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석·윤아 몸 묶은 안자일렌…'죽어도 살아도 함께'란 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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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8.10. 오후 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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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난영화 ‘엑시트’ 속 등반 코드
빌딩 오르는 '빌더링' 중 '프리솔로'
로프 없이 위기서 거듭남 보여줘

다이노 동작 중 몸 닐리는 ‘런지’
고난이도 기술로 절박함 드러내
조정석·윤아 주연의 ‘엑시트’가 지난달 31일 개봉 이후 관객 430만 명을 넘어섰다. 이번 주말 500만 명을 넘을 기세다. ‘엑시트’는 코미디를 버무린 새로운 개념의 재난영화라는 평이다.

인근 유독가스 테러로 어머니(고두심) 고희연은 아수라장이 된다. 대학 산악부 에이스 출신인 아들 용남(조정석)은 연회장의 부점장 의주(윤아)와 함께 탈출에 나선다. 티저 영상으로 공개된 몇몇 장면에는 등반 코드가 숨어 있다.
의주(윤아·왼쪽)와 용남(조정석)이 유독가스를 피해 질주하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이상근 감독은 “재난 속 젊은이들의 부침을 클라이밍이라는 소재로 빚었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등반 전문가들은 장면마다 등반 코드를 곁들여 설명해 줬다. '엑시트'를 이미 봤다면 이 등반 코드를 곱씹어 되새기면 되고, 볼 예정이라면 보다 맛깔스럽게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암길
극 중 가스 테러가 발생한 지역은 ‘암길’이다. 일부 관객들은 ‘어두운(暗) 길’이라고 유추하고 있다. 등반 전문가들은 ‘바윗(岩)길’로 보고 있다. 앞뒤 이름 모두 용남 같은 청춘들의 고단한 행로를 빗대고 있다. 이렇게 암길에 대한 해석을 놓고 의견이 분분하지만, 이상근 감독의 해명은 의외로 간단했다. “암길? 내가 사는 암사동과 길동을 합친 이름인데….”

루트 파인딩(route finding)
용남(조정석)이 대학 산악부 시절 인공암벽에서 등반 중 추락하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등반 루트를 잘 살펴본 뒤 자신의 몸을 어떻게 운용할지 숙고하는 과정. 티저 영상에는 “시작부터 완등 지점까지 빠른 판단으로…”란 대사가 나온다. 용남이 대학 졸업 후 선택의 갈림길에서 번번이 고배를 마시는 것은 루트 파인딩을 잘못해서라는 의미로도 볼 수 있다.

티저에서는 또 누나 정현(김지영)이 “하필 산악부가 뭐냐”며 용남에게 핀잔을 주는데, 루트 파인딩을 제대로 못 했기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과거의 의주가 옆에서 완등을 외치고 좋아하는데, 용남은 등반 중 추락하는 장면도 티저에 나온다.

최석문(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씨는 이 상황을 “추락은 클라이머가 용납해야 할 등반의 한 과정인데, 실제로는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도 많다”며 “백수인 용남과 직장인 의주를 교차시키려는 것”이라고 평했다.

빌더링(buildering)
바위가 아닌 빌딩을 오르는 행위. 빌딩(building)과 스포츠 클라이밍의 한 종목인 볼더링(bouldering)의 합성어다. 용남은 유독가스가 엄습하는 상황에서 가족을 구하려고 고희연이 열리고 있는 빌딩을 오른다.

1975년 프랑스 파리의 56층(210m) 몽파르나스 빌딩이 빌더링의 첫 타깃이 됐다. 한국에서는 윤길수(62) 씨가 1998년 한국종합무역센터(253m)에 올랐다. 경범죄(불안감 조성)로 과태료 5만원이 부과됐다. 윤 씨는 당시 “외환위기로 지친 국민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윤 씨는 최근 “그때 2시간 30분이면 오를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확보물이 금속 외관의 빌딩에 물리지 않으면서 줄줄이 떨어져 나갔다. 38m마다 있는 경광등에 확보물을 설치해 올라갔다”고 밝혔다.

윤 씨는 로프와 확보물이라도 챙겼지만 프랑스의 알랭 로베르(57)는 장비도 없이 올라가는 것으로 유명하다. 로베르는 2011년 세계에서 가장 높은 아랍에미리트 두바이의 부르즈 칼리파(828m)를 6시간 만에 올랐다. 지난해 롯데월드타워(123층, 555m)를 오르다 체포되기도 했다. 로베르는 “남북 화해 분위기 축하를 위한 등반”이라고 일갈했다.

