끄덕거렸다. 그때 처녀는 집안의 손아래 조카라고 알려 주었다. 그 점으로 봐서 그 처녀는 시중드는 것 같고, 장정은 그녀를 호신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들은 내가 그녀를 업은 다음날부터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된 것은 미모의 여인과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녀가 준비해 온 양식은 이틀 지나 떨어졌다. 그 후의 양식은 그녀의 봇짐 속에서 금반지, 금목걸이, 다이아몬드반지 등의 귀금속이나 그 당시 여성들의 최고급으로 알려진 유똥, 비로드 등의 옷을 농가에서 쌀과 야채, 양념 등과 교환했다. 그 심부름을 내가 했다. 금반지나 저고리, 치마 중 어느 것이든 교환되는 쌀은 고작 한두 바가지와 반찬이었다. 그 정도로는 하루나 두 끼 식량 정도 밖에 되지 않아 점심은 거르게 될 때도 있었다. 그녀는 밥을 지어본 적이 없고 나는 자취를 한 경험이 있어 그마저 내가 했다.

그녀를 업고 지나칠 정도로 무뚝뚝하게 걸었던 이틀이 된 날, 짤막하고 간단한 이야기를 할 기회가 생겼다. 그때 그녀는 서울종로구혜화동에 거주하고 있는 순수한 서울출신이라는 것을 짐작했다.

충청북도장호원부터는 간혹 산 너머로 '쿠쿵 쿵∼'거리는 포성이 앞서보다 요란스럽게 들리고 피란민들의 검문이 잦아졌다. 그런 전방지역의 남자는 수염을 깎지 않고 텁수룩하게 하고 있다. 여자는 될 수 있는 한 활동하기 좋은 낡고 허름한 옷을 입고 있다. 또 화장을 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고 가난해 보이면 부역에 동원되지 않거나 정신적으로 위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미모의 여인은 품질이 좋은 고급화장품으로 세련되게 짙은 화장을 하고 있어 검문 때는 지레 겁을 먹고 당황한다. 나는 그때마다 서울에서 도피성 고학생이라는 거짓말을 해 검문을 쉽게 통과했다. 바로 내 뒤에 있는 미모의 여인 차례 때는 나와 동행인임을 말함으로써 무난했다.

충청북도충주읍을 지나 괴산읍 쪽 어느 빈농가에서 일박한 다음 날 이른 아침, 미모의 여인과 행선지가 달라 헤어지게 됐다. 그녀는 경상북도상주를 거쳐 대구에 가기로 되어 있고, 우리는 문경을 거쳐 동해안에 가기로 되어 있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봐서 어느 지역까지라도 동행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녀는 가까운 곳에 일행을 만나기로 되어 있다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밤마다 잠든 사이에 그녀는 그녀의 일행과 연락이 된 것 같았다. 그것으로 봐서 그녀의 일행은 그녀를 호신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대구에는 지인이 있다고 했다. 연고가 없는 지역에 지인이 있는 것만으로 위험한 전선을 넘어야 하는 피란의 목적지를 정해 둔 것은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때 쯤 대구에는 임시수도가 생긴 것 같았다. 넘겨잡아 그녀의 남편은 고위직 정부요인이거나 군에서 고위 지휘관이라 짐작했다.

헤어지려는 곳은 인적이 끊어진 울창한 숲 속의 파란 하늘 아래에 흰 구름만 뭉게뭉게 떠 있는 청명한 깊은 산중이다. 호진과 영구가 앞서가고 있는 삼거리 갈림길에서 그녀는 불끈 쥐었던 나의 손을 놓지 못하고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면서 걸음을 멈추었다. 나도 눈물이 나오면서 그녀의 손을 애써 놓았다. 우리는 서로 성도 모르고 이름과 나이도 모르면서 살기만 하면 만나는 기적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만 기약하고 헤어지게 됐다. 마지막으로 서로 소리 없이 덥석 껴안았던 손을 놓는 순간, 먼 산 너머로 '쿠쿵∼쿵'거리는 산울림이 울러 퍼지는 포성은 청명한 달밤의 서글픈 야곡이 되게 했다.

헤어지고 얼마간 걷다가 뒤돌아봤다. 무거운 짐을 지고 엉금엉금 걷는 그녀의 고개 숙인 걸음은 몇 걸음 가지 못하고 지팡이를 짚고 길 한가운데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신라시대의 '무영탑의 사랑'이 떠올랐다. '사랑에는 국경이 없다. 죽음에도 두렵지 않다'는 작별의 여운이었다.

▶ 강화된 검문

선녀처럼 아름다운 미모의 여인과 헤어지고 점심을 굶으면서 괴산읍을 향해 무턱대고 걸었다. 산길을 따라 종일 고개를 넘고 넘어도 마주치는 통행인은 없고 주막도 없는 깊은 산속이었다. 어두움이 들었을 때부터는 앞이 보이지 않아 동서남북의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된 순간, 전등불이 반짝이는 곳이 있었다. 그곳은 괴산읍내와 이십 리 떨어져 있는 간이지서였던 것을 인민군이 점령한 후 간이내무서가 되어 있었다. 또 한 마장 더 걸어가면 쭉 뻗은 도로변에 외딴 농가가 있다는 것도 알았다. 찾아간 농가는 마당 한가운데 모닥불을 피워 놓고 저녁상을 물리고 있는 중이었다. 우리는 거의 동시에

'먹다가 남은 음식이 있으면 조금이라도 얻어먹었으면 고맙겠다'

고 애걸했다. 그것도 며칠을 굶었다고 했다. 딱한 사정을 들은 그 농가에서는 잠시 기다리게 한 뒤, 제법 크고 넓은 양은 자배기에 새로 지은 감자가 듬성듬성 들어 있는 꽁보리밥을 수북하게 퍼다 주었다. 그것도 우리들에게 겸연쩍어하면서 공손히 대해 주었다. 우리는 김이 무럭무럭 나는 뜨거운 그 꽁보리밥을 세 마리 개가 고기 뼈다귀를 놓고 서로 많이 차지하려는 것처럼 정신없이 퍼먹었다. 또 문간방에서 편안하게 잤다. 그런 충청도 양반의 순박한 마음씨는 전쟁의 난리 통에도 변함이 없었던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다음날 아침, 그 농가에서는 큰길을 따라 직진하면 ㅏ(아)자 모양의 삼거리가 나온다. 그 삼거리 오른쪽 다리를 건너가면 괴산읍내로 가게 된다. 그 길로 가지 말고 바로 직진해서 험준한 돌산으로 걸어 괴산읍내를 벗어나라고 했다. 읍내를 가면 외지인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기도 한다고 알려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대로 삼거리 오른쪽 다리를 건너지 않았다.

삼거리 왼쪽 길가에 있는 산 밑에는 불에 타서 연기만 무럭무럭 나고 있는 외딴 초등학교가 있었다. 그저께 유엔군 전투기의 폭격으로 그 초등학교는 소실되고 인명피해가 많았다. 원인은 소실된 초등학교에 인민의용군이 수용되었기 때문이다. 읍내 인민위원회에서는 그 정보제공자를 잡으려 검문을 강화한 것이다. 아침에 농가에서 알려 준 말은 소실된 초등학교로 입증된 것이다. 그 피해는 얼마 전 서울용산역과 한국조폐공사를 유엔군이 폭격한 후 두 번째로 폭격한 소식이었다.

