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계시 풀이 7: 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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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시 풀이 7: 외집

단아하고절제된표현속에담겨있는조선조대학자의정갈한삶과깊은정신세계
  • 저자
    이황
  • 번역
    이장우,장세후
  • 출판
    영남대학교출판부
  • 발행
    2019.02.25.
책 소개
▶ 한시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문서적입니다.

책 정보

책 정보

  • 카테고리
    국어학이론
  • 쪽수/무게/크기
    298548g160*234*25mm
  • ISBN
    9788975815836

책 소개

▶ 한시에 관한 내용을 담은 전문서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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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퇴계 이황의 한시를 20여년간의 연구를 통해 한글로 옮기고 자세하게 풀이
《퇴계 시 풀이》는 조선조 대학자 퇴계 이황 선생이 읊은 한시를 오늘날 젊은 독자들의 수준에 맞게 한글로 옮기고 자세히 풀이한 책이다. 퇴계 이황은 평생 동안 많은 시를 지었는데, 그의 문집에 실린 시 2,000여 수 가운데 내집 5권에 실린 775제 1,086수를 먼저 번역하여 5권(5책)으로 출판하였으며, 6집 별집에는 355수를 수록하였다. 이미 출판된 내집 5권은 지난 2008년에 학술원 추천 우수도서로 선정된 바 있으며, 이번에 출간하는 외집(199수)과 속집 2권(각각 168, 178수)를 더하여 비로소 퇴계 시의 완간을 보게 되었다.

이장우 장세후 교수 두 사람이 1986년부터 풀이하기 시작하여 강산이 세 번 변할 3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각종 문헌과 연구자료를 면밀하게 검토하고 조사하여 한시 원문을 조심스럽게 풀었으며, 어려운 글자나 어휘들에 대해서도 상세한 주석을 달았기 때문에 우리나라 고전번역의 지표가 되기에 나름대로 충분한 가치가 있다. 나아가 시를 짓게 된 배경이나 지은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사항을 조사하여 한글로 쉽게 설명함으로써 퇴계의 정갈한 삶과 정신세계를 생생하게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선비들의 생활상을 물론, 퇴계의 생애를 고찰하는 데도 큰 역할
동양의 전통 속에서 시(詩)는 매우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퇴계선생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공부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한 가지는“긴수작(緊酬酌)”이요, 한 가지가“한수작(閒酬酌)”이다. 철학 같은 어려운 공부는‘긴수작’에 속하고 시문 같은 부드러운 공부는‘한수작’에 속한다. 학자가 공부하는데 이 두 가지 공부를 함께 해야만 옳게 공부가 발전한다고 하였다.
따라서 그의 시를 통해 문사철(文史哲)을 두루 이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당시 선비들의 생활상을 물론, 퇴계의 생애를 고찰하는 데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세계적으로 퇴계가 주자의 적통임을 인정받고 있기에 꼼꼼한 번역과 상세한 주석이 담겨진《퇴계 시 풀이》전집은 동양철학의 연구에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국내외의 참고 가능한 모든 자료를 완전하게 분석하여 녹여 넣은 노력의 결과물
조선시대 후기에 퇴계의 많은 시를 비롯하여《퇴계집》에 한문으로 주석을 단 책으로는《퇴계문집고증》과《요존록(要存錄)》 두 가지가 있는데,《퇴계 시 풀이》는 이 두 가지 주석서를 면밀하게 검토하였다. 그동안 한국에서 두 종의 번역이 나왔는데 첫째는 주석이 거의 없는 4?4조 내방가사체를 기본 틀로 한 이가원의 번역이고, 두 번째는 《퇴계집》의 주석본인《퇴계선생문집고증》을 주로 참고한 신호열의 번역이다. 두 책은 모두 5권 2책인데 비하여,《퇴계 시 풀이》는 9권 9책으로, 매권의 분량이 위 두 주석본에 비해 방대하고 매우 소상하다. 뿐만 아니라 중국 백화문으로 번역한 지아순시엔(賈順先) 교수의 저술을 참고하는 등 모든 국내외의 참고 가능한 모든 자료를 완전하게 분석하여 녹여 넣은 노력의 결과물이다. 한문을 잘 모르는 한국의 젊은 세대들도 관심만 가진다면 읽어낼 수 있도록, 내용은 깊이가 있으면서도 설명은 쉽게 하려고 노력하였다.

