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일계통 신품종 모내기. 마을주민들이 공동으로 손 모내기를 하고 있다.(1976년 경기 평택) 사진/농촌진흥청 제공

비닐하우스 등 온실 등장으로 사계절 농사를 지을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아직 5월은 농업인들에게 본격적인 영농이 시작되는 달이다. 영농기술과 농기계 발달로 농촌풍경도 사뭇 달라졌다. 한창 바쁜 영농기를 시작하는 우리 농업인들의 과거와 오늘의 모습을 연대별로 짚어본다.
농업의 변화를 살피며 미래농업의 변혁을 예측해 본다. [편집자 주]

1980년대 이전…
모내기 때는 농촌주민 남녀노소 총동원령

서로 물대려 물싸움도 벌어져
소는 없어선 안 될 농기계
모내기 때 학교결석은 당연시

1980년대 이전 우리 농촌의 겨울은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면서 영농철에 쓸 농기구를 정비하고, 지게와 못줄 등을 준비하는 때였다. 5월은 24절기 중 입하(立夏)와 소만(小滿)이 들어 있는 달이다. 우리의 농업과 농촌은 통일벼로 주곡인 쌀을 자급 달성한 1976년을 기점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통일벼 재배를 위해서 설치한 보온절충못자리로 녹색혁명을 이룩하자마자 채소를 획기적으로 생산한 백색혁명이 시작됐던 것이다. 많은 농업인들이 비닐을 이용한 농업으로 획기적인 생산성 증대와 계절성을 극복할 수 있었다.

못자리는 4월말 곡우(穀雨) 때부터 시작해 5월에 본격적으로 설치했다. 통일벼의 재배를 위한 보온절충못자리가 있기 전에는 마지막 서리 오는 날을 기준으로 볍씨를 못자리에 뿌리는 일이 시작됐다.
한해 농사의 기본이 되는 못자리지만 당시에 비료가 없었기 때문에 말린 풀을 발로 밟은 후 위에 흙을 덮어 못자리판을 만들었다. 널빤지를 이용해 못자리판을 평평하게 고르고, 나중에는 왕겨와 재를 거름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또한 못자리에는 새끼를 사방으로 둘러서 볍씨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했다.

이렇게 만든 못자리에 바람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볍씨를 뿌리는 낙종(落種)이 이루어졌다. 못자리에서 어느 정도 모가 자라기 시작하면 벼를 제외한 잡초, 특히 피의 제거에 중점을 뒀는데, 틈이 날 때마다 이뤄지는 피사리는 모내기 전에 진행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학생들은 모쟁이 역할로 흙범벅
모내기는 5월 하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는데, 모를 내기 위한 물대기가 쉽지 않았다. 당시에는 서로 물을 차지하려고 농업인들끼리 물싸움을 했다는 기사가 종종 보도되기도 했다.
수리시설이 갖춰져 있는 곳은 문제가 없었지만 그렇지 못한 곳의 모내기는 만만치 않았다. 두레질과 물레방아를 이용해 논에 물을 대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런 다음 소를 이용해 쟁기로 갈아놓은 논에 물을 댄 후 다시 써레로 논을 골랐다. 그 당시 소는 농사일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농기계였던 셈이다.

모내기는 품앗이를 하는 이웃은 물론, 논 주인집의 모든 사람이 동원되는 중요한 일이었다. 먼저 주인을 비롯한 몇 명이서 못자리의 모를 손으로 뽑아서 모은 뒤 2~3개의 볏짚으로 묶는데, 한쪽만 당기면 바로 풀어지도록 했다.
논이 못자리와 조금 떨어져 있으면 묶어놓은 모를 지게로 날라야 했는데, 물과 흙이 더해진 무게로 인해 운반이 만만치 않았다. 그때는 경지정리가 이뤄지지 않아서 지게를 지고 논두렁을 걷는다는 것이 쉽지 않는 일이었다.