문득 서울종로구안국동에서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어 배재고등학교에 수용됐을 때 낯선 청년과 함께 자정 쯤, 학교 담을 넘어 탈출하지 않았더라면 인민의용군에 입대되어 이미 죽었을지? 살았어도 지금쯤은 이곳에 있거나 전방에서 국군을 상대로 전투를 하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꽁보리밥을 제공받은 인심 좋은 농가에서 알려 준 돌산은 산길이 거의 없었다. 그런 험한 산을 넘고 넘어 괴산군연풍면으로 가던 중, 인적이 드문 국도변의 외딴 주막 같은 빈집에서 왼팔에 좌익계 완장을 찬 청년 두 명에게 검문을 당했다. 그들은 허름한 국군복장을 하고 바지에는 흐트러지지 않도록 국방색 천으로 된 띠(일본군 갑반, けどる)가 감겨 있었다. 또 대동아전쟁 때의 일본군 소총을 메고 어깨를 쭉 뻗치고 있었다. 그 태도가 큰 감투를 쓴 것처럼 우쭐대고 있어 지나치게 어울리지 않았다.

통행인은 우리 밖에 없어 검문은 우리뿐이었다. 그 당시의 학생증은 학도호국단 수첩에 기재되어 있었다. 그 학생증을 본 즉시 찢으면서 우익계학생으로 단정해 놓고 입고 있는 옷 주머니와 봇짐을 샅샅이 검사했다. 호진이 호주머니에서 럭비선수증이 나왔다. 럭비경기는 광복 후에 보급되고 있어 산속 마을에서는 생소했다. 소련을 중심으로 공산주의국가에서 즐기는 최신 운동경기라 했더니 소련이란 말에 귀가 쏠려 의심스러운 점을 다소 푸는 듯 했다. 또 호진이 봇짐 속에서 세수 비누가 나왔다. 그 당시 농촌에서는 비누가 귀했다. 깊은 산속 마을의 장날에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탐이 나는 눈치가 보여 각자 두 개씩 주었더니 검문은 무사히 통과시켜 주었다.

연풍면소재지에 도착했을 때는 대낮이었다. 아침과 점심을 굶고 가파르게 험한 산고개가 많은 문경새재를 넘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간밤과 같은 충청도 인심 좋은 농민을 만나 꽁보리밥이라도 얻어먹을 수만 있으면 허기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하고 구걸하러 다녔다.

인민군과 국군의 전투로 깊은 산속에 대피했던 농민들은 귀가하지 않고 있어 농가마다 빈집뿐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고 농가를 기웃거리다가 그만 연풍내무서로 되어 있는 연풍초등학교에 연행됐다. 그 내무서는 우리를 검문해도 의심할 점이 없었다. 그런데도 복도에서 오랫동안 무릎을 꿇게 했다. 돌려보낼 때, 내무서원에게 먹을 음식을 구걸해 봤다. 그 즉석에서 거절당했다. 이제는 거절을 당해도 허기를 면할 수 있을 것이라 예상되면 어디에서나 부끄럼 없이 구걸하려는 배짱이 생겼다.

하루 종일 굶고 비어 있는 부유한 기와집 농가의 문간방에 여장을 풀고 잠을 청했다. 여름 해는 길어 해떨어지지 않았을 때이다. 나를 제외한 두 동료는 피로에 지쳐 '드르렁'거리는 콧소리를 내면서 깊은 잠에 빠졌다.

나는 너무 시장해 잠이 오지 않았다. 뱃속은 쉴 새 없이 '꼬르륵'거리는 신호가 요동치고 있었다. 그 요동은 굶어서 서서히 죽어가는 신호인 것 같았다. 죽어도 문경새재를 넘어 고향인 경상도 땅에서 죽는 것이 소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이 잠든 두 동료를 흔들어 깨웠다. 그들은 갑작스레 무슨 변이 생긴 것이 아닌가 싶었는지 거의 동시에 놀란 표정으로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동그래진 눈을 비비면서 두리번거린다. 해는 서산에 떨어지지 않았으니 지금부터라도 문경새재를 넘을 것을 제의했다. 그들은 잠결에 들은 제의라 별 생각 없이 받아들였다.

▶ 문경새재에서 생긴 공포

연풍면에서 문경새재를 오르는 산길은 차량이 통행할 수 있는 꼬불꼬불한 코스였다. 그 코스의 산세는 울창한 숲과 험한 절벽만 있어 산모롱이를 돌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먼저 걸어 왔던 산모롱이가 바로 눈 아래 보였다. 다시 산모롱이를 돌면서 아래를 내려다봐도 바로 전에 걸었던 산모롱이가 보였다. 그런 가파른 산모롱이의 어느 깊은 산골짜기에는 죽은 시체가 썩고 있는 퀴퀴하고 꼬리 한 악취가 풍기고 있었다. 그 악취로 봐서 전투가 끝난 지 오래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산세가 험준한 만큼 골짝마다 여러 날 전투를 했을 것이다. 그 전투로 쌍방 간에 희생된 장병들이 여태껏 걸어 온 어느 지역보다도 사상자가 많았던 것 같았다.

산 너머로 해가 떨어질 무렵, 걸어가고 있는 산길 옆의 기슭에는 국군의 공격을 받아 고장 난 인민군탱크와 경비하고 있는 인민군병사가 있었다. 그 병사는 따발총으로 완전무장하고 주변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비썩 마른 체격에 푹 파인 눈으로 우리를 째려보고 있어 저격할 것 같았다. 떨리는 발걸음으로 탱크 앞을 태연히 지나 십여 걸음 걸었을 순간, 탱크 쪽에서 천지를 진동시키는 듯한 '콰∼광 쾅쾅'거리는 굉음이 들렸다. 그 소리에 놀라면서도 무서워서 뒤돌아보지 않고 그 병사가 우리를 저격한 것으로 착각하고 '이제는 죽었구나?'라는 생각만 하면서 앞만 보고 걸었다.

문경새재는 산봉우리가 첩첩인 만큼 콰∼광 쾅쾅거리는 산울림의 굉음도 연달아 울렸다. 그때마다 '죽게 되었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되어 죽어도 한두 번이 아니고 골백번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앞만 보고 한참 걷다가 그 산모롱이를 지날 무렵, 탱크가 있는 쪽을 내려다보니 그 굉음은 고장 난 탱크를 떠받쳐 놓았던 작기가 넘어지면서 탱크도 길 한가운데에 벌렁 넘어져 길바닥에 부딪치는 소리였다. 그것을 보고 무사했다는 것을 그제야 알게 되어 죽지 않고 살았다는 한숨을 쉬었다.

땅거미가 지고 어두움이 들었을 때는 문경새재의 정상 가까이에 갔다. 그 산마루 근처 숲 속에는 굵은 나무토막이나 쇠파이프를 든 건장한 지역청년 칠팔 명이 무엇인가 찾으려고 소곤거리면서 숲 속을 뒤지고 있었다. 그 무엇은 전리품인 것 같았다. 우리는 무서웠던 참이라 동시에 큰 소리로 그들에게 문경읍내까지의 거리와 소요되는 예상시간을 물었다.

그들은 깜짝 놀라면서 이런 캄캄한 한밤중에 '새재를 넘으려는 사람은 처음 봤다'고 한다. 그러면서 이곳 정상부터 이십여 리 정도 내려간 곳에서 왼쪽으로는 오솔길이 있다. 그 길을 따라 가면 농가가 나온다. 그 농가에서 자고 가라고 했다.

