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딩 오르는 '빌더링' 중 '프리솔로'
로프 없이 위기서 거듭남 보여줘
다이노 동작 중 몸 닐리는 ‘런지’
고난이도 기술로 절박함 드러내조정석·윤아 주연의 ‘엑시트’가 지난달 31일 개봉 이후 관객 430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 주말 500만 명을 넘을 기세다. ‘엑시트’는 코미디를 버무린 새로운 개념의 재난영화라는 평이다.
인근 유독가스 테러로 어머니(고두심) 고희연은 아수라장이 된다. 대학 산악부 에이스 출신인 아들 용남(조정석)은 연회장의 부점장 의주(윤아)와 함께 탈출에 나선다. 티저 영상으로 공개된 몇몇 장면에는 등반 코드가 숨어 있다.
이상근 감독은 “재난 속 젊은이들의 부침을 클라이밍이라는 소재로 빚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등반 전문가들은 장면마다 등반 코드를 곁들여 설명해 줬다. '엑시트'를 이미 봤다면 이 등반 코드를 곱씹어 되새기면 되고, 볼 예정이라면 보다 맛깔스럽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티저에서는 또 누나 정현(김지영)이 “하필 산악부가 뭐냐”며 용남에게 핀잔을 주는데, 루트 파인딩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의 의주가 옆에서 완등을 외치고 좋아하는데, 용남은 등반 중 추락하는 장면도 티저에 나온다.
최석문(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씨는 이 상황을 “추락은 클라이머가 용납해야 할 등반의 한 과정인데, 실제로는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며 “백수인 용남과 직장인 의주를 교차시키려는 것”이라고 평했다.
1975년 프랑스 파리의 56층(210m) 몽파르나스 빌딩이 빌더링의 첫 타깃이 됐다. 한국에서는 윤길수(62) 씨가 1998년 한국종합무역센터(253m)에 올랐다. 경범죄(불안감 조성)로 과태료 5만원이 부과됐다. 윤 씨는 당시 “외환위기로 지친 국민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최근 “그때 2시간 30분이면 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확보물이 금속 외관의 빌딩에 물리지 않으면서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38m마다 있는 경광등에 확보물을 설치해 올라갔다”고 밝혔다.
윤 씨는 로프와 확보물이라도 챙겼지만 프랑스의 알랭 로베르(57)는 장비도 없이 올라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베르는 2011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828m)를 6시간 만에 올랐다. 지난해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를 오르다 체포되기도 했다. 로베르는 “남북 화해 분위기 축하를 위한 등반”이라고 일갈했다.
이탈리아의 등반 영웅 발터 보니티(1930~2011)는 1954년 K2(8611m) 초등 때 등정 욕심에 사로잡힌 동료들(아킬레 콤파뇨니와 리노 라케델리)로부터 8100m 지점에서 셰르파와 함께 버림받았다. 죽음의 비박을 버텨냈다. 보나티는 그 충격으로 솔로 등반을 하게 됐다. 이듬해 프티 드뤼 남서필라를 5일 동안 홀로 오르면서 장비와 식량을 넣은 커다란 짐(홀링색)을 끌어올리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울분이 혁신을 부른 셈이었다. 이 기술은 약 10년 후 미국 요세미티 거벽 등반자들에게 전수돼 ‘홀링 테크닉’이라 이름 붙여졌다.
미국의 알렉스 호놀드(34)는 2017년 요세미티의 980m 거벽 엘 캐피탄을 프리 솔로로 올랐다. 세계 최초였다. 이 등반을 통해 찍은 다큐멘터리 ‘프리 솔로’는 올해 아카데미 장편 다큐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호놀드의 등반 장면을 찍은 스태프들은 당시 “죽음을 찍게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놀드는 촬영 중 갑자기 하기 싫어졌다며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무섭다는 이유였다. 이 다큐는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얻은 삶의 통찰과 자기애에 관한 정직한 고백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리 솔로를 개척한 독일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1960-1992)는 “죽음에 관한 사색을 통해서 삶의 진가를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모험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암벽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던 궐리히는 뜻밖의 장소에서 사망했다.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32세에 운명했다.
이상근 감독은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인 김자비(32·큐브클라이밍)에게 자문해 고급기술을 표현하며 절박함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김자비의 동생은 스포츠 클라이밍 여제 김자인. 형 김자하도 클라이밍 선수다.
모스 부호는 21세기 들어 종말을 맞이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모스 부호를 인공위성 식별장치로 대체했다. 1997년 프랑스 해군은 모스 부호 사용을 중단하면서 ‘수신자 모두에게 알림. 영원한 침묵에 앞선 우리의 마지막 함성’이라는 무전을 보냈다. 1999년 미국에서의 모스 부호 중단 신호는 모스 부호를 창안한 사무엘 모스가 1844년에 보낸 것과 똑같았다. ‘신이 낳은 것이 무엇인가?’
양쪽으로 팽팽히 친 로프에 손과 발로 매달려 건너가는 방법이 있다. 또 로프 위에 엎드린 채 체중을 싣고 발을 로프에 휘감아 양손으로 로프를 잡아당기며 전진하는 방법도 있다. 후자는 완력이 약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밸런스 유지가 힘들며 몸이 거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용남과 의주는 후자를 택한다. 티저 영상에는 로프 위 의주의 몸이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명희(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씨는 “도로의 유독가스라는 악재를 피하기 위해 티롤리안 기술을 선보이는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용남과 의주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기네스에서 인정한 가장 긴 티롤리안 트래버스는 1550m. 2008년 불가리아의 릴라 산군에 설치됐다.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한 김미곤(47) 대장은 “안자일렌 기술은 날카로운 능선이나 8000m 고봉 등반 시 주로 사용하는데 한 명이 미끄러지면 다른 동료들이 버텨서 추락을 막아주지만, 종종 함께 떨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석정근(34·코아클라이밍) 씨는 “용남과 의주는 안자일렌으로 서로를 묶으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결의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상근 감독은 “자연에서 주로 행하는 클라이밍을 도심으로 가져와 재난 탈출의 방안으로 제시했다”며 “목적지를 향해 올라가는 클라이밍의 기본 행위와 '엑시트' 속 주인공들이 필사의 탈출을 행하는 모습이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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