이미 소로 써레질을 한 논에 묶은 모를 군데군데 놓고서 손으로 직접 모내기를 시작한다.다. 미리 준비한 못줄을 논두렁 양쪽에서 붙잡고 소리를 지르면서 장단에 맞춰 모내기를 하는데, 주인집 학생들은 모심는 일꾼들의 모가 부족하지 않게 모를 나눠주는 역할인 ‘모쟁이’
를 하느라 분주하게 손과 발을 움직여야 했다. 보통 모쟁이의 얼굴은 논에 있는 흙으로 범벅이 돼 누구인지를 알아보기가 쉽지 않았다. 시골에 있는 학교에서는 농번기에 방학이 있어서 학생들이 영농을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아낙네는 식사·새참준비로 분주
농번기탁아소, 아이돌봄역 톡톡
통일벼·화학비료로 식량자급 달성

흙 섞인 막걸리로 지도사 평가
농촌 아낙네들도 대부분 모내기에 동원됐고, 모내기를 하는 집안의 부인과 친척들은 일꾼들의 식사를 준비해야 했는데, 이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 농사일 중 가장 힘이 드는 모내기에는 아침부터 점심 저녁은 물론 오전과 오후의 새참까지 준비해야 했다.
농촌의 아이들은 특별히 돌봐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70년대부터 시작된 농번기탁아소 사업은 농번기에 방치된 농촌 아이들을 돌봐주는 중요한 사업이었다. 또한 일꾼들의 아이들은 점심이나 저녁식사 때 모내기 하는 장소로 가서 한 끼를 때우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식사시간에 누가 지나가면 불러서 같이 하는 인심이 있었고, 막걸리를 위주로 한 농주가 곁들어졌다. 막걸리는 가게에서 구입하기도 했지만 다른 사람 모르게 집에서 빚어서 먹기도 했다.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막걸리 심부름을 하면서 부모님 모르게 막걸리를 마시고 얼굴이 빨게진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농촌지도소 지도사가 지나가면 농주를 한 잔 따라 주곤 했는데, 일부러 흙이 묻은 손가락을 술대접에 넣어 따라주고 흙이 퍼져가는 술을 마시는지를 보며 그 지도사의 농업과 농촌에 대한 열정을 판단하기도 했다.

모내기는 전국적인 가장 중요한 행사였다. 일꾼들 10여 명이 한 팀이 돼 경기도부터 시작해 충청도를 거쳐 전라도까지 순차적으로 모내기를 하면서 내려가기도 했다. 중부지역인 경기도는 조생종 벼가, 충청도는 조생종, 중생종, 전라도는 중만생종이 재배돼 가능한 일이었다. 이들은 보통 주인집이나 마을회관에서 생활하면서 모내기를 했다.

▲ 식생활 개선을 위한 순회교육(1976년 경기 화성) 사진/농촌진흥청 제공

논 김매기는 품앗이 당연시
논 김매기는 보통 3번 정도 했는데, 벼의 뿌리까지 보일 정도로 깊이 하는 바람에 김매기 후에는 벼가 비뚤어져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농업의 역사가 잡초와의 전쟁이라고 말한 이가 있는 걸 봐도 김매기는 동네 사람들끼리 품앗이가 없이는 하기 힘든 고된 농사의 한 부분이었다.
비료는 해방이후 암모니아 비료, 초안(질산암모늄)비료 등이 있었는데, 금비(金肥)라고 불릴만큼 비쌌고 구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따라서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말린 풀을 이용하거나, 생풀을 직접 논에 넣거나, 혹은 퇴비를 만들어서 논에 뿌린 다음 쟁기로 갈아엎어 사용했다.
1974년 5월8일 남해화학이 설립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 화학비료는 통일벼 재배와 더불어 우리나라 농업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계기가 됐다.  