이 산에서는 광복이 되기 전만 해도 호랑이가 나타났다. 지금도 다른 맹수가 있을 수도 있어 조심할 것도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들은 뒤부터 맹수가 나타났을 때를 대비하기 위해 굵은 나뭇가지를 하나씩 꺾어들고 걸었다. 그날이 팔월초파일(8월8일)이다. 개똥벌레가 수없이 앞을 밝히고 있는 캄캄한 자정쯤이었다. 잊지 않고 기억해 두기로 했다.

자정이 훨씬 지난 뒤, 이 지역 청년들이 가리켜 준 오솔길을 따라 한참 걸어간 산기슭의 노변에는 십여 호 정도로 작은 빈촌마을이 있었다. 그 마을 입구 쪽 외딴집 앞에서 무서움을 타고 있던 우리는 산울림이 천둥치듯 큰 소리로 주민의 잠을 깨웠다. 무턱대고 숙소와 식사를 제공해 줄 것을 부탁했다. 그 소리에 놀란 그 집에서는 우리를 인민위원회에서 온 사람으로 착각하고 부위원장 집을 가리켜 주었다. 부위원장은 어저께 이 마을에서 가장 못 산다고 해서 선출됐다고 한다. 선출은 됐어도 가장 가난하고 일자무식인 문맹자라 업무를 볼 수 없어 무효화시켜 달라고 사정한다. 그러면서 농사를 짓고 있다고는 하지만 깊은 산속에 있는 남의 밭 세 마지기를 경작하는 화전민이었다. 보릿고개 때는 먹을 식량이 부족해 끼니를 굶는 경우가 능사라고 한다. 그런 형편인데도 인민군치하에서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는 가장 적임자라 선출되었다고 서슴없이 말했다.

차려 준 음식은 서울 봉서 집에서 준 멀건 죽보다도 훨씬 못한 죽이었다. 펄펄 끓는 그 죽을 단숨에 먹었는데도 목청은 데지 않고 멀쩡했다. 내가 이날 이때까지 먹은 음식 중, 그렇게 맛있는 음식은 처음이었다. 그 죽은 부위원장 취임 축하로 집에서 키우던 강아지를 잡은 개고기를 요리해 먹고 남은 음식이었다. 난생 처음 먹어 본 개고기 죽이다. 워낙 못 사는 집에서 먹은 죽이라 전투장에서 죽은 병사를 요리한 음식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 인민군 대이동과 제트전투기 출동

다음날 아침. 문경읍내에 도착할 무렵에는 봇짐을 지거나 이고 피란 갔던 농민들이 분주히 귀가하고 있어 전투가 끝난 지 며칠 되지 않았던 것 같았다. 아침을 구걸할 수 없을 것 같아 읍내로 들어가지 않았다. 어느 노변을 걷고 있을 때, 어떤 농가에서 피란 갔다가 새벽에 돌아오자 떡을 만들어 이웃에 맛을 보게 하려고 우리를 불렀다. 그런 인심 좋은 농가의 선심으로 그날 아침은 누런 인절미와 흰 백설기로 공복을 어느 정도 채웠다.

떡을 얻어먹은 농가를 떠나 국도를 따라 점촌읍내 쪽을 향해 걸었다. 통행인은 우리 밖에 없는 외딴 주막을 겸한 국도변 어느 농가에서 휴식했다. 막 떠나려 할 때, 점촌 쪽에서 헐레벌떡거리면서 가까이 걸어오고 있는 농민들이 있었다. 그들은 우리가 가려는 큰 길목에 좌익계청년들이 통행인을 검문하면서 외지인은 무조건 연행하고 있다고 했다. 검문을 피하려면 점촌 쪽을 향해 왼쪽 산길이 없는 바위산을 넘으면 안전하다고 가리켜 주었다.

바위산은 걷기가 매우 험했다. 그러나 그다지 높지는 않고 바위 사이에는 틈새가 있어 몸을 바위에 바짝 붙이면서 걸었다. 어느 산허리를 걷고 있을 때, 국도 건너편에 문경탄광 쪽이 내려다보였다. 그곳에서 인민재판을 하고 총살한 시신을 농민들이 지게나 들것으로 운구하고 있었다. 그것도 한두 구가 아니고 줄을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국도로 걸었으면 영락없이 살아남지 못했을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바위산에는 주먹보다 큰 불발탄이 있었다. 더 이상 걷기가 두려워 그 불발탄의 뇌관을 터트려 자폭하고 싶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이곳까지 걸어 왔던 것이 너무나 아까워 단념하고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는 양지 바른 쪽 바위 위에 얹어 놓고 계속 걸었다.

바위산을 넘고 점촌읍내를 들어가려다가 드나드는 행인이 보이지 않아 두려움이 앞섰다. 방향을 바꾸어 예천읍내 쪽을 향해 쭉 뻗은 국도를 걸었다. 어두워졌을 때는 예천읍내를 지나 안동군풍산면 국도변에 왔다. 그 국도변에는 마을이 없어 저녁을 굶은 채 국도변 외딴주막집 빈방에서 여장을 풀었다.

자정이 될 무렵인 캄캄한 야밤에 점촌읍내 쪽 국도에서 예천읍내를 거친 국도에는 '뚜벅'거리는 소리와 '덜커덩'거리는 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뜨렸다. 처음에는 들릴 듯 말 듯 가늘게 들리던 소리가 차츰 요란스러웠다. 그 소리는 인민군이 행군하는 소리와 무기를 적재한 마차의 말굽 소리였다. 일련의 인마(人馬)가 일정한 간격을 두고 잠자려던 주막집 앞의 국도를 지나고 있었다. 때로는 '드르렁'하는 요란한 굉음을 내면서 이동하는 탱크도 있었다. 날이 밝아지려는 새벽이 되자 그 이동은 뚝 끊어졌다. 유엔군 헬리콥터는 아침부터 인민군이 이동한 정확한 위치를 알려고 정찰했다.

우리일행은 간밤에 밤을 새운 국도변의 외딴 주막에서 아침을 구걸하려 그 지여의 들녘 한가운데 있는 조용하고 고요한 농가마을에 들렀다. 그 마을에는 농민들이 피란 가고 없어 아침을 굶었다. 국도로 되돌아오던 중, 그 마을 앞뜰에는 집채보다 큰 이상한 물체가 보릿짚으로 덮어져 있었다. 무심코 짚을 헤쳐 보니 그 물체는 인민군 탱크였다.

때는 논에 모를 심고 난 농번기가 지났다. 들녘에는 논물이 가득 차 있고 통행인은 국도로 향해 걸어가고 있는 우리일행뿐이었다. 고공으로 비행하던 제트전투기인 '쌕쌕이' 한 편대가 저공으로 회전하다가 갑자기 논바닥에 닿을 정도로 근접비행하면서 우리에게 한 번씩 기총사격했다. 그 순간 논바닥에 무의식적으로 엎드려졌다. 만일 쌕쌕이가 사격하던 중, 딴 곳으로 은폐하려 움직였다면 쌕쌕이는 영락없이 다시 편성해 우리일행을 향해 사격했을 것이다. 그렇게 안 했기에 모두 무사했다.

쌕쌕이가 사라진 뒤 사격하는 장면이 연상됐다. 네 대의 쌕쌕이는 한 번씩 저공으로 하강하면서 내가 엎드려 은폐하고 있는 바로 뒤편에서 사격했다. 그 실탄이 논바닥에 파고 들어가는 '폭폭' 하는 소리가 매우 가까워 나를 적중시킨 것 같아

'오∼, 하나님이시여! 오∼, 하나님이시여!'