솔로 등반
용남(조정석)이 어머니(고두심)의 고희연장에 유독가스가 엄습하자 가족을 옥상으로 탈출시키기 위해 솔로 등반을 하고 있다. 용남은 곧바로 프리솔로로 등반 스타일을 바꾼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용남이 혼자 고희연장의 빌딩을 오른다. 솔로 등반은 체력과 집중력이 절대적이다. 로프의 한쪽을 고정한 뒤 다른 한쪽은 자기 몸에 묶는다. 올라갈 만큼만 로프를 풀어야 한다. 이 과정을 수십 회 반복해야 한다. 이 등반 시스템에 익숙하지 않으면 재앙과 맞닥뜨릴 수 있다. 문성욱(48·바위를찾는사람들) 씨는 “솔로 등반은 용남이 위기에서 거듭남을 보여주는 실마리”라고 말했다.

이탈리아의 등반 영웅 발터 보니티(1930~2011)는 1954년 K2(8611m) 초등 때 등정 욕심에 사로잡힌 동료들(아킬레 콤파뇨니와 리노 라케델리)로부터 8100m 지점에서 셰르파와 함께 버림받았다. 죽음의 비박을 버텨냈다. 보나티는 그 충격으로 솔로 등반을 하게 됐다. 이듬해 프티 드뤼 남서필라를 5일 동안 홀로 오르면서 장비와 식량을 넣은 커다란 짐(홀링색)을 끌어올리는 새로운 기술을 선보였다. 울분이 혁신을 부른 셈이었다. 이 기술은 약 10년 후 미국 요세미티 거벽 등반자들에게 전수돼 ‘홀링 테크닉’이라 이름 붙여졌다.

프리 솔로
알렉스 호놀드가 미국 요세미티의 엘 케피탄을 프리 솔로로 등반하고 있다. [중앙포토]
용남은 빌더링 중 로프가 모자라자 아예 로프를 풀어버리고 등반한다. 솔로에서 프리 솔로로 등반 형태가 요동친다. 추락에 대비할 아무런 장비 없이 오직 몸뿐이다. 최석문 씨는 “가족을 구하기 위한 필사의 노력이 가중된 상황 암시한다”고 말했다.

미국의 알렉스 호놀드(34)는 2017년 요세미티의 980m 거벽 엘 캐피탄을 프리 솔로로 올랐다. 세계 최초였다. 이 등반을 통해 찍은 다큐멘터리 ‘프리 솔로’는 올해 아카데미 장편 다큐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호놀드의 등반 장면을 찍은 스태프들은 당시 “죽음을 찍게 될지도 모르겠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호놀드는 촬영 중 갑자기 하기 싫어졌다며 등반을 포기하고 내려오기도 했다. 무섭다는 이유였다. 이 다큐는 인간이 거대한 자연과 마주하는 과정에서 얻은 삶의 통찰과 자기애에 관한 정직한 고백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프리 솔로를 개척한 독일 클라이머 볼프강 귈리히(1960-1992)는 “죽음에 관한 사색을 통해서 삶의 진가를 인식할 수 있다는 생각이 나를 모험으로 이끌었다”고 말했다. 암벽에서 생과 사를 넘나들던 궐리히는 뜻밖의 장소에서 사망했다. 아우토반에서 교통사고로 32세에 운명했다.

다이노(dyno)
용남이 빌더링 중 마지막 구간에서 몸을 날려 옥상에 오른다. 다이노는 등반의 최고급 기술 중 하나다. 하지만 몸을 날리는 만큼 위험도 크다. 스포츠 클라이밍 1세대인 윤길수(애스트로맨) 씨는 “다이노는 다이내믹 무브먼트(dynamic movement)의 줄임말이고 런지(lunge)·데드포인트(dead point)를 포함하는 개념”이라고 말했다. 런지는 먼 곳의 홀드를 잡는 '동적 동작'을 의미하고 데드포인트는 비교적 가깝지만 불안정한 홀드를 순간적으로 잡으면서 무중력 상태에 이르는 ‘정적 동작’을 뜻한다,

이상근 감독은 “스포츠클라이밍 국가대표인 김자비(32·큐브클라이밍)에게 자문해 고급기술을 표현하며 절박함을 보여주려 했다”고 말했다. 김자비의 동생은 스포츠 클라이밍 여제 김자인. 형 김자하도 클라이밍 선수다.