까락 때문에 힘든 보리베기
보리는 벼 다음으로 중요한 식량작물이었는데, 보리가 익어갈 무렵부터 미리 수확해 먹어야 했다. 보리가 완전히 익기 전에 먼저 잘 익은 것만을 골라서 말린 다음 빻아서 보리밥을 만들어 먹는 것은 농촌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보통 보리는 5월경부터 수확했는데, 이모작을 하는 남부지방에서는 보리 수확 후 모내기가 이뤄졌음은 물론이다. 보리 수확은 까락이 몸에 붙기 때문에 괴로운 작업이었다. 농촌진흥청이 개발한 까락 없는 보리가 그 때 나왔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이렇게 벤 보리는 밭에 널어 말린 다음 농업인들이 직접 지게로 져서 집으로 가져와야했다. 보통 보리는 도리깨로 탈곡을 했는데, 나중에는 원동기와 함께 탈곡기를 이용했다. 이때 수냉식 원동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감자를 철사에 꿰어 원동기 속의 물에 넣어 놓으면 잘 익은 감자를 맛보는 즐거움도 있었다.
시골 대부분의 학교에서는 보리 베기와 모내기 때, 봉사활동이 당연시 됐고, 농번기 방학도 며칠씩 이뤄지곤 했다. 보리 베기는 마른 밭에서 하기 때문에 누구나 가능했지만 까락으로 인해 힘든 작업이었고, 모내기 봉사활동은 상급반을 중심으로만 이뤄졌다. 당시는 집안 농사일을 돕기 위한 학교 결석이 당연시되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이전의 농촌은 보릿고개가 있는 가난한 농촌이었지만 이웃 간에 정이 있고, 인심이 넘쳐나는 사람이 사는 공동체였다.
1976년 통일벼가 나오면서 쌀 자급이 달성돼 5천년 동안 이어져 온 굶주림으로부터 해방된 것은 우리 민족에게 크나큰 축복이었다. 이를 계기로 해 오늘의 우리가 있음을 감사드려야 한다.

[도움말=농촌진흥청 조영철 박사]


 

▲ 1995년 함양군 서하면 농번기 때의 새참{사진제공=하종희(전 함양군농업기술센터 소장)

드라마 ‘전원일기’로 기록된 1980~2000년까지의 농촌
옆집 순이 서울로 떠나고
농촌총각 시름은 깊어만 갔네…

모내기의 혁명 이앙기 등장…벼농사의 대변혁
일손 대신하는 기계 구입하며 농가빚 쌓여

드라마 전원일기는 1980년 10월부터 2002년 12월까지 방영되며 그 시절 우리나라 농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냈다. 양촌리 김회장(최불암 역)이 노모를 모시고 아들 손자까지 4대가 단란하게 가정을 꾸리는 농촌이 무대였다. 드라마 속에서는 아직 화목한 대가족이 아직 유지되고 있었지만 실상 1980년대는 농촌의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나는 탈 이농의 시작을 알리던 시기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1989년 1000만 명이던 농업인 수가 1999년에는 500만 명으로 반토막이 났다.
“1984년 쯤인가 우리집에도 보행이앙기를 사용했어. 그전까진 조합에서 조를 짜서 이집저집 순번대로 돌아가며 하나하나 손모를 냈지”

1983년에 농사짓는 집에 시집와 이듬해부터 논으로 들어갔다는 익산시 춘포면의 정미숙 씨의 그 시절에 대한 회상이다.
“손모내기는 모가 제법 자랐을 때 하는데, 이앙모는 키도 적고 시원찮아 보였나봐. 주위에선 나락 다 버렸다고 흉봤지만 난 일손이 편해서 이앙기 사용이 좋았어.”

1970년대 말에 이앙기가 개발되면서 벼농사에 큰 변혁이 왔다. 들녘에 농기계가 출현하면서 노동력이 대폭 절감되었고 논의 규모화는 자연스런 과정이 됐다. 기계이앙기는 1990년대에 보급되기 시작했다.
트랙터도 편리한 농사의 일등공신이다. 지금은 어지간한 농사하는 집에선 이앙기 한 대쯤은 갖고 있지만 당시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우리는 87년에 경운기를 처음 들여놨어. 그 다음에 트랙터 콤바인 순으로 구입하다보니 지금은 지게차까지 없는 기계가 없어. 옛날엔 100만원 정도하는 경운기 한 대만 있어도 대단했어.”
정미숙 씨는 ‘지금은 창고에 기계값만 몇억’이라면서 일손을 대신한 농기계를 빚 얻어서 사게되고 또 빚을 갚을 때쯤 새 기계로 바꿔야하니 농촌살림은 다람쥐 쳇바퀴 마냥 제자리라고 하소연한다.