하는 구원의 기도소리가 마음속에서 저절로 부르짖어졌다.

사격이 끝난 한 동안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오들오들 떨렸다. 얼굴과 머리카락, 입고 있는 하얀 체육복에 붙은 논바닥의 찐득찐득한 황토는 뒤범벅이 되어 몰골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고도 귀청이 떨어질 정도의 소음에 옆 사람이 큰 소리로 말을 해도 전연 들리지 않고 귓속은 이명 소리만 '앵앵'거렸다. 피란민은 흰 옷을 입으면 안전하다고 한다. 우리들의 옷차림은 모두 흰색이다. 쌕쌕이는 우리를 피란민으로 가장한 것으로 착각하고 사격한 것 같아 흰 옷도 별로 효과가 없는 것 같았다.

한편, 보릿짚으로 덮어져 있는 탱크 주변에는 경비하고 있는 인민군 기갑병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 병사는 쌕쌕이가 우리를 사격하는 것을 봤을 것이다. 그랬기에 국군의 첩보원으로 의심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일 의심했더라면 총살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생각이 들어 이래저래 죽게 된 것을 살아나게 된 기적 같은 요행이었다.

▶야전에 참전한 인민의용군과 여군

유엔군 전투기에 저격당한 풍산면지역에서 안동읍내 쪽 국도변에는 양지바른 외딴 빈집이 있었다. 그 빈집 앞 그늘진 나무 밑에서 휴식하던 중, 완전무장한 두 인민군이 가까이 다가 왔다. 그들은 고등학교 재학 중인 경남출신의 서울 유학생이었다. 총칼을 들고 인민군과 함께 하루에도 남으로 백 리 이상 진격하면 늦어도 열흘이내 귀가할 수 있다는 감언에 인민의용군에 입대했다고 한다. 전쟁은 언제 끝날지 예측할 수 없다. 그새 개죽음이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어 입대한 것을 후회하면서 우리의 여정을 부러워했다.

그들 복장은 인민군복이었다. 그러나 어깨와 전투모에는 인민군 계급장과 마크가 부착되어 있지 않았다. 그 대신 빨간 모포 천을 별표 모양으로 잘라서 만든 마크를 대신하고 있었다. 그것을 보고 인민군과 인민의용군을 식별할 수 있게 됐다. 그들이 소속부대로 돌아갈 때 이웃 부대는 우리 부대보다 훨씬 많은 인민의용군이 있다는 말을 남기고 사라졌다. 잠시 후, 인민군복으로 무장한 내무서원인지, 특수요원인지 알 수 없는 인민군이 다가 왔다.

그는 봇짐을 뒤지더니 별다른 의심은 하지 않고 각자 소지하고 있는 우리나라 지도만 압수했다. 조사 받고 난 즉시, 이판사판으로 음식을 구걸했다. 그 구걸이 먹혀들어 흰쌀밥에 쇠고기 국을 배가 탱탱하게 꽉 차도록 푸짐하게 먹었다. 그것으로 봐서 그 음식은 인민군이 간밤에 이곳 마을을 점령하자 약탈한 소를 도살하여 요리한 음식을 먹고 남긴 것이었다.

그날은 이 마을의 빈집에서 일박하기로 했다. 잠을 청하려 할 때, 또 다른 농가의 넓은 마당에는 인민군이 오락회를 시작했다. 그 오락회는 따발총으로 집총한 여군 집단도 있었다. 그 여군도 그들끼리 남성군인처럼 어깨총, 앞에총, 엎드려 총 등의 각개 총검술을 했다. 그 장면은 남성군인들을 뺨칠 정도였다. 총검술이 끝난 다음은 군가를 합창했다. 그 소리도 남성군인을 능가할 만큼 씩씩했다.

그 상황은 여군도 야전에서 보병으로 참전하고 있다는 장면이다. 그 모습을 보고 북한은 6⦁25전쟁의 승리만을 위해 전투력이 있다고 판단되는 젊은 청년은 남녀를 구분하지 않고 모조리 총동원해서 오래 전부터 강도 높은 훈련을 시켜 야전에 참전토록 한 것으로 확인된 것이다.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어 놓은 검문

이튿날 정오쯤 안동읍내 변두리에 도착했다. 읍내는 유엔군 폭격기의 폭격으로 불타고 있었다. 불은 타면서 번지고 있어 일부 중심지역은 불바다가 되고 있었다. 오고 보니 불타고 있는 곳은 가지 말라는 괴산읍 어느 변두리 농가에서 알려 준 말을 어기게 된 것이다.

대동아전쟁 때 일본군 소총으로 무장한 그 지역 좌익계청년들에게 연행됐다. 그들은 헛간 같은 허름한 빈 창고에 연행하자마자 닥치는 대로 얼굴과 턱, 어깨 등을 주먹으로 치고 허리와 엉덩이를 야구방망이나 야전용 침대마구리로 후리 때렸다. 또 일본군 군화를 신은 구둣발로 엉덩이와 장딴지에 멍이 들고 피가 줄줄 흐르도록 깠다. 그렇게 극심하게 고문하는 것은 우리를 이미 반동분자로 낙인을 찍어 놓고 확인하기 위한 절차였다.

그 행위를 추궁할 때 대구에서 반동행위를 한 것을 봤다고 우겼다. 고향이 포항인 우리는 대구는 상경하기 위해 대구역에서 경부선 열차를 환승하기 위한 대기시간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그들은 우리를 그들이 강요하는 주장대로 답이 나올 때까지 모질게 고문했다. 호진이는 럭비선수답게 키 크고 체격이 우람해 맷집이 좋아 영구와 나보다 더 많이 구타당했다.

조사 받은 옆 자리에는 국군 이등상사(부사관 급 중사)가 고문을 당해 신음하고 있었다. 그는 턱이 뒤틀린 상태에서 입속에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다. 두 눈은 구타에 의해 찢긴 상태로 피멍이 되어 있고 눈알은 살갗에 툭 튀어나와 있었다. 정수리 쪽에서 흘러내린 핏자국은 머리카락과 얼굴, 군복에 말라붙었고 군복은 바리바리 찢어져 있었다. 우리를 고문하고 있는 사이에도 그 군인을 고문했다. 물어도 신음하고 있어 말이 나오지 않고 있었다.

신음도 시들시들 죽어가는 소리였다. 그런데도 아무런 대답이 나오지 않으면 나올 때까지 구타했다. 견디지 못해 억지로 대답은 해도 턱이 비틀려 있어 벙어리가 말하듯 '버∼버'거리기만 했다. 그래도 알아들을 수 있을 때까지 개패 듯 구타했다. 그 광경을 보고 포로병을 죽을 때까지 두들기는 행위는 천하가 공노할 비인간적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우리는 그들의 고문을 세 시간 넘도록 견뎠다. 온갖 비명을 지르면서도 그들이 우기는 반동운동을 했다는 질의는 실제로 한 적이 없었기에 끝끝내 부정했다. 봇짐 속을 샅샅이 뒤지고 뒤져도 그에 대한 근거는 나오지 않아 마지못해 풀어 주었다. 풀려난 초기에는 개죽음만 면했을 뿐 바로 서지 못해 엉금엉금 기면서 걸었다. 그런 걸음으로 화염에 싸이고 있는 거리에서 머리에 쓴 밀짚모자를 떨어뜨리고도 줍지 않고 서둘러 빠져나와 낙동강을 건너느라 아픈 것은 둘째로 하고 정신 차릴 겨를도 없었다.

