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이미지

[미디어파인=유진모의 무비&철학] 정지우 감독의 ‘유열의 음악앨범’은 유열은 있지만 ‘음악앨범’과는 별 상관이 없다. ‘해피 엔드’의 사랑은 있지만 욕망은 없다. ‘은교’의 시간 초월의 의지는 있지만 일탈적인 사랑은 없다. ‘건축학개론’의 추억을 자극하는 레트로 감성과 1990년대의 히트곡이 흐르며 외로운 사람들의 갈증을 분출한다.

1994년. 대학생 미수(김고은)는 죽은 어머니가 물려준 미수빵집을 피 한 방울 안 섞인 언니 은자(김국희)와 함께 운영하며 살고 있다. 어느 날 이른 아침 소년원에서 갓 출소한 교복 차림의 현우(정해인)가 들어오더니 두부를 달라고 한다. 그는 ‘알바’ 모집 전단지를 보고 미수는 두렵지만 채용한다.

잘생긴 현우의 외모는 세 ‘식구’의 소소한 행복에 활력소가 되는데 어느 날 불량스러운 현우의 친구들이 들이닥친다. 현우는 가불을 받아 그들과 함께 나간다. 미수는 은자에게 그가 안 돌아올 것 같다고 말한다. 1997년. 미수는 출판사에 취업하고, 친구 현주(정유진)는 ‘유열의 음악앨범’ 작가가 된다.

미수는 빵집 문을 닫는다. 은자는 결혼해 상가 지하에 칼국수 가게를 차린다. 어느 날 빵집 앞에 서있는 미수 앞에 현우가 나타나 내일 입대한다고 하고 미수는 이사를 간다. 2005년. 미수는 다른 출판사로 옮겼다. 그들이 만든 책이 높은 판매율을 기록하고 대표 종우(박해준) 등은 자축 파티를 연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이미지

제대한 현우는 미수가 살던 곳으로 이사했고, 미수가 근무하는 출판사 건물 2층에 사무실을 임대했다. 그리고 미수 앞에 나타난다. 미수는 3일 휴가를 낸 뒤 자신이 살던 곳이기도 했던 현우의 거처에서 생전 처음 느끼는 행복을 누린다. 하지만 종우는 재력을 앞세워 미수의 마음을 잡으려 하는데.

묘한 멜로가 탄생했다. ‘해피 엔드’와 ‘은교’에서 다소 세기말적인 멜로를 그렸던 감독은 50대에 접어들자 정갈함으로 스토리와 그림을 정초(正草)한다. 중간까진 매우 팽팽하고 스피디하며 스타일리시한 누아르 멜로로 진행하며 1994년부터 2005년이라는 10년의 세월을 군더더기 없이 펼쳐낸다.

미수, 현우, 은자는 모두 고아다. 미수의 엄마는 생전에 은자를 가족으로 받아들였다. 미수는 자격지심이 큰 여자다. 내세울 스펙도, 백그라운드도 없다. 현우는 남모를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자신의 잘못은 아니지만 큰 사건의 현장에 함께 있었고, 친구들과 그 비밀을 공유하지만 아픔은 못 지운다.

그 사고로 소년원에 들어가야 했고, 그 시절 아침 9시마다 ‘유열의 음악앨범’의 시그널을 들으며 일과를 시작하면서 “오늘 나가게 해주세요. 이곳을 나가면 세상이 바뀌게 해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미수 역시 그 방송 애청자라는 이유로 현우와 쉽게 가까워진다. ‘음악앨범’은 향수와 추억의 그리움이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이미지

영화의 배경은 북촌, 서촌, 낙원상가 등 서울의 중심에 있지만 아직도 과거의 정서가 간직된 곳들이다. 주인공들의 거처는 도시지만 첨단화되지 못한 달동네다. 가파른 언덕길과 허름한 계단을 올라야 하는 단독주택. 한쪽에선 신축 아파트가 들어서고, 24시 편의점이 동네 상가를 점령하는 과도기.

미수빵집엔 부동산 중개소가 들어왔다. 이렇게 디지털화, 도시화하는 우리의 삶의 공간은 그러나 생활이 스마트화될수록 정서는 공동화된다. ‘보이는 라디오’ 첫 방송 때 유열은 “라디오를 보여줄 필요가 있을까?”라고 말한다. 라디오는 듣는 것과 라디오도 보여줄 것이란 테제의 충돌은 곧 주제다.

사실 이 영화는 멜로의 외피를 하고 있지만 그 본체는 바로 디지털의 스마트한 편리함이냐, 아날로그의 땀내 나는 인간미냐의 강렬한 펀치 교환이다. 1997년이 되자 현우는 휴대전화를 갖지만 미수는 여전히 유선전화 안에 갇혀 지낸다. 현우는 육체노동을 하거나 헬스클럽에서 형식적으로 일한다.

미수는 출판사에서 글과 종이를 다루는 일을 한다. 기계적으로 일하고 기계화의 노예가 돼가는 현우와 인간만이 가진 언어와 문자와 씨름하는 미수의 삶의 방식은 판이하다. 그럼에도 현우가 헌책방을 가까이하고 둘이 공통적으로 만화책을 무척 좋아한다는 취향에서 접점을 발견하고 사랑하게 된다.

▲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스틸 이미지

마치 빛바랜 고서에서 풍길 듯한 향취가 주인공들의 순수한 사랑과 어우러진다. 미수의 거처였던 현재 현우의 거처가 그 통일성이자 합일점이다. 싱크대의 수도를 틀면 화장실에선 온수가 안 나온다. 세상의 모든 건 연쇄작용이고, 인과율에 따라 움직이며 그래서 운명은 정해져있다는 결정론이다.

미수는 현우와 다시 만났을 때 “또 우연히 만나네, 우린”이라고 말했지만 그녀는 그렇게 만날 걸 믿었거나 알고 있었다. 스피노자는 ‘자연에서 우연한 건 하나도 없고 신의 본성인 필연성에 의해 결정돼 있다“라고 말했다. 두 사람의 시간과 공간은 사랑을 관장하는 에로스가 미리 밑그림을 그려놨다.

라이프니츠의 모나드론의 모나드는 지금은 많이 제거됐지만 예정조화론만큼은 서양의 결정론자들로부터 동양의 운명론자들까지 수긍한다. 신이 있다면 미수와 현우의 만남은 기계론적 결정론에 따른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한국인이기에 운명이었던 것이다. 그래야 결혼하거나 헤어져도 회한이 없다.

미수는 현우의 사진에 대한 집착의 이유를 묻고 그는 “내 모든 기억들이 내 것 같지 않아 짜증 나. 그래서 기억을 안 빼앗기려 사진으로 남기는 것”이라 답한다. 사람은 선험적 관념과 경험적 기억으로 산다. 영화를 관통하는 주제인 추억이다. 세상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마름모 도넛처럼. 28일 개봉.

▲ 유진모 칼럼니스트

[유진모 칼럼니스트]
전) TV리포트 편집국장
현) 테마토크 대표이사
   칼럼니스트(미디어파인, 비즈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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