새참으로 ‘빵과 통닭’ 등장
농촌주택 부엌개량 등 농촌 정주여건 개선

삭막해지기 시작했지만 아직 살만한 농촌
“큰 대야에 새참을 담아 리어카에 싣고 나갔어. 작은애는 업고 큰애는 손을 꼭 잡고...집에서 국수 삶고 막걸리에 김치전, 개떡도 만들었지.”
농사일을 거들어 주러 오는 사람들을 잘 대접해야 했기에 새참과 들밥 준비로 새벽부터 분주했다며 정미숙 씨는 처음 농사짓던 당시를 추억한다. 대학생들이 방학을 맞아 마을마다 농촌봉사 활동을 나오기도 했다.

“갸들이 와갔고 피 뽑으라면 나락을 뽑았어. 피도 종류가 여러 가지라 어릴 때는 피하고 나락하고 별 차이가 없어.”1980년대와 1990년대 초까지의 농활은 의식화·계몽 위주의 농활성격이 짙어 주민과의 마찰도 생겼다.
“쓸데없는 소릴 하는 학생들이 있어 경찰을 부르기도 했지”

정읍의 한 여성농업인은 서울서 대학생들이 왔다기에 교육 받으러 갔다가, ‘정부를 비방하는 이상한 소리’를 하기에 경찰에 신고했던 당시를 회상한다. 낮에는 이장의 안내에 따라 농촌 일손을 돕고 밤에는 주민들과의 대화, 가호 방문 등 문화·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한 농활은 농촌에 활력을 불러 일으켰다.
농사의 기계화로 품앗이 하는 풍경 점점 사라지고, 사람를이 농촌을 떠나면서 일손이 부족해지고 여자들도 직접 농사일을 거들어야 했던 것도 이 무렵이다. 우유와 빵 등 간편한 ‘인스턴트 새참’이 등장한 이유다. 1980년대 초반 한 신문에는 모내기 때 새참으로 맥주가 나오고 자장면ㆍ통닭 등 종류도 다양해진 것을 농촌의 신풍속도롤 소개하고 있다.  

농촌에서 여성의 역할이 부각된 것도 이때쯤이다.
농사일과 집안 살림에 시부모 봉양까지 도맡아야하는 농촌여성들이 부엌에서 일하기 좋게 입식으로 개조하기 시작한 게 1980년대 말쯤이다.
하지만 1980년대 들어 도농 간 문화와 사회 환경의 발전 격차는 더욱 벌어지기 시작했다.  농촌의 정주환경은 도시에 비하면 열악했고, 좋은 일자리는 부족했기에 젊은이를 중심으로 이농이 급증했다. 특히 젊은 여성들은 서울에 일자리를 찾아 떠나는 경우가 많아 농촌 총각이 점차 장가가기 힘들어진 것도 이때부터로 전국적인 농촌총각 장가보내기 운동도 펼쳐졌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농촌은 어딜 가나 마을 어귀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아이들은 물론이고 30~40대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돌이켜 보면 1980년대의 농촌기피 현상은 도·농간의 소득격차와 농촌의 문화적 궁핍 및 국내 산업간 경제성장의 불균형이 주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쭉 뻗은 사통팔달의 신작로 길이 나있는 익산시 춘포면에는 1987년에 처음 버스가 다녔다.
‘각시 없이는 살아도 장화 없이는 못산다’는 말도 있었다. 진흙탕이고, 버스도 한 대 들어오지 않는 농촌이 수두룩했다. 정미숙 씨는 이 마을 여자 중에 제일 먼저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읍내로 아이들 등하교를 위해 95년부터 운전대를 직접 잡았다.

“그 시절엔 논 7~8필지면 겁나게 부자 소리 들으며 머슴까지 두고 살았어. 지금은 그만큼 수익을 올리려면 논 30~40필지는 돼야해.”
끼니 걱정 없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는 기준이 바로 논 7~8필지였다.
벼농사를 하는 천영호 씨는 선대에서 물려받은 논에다 1995년부터 정부의 농지구입자금 지원을 받아 농지를 늘릴 수 있었다. 농사 규모는 5배로 늘었지만 소득은 그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

“농촌에는 젊어 한량이 늙어 보약이란 소리가 있어~”젊을 때 몸 상하는 것 모르고 일만 했더니 지금은 온 몸이 안 아픈 데가 없는 종합병원이라면서 씁쓸해한다. 하지만 농사를 천직이라 여기고 농촌을 굳건히 지킨다는 자부심도 생겼다. 젊어서부터 30~40년간 굳건히 농촌을 지켜온 그들은 말한다.
“예순인 우리가 막둥이야, 젊은이가 없어. 너나 할 것 없이 대학을 가니까 흙 안 묻히고 힘 안 들이고 살려고 깨끗한 시내로 가는 거지. 그래도 예전에 비해 덜하지만 농촌은 아직까지 살만해. 정이 남아있어.”