축자역(逐字譯)에 가까울 정도로 한시 원문을 면밀하고도 조심스럽게 풀이
《퇴계 시 풀이》의 특징은 번역은 거의 축자역(逐字譯)에 가까울 정도로 한시 원문을 면밀하고도 조심스럽게 풀었으며, 모든 어려운 글자, 어려운 어휘에 대하여 상세한 주석을 달았다. 시 작품의 저작 배경이나 저작 의도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모든 참고 사항을 조사하여, 한글로 모두 풀어 설명하여 두었다. 그 한 예로 퇴계 선생이 중국이나 한국의 어떤 시를 보고 지은 시가 있으면, 현존하는 그 원시(原詩)를 모두 참고로 번역하여 붙였다. 도연명, 이백, 두보, 소식, 주자 등의 수많은 명시는 물론, 퇴계 선생의 벗과 제자들의 많은 시를 참고로 열거하기도 한다.

매 권 뒤에 아주 상세한 색인(索引)을 첨가, 손쉽게 어려운 한문 전고를 검색 확인
책의 매 권 뒤에는 아주 상세한 주석 항목 색인(索引)을 첨가하여 두어 한시 전고사전으로 활용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며, 다른 한문책을 읽을 때도 이 색인을 참고하여 활용하면 매우 손쉽게 어려운 한문 전고를 검색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퇴계의 한시에는 유가 경전이나 중국의 저명한 시인들의 작품에서 나온 전고는 물론이요, 노장(老莊) 계통의 고전, 중국의 신화(神話)와 전설과 관련된 재미있는 전설도 많이 인용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을 알아보는데도 이 책만큼 친절한 책도 드물다.

한국의 번역?주석의 역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만한 획기적인 역작
한국에서 역사상 이퇴계 선생의 문집을 이렇게 꼼꼼하게 읽은 학자들도 드물고, 한문책을 이렇게 쉽고도 꼼꼼하게 풀어 놓은 책도 드물다. 이 책은 한국의 번역?주석의 역사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고도 남을만한 획기적인 노작(勞作)이자 역작이다.

권7 외집에는 199수의 시들을 수록
등 199수로 외집에 수록된 시이다. 18세 때 이미 천리의 유행에 인욕(人欲)이 끼어들까 걱정을 하는 내용을 읊은 이 수록되어 있다. 외집 역시 추후에 편집 수록한 시들로 처음부터 다시 시를 연대순으로 편집하고 있으며, 별집과 같이 간혹 누락된 글자도 보인다. 300쪽에 주석 항목 색인이 587조목이다.

저자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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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 前日綏之家, 偶成勝事, 出門, 便爲陳迹, 不可無一語, 以記一時之事. 昨見金李兩公詩, 其事, 又頗相類. 敢和一篇, 奉呈案下, 伏冀ㆍ章. 庶幾他日, 聯寄綏之, 以發一笑. ㆍ 지난날 유지님의 집에 자못 좋은 일을 이루었는데, 문을 나서니 곧 지나간 자취가 되어 버렸다. 한 마디 하지 않을 수가 없어서 당시의 일을 기록한다. 어제 김공과 이공 두 분의 시를 보니 그 일을 적은 것이 또한 자못 서로 비슷하였다. 감히 한 편을 화답하여 삼가 (유지님의) 책상머리에 올리고 엎드려 시편들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란다. 훗날 나란히 유지님에게 부치어 한바탕 웃게 하였으면 한다.
