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회장 김원웅 인터뷰]①내 부모는 모두 '김원봉 광복군 대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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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호택 논설고문
입력 2019-06-0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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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 삼의사 묘역을 찾은 참배객과 기념촬영하는 김원웅 광복회장[김세구 기자 k39@]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이 26일 여의도 광복회관에서 본지 황호택 논설고문과 인터뷰를 하고 있다.[김세구 기자 k39@]



황호택이 만난 사람⑥ - 김원웅 광복회장<1>

"김구 살아있었으면, 한국정부 훈장 거부했을 것"
"이 나라 36년은 식민지배, 이후 74년은 친일파지배였다"
"광복군 출신은 밑에서 박수치고, 친일파는 단상에서 박수받던 나라"


3선 의원을 지낸 김원웅 신임 광복회장은 2009년 정치를 접고 홀연히 사라졌다가 2014년 강원도 인제에 비영리 사회적 협동조합 ‘허준 약초학교’를 설립했다. 내린천이 흐르는 골짜기 3000평 농장에서 약초를 재배하고 전국의 지방자치단체를 돌며 약초관리사 교육을 했다. 그가 올해 21대 광복회장 선거에 출마해 4선 의원 출신의 거물 이종찬 전 국정원장과 겨뤄 승리했다.
광복회를 통해 인터뷰 요청을 했더니 날짜가 자꾸 미뤄졌다. 그에게 직접 문자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안 있다 일요일인 26일 효창공원 3의사(윤봉길 이봉창 백정기)묘역에서 만나자는 답이 왔다. 그는 정장으로 참배를 마치고 여의도 광복회관에 와서 구멍 난 흑색 청바지에 깃 없는 티셔츠 차림으로 마주 앉았다.
21대 광복회장 선거는 명문 독립운 동가 후예의 대결이라는 점에서도 관심이 높았다. 이 전 원장은 서간도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다. 김 회장의 부친은 약산 김원봉이 이끌던 의열단 출신이고, 모친은 의열단이 확대 개편된 조선의용대에 16살 처녀로 들어간 여성대원이었다. 두 분은 김구 선생의 중매로 결혼했다.
광복회장 선거 기간에 이 전 원장이 문재인 대통령이 초대한 사회원로 간담회에 참석하면서 ‘청와대 선거개입설’이 불거졌고, 시민단체들이 이 전 원장의 5공 참여 경력을 문제 삼기도 했다.
-과거엔 광복회장을 경선 없이 추대하는 경우가 왕왕 있었는데 이번 선거는 어느 때보다 뜨거웠던 것 같다.
“독립지사 분들이 많이 생존해 계실 때는 선거를 안하고 추대된 적이 있었다. 박유철 회장 전에는 직접 독립운동에 참여한 애국지사들이 회장을 맡았다. 그 분들 사이에는 독립운동을 하는 과정에서 생긴 위계가 있었다. 이제 유족의 시대로 넘어오면서 추대가 어렵게 됐다. 나는 청와대 개입설이나 이 전 원장의 5공경력을 둘러싼 논란에 일절 관여하지 않았다.”
이 전 원장은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태어나 임정의 마지막 청사가 있던 충칭(重慶)에서 소년시절을 보냈다. 이 회장은 충칭에서 태어난 다음해 해방을 맞아 귀국선을 타고 한국에 왔다.
-두 분이 충칭에서 만날 기회가 있었나?
“이 전 원장도 충칭에 있었으니 나를 기억할 수도 있다. 거기는 한인 숫자가 적어 새로 태어나는 아이가 많지 않았다. 충칭에서 성장한 이 전 원장의 또래가 이번 선거에서 나를 도와주면서 ‘야 내가 너 업고 다녔어’라고 말했다. 선친끼리도 교유가 있었다.”
총독부 산하 기관과 요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감행해 일제의 간담을 떨게 한 의열단의 활약상은 영화 ‘암살’ '밀정'을 통해 최근 널리 알려졌다. 그런데 조선의용대는 독립운동사에 밝지 않은 사람에겐 생소하다.
“조선의용대가 실제로는 광복군보다 규모가 컸다. 조선의용대원이 조선의용군 수만 명으로 확대 개편돼 중국 마오쩌둥(毛澤東)정부 수립에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광복군은 수백명 수준이다. 조선의용대의 일부가 약산 김원봉 선생을 따라서 광복군에 합류했다. 그게 광복군 제1지대가 된 거다. 원래 광복군에 있던 백범 김구를 따르던 게 2지대다. 3지대 4지대는 나중에 합류한 광복군이다. 가장 강성인 민족주의 성향의 조직이 1지대다. 어머니 아버지는 1지대서 만났다.”
-의열단을 이끌던 약산 김원봉 선생은 캄캄한 암흑기에 별처럼 빛나는 독립운동가인데 북한에서 장관을 두 번 하는 바람에 국가보안법 시대에 한국에서는 금기(禁忌)의 인물이었다. 6.25 때도 북 쪽을 위해 싸웠다. 그래서 그에게 독립운동의 서훈을 줘선 안 된다는 견해가 보수 쪽에서 나온다.