 

▲ 세종시 연동면에서 스마트팜을 운영하는 농부들이 스마트폰으로 재배한 딸기를 들어 보이며 환하게 웃고 있다. (SK그룹 제공)

2000년대 이후…
내 손안에 농장 있다...ICT 융복합이 농업 지형 바꿔

기계화·전문화로 두레, 품앗이 사라져...
제2의 귀농물결

2000년대 들어 웰빙 트렌드는 농촌의 다원적 가치를 높였다. 특히 먹거리에 대한 안전성이 중시되면 농촌의 변화가 시작됐다. 도시민들이 농촌을 찾는 횟수가 잦아졌고 외환위기를 겪으며 실질한 도시민이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이전했다. 이들은 농촌에서 농사일뿐만 아니라 식품 가공, 관광, 체험 등을 통해 농외소득을 한층 더 높여나갔을 뿐만 아니라 찾아오는 농촌으로 변화를 주도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농업 가구수가 2000년 들어 현격하게 줄어든 점이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농업 가구수는 2010년 117만7000호에서 지난해 108만9000호로 7.5% 감소했고, 인구는 256만9000명으로 집계되면서 16.1% 감소했다.
농업인구는 고령화되고 감소했지만 그 나름데로 농촌은 변화하고 있다. 기계화, 조직화, 전문화 등를 통해 1억원 이상의 농업소득을 창출하는 농가들이 늘고 손안에서 농사를 짓는 농가도 생겨났다. 또 2010년을 전후 해 각 분야의 전문성을 지니고 있는 베이비부머 세대가 제2의 귀농 물결을 주도하고 있어 농촌에 활력을 불어 넣을 것으로 기대된다.

# 손 안에서 농사짓네...게으른 농부 늘어
다소 과장된 표현일까. 2000년대 들어 전화 2통으로 벼농사를 풍작으로 이룰 수 있다.
경기 이천서 벼농사를 20년 째 짓고 있는 김모 씨는 2000년대 들어 벼농사는 정말 쉬워졌다고 한다. 기계화를 통해 이뤄지다보니 봄철 승용이앙기 한번, 가을철 콤바인 한번 돌려달라고 전화하면 벼농사는 마칠 수 있다는 것.
흔히 농작물은 농민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하지만 2000년대 이후 우리는 게으른 농부를 자주 접한다. 유선통신을 넘어서 이제는 PC 또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을 통해 과수원, 시설하우스, 축사 등에 대한 정보를 한 눈에 볼수 있다. 이에 점차 게으른 농부들이 늘고 있는 추세이다.

이는 노지채소를 재배하는 농가들도 예외는 아니다. 대농의 경우 전국을 순회하는 작업반들을 통해 농사를 짓는 게 보편화돼 있다. 배추, 무 등은 포전거래를 하는 밭떼기 상인들이 정식만 하면 나머지는 책임진다. 다소 헐값에 넘기는 것 같아 아쉬움은 있지만 나이 먹고 점차 기력이 쇠하다보니 오히려 밭떼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또한 감자 농사도 정식과 수확 가장 바쁜 철에는 작업반을 동원해 일을 시키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들은 기계화, 전문화, 조직화 등으로 무장돼 있는 만큼 작업 속도도 빠르고 기술력도 뛰어나다고 평가받고 있다. 다만 아쉬운 점은 농촌사회의 전통 노동문화인 두레와 품앗이 등은 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 ‘스마트폰’으로 ‘스마트팜’ 경영
ICT 융복합형으로 농업 지형이 바뀌고 있다. 스마트팜은 농촌의 희망을 구현하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현장이다. 이미 선도 농가들의 성공사례가 등장하고 있고 전국적으로 확산이 빠르게 진행 중이다. 스마트팜 보급은 2014년부터 시작됐다. 2014년 60ha에서 1년 만에 5배 이상 성장했다. 스마트팜은 원예분야와 축산분야에서 빠르게 성장하고 있다. 농장에 작물과 가축의 생육환경을 최적 상태로 유지 관리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농업의 생산력과 경쟁력을 한층 높여 새로운 형태의 농업혁명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손안에서 기상을 보고 관수관리, 하우스·온실 개폐 관리 등을 통해 생육 환경을 조성하고 농축산물 시세 정보를 확인하며 적정한 출하시기를 조정할 수 있다. 아직 영세한 고령의 소농들은 봄볕을 맞으며 밭에서 일을 하지만 대농들의 방안에서 선풍기 바람을 맞으며 스마트 폰으로 농사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는 정부 보급 확대로 더욱 가속화 될 것으로 보인다.