▶ 향토출신 군관

낙동강을 건너 동해안 방향으로 가는 국도변에는 과수원이 있었다. 그 과수원에는 설익은 조생종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어 배가 꽉 불거지도록 따 먹고 각자 단봇짐 속에 가득 채웠다. 사과로 배를 채운 것이 탈이 났다. 그날 밤에는 모두 설사를 하느라 밤새도록 잠을 설쳤다.

다음날은 청송군진보면에 도착했다. 도착했을 때는 청송읍 쪽에서 국군의 박격포 포탄이 터지는 '콰 광 쾅∼'거리는 소리가 종전보다 요란하게 들리고, 동해의 어느 해역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발사한 포탄이 머리 위로 '희유, 희유, 희유∼'거리면서 날아가고 있어 청송읍 쪽 깊은 산중의 어딘가 최전방전선이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고향으로 가려면 청송읍을 거쳐 가는 내륙 쪽과 영덕군영덕읍을 거쳐 가는 동해안 쪽으로 가는 두 길이 있다. 어느 쪽을 택해도 내 고향을 가는 데는 모두 험준한 산봉우리를 수많이 넘어야 하고 거리는 비슷하다. 가고자 하는 전방은 한창 전투를 하거나 인민군이 점령해 있는 지역, 국군이 탈환한 지역, 전투가 시작되려는 지역 중의 한 가지일 것이다.

진보약수터 나무그늘 밑에 앉아 청송읍 쪽에서 걸어온 나그네가 준 엿과 약수로 배를 채우면서 쉬고 있을 때, 그 나그네는 청송읍과 주변의 산악지대는 상당히 많은 국군이 인민군과 전투를 하고 있다. 그곳을 벗어나면 다시 인민군이 점령해 있다고 했다. 청송읍을 거치는 것은 영덕읍을 거치는 것보다 전투지역을 더 많이 거쳐야 하는 뜻과 같다.

우리는 전투가 적을 것으로 예상되는 영덕읍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걸었다. 걸어가고 있는 국도에는 청명한 대낮인데도 통행인을 볼 수 없어 으스스했다. 그런 지역에서 저녁노을이 들 무렵, 국도변 외딴 빈 초가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기 위해 여장을 풀고 안동지역의 과수원에서 딴 사과를 먹고 있었다. 그때 전투모와 야전용 군복에 나뭇잎을 소복하게 곶은 완전무장한 두 명의 인민군 병사가 숲 속에서 나타났다. 그들은 따발총 가늠쇠에 손가락을 넣고 사격할 자세로 접근하면서 우리들의 행선지를 물었다.

행선지를 알고 난 그들은 소속된 부대에 고향이 우리와 똑같은 군관(인민군장교)이 있다고 했다. 그 군관에게 알리면 이곳에 올 수도 있을 것이라는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잠시 후, 그 군관이 나타났다. 우리를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다는 것을 마땅찮게 여기면 영락없이 그 자리에서 살려두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조마조마하던 중, 그 군관은 우리들에게 고향에서 거주하고 있는 지역만 대충 묻고 자기 자랑만 했다. 중⦁고등학생 때 좌익계학생운동을 하다가 경찰서에 연행된 자랑만 했다.

그 투쟁경력을 북한에서 인정받아 김일성대학에 입학했다. 재학 중, 남조선해방을 위해 군관교육을 받고 정식 군관으로 임관되어 참전하고 있다. 지금은 혁혁한 공적을 인정받고 있는 군관임을 자처했다. 그는 내가 고향에서 다녔던 6년제 중학교에 3년이나 4년 선배인 것 같았다. 하루나 이틀 후면 고향을 해방시킬 것이라 예언했다. 그때는 고향에서 반대운동을 하고 있는 학생과 청년을 보복할 뜻도 밝혔다. 그런 다음

"고향에서 다시 만나자"

는 말을 남기고 순식간에 사라졌다.

인민군은 밤에만 전투한다. 밤이 깊어지면서 국군과 인민군이 교전하는 총소리가 가까이 들렸다. 그러나 그날 밤의 총알은 사정거리를 벗어난 것인지 총알이 땅에 박히는 소리가 힘없어 보였다. 그런데도 무서웠다. 보다 안전지대로 옮기려 해도 앞이 보이지 않는 깊은 밤이 됐다. 그날 밤의 생사는 운명에 맡기기로 하고 그 외딴집에서 지냈다.

▶총알 밭에서 살아난 기적

그 다음 날도 어제 방향대로 영덕읍내 쪽으로 걸었다. 그 길을 따라 계속가면 산세가 험준하고 산봉우리가 첩첩인 황장재가 나온다. 가도 가도 그 재는 나타나지 않고 갈수록 영덕읍강구 앞바다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발사한 함포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소리만 점점 커지고 가깝게 들렸다. 그 소리를 들으면서 어느 산속의 국도를 걸었다. 그 국도의 도랑 옆 풀숲 속에는 실탄상자가 즐비해 있어 총알 밭을 걷고 있었다. 자꾸만 죽을 곳을 찾아가는 것 같아 불안했다. 걸음을 멈추고 사방을 살피니 인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낯선 길의 일부를 되돌아 다른 방향으로 갈 생각을 해 봤다. 그런 길이 있는지…?

있더라도 안전이 보장될 것 같지 않아 진퇴양난이 되어 길 한가운데에서 망설였다. 그러던 중 서울에서 유학하고 있는 이 지역 출신인 중학생이 우리가 걸어 왔던 쪽에서 헐레벌떡거리면서 걸어왔다. 그는 이 지역 지리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 방향을 돌려 그 집에서 하룻밤을 지내기로 했다. 그를 따라 주왕산 허리부분을 향해 한참 걸었다. 이 길도 황장재를 향해 걸었던 길처럼 통행인은 우리 밖에 없어 허전한 두려움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주왕산 위쪽 파란 하늘을 쳐다보면서 넓은 고갯길을 걸으니 상쾌해서 살 것 같았다.

주왕산 속을 어느 정도 걸었을 때, 어느 산마루 쪽에서 산허리 모롱이를 돌며 내려오고 있는 군인이 있었다. 멀리서 본 순간 국군인지, 인민군인지 알 수 없어 어리둥절했다. 국군이면 이곳은 인민군의 침략을 방어하고 있는 지역이고 그렇지 않으면 인민군 점령지역이다.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 그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철모가 벗긴 채 권총도 소지하지 않은 국군장교였다.

군복은 여기저기 찢어졌고 얼굴은 군데군데 황토 흙이 누렇게 묻어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어께는 축 늘어졌고 걸음은 어기적어기적 걷고 있어 며칠 굶은 것 같았다. 한쪽 어깨에는 양철로 제작된 납작한 육군 중위 계급장이 흔들거릴 정도로 늘어지게 부착되어 있고 다른 한쪽은 있지도 않았다. 눈은 거의 감은 채 천천히 내려오고 있었다. 주왕산에서 인민군과 전투 중 부하를 잃고 무작정 걷고 있는 것 같았다. 그를 본 나는 '전쟁에는 승자만이 살아남는다'는 진리를 현장에서 목격한 셈이다.