“백범 김구 선생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면서 ‘어떠한 불이익이 있더라도 남한 단독정부에 참여하지 않겠다’고 했다. 만약에 백범 김구선생이 살아 계셨으면 남한에서 주는 훈장을 거부했을 거라고 나는 생각한다. 약산 김원봉은 해방 후 북쪽으로 가지 않고 광복군 부사령관 직함을 갖고 남쪽으로 귀국했다. 그런데 친일경찰 출신 노덕술에게 모욕적인 수사를 받았다. 심지어 친일 경찰과 연결된 테러리스트의 위협으로 생명이 위태로운 처지였다. 백범 김구선생이나 몽양 여운형 같은 민족주의자들이 테러리스트에게 암살당하던 시기였다. 그런 상황에서 남쪽에 약산이 있었다면 생명을 부지 못했을 것이다. 약산이 월북한 것은 여기서 쫓아낸 거나 마찬가지다. 남한에서 친일파가 득세한 현실에 절망해서 월북한 것이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게 아니다. 생명의 위협을 받아서 도피한 거다.”
김 회장은 ‘해방 후에 친일 청산이 안돼 나라의 기강이 바로 서지 않고, 친일 반민족 세력이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층을 형성했다’는 견해를 강하게 피력했다. 이런 의견에 동조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김 회장의 역사 인식은 앞으로 광복회가 국가 정체성의 문제에서 목소리를 강하게 낼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후에 9월 하순에 반민특위가 결성될 때 이승만 대통령이 반민특위법을 제정하지 말라고 5번이나 담화문을 발표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입장을 쫓아 친일세력을 옹호했다. 이승만 치하에서 친일경찰들이 나서 반민특위를 해체했다. 대한민국 국군을 창설하고 초대 육군 참모총장에 만주에서 독립군을 토벌하던 사람이 임용됐다. 제2대부터 19대까지 참모총장들도 그런 사람들이다. 만주국 관동군 장교 박정희는 집권까지 하지 않았나. 나는 일제 36년의 식민지배, 나머지 74년은 친일 반민족 세력의 지배 역사라고 본다. 친일에 뿌리를 두고 분단에 기생해 온 정치세력과 그런 언론과 학계 등이 우리 사회의 기득권층으로 형성돼 있다. 이것을 혁파하지 않으면 국민통합은 불가능하다.”
-충칭에서 귀국한 부모님이 어떻게 대전에 정착하게 됐나?
“아버지의 고향은 본래 경남 진주다. 부모님이 서울에 살다가 6·25 나자 마자 한강 다리가 끊겨 못 빠져나와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1·4후퇴 때 임시 수도가 있던 대전에 가서 정착했다. 나는 대전에서 원동초대전중 대전고를 다녔다.
-이승만 대통령은 공과가 있다.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독립운동을 한 이승만은 친일파를 싫어했다. 하지만 2차 대전이 끝나고 냉전체제가 되면서 공산주의를 막으려면 치안과 행정 경험이 있는 경찰과 관료를 쓰는 수밖에 없다는 게 이승만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이승만은 상해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했지만 탄핵 당했다. 민족진영에 일하신 분들은 이승만을 높이 평가하지 않았다. 우리 집이 대전이니까 영남 호남에 사는 독립운동 동지들이 대전에 들렀다가 하루 이틀 묶고 가신다. 나는 초중학교 때 독립운동가들 막걸리 주전자 심부름하면서 컸다. 어른들이 하는 얘길 언뜻언뜻 들었는데, 광복군 출신 애국지사가 8·15 광복절 행사에 참석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거다. 독립운동가는 단하에서 박수치고, 친일파들은 단상에서 박수 받는 상황에 비분강개했다.
우리 집도 독립운동한 사실을 쉬쉬하며 살았다. 경찰서 지서나 이런 데 가면 친일 경찰들이 앉아 있으니까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아버지 어머니 독립운동을 했다는 걸 1950년대 1960년대엔 말을 못했다.”
-문재인 대통령도 해외 교민을 위한 만찬 석상에서 ‘독립운동하면 3대가 망한다’는 옛말을 인용했는데 실상이 어떤가.
“광복회장 선거운동을 하느라 전국을 다녔다. 80명 대의원만 해도 독립운동 가문에서 뽑힌 사람이지 않나. 그 분들이 내가 방문하는 걸 극구 사절했다. 어렵게 사는 사람이 많았다. 옛날 야당 당원의 집보다도 훨씬 더 가난하다. 국회의원을 여러 번 한 나나 이 전 원장은 특수한 경우라고 보면 된다.”
-친일미화금지법 제정 운동을 하겠다고 공약했는데….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일부 학자들이 있다. 특수한 몇 가지를 갖고 과도하게 미화한다. 식민지배가 없었으면 우리가 근대화가 안됐던 것처럼. 보수 언론에서 높이 평가하고 인용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 중에 학자적 양심을 벗어나 과도하게 일제강점기를 미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친일미화금지법은 프랑스 독일의 나치 찬양금지법과 비슷한 취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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