2. 再送詩板, 必求至精, 眞可謂好事, 但恐拙句, 不足以副厚望耳. 然後篇, 改難字爲應字, 自謂深得意趣, 非君再送, 何得此耶. 古人云, 得句喜於得官, 豈不信哉. 且君於文雅, 留意致精如此, 若於兵法, 亦能如此, 則其斫樹, 何止構一亭而已. 故以此戱爲絶句, 幷上博一笑_濯淸二律見下 ㆍ 다시 내가 쓴 시판을 보내면서 반드시 지극히 정밀함을 구하니 실로 일 벌이기를 좋아한다 하겠지만, 아마 서투른 구절이 두터운 바람에는 흡족하지 않았을 터이다. 그러나 후편에서 「어려울 난」자를 「응할 응」자로 고치고서는, 스스로 의취를 깊이 얻었다 이르노니 그대가 다시 보내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것이 가능하였겠는가ㆍ 옛 사람이 말하기를 「좋은 구절을 얻는 것이 관직을 얻는 것보다 기쁘다」고 하였는데 어찌 믿지 않겠는가ㆍ 또한 그대는 문장이 우아하고 뜻을 남김이 이와 같이 정밀하며, 병법 같은데도 또한 능히 이러할 수 있으니, 나무를 찍어내면 어찌 정자 하나를 얽는데 그칠 따름이겠는가ㆍ 그러므로 이것으로 장난삼아 절구를 짓고 아울러 한바탕 웃어주시기를 바랍니다_ 탁청 율시 두 수는 아래에 보인다
3~4. 濯淸主人寄余書, 有假寓江皐之嘲, 戱贈. 二絶 ㆍ 탁청정 주인이 내게 편지를 부쳐왔는데, 강가 언덕을 빌려 우거한다는 놀림말이 있으므로 장난삼아 지어 드린다. 절구 두 수
5~6. 再次. 二首 ㆍ 다시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짓다. 두 수
7~8. 濯淸亭. 贈主人金綏之 ㆍ 탁청정. 주인 김유지에게 드리다
9~11. 戱贈金綏之 ㆍ 장난삼아 지어 김유지에게 드림
12~13. 挽金綏之 ㆍ 김유지를 애도함
14. 題江陵通判金伯榮所送, 遊鏡浦臺圖 ㆍ 강릉 통판인 김백영이 보내준 〈경포대에 노니는 그림〉에 적다
15. 謝伯榮送靑石硯 ㆍ 김백영이 청석 벼루를 보내줌에 감사하다
16. 挽金上舍可行 ㆍ 진사 김가행을 애도함
17. 送金惇ㆍ ㆍ 김돈서를 전송하다
18~19. 喜諸君見訪 ㆍ 제군들이 찾아줌에 기뻐하다
20~21. 次韻惇ㆍ與庇遠章仲, 雪後唱酬之作 ㆍ 돈서가 비원, 장중과 함께 눈 온 뒤에 주고받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22~23. 士敬以病, 未遂淸凉之約, 有作夾之所和韻 ㆍ 조사경이 병으로 청량산에 가기로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하였는데 금협지가 화답한 시의 각운자로 지은 작품이 있기에
24. 重陽病中示諸君 ㆍ 중양절날 병중에 제군들에게 보이다
25. 出山韻 ㆍ 산을 나와서 짓다
26. 野池 ㆍ 들의 못
27. 詠懷 ㆍ 마음 속을 읊다
28. 題龍壽寺 ㆍ 용수사를 제목삼아 짓다
29~30. 寄題金綏之濯淸亭. 二首 ㆍ 김유지의 탁청정에 지어부침. 두 수
31~34. 送金惇ㆍ之玄風 ㆍ 김돈서가 현풍으로 감에 전송하다
35. 次韻答金惇ㆍ ㆍ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지어 김돈서에게 답하다
36. 次鏡浦臺微字韻 ㆍ 경포대에 걸린 시의 「희미할 미(微)」자 운을 써서 짓다
37. 次丘山書院韻 ㆍ 구산서원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38~39. 金惇ㆍ和余所和琴夾之遊山諸作, 就其中復和二首, 却寄二君 ㆍ 김돈서가 내가 화답한 금협지의 산에서 노닌 여러 시작에 화답하여 곧 그 가운데서 다시 두 수를 화답하여 도로 두 사람에게 부치다
40. 示金惇ㆍ ㆍ 김돈서에게 보이다
41. 紅梅韻 ㆍ 홍매
42. 追次金惇ㆍ西行, 留別諸友韻 ㆍ 김돈서의 서쪽으로 가며 여러 벗들을 두고 떠나다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뒤늦게 짓다