패잔병 장교의 모습이 멀어진 다음은 어느 산봉우리 허리부분을 넘은 순간이다. 갑자기 높은 곳의 숲 속에서 우리 쪽으로 점프하다시피 부리나케 내려오고 있는 무장한 이십여 명의 사람을 만났다. 그들은 따발총이나 소련장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인민군복은 입지 않고 개똥모자에 가벼운 봇짐을 지고 있는 작달막한 십대 소년들이었다. 모두 민첩한 행동을 하고 있어 기세가 등등했다. 그것으로 봐서는 빨치산이었다. 대장처럼 보이는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 나타났다. 그는 우리들의 신분과 행선지를 물은 다음, 집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대원들을 인솔해 어디론가 번개처럼 사라졌다. 의심스러운 점이 있으면 그 자리에서 사살한다는 소문난 실제의 빨치산을 야전에서 내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조사 받은 순간, 이제까지 걸어왔던 고생의 보람도 없이 죽게 됐다는 생각이 나서 가슴이 철렁했다.

해가 떨어지고 어두움이 들었을 즈음 학생 집에 도착했다. 그 집에는 그의 부모와 형제들이 피란 가고 없었다. 피란 갔다 돌아온 이웃집은 몇 있었으나 등불을 켜지 않고 있었다. 불빛이 비치면 앞산 너머 강구 앞바다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함포사격 한다. 그런 점으로 볼 때 이곳은 인민군이 점령해 있던 것을 국군이 탈환하려고 작전 중인 느낌이 들어 총알 밭에 잠자게 된 것 같았다. 부엌 아궁이에 불을 지필 수 없어 밥을 짓는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어 낙동강 주변의 과수원에서 갖고 온 사과로 저녁을 대신했다.

밤이 깊어지면서 소총소리와 포탄소리가 콩 볶듯이 들렸다. 함포가 머리 위로 날아가는 '희유, 희유, 희유∼'거리는 소리, 땅에 부딪치는 '콰∼광 쾅쾅'거리는 소리는 그치지 않았다. 가까이 떨어지는 함포소리는 하늘을 두 쪽으로 쪼개 듯 천둥치는 것 같았다. 그 소리에 무섭고 두려움에 콩알만큼 작아진 가슴이 요동치는 고동은 진정되지 않았다.

한쪽 귀퉁이 방구석에 쪼그려 앉았다. 쪼그려 앉은 자세로 연속적으로 들리는 폭음소리에 깜짝깜짝 놀랬다. 그와 동시에 어깨는 들썩이면서 턱은 다물어지지 않고 덜덜 떨렸다. 팔과 다리도 오돌 오돌 떨려 안정된 자세가 취해지지 않았다. 오금은 아예 딱 붙어버려 꿈틀거려지지 않고 석고처럼 굳어졌다. 고막은 멍멍 해지면서 옆 사람이 큰 소리를 질러도 들리지 않았다. 그날 밤은 그런 상황 속에서 생사에는 신경 쓸 겨를 없이 넋을 잃은 얼빠진 사람이 됐다가 저절로 깊은 잠에 빠졌다.

잠이 깬 새벽하늘은 포탄소리가 멎었다. 주변에는 인민군 따발총이나 소련장총 소리가 끊어지고 국군의 소총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는 인민군이 전멸됐다는 신호였다. 국군의 소총소리마저 멎은 그날의 청명한 아침은 6⦁25전쟁 중 내가 알게 된 국군이 승리한 최초의 희소식이었다. 그 소식은 불바다가 된 치열한 전투를 하는 총알 밭에서 총칼 없이 살아난 기적이었다.

▶ 전선통과

간밤에 전쟁터였던 마을을 벗어나 동해안 방향을 향해 산을 넘고 또 넘어 옥계천에 왔다. 그 천의 냇가에 앉아 단봇짐 속에 남겨 둔 과일을 몽땅 들어내어 먹었다. 다음은 그 냇물을 건너 가파른 언덕을 넘어 영덕군장사면에 도착했다. 도착한 즉시 그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집집마다 텅 비어 있어 그날 아침도 굶었다.

그 마을 광장에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인민군이 있었다. 그는 오른쪽 허리에 권총을 차고 있었다. 또 어깨에서 오른쪽 허리까지 대각선으로 질러 맨 가죽 멜빵에 가죽가방이 매달려 있어 정장한 인민군 군의관이었다. 어깨에 부착된 계급이 대좌(대령)였다. 그 정도면 사단 이상 군단급 야전병원장일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간밤의 전투에서 부상한 인민군부상병을 야전병원으로 옮겨 줄 것을 요청했다. 서울에서 여러 날 굶으면서 걸어오던 중, 안동지역의 과수원에서 딴 설익은 사과만 먹었던 설사가 끊이지 않는다고 애걸하면서 거절했다. 설사로 핼쑥해진 모습을 본 그는 고위급 군의관답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것 또한 우리일행이 살아난 기적이었다.

동해안 7번 국도는 장사마을을 동서로 양분하고 있다. 서쪽은 인민군이 장악해 있고 동쪽은 동해연안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이 보호하고 있어 그 국도는 인민군과 국군의 동해안 전선이었다. 상공에는 유엔군 헬리콥터가 잠자리처럼 저속과 저공으로 비행하고 있어 그 국도는 국군의 최전방전선의 요새역할을 하고 있었다. 또 그 국도는 인민군 군의관이 있던 곳에서 지척지간이다. 우리일행은 전투가 없는 청명한 대낮에 총소리 한 방 듣지 않고 동해안 전선인 그 국도를 무난히 통과했다.

7변 국도의 동쪽 장사마을 이남의 동해연안도 유엔군 항공기와 구축함이 방어하고 있어 안전지대였다. 우리일행은 그 국도의 남쪽 영일군송라면에 도착했다. 그 당시 영일군청은 포항시내에 있어 송라면과 그 이남의 영일군은 모두 내 고향(지금은 포항시)이다. 해질 무렵에는 송라면 남쪽 청하면 월포어촌에 도착했다. 그 어촌백사장에서 인민군이 내 고향 포항시가지를 기습 점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북쪽 시민은 시가지 북쪽으로, 남쪽 시민은 시가지 남쪽으로, 또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하던 시민은 포항송도해수욕장으로 분산됐다는 소식도 들렸다. 우리 집은 시내 남쪽에 있다. 남단에는 형산강이 있어 우리 집 가족은 틀림없이 형산강 이남으로 피란 갔을 것이라 짐작했다. 어떻게 하더라도 부모형제를 찾아야 한다. 그 생각을 하니 죽도록 천리를 걸어 전선을 통과해 왔던 내 고향이 이 모양이 되었으니 앞이 캄캄해지도록 울화통이 터졌다.

마침 피란민이 우글거리고 있는 월포어촌 백사장에서

"야∼! 오래간만이다"

라는 말을 하는 영구의 친구가 있었다. 그는 영구가 서울로 유학하기 전, 바로 옆 좌석에 앉은 절친한 급우였다. 그의 어머니가 저녁을 준비하고 있어 안동군풍산면의 어느 마을의 적진(敵陣)에서 국밥을 먹은 후 닷새 만에 공복을 진정시켰다.

그날 밤은 잘만한 빈집이나 빈방이 없어 그 어촌백사장에 뒤집어 놓은 돛단배 밑의 모래 위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은 월포어촌을 한 바퀴 돌았다. 그곳 어민들은 수많은 피란민 등살에 시달려 싸리나무 대문이 열려있는 집이 없어 아침을 구걸하려는 말도 붙여 보지 못했다. 그때부터 우리일행은 각자 개인행동을 하여야만 누구든 하루 한 끼만이라도 구걸될 것 같았다.

