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가 김별아는 이 간단한 사실에 상상력의 옷을 입혀 최근 장편소설 ‘불의 꽃’을 선보였다. 간통 남녀가 어찌하여 뿌리칠 수 없는 사랑에 직면하게 됐는지 구구절절 펼쳐낸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시대와 불화한 인간은 많았지만, 조선사회 여성이 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사랑밖에 없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조선시대 ‘금지된 사랑’에 제동을 건 것은 참형이 아니었다. 성종 때 반포된 ‘재가여자손금고법’(再嫁女子孫禁錮法)이 결정적이었다. 재가한 여자의 자손은 어떤 과거에도 응시할 수 없다고 명시한 법이다. 여기에다 열녀 포상 제도가 쐐기를 박았다. 사랑을 제압하는 강력한 볼모는 자식의 미래였던 모양이다.
조선시대에도 이혼은 가능했지만 철저하게 남성 위주였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거나 무자식, 음란, 질투, 악질, 수다, 도둑질 같은 항목에 찍히면 내쫓아도 무방했다. 부모상을 치렀거나 가난할 때 결혼해 부귀하게 된 경우, 돌아갈 곳이 없는 아내는 그나마 이혼을 금했다. 엊그제 전북대 박물관에서 공개한 조선시대 이혼합의서는 다양한 상상을 불러일으킨다. 최덕현이라는 남자가 구술하고 누군가 한문으로 대필한 문서다.
이 남자는 “(아내가) 어려운 살림 속에서도 동고동락하여 왔는데 뜻하지 않게 오늘 아침에 나를 배반하고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가버렸으니 슬프다”면서 “저 두 딸은 장차 누구에게 의지하여 자랄 것이냐”고 탄식한다. 그는 “칼을 품고 가서 그녀를 죽이는 것이 마땅한 일이나 그렇게 하지 않은 이유는 장차 앞길이 있기 때문”이라고 물러서면서 “십분 생각하여 용서하고 엽전 35냥을 받고서 영원히 우리의 혼인관계를 파기하고 위 댁(宅)으로 보낸다”고 기술한 뒤 말미에 손바닥 도장을 남겼다.
아내가 팔려간 것인지, ‘새로운 사랑’을 찾아 비정하게 떠났는지 알 길은 없다. 시대를 관통하는 고단한 사람 살이가 애잔할 따름이다.
조용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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