43~44. 次集勝亭韻 ㆍ 집승정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45. 溪莊病中, 喜鄭直哉來訪 ㆍ 계장에서 병중에 정직재가 찾아옴을 기뻐하다
46. 王母城 ㆍ 왕모성
47. 玉堂憶梅 ㆍ 옥당에서 매화를 그리워하다
48~51. 贈李叔獻 ㆍ 이숙헌에게 주다
52~53. 芝山蝸舍 ㆍ 지산와사
54. 禪峻上人將遊楓岳, 再贈一絶 ㆍ 선준 스님이 금강산을 유람하려 함에 다시 절구 한 수를 보내주다
55. 源師曾見於鳳停寺, 今携金後凋詩, 來示次一絶云 ㆍ원 스님을 봉정사에서 만난 적이 있는데 이제 김후조의 시를 지니고 와서 보여주므로 같은 각운자를 써서 절구 한 수를 짓는다
56. 挽李上舍克儉 ㆍ 이극검진사를 애도한다
57. 挽淑人金氏 ㆍ 숙인 김씨를 애도하다
58. 挽朴上舍珩 ㆍ 박형 진사님을 애도함
59. 贈宗粹上人 ㆍ 종수 스님에게 지어주다
60. 寄子中 ㆍ 정자중에게 부치다
61. 出山半途遇雪, 寄鄭子中兼示諸姪 ㆍ 청량산을 나서던 도중에 눈을 만나 정자 중에게 부치고 아울러 여러 조카들에게 보이다
62. 是日宿博石村舍, 夜起看月 ㆍ 이날 박석촌의 집에 묵으면서 밤에 일어나 달을 구경하다
63~64. 出山明日, 次韻答黃仲擧 ㆍ 청량산에서 나온 다음날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지어 황중거에게 답하다
65. 溪齋寄鄭子中 ㆍ 계재에서 자중에게 부치다
66~67. 前日靜存書末, 有嶺梅吐芬時寄一枝之語. 今年此間, 節物甚異. 四月ㆍ芳始盛, 而梅發與之同時. 人或以是爲梅恨, 是非眞知梅者, 乃所處之地, 所遇之時然耳. 適答靜存書, 因寄梅片, 兼此二絶, 亦不可不示左右, 願與靜存, 共惠瓊報, 庶幾爲梅兄解嘲也 ㆍ 전날 정존의 편지 끝에 「고개의 매화가 향기를 뿜으면 때맞춰 한 가지를 보내주십사」하는 말이 있었다. 금년 이 곳에는 제철 사물이 매우 남달랐다. 4월에 여러 가지 꽃들이 비로소 성하게 피었는데 매화가 꽃을 피운 것이 그와 때를 같이 하였다. 사람들 가운데 혹 「이는 매화로서는 유감스럽다」고도 하는데, 이는 참으로 매화를 아는 것이 아니며 곧 처한 곳과 만난 때가 그럴 따름이다. 마침 정존에게 답장을 부치는 김에 매화 가지를 부치고, 아울러 이 절구 2수를 지어 또한 곁에 보여주지 않을 수 없으니, 원컨대 정존에게 주어 함께 아름다운 답장을 보내준다면 매형에게 놀린 것을 해명하게 될 것이다
68~98. 辛亥早春, 趙秀才士敬, 訪余於退溪, 語及具上舍景瑞·金秀才秀卿所和權 景受六十絶, 幷景瑞五律. 余懇欲見之, 士敬歸卽寄示, 因次韻遣懷 ㆍ 신해년(1551) 이른 봄에 수재인 조사경이 퇴계로 나를 찾았는데, 진사 구경서와 수재 김수경이 화답한 권경수의 60절구 및 경서의 오언 율시를 언급하였다. 내 간절히 그 시들을 보고 싶어 하자 사경이 돌아가자마자 부쳐서 보여줌에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지어 감회를 푼다
99~102. 心經絶句, 次琴聞遠韻 ㆍ 《심경》을 읊은 절구. 금문원이 지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03~110. 題靈川ㆍ竹, 八絶_申公潛, 自號靈川, 善梅竹 ㆍ 영천자의 대나무 그림에 적다. 절구 여덟 수_ 신잠 공은 자호가 영천인데 매화와 대나무 그림에 뛰어났다
111. 將遊淸凉馬上作 ㆍ 청량산을 유람하고자 하여 말 위에서 짓다
112. 渡彌川, 望山 ㆍ 메네 긴 소를 지나며 산을 바라다
113~114. 和愼仲所次夾之泰和之韻 ㆍ 신중이 협지와 태화가 지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지은 시에 화답하다
115. 奉懷景靜城主 ㆍ 삼가 경정 현령님을 그리워하다