헤어진 첫날은 내가 알고 있는 피란민이 없어 하루 종일 굶었다. 밤에는 좌익계청년들이 인민군 무기와 음식, 부상병 등을 운반하는 부역에 피란민을 연행한다. 백사장에 엎어 놓은 돛단배 속을 뒤지기도 한다고 알려져 있어 그날 밤은 월포어촌 앞산의 울창한 풀숲 속에서 홀로 잤다.

다음날은 월포어촌백사장보다 남쪽으로 걸었다. 몇 어촌을 거쳐 흥해읍 칠포남단의 백사장(칠포해수욕장)에 도착했다. 그 백사장에 접해 있는 산 밑에 담이 없는 외딴 빈집 평상에 앉아 시원한 바닷바람을 쐬면서 휴식했다.

그 집 남쪽에는 곡강천 개천이 접해 있다. 그 개천의 냇물을 건너면 봉림불이다. 봉림불로 가려고 일어나려던 찰라, '희유∼쾅' 하는 함포소리가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들렸다. 정신을 차렸더니 그 소리는 봉림불에서 피란민들이 소를 잡는 것을, 앞바다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좌익계청년들이 인민군식용을 위해 소를 잡는 것으로 오인하고 함포사격을 했다.

그 사격에 여러 명의 피란민이 희생된 소동이 일어났다. 내가 휴식했던 평상에서 한 발짝 먼저 일어나 곡강천을 건넜더라면 소 잡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쇠고기를 얻어먹으려 어슬렁거렸다가는 함포사격에 희생될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찔했다.

그 소동으로 반대 방향인 북쪽 칠포어촌을 향해 걸었다. 도중에 초등학생 때 급우였던 현해를 만났다. 그도 나처럼 단신이었다. 그의 태생지는 이 지역 농촌이라 식견이 나보다 풍부했다. 그와 함께 그가 알고 있는 칠포어촌의 어느 어민 집에서 보리밥을 얻어먹고 그 집에서 잤다. 그 보리밥은 삼 일만에 먹은 음식이었다.

이튼 날은 그와 함께 칠포어촌의 북쪽 이웃 마을인 청하면 청진어촌으로 이동했다. 그 어촌에는 현해의 외가가 있다. 그 집은 그 마을에서 유일하게 보릿고개를 타지 않는 기와집이었다. 집 주인은 칠순이 넘은 해박한 노인이었다. 그 노인이 주선해 준 흰쌀밥을 푸짐하게 먹고 모처럼 늘어지게 휴식했다. 밤에는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지 않기 위해 숨어야 할 마땅한 곳이 없어 장독대에 있는 김장용 큰 독안에서 잤다. 자고난 이른 아침, 장독 뚜껑을 열고 밖으로 나왔더니 현해가 보이지 않았다. 간밤에 숨었던 독 안이 갑갑해 바람을 쐬려 밖으로 나왔다가 그만 좌익계청년에게 연행되었던 것 같았다.

다시 혼자가 되어 되돌아왔던 길을 따라 걸었다. 잠잠해진 봉림불을 지나 흥해읍 용한어촌을 거쳐 우목어촌에 왔다. 그곳에서 뜻밖에 피란 온 할머니, 셋째 숙부내외와 그의 가족을 만났다. 그날 저녁은 숙부님이 피란 때 준비한 쌀이 남아 있어 요동치는 뱃속을 진정시켰다.

우목어촌에서 알게 된 것은 서울에서 귀향할 때 입고 출발한 흰 체육복이 땀에 찌들대로 찌들었고 황토가 누렇게 묻어 있었다. 또 궁둥이 쪽은 팬티가 외부로 들어날 정도로 비쳤다. 비치는 것을 몰랐던 것은 밤에 잘 때도 입고 잤기 때문이다. 그렇게 험해진 체육복을 할머니가 발견하셨다. 그리고 그 지역 주민이 작업 때 입던 허름한 카키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카키복은 여름용이 아니고 미군들이 입고 있는 두툼한 군용 구호품이었다. 맞지도 않고 낡을 대로 낡았다. 피란지에서는 그런 옷을 입고 있으면 거지로 취급하기보다 여러 모로 의심 받기에 좋을 것 같았다.

우목어촌은 높은 언덕 위에 있는 마을이다. 해안에는 암반이 많아 달 없는 밤에는 어두워서 해안으로 걸어 다니는 통행인이 없다. 그날은 그런 캄캄한 밤었다. 바닷물 위의 암반 틈에서 동원될 걱정 없이 잠을 잘 잤다.

▶ 재차 전선통과

우목어촌에서 자고 일어난 다음날 아침, 국군은 내 고향시가지를 탈환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 탈환은 닷새 전 장사마을에서 전선을 통과한 것과는 달리 인민군이 내 고향시가지를 기습공격 한 것을 탈환했다가 후퇴한 것을 다시 수복한 소식이었다.

첫 번째 후퇴는 월포어촌에 도착했을 때 들었으나 첫 번째 탈환과 재차 후퇴는 언제였는지 듣지 못했다. 어쨌든 두 차례 뺐기고 빼앗는 동안 원한도 없는 우리 국민끼리 '얼마나 치열한 격전을 했을까?' 얼마나 젊은 청년들이 희생됐을까? 얼마나 시가지는 파괴됐을까? 또 시민들은 언제쯤 제집으로 귀가할 수 있을까? 그 생각만 하면서 한시라도 빨리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우목어촌을 출발했다.

우목에서 남쪽 이웃 어촌은 흥해읍 죽천어촌이다. 그 어촌백사장에는 유탄이 '희유∼'거리면서 모래 속으로 폭폭 들어가는 총알 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 유탄은 유효사정거리에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민군이 바로 내 앞에서 사격한 실탄처럼 느껴져 불안했다.

피란민은 스스로 대열을 지었다. 그 대열은 내 고향 시가지 남단을 거쳐 형산강을 건너 연일읍에서 해체한다. 도중에는 검문을 받게 되어 있었다.

첫 번째 검문은 죽천어촌과 그보다 남쪽인 포항시가지 최북단의 여남어촌 사이에 불거져 나온 바닷물이 철렁거리는 산모롱이다. 그 바닷가 쪽에는 하얀색 한복을 입은 시신이 바닷물에 철렁거리고 모롱이 쪽에는 얼굴을 새까맣게 칠을 하고 완전무장한 두 명의 국군헌병이 피란민을 검문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실탄을 장전한 칼빈총을 앞에총하고 가늠쇠에 손가락을 끼고 사격할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내 차례 때 검문하던 헌병은 나를 한쪽 모퉁이에 대기시키려 했다. 그 순간, 총살당할 것 같아 가슴이 철렁거려지더니 비실거려졌다. 맞지도 않는 낡은 카키복을 입은 것이 원인이었다. 앞에서 먼저 검문도 하지 않고 통과한 할머니와 숙부내외는 나를 서울에서 귀향 중 만난 가족이라고 사정한 것이 통해서 무사했다. 그러나 벌벌 떨리는 심리적인 고통은 오래도록 지속됐다.

두 번째 검문은 여남어촌에서 한다. 그 어촌백사장에서 검문하고 있는 장소로 걸어가던 중, 나보다 연상인 초등학교와 중학교 급우였던 동창생 흥덕이와 마주쳤다. 그는 6⦁25전쟁이 일어나자 고등학교 재학 중, 현지 입대하여 피란민 차림으로 전선을 넘나들었다. 내가 밥을 구걸하느라 고생하는 꼴을 봤다고 하면서 검문을 받으려는 줄을 서기도 전, 부대지휘소로 바로 안내했다. 그곳에서 과일과 건빵, 다과 등을 푸짐하게 대접받고 휴식도 취했다.

