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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영화 `나랏말싸미` 역사왜곡인가 새로운 관점인가

양유창 기자
입력 : 
2019-07-25 15: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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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유창 기자의 시네마&] 지난 24일 개봉한 영화 '나랏말싸미'가 관객과 네티즌의 뭇매를 맞고 있다. 쟁점은 역사 왜곡 여부다. 제작진은 도입부에 '영화는 한글 창제설 중 하나를 영화화한 것'이라고 밝혔지만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그런 자막을 넣고 싶지 않았다"고 밝힌 것이 논란을 더 키웠다. 영화는 박해일이 연기한 신미스님이라는 미지의 인물이 세종을 도와 한글 창제를 주도한 것으로 묘사한다. 산스크리트어, 티베트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한 신미스님은 송강호가 연기한 세종과 거의 '맞짱' 뜨면서 세상에 없던 새로운 언어를 하나씩 완성해간다.

그동안 한글 창제는 세종의 단독 업적 혹은 집현전 학자들과의 공동 작업의 결과물이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하지만 몇 년 전부터 불교계를 중심으로 신미스님의 존재가 부각되고 있는데 불교 신자인 신인 감독 조철현은 이를 적극 수용해 데뷔작을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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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계에 따르면 신미스님이 부각되는 이유는 △집권 초기에 불교를 탄압하던 세종이 신미스님에게 '선교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라는 길고 영광스러운 법호를 내릴 정도로 그를 총애했다는 것 △한글을 공동 창제한 것으로 알려진 집현전 학자들마저 한글 반포를 반대한 기록 △훈민정음의 글자 모양 17개가 고려시대 스님들이 한자 옆에 발음을 알리기 위해 새겨넣던 점, 선 등 각필 부호와 일치한다는 것 △연산군 때까지 발간된 한글 책의 65%가 불교 문헌이라는 것 △신미스님을 스승으로 삼은 세종의 아들 세조(수양)가 불전을 한글로 번역하는 일에 적극 나섰다는 것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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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에는 훈민정음 반포 이후인 1446년에야 비로소 세종이 신미스님을 알게 된 것으로 나오지만 불교계에선 조선왕조실록이 신미스님을 간신으로 묘사하면서 기록을 누락시킨 것이라며 신미의 스승 행호스님과 세종이 10여 년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고 주장한다. 영화에 자문으로 소개되고 영화 개봉 전 원작 논란에 상영금지 가처분신청을 제기하기도 했던 책 '훈민정음의 길- 혜각존자 신미평전'의 저자인 문화재 기록가 박해진은 세종이 직접 쓴 훈민정음 서문이 108자, 한문어지가 그 절반인 54자이고, 전체가 33장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 세종어지가 실린 '월인석보'가 108쪽인 것 등이 모두 불교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숫자와 관련 있고 이는 한글창제 기록에서 심미스님을 지운 대신 남겨둔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한글 창제에 신미스님이 기여했다는 것은 하나의 가설일 뿐 학계에서 인정받는 학설은 아니다. 숫자에 대한 집착은 불교판 '다빈치코드'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영화에 대해 평점 테러가 벌어지는 이유는 검증되지 않은 가설을 여름 대작 한국영화로 소비하기에는 찜찜함이 남기 때문일 것이다. 총제작비 130억원이 투입된 영화는 송강호라는 대배우를 캐스팅했는데 그 무게감 때문에 더 힘이 실린다. 영화는 픽션을 전제하는 한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는 매체지만,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는 한국인에겐 성역과도 같은 것이어서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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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기침 횟수까지 기록해놓을 정도로 꼼꼼한 사료인 조선왕조실록에 유독 한글 창제 과정은 누락돼 있다. 세종대왕이 만들었다는 기록은 존재하지만 설마 왕이 혼자 다 했을까 하는 의심이 집현전 학자들에 이어 이번엔 스님까지 끌어들였다. 하나의 가설이라는 것을 감안하고 보면 영화는 자모음 28자로 이루어진 한글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꼼꼼하게 담아 우리가 매일 쓰고 말하는 글자인 한글의 원리를 생각해보게 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기역'이라는 소리가 어떻게 'ㄱ'이라는 모양의 글자로 낙점됐는지, 된소리를 만드는 데 공헌한 거문고 소리, 자음과 모음을 합치는 과정 등이 흥미롭게 전달된다. 점과 선만으로 이루어져 단순하고 아름다운 한글의 원형을 보고 있으면 스티브 잡스 부럽지 않은 창조성이 결실을 맺는 순간 경외감을 느끼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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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호와 박해일이 이끌어가는 영화지만 고 전미선 배우가 연기한 소헌왕후의 비중도 제법 크다. 소헌왕후는 세종과 신미스님 사이가 멀어질 때마다 중재자를 자처하고 한글을 가장 먼저 부녀자들에게 보급해 문맹을 벗어나게 한 주체적인 여성으로 그려진다. 탕준상이 연기한 신미스님의 제자 학조와 상궁 이진아(금새록)의 알콩달콩 우정은 전반적으로 진중한 영화에 밝은 기운을 불어넣는 신스틸러로 손색이 없다.

[양유창 기자 sanity@m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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