116. 懷士敬 ㆍ 사경을 그리워하다
117. 屬朴生之華 ㆍ 박지화에게 일러주다
118. 次惇ㆍ遊山約韻 ㆍ 돈서의 산을 유람하기로 약속하다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19. 次聞余先行作韻 ㆍ 내가 먼저 가서 시를 지었다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20. 次般若臺韻 ㆍ 반야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21. 周景遊遊山韻 ㆍ 주경유의 산에서 놀다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122~123. 庭梅, 二絶 ㆍ 뜰의 매화. 절구 두 수
124~126. 寄趙士敬 ㆍ 조사경에게 부치다
127. 酬趙士敬明字韻 ㆍ 조사경이 지은 명자 운 시에 답하다
128. 答李仁仲明字韻 ㆍ 이인중이 지은 명자 운 시에 답하다
129~137. 題士敬幽居 ㆍ 사경의 그윽한 거처에 적다
138~139. 次謝士敬相訪, 二絶 ㆍ 사경이 찾아옴에 감사하여 같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절구 두 수
140~146. 次韻士敬芙蓉峯諸作 ㆍ 사경이 지은 부용봉 여러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47~148. 頃以兩絶寄子中, 幸蒙酬和, 每韻每一絶. 不可闕然無報, 復用兩絶, 追寄云 ㆍ 얼마 전에 절구 두 수를 자중에게 부쳤더니 다행스레 화답시를 받았는데 매 운마다 절구 한 수씩이었다. 빠뜨리어 답하지 않을 수 없어서 다시 절구 두 수를 추후에 부친다
149. 題柳而得ㆍ二牛圖 ㆍ 유이득의 소 두 마리를 그린 그림에 적다
150~151. 次韻答士炯·時甫 ㆍ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지어 사형과 시보에게 답하다
152~159. 次時甫韻 ㆍ 시보가 지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60~161. 陶山送鄭子中, 赴關東幕_時子中, 以眞寶縣監, 陞除 ㆍ 도산에서 정자중이 관동의 막부로 부임함에 전송하다_ 이때 자중은 진보 현감에서 승진되어 임명되었다
162. 題子中關東行錄 ㆍ 자중의 〈관동 여행록〉에 적다
163~164. 示金而精 ㆍ 김이정에게 보이다
165. 余病去陶山, 秋涉冬矣. 今察日溫, 與而精來尋, 頗有羲之ㆍ仰陳迹之歎, 得一絶, 以示而精云 ㆍ 내 병으로 도산서당을 떠났는데 가을에서 겨울을 지났다. 이제 살펴보니 날이 따뜻하여 이정과 함께 찾아왔는데 자못 왕희지의 고개를 숙였다가 쳐드는 사이에 묵은 자취가 되었다는 탄식이 있었으며 절구 한 수를 짓게 되어 이정에게 보인다
166. 次韻而精書齋偶吟 ㆍ 이정의 서재에서 우연히 읊조리다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67. 東厓許相公有嗣子, 素聞其志行高峻, 令而精誦其絶句. 又知其文雅如此, 嘉歎之餘, 用其韻, 見意云 ㆍ 동애 허상공에게 사자가 있는데 평소에 그 지행이 높고 빼어나다는 것을 듣고 이정으로 하여금 그가 지은 절구를 암송하게 하였다. 또한 그의 글이 이렇게 아름다움을 알고 찬탄하던 나머지 그 각운자를 써서 뜻을 드러내 보인다
168. 病中承惠慶歲佳句, 次韻謝意, 冀一念賜笑覽 ㆍ 병중에 새해를 축하하는 아름다운 시를 받고 같은 각운자를 써서 지어 감사하는 뜻을 나타내고, 다만 한번 웃으면서 보아주시기를 바란다
169. 寄子中 ㆍ 자중에게 부치다
170. 寄汾川李大成 ㆍ 부내의 이대성에게 부치다