세 번째는 두호동, 항구동과 학산동을 거쳐 번화한 동빈동 시가지에 위치한 하마다(濱田) 사무실에서 검문을 받는다. 인민군이 내 고향을 두 차례나 점령했을 때 인민군에 동조했거나 좌익계청년이 무고한 시민을 살상했다. 그 사무실에서는 그들을 색출하기 위해 시민과 군인이 합동으로 검문하고 있었다. 그 검문은 내가 서울에서 귀향 중이고 입은 옷이 맞지 않는 카키복에 의심을 품고 나를 정보장교가 강도 높게 심문하는 2층 사무실로 인계됐다.

이제까지 걸어 와서 귀향했던 것이 허사가 되고 어딘가 송치될 것 같았다. 마침 정보장교 옆 좌석에는 아버지를 잘 알고 있는 영관급 향토방위군장교가 앉아 있었다. 그의 도움으로 세 번째 정보장교의 검문도 무사했다. 그때 그 장교는 아버지가 울산방어진 항구의 부두 어판장에서 피란 중이라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며칠 후에는 군용선(軍用船)으로 그곳에 가게 된다. 그땐 '자네가 귀향했다'는 소식을 전하겠다고 말씀하셨다.

동빈동과 남빈동 부둣가를 거쳐 죽도동을 걸었다. 죽도동 남단에는 형산강으로 가는 긴 봇둑이 있다. 그 봇둑을 따라 대도동을 거쳐 상도동을 지나면 형산강 강둑과 연결된다. 형산강 다리는 파괴되었으나 형산강 강둑에는 강을 건너 연일읍으로 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있다. 그 다리를 건너 해산하면 아버지를 만나려 갈 예정을 잡고 거던 중, 고희를 훨씬 넘긴 할머니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됐다. 대도동 봇둑의 동쪽은 염전지역이다. 할머니를 모시고 염전사업자인 동행중인 숙부 집에서 지냈다.

▶ 폭풍이 멎은 날

국군은 어저께 수복했던 지역을 작전상 불리한지 통행금했다. 할머니를 비롯한 우리일행은 염전지역을 벗어날 수 없어 숙부 집에서 머물게 됐다. 아침부터 숙부 집 상공에는 헬리콥터가 쉴 새 없이 하늘을 배회하면서 정찰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쌕쌕이도 하루에 수 십 번 서산을 넘어가는 소리로 요란스러웠다. 밤에는 야광탄의 불빛과 소총사격소리, 영일만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발사한 함포소리에 귀청이 멍멍해졌다.

염전사업자는 염전을 최소한 수만 평 이상 경작하고 있어 가까운 이웃이 없다. 숙부 집도 이웃이 없는 외딴집이다. 6⦁25전쟁이 일어난 초기의 한동안은 장마였다. 장마가 끝난 뒤로도 염전사업자는 소금을 생산하지 않고 방치했다. 원인은 전쟁이 일어나 시국이 어수선해졌기 때문이다. 방치해 둔 염전에는 빗물과 바닷물이 합류되어 광활하게 넓은 대도동 염전은 바다가 되었다. 바닷물에 잠긴 염전 길은 육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평소에 익숙지 못한 사람은 염전 물을 헤치고 통행할 수 없게 됐다.

숙부는 전쟁이 일어나기 전, 소금생산에 필요한 인부와 식구들의 양식을 넉넉히 비축해 두었다. 또 내 고향은 제일염을 생산한다. 제일염을 생산하려면 화력이 좋은 청솔을 땔감으로 한다. 숙부 집에는 땔감도 풍부히 비축해 두었다. 피란 갔다 돌아왔는데도 두고 간 것은 그대로 있었다.

숙부 집은 염전 중에서도 깊숙한 곳에 있다. 그 집을 기준으로 동쪽 해도동 초입까지는 아득히 펼쳐 있는 염전뿐이다. 서쪽 서산까지는 칠성천이 흐르는 봇둑 너머로 논과 서산 밑의 농가뿐이다. 남쪽 형산강 강둑까지는 염전과 대도동, 상도동지역의 채소밭이다. 또 북쪽 죽도동지역의 농촌 마을까지는 물에 잠겨 있는 갈밭과 늪지와 논만 있다. 숙부 집을 기준으로 했을 때, 그 지역까지의 거리는 시야가 밝은 날에도 희미하게 보일둥 말둥 할 정도로 멀었다. 그런 거리에서 인민군과 국군이 소총사격을 해도 실탄은 유효사정거리 밖이다. 시야에는 장애물이 없어 그들의 동태와 전투장면도 어느 정도 관찰할 수 있다.

숙부 집에서 피란한 삼일 째 된 초저녁, 서산 밑 대잠동 뒷산 능선에서 인민군이 국군을 향해 사격한 가벼운 전투가 있었다. 국군은 즉시 박격포와 영일만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의 함포로 그들을 일격하니 잠잠해졌다. 어두워지자 '딱∼콩', '따따따∼', '따르륵∼', '더럭더럭', '쉬익', '쓰윽' 등 인민군과 국군 사이에 각종 무기로 사격하는 전투소리가 밤새도록 콩 튀기 듯 했다. 그 전투로 인민군은 내 고향 시가지를 세 번째 점령했다. 형산강 북쪽 강둑은 인민군, 남쪽 강둑은 국군이 경계하고 있는 동해안 최전방전선이 됐다. 그렇게 되자 숙부 집이 있는 염전은 인민군이 점령한 지역이 됐다. 그러나 인민군은 염전을 진입할 수 없어 숙부 집에 있으면 안전했다.

후퇴한 국군은 그냥 있지 않았다. 날마다 낮에는 헬리콥터가 염전지역과 그 주변을 빙빙 돌면서 인민군의 동태를 정찰했다. 밤에는 국군이 형산강 서쪽 방향의 경주군안강읍 쪽에 주둔한 인민군 진영을 향해 집중 사격했다. 또 영일만에 정박한 유엔군구축함에서 함포사격을 소총처럼 비 오듯 발사했다. 숙부 집에서 야광탄이 날아가는 방향과 함포가 폭파한 곳을 보고 그 전투의 격전지를 짐작했다. 그 전투는 국군이 대승한 안강전투였다.

인민군이 안강전투에서 전멸당한 며칠 지난 밤, 국군은 인민군 엄호가 수많이 있는 형산강 북쪽 강둑의 상공을 향해 조명탄을 무수히 발사하여 대낮처럼 밝히고 인민군 엄호 속을 선명하게 비치게 했다. 쌕쌕이는 그 엄호 속을 불바다가 되도록 소이탄을 발사했다. 강 건너 국군도 집중 사격했다. 엄호 속의 인민군은 총 한 방 쏘지 못하고 전멸됐다. 그 여세로 국군과 유엔군은 북진해 내 고향 시가지를 세 번째 탈환했다. 포항시가지 남쪽 지역인 남빈동, 중앙동, 여천동, 신흥동, 대흥동과 길게 뻗은 서산 밑의 용흥동 일부 등의 가옥은 폭풍에 의해 길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폐허가 됐다.

울산방어진에 피란한 아버지는 나보다 몇 시간 먼저 폭풍으로 웅덩이가 된 우리 집에서 넋을 잃고 한숨만 쉬고 계셨다.

문화부 jebo@i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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