따따따 따아따아따아 따따따
용남의 가족들이 '따따따 따아따아따아 따따따'를 외치며 구조를 요청하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옥상으로 대피한 용남의 가족에게 의주가 가르쳐 주는 긴급 구조 신호. SOS의 모스 부호다. Save Our Ship, Save Our Soul의 약자라는 설이 있으나 S와 O의 모스 부호가 간결해서 사용됐음이 유력하다. 기호로 표시하면 ···_ _ _··· 다. 짧게 세 번, 길게 세 번, 짧게 세 번이다. 산에서 조난을 하면 랜턴 불빛을 이렇게 사용하면 된다. 이 SOS 신호는 1912년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 처음으로 쓰였다. 1500여명이 사망했지만 이 SOS 신호가 없었다면 근처의 카르파티아호가 711명을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모스 부호는 21세기 들어 종말을 맞이했다. 국제해사기구(IMO)는 모스 부호를 인공위성 식별장치로 대체했다. 1997년 프랑스 해군은 모스 부호 사용을 중단하면서 ‘수신자 모두에게 알림. 영원한 침묵에 앞선 우리의 마지막 함성’이라는 무전을 보냈다. 1999년 미국에서의 모스 부호 중단 신호는 모스 부호를 창안한 사무엘 모스가 1844년에 보낸 것과 똑같았다. ‘신이 낳은 것이 무엇인가?’

티롤리안 트래버스(Tyrolean traverse)
용남이 티롤리언 트래버스 기술로 건물과 건물 사이를 건너고 있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용남과 의주는 로프 한쪽에 아령을 매달아 건너편 건물로 던진 뒤 그 로프를 이용해 넘어간다. 협곡, 격류를 건널 때 혹은 빙하의 크레바스나 아이스폴 등을 통과할 때 이용되는 기술이다.

양쪽으로 팽팽히 친 로프에 손과 발로 매달려 건너가는 방법이 있다. 또 로프 위에 엎드린 채 체중을 싣고 발을 로프에 휘감아 양손으로 로프를 잡아당기며 전진하는 방법도 있다. 후자는 완력이 약한 사람들이 이용하는 방법이지만 밸런스 유지가 힘들며 몸이 거꾸로 돌아갈 수도 있다. 용남과 의주는 후자를 택한다. 티저 영상에는 로프 위 의주의 몸이 돌아가는 장면이 나온다.

이명희(46·노스페이스클라이밍팀) 씨는 “도로의 유독가스라는 악재를 피하기 위해 티롤리안 기술을 선보이는데,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용남과 의주의 상황을 반영한다”고 말했다. 기네스에서 인정한 가장 긴 티롤리안 트래버스는 1550m. 2008년 불가리아의 릴라 산군에 설치됐다.
티롤리안 트래버스.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안자일렌(Anseilen)
용남과 의주가 서로의 몸에 로프를 묶는 안자일렌으로 빌더링을 하고 있다. [사진 CJ 엔터테인먼트]
용남은 가족을 구조헬기에 실어 보내지만 의주와 함께 남아 곳곳의 빌딩 옥상을 넘나들며 필사의 탈출을 시도한다. 이 과정에서 서로를 로프로 묶는다. 이는 안자일렌 기술이다. 영어로는 러닝 빌레이(Running belay)라고 한다.

8000m급 14개 봉우리를 완등한 김미곤(47) 대장은 “안자일렌 기술은 날카로운 능선이나 8000m 고봉 등반 시 주로 사용하는데 한 명이 미끄러지면 다른 동료들이 버텨서 추락을 막아주지만, 종종 함께 떨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석정근(34·코아클라이밍) 씨는 “용남과 의주는 안자일렌으로 서로를 묶으며 ‘살아도 함께 살고 죽어도 함께 죽는다'는 결의를 보여준다"고 밝혔다.

이상근 감독은 “자연에서 주로 행하는 클라이밍을 도심으로 가져와 재난 탈출의 방안으로 제시했다”며 “목적지를 향해 올라가는 클라이밍의 기본 행위와 '엑시트' 속 주인공들이 필사의 탈출을 행하는 모습이 일맥상통한다고 느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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