171. 竹閣曾有二刻, 已不勝愧. 今又索題, 恐或重ㆍ, 故前者辭之. 書來再督, 只以一絶, 塞責, 千萬勿掛他眼, 幸甚 ㆍ 죽각에 일찍이 (황중거와 내 시의) 두 판각이 있게 된 것도 이미 부끄러움을 이길 수 없다. 이제 또 지어주기를 구하니 혹 너무 더럽히는 것이나 아닐까 하여 지난번에 사절하였다. 편지를 보내와 거듭 독촉하므로 다만 절 구 한 수로 책임이나 메우니 부디 남들 눈길이 가는 곳에나 걸지 말았으면 매우 다행이겠다
172~176. 次韻李庇遠見寄 ㆍ 이비원이 부쳐온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77. 次李公幹韻 ㆍ 이공간이 지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
178~179. 康將軍池亭, 次權士遇韻_康希哲 ㆍ 강 장군의 지정에서 권사우가 지은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_ 강희철
180. 奉和聾巖, 送靈秀之楓嶽韻 ㆍ 삼가 농암선생의 영수가 풍악에 감에 전송하다 라는 시의 각운자를 써서 화답하다
181. 題雄師詩卷 ㆍ 웅 스님의 시 두루마리에 적다
182~185. 溪莊喜伯强見訪, 四首 ㆍ 계장에서 백강이 찾아줌을 기뻐하다, 네수
186. 寄龜巖 ㆍ 귀암에게 부치다
187. 寄南溪 ㆍ 남계에게 부치다
188. 寄鐵津 ㆍ 철진에게 부치다
189. 黃小ㆍ寄龜巖·南溪·鐵津各四十枚, 幷呈一絶, 求和 ㆍ 황소전을 귀암과 남계, 철진에게 각각 40매씩 부치고 아울러 절구 한 수를 드리며 화답해주기를 구한다
190. 寄題仙夢臺 ㆍ 선몽대에 지어 부치다
191~192. 西麓黃花盛開, 琴壎之·柳應見要余共見 ㆍ 서쪽 산기슭에 국화가 만개하였는데, 금훈지와 유응현이 나와 함께 보기를 청하다
193. 遊枕流亭, 次亭韻_幷序 ㆍ 침류정에서 놀며 정자의 시의 각운자를 써서 짓다_ 서문을 아우름
194. 寄示重新雙碧亭詩, 謹次韻奉呈 ㆍ 쌍벽정을 중수한 시를 부쳐와 보여주어 삼가 같은 각운자를 써서 부쳐드리다
195~196. 甲子六月ㆍ日, 陪郭明府, 與諸人, 避暑月川亭, 因泛風月潭 ㆍ 갑자년(1564) 6월 보름에 곽사또를 모시고 여러 사람과 함께 월천정에서 피서를 하다가 이어서 풍월담에 배를 띄우다
197~198. 曾和洪上舍應吉東遊錄中二律, 今錄呈以博笑 ㆍ 일찍이 진사 홍응길의《동유록》에 있는 율시 2수에 화답한 적이 있는데, 지금 적어서 드리어 크게 웃어주시기를 빈다
199. 挽洪上舍應吉 ㆍ 진사 홍응길을 애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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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계 이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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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
이장우
번역자
李 章 佑 이 장 우1961년 : 서울대학교 중어중문학과 졸업1968년 : 국립대만대학에서 중국문학 석사1982년 :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문학박사.서울대, 연세대, 숙명대, 경북대 등에서 강사 및 단국대, 국민대 교수 역임. 중국 국립중앙연구원, 프랑스 파리 제7대학, 미국 스탠포드대학과 하버드대학 등에서 연구와 강의.(現)영남대학교 중국언어문화학부 명예교수, 사단법인 영남중국어문학회 이사장, 동양고전연구소 소장- 저서?역서『韓愈詩 이야기』, 『중국문화통론』, 『중국문학을 찾아서』, 『中國詩學』, 『中國의 文學理論』, 『퇴계시 풀이』, 『고문진보 전?후집(공역)』 외 다수.