# ‘들밥 뷔페합니다. 5000원’
2000년대 들어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길, 밭길을 조심스레 걸어 들밥을 나르는 아낙네의 모습은 사라졌다.
시골 마을에 가면 식당 앞에 버젓이 붙어 있는 문구가 눈에 띤다. ‘들밥 뷔페합니다.’ 5~7가지의 찬에 밥과 국이 5000원이면 충분하다. 이들 작업반은 시간 기준 노임을 받는 게 아니라 노동 면적 당 급료가 책정되다 보니 신속하게 일을 끝낸다고 한다.
그래서 인지 막거리 등 농주를 찾는 작업반은 거의 없다. 얼른 일을 마치고 다음 날을 준비하려하기 때문이다. 밭 한고랑 갈고 목을 축이던 시절은 사라진지 오래다. 특히 기계화가 급속히 확산됨에 따라 농사를 짓다가 트랙터, 경운기 등의 농기계 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하자, 아예 술을 안 먹는 농업인도 많다. 새참도 들에서 굳이 먹으려 하지 않는다. 집에 가서 먹거나 또는 인근 식당을 이용한다.

# 베이비 부머 제2의 귀농 물결
2000년 들어 귀농귀촌자가 몰리기 시작했다. 1998년 외환위기를 겪으며 국내 내수 경기가 어렵게 되자, 도시에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고향으로 또는 농촌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러나 이 같은 현상은 2010년 다시 한번 재현된다.
이번에는 베이비 부머세대의 귀촌귀농이다. 베이비부머 은퇴자는 제2의 귀농 물결을 주도하고 있다. 베이비부머의 은퇴 행렬이 시작된 것은 2010년 전후다. 이후 해마다 수십만 명이 기존 직장에서 나오고 있다. 이들은 고민 끝에 도시를 등지고 농촌에서 여유로운 삶을 꿈꾼다.

통계청에 따르면 2014년 귀농·귀촌 규모는 4만4천586가구, 8만855명으로 전년의 3만2천424가구, 5만6천267명에 비해 가구는 37.5%, 인원은 43.7% 각각 늘었다.
지난해 귀농·귀촌 규모는 아직 정확한 통계가 잡히지 않았지만 5만 가구에 10만명을 넘어선 것으로 통계청은 추산했다.
충주시농업기술센터 관계자는 “은퇴 후 귀농하는 베이비 부머세대는 연금을 받는 경우도 많다”며 “적당한 규모의 농가주택을 마련하고 농사로 한 달에 100만원 정도 수익만 꾸준히 올리면 생활에 별 어려움이 없다”고 말했다.

# 다문화 사회로 접어든 한국 농촌
시골 입구의 느티나무 밑에는 마을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 담소를 나눈다. 그러나 언제부터 한국 시골마을이 맞나 싶을 정도로 외국인들이 많아졌다. 국적이 같은 외국인들은 자국어로 이야기를 나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 후반을 기점으로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특히 농촌의 다문화 가정을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주로 혼인 적령기를 놓친 농촌 지역의 미혼 남성 위주로 국제결혼이 이뤄졌기 때문이다.  

통계청의 2010년 인구조사자료에 의하면 다문화 가정은 38만 6977가구로 나타났다. 특히 농촌 지역 국제결혼 추이를 살펴보면 2004년 국제결혼은 1814건으로 농촌전체 결혼의 27.4%였던 것이 2007년에는 3,171건으로 41.4%로 증가했다. 이후 그 비율이 다소 낮아지긴 했지만, 국제결혼은 이제 농촌의 중요한 가족 형성 방식으로 자리 잡았다고 할 수 있다.
결혼 이주 여성의 출신국 또한 갈수록 다양해지고 있어서 2000년 초에는 중국, 일본, 필리핀 출신이 다수였으나, 최근에는 베트남, 태국, 몽골,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등 다변화 경향을 나타내고 있다.