장세후
번역자
경북 상주에서 태어나 영남대학교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주희 시 연구』)를 취득하였다. 영남대학교 겸임교수와 경북대학교 연구초빙교수를 거쳐 지금은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의 전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2003년 대구매일신문에서 선정한 대구·경북지역 인문사회분야의 뉴리더 10인에 포함된 바 있으며, 2022년 『퇴계 시 풀이』로 제5회 롯데출판문화대상 번역출판 부문 본상을 수상하였다.저서로는 『이미지로 읽는 한자 1·2』(연암서가, 2015·2016)가 있고, 주요 역서로는 『한학 연구의 길잡이(古籍導讀)』(이회문화사, 1998), 『초당시(初唐詩, The Poetry of the Early T’ang)』(Stephen Owen, 中文出版社, 2000), 『퇴계 시 풀이·1~9』(이장우 공역, 영남대학교 출판부, 2006~2019), 『고문진보·전집』(황견 편, 공역, 을유문화사, 2001), 『퇴계잡영』(공역, 연암서가, 2009), 『唐宋八大家文抄-蘇洵』(공역, 전통문화연구회, 2012), 『춘추좌전(상·중·하)』(을유문화사, 2012~2013), 『도산잡영』(공역, 연암서가, 2013), 『주자시 100선』(연암서가, 2014), 『사마천과 사기』(연암서가, 2015), 『사기열전·1~3』(연암서가, 2017), 『주희 시 역주·1~5』(영남대학교 출판부, 2018), 『국역 조천기지도·홍만조 연사록』(공역,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19), 『도잠 평전』(연암서가, 2020), 『공자 평전』(연암서가, 2022)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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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으로 합격, 32세에 문과 초시 2등으로 합격하고 다음 해인 33세(1533)에 반궁(泮宮)에 유학하며 경상도 향시에 합격한다. 34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권지부정자와 예문관검열이 되었고 36세에 선무랑과 성균관전적을 거쳐 9월 호조좌랑에 임명되었다. 37세에 선교랑, 승훈랑, 승의랑에 임명되었으나 어머니 박씨의 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난다. 39세에 3년 상을 마치고 홍문관부수찬을 거쳐 수찬지제교로 승진해 40세에는 사간원정언, 승문원교검, 경연시독관, 춘추관기주관교리에 임명되었고 42세에는 홍문관부교리, 충청도·강원도어사로 순찰했으나, 43세에 병을 이유로 관직을 사임했다. 이후 종친부전첨, 세자시강원필선, 사간원사간, 성균관사성 등에 여러 차례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44세 10월에 상경한 후 중종이 승하하자 부고와 시장을 집필했다. 47세 7월에 안동부사에 제수되었으나 사임했다. 홍문관응교에 제수되어 상경해 사퇴하려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48세에 외직을 자청해 단양군수로 취임했다. 10월에 풍기군수로 전임했다. 49세에 소수 서원을 개칭해 사액 서원의 효시가 되었다. 9월에 신병으로 사임해 귀향했다. 그러나 신병을 이유로 세 번이나 사직원을 제출한 후 회답을 기다리지 않고 퇴계로 돌아와 임소를 이탈했다는 죄목으로 직첩을 박탈당했다. 50세에 예안 하명동에 한서암(寒棲庵)을 짓고 학문에 전념한다. 53세 4월에 성균관대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퇴한다. 54세에 형조·병조참의, 첨지중추부사에 임명되었고 경복궁에 새로 지은 여러 전각의 편액을 썼으나 이듬해 병으로 모든 관직을 사임하고 귀향한다. 56세에 도산에서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를 편찬 완성하고 다음 해인 57세에 도산 서당을 지을 터를 마련하고 『계몽전의(啓蒙傳疑)』를 저술했다. 58세에 대사성에 임명되자 사직을 청했으나 허락받지 못하고 공조참판에 임명되었다. 59세에 휴가를 얻어 귀향한 후 관직을 사임하고 『송계원명리학통록(宋季元明理學通錄)』을 저술했다. 60세에 고봉 기대승(奇大升)과 편지로 사단칠정론(四端七情)을 변론했다. 도산서당(陶山書院)이 완공된다. 61세에 「도산기(陶山記)」를 저술했다. 64세 2월에 무이구곡도(武夷九曲圖)의 발문을 썼으며 65세에 『경현록(景賢錄)』, 『역학계몽(易學啓蒙)』, 『명당실어(名堂室語)』 등을 저술했다. 66세에 공조판서와 홍문관·예문관대제학에 제수되었고, 다음 해인 67세에 다시 예조판서, 경연춘추관사로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8월에 귀향, 역동 서원(易東書院)을 새로 건축했다. 68세에 선조 원년 의정부우찬성과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자 6월에 소명을 어기지 못해 상경해 양관의 대제학을 겸임했다. 재임 중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 『성학십도(聖學十圖)』를 저술했다. 69세(1569)에 이조판서에 임명되었으나 사의를 표명하고 귀향했다. 70세 7월 역동 서원에 가서 『심경(心經)』을 강의하고, 8월 역동 서원의 낙성식에 참여했다. 11월 격물치지설(格物致知說)을 개정하다 병이 심상치 않자 12월 봉화현감으로 재직 중이던 큰아들을 사직, 귀가하게 해 장례 준비를 갖추도록 했다. ‘퇴도만은진성이공지묘(退陶晩隱眞城李公之墓)’라는 명문(銘文)과 자명(自銘)을 몸소 짓고, 임종 직적 매화분에 물을 주라는 말과 함께 한서암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후 영의정에 추서되었다. 저서로는 『계몽전의』, 『송계원명이학통론』, 『퇴계집』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