 

▲ 강원도 원주시는 고속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다양한 상권이 밀집해 있다.

“농촌여성도 즐길 건 즐겨야죠”

발전하는 농기계, 발전 없는 삶의 질
열악한 여가생활, 지자체 도움 필요

5월, 농번기를 맞은 농촌에선 1년 농사를 준비하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그중 농촌여성들은 밤낮없이 농사에 시간을 투자하고 있으며, 꼼꼼함과 섬세함을 무기로 영농활동의 주체가 되고 있다.
현재 농촌은 급변한 시대에 맞게 최첨단으로 발전된 농기계의 도움을 받고 있다. 농기계 보급으로 인해 경영비 절감과 소득 증대의 효과를 보고 있지만  농촌여성들의 삶의 질적인 부분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다. 과연 무엇 때문인지 그들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자.  

“시내에 나가면 즐길 거리, 볼거리가 많지만 농번기인 5월에 여가생활을 즐기는 건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다”
한국생활개선원주시연합회 김양금 회장의 말이다. 강원도 원주시는 김 회장의 말처럼 고속버스터미널을 중심으로 백화점, 영화관, 예술회관 등 다양한 상권이 밀집해있다. 하지만 차로 불과 3분가량 떨어진 곳은 중심가와 달리 드넓은 논과 밭을 자랑한다.

남편과 함께 소를 키우고 있는 그는 “농촌여성들도 다른 도시여성들처럼 쉬고 싶고, 놀고 싶고 친구와 만나 수다를 떨고 싶은 마음은 똑같다. 하지만 새벽같이 일어나고 밤늦게 잠들어야해 여유가 없다”고 토로했다.
병원에 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김 회장은 몸이 아파 일을 못할 정도가 아니면 병원에 가는 일은 드물다며 “병원 갈 시간조차 없다는 말이 맞다. 비가 오는 날에도 하우스를 챙겨야하니까…”라며 자신의 처지를 설명했다.

한국생활개선충주시연합회 박인자 회장은 오래 전 귀촌해 누구보다 바쁜 농번기를 보내고 있다.
박 회장은 “세월이 흘러 도시에 고층빌딩이 들어선 것처럼 농촌에도 많은 변화가 생겼다. 때문에 여가를 누리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지만 농촌에서 오래 살다보니 5월보단 한가한 겨울에 문화생활을 즐긴다”며 입을 열었다.
이어 그는 “학창시절, 먹을 게 없어 고구마, 호박으로 죽을 쒀먹었던 적이 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농사일에 치여 병원에 갈 생각을 못한다. 건강을 생각해서 병원에 가려고 노력하지만 시간을 내는 게 어렵다”고 답했다.

그럼에도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면 과거 농촌여성들이 가부장적제도에 얽매여 가사와 농사만 병행한 것과 달리 문화생활을 즐기기 위해 조금이나마 노력하고 있다는 점이다.
원주시농업기술센터 박준건 농촌자원과장은 농번기 농촌여성들의 삶에 대해 “안타깝게도 농번기엔 여가생활을 찾아볼 수가 없다”며 “그럼에도 농촌여성들은 자신보다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활동도 하고 있고, 매월 첫째 주와 셋째 주 금요일엔 원주시청 로비에서 프리마켓을 진행한다”고 말했다.

원주 외에도 강원도 홍천군농업기술센터에서는 매주 화요일 오카리나와 우쿨렐레 수업을 실시한다. 바쁜 농번기라 출석률이 평소보다 저조한 건 사실이나 대부분의 회원들은 왕복 1시간이 걸리는 시간을 투자해 자신의 스트레스를 해소하며 여가생활을 즐긴다.
농촌여성들은 자신의 몸조차 돌보지 못하는 5월, 개인적인 문화생활을 즐길 수 없지만 농업기술센터에서 진행하는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통해 잠시나마 삶의 여유를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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