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폭력일지라도 누군가엔 일생의 상처이거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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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 소설집 ‘은주의 영화’ / ‘읍내의 개’ ‘염소가족’ 등 8편 담아 / 야만의 시대에 일상화된 폭력 / 해체된 가족의 서글픔 등 이야기 / 약자들 삶과 애환 질펀하게 그려

12년 만에 소설집을 상재한 공선옥. 그는 “내가 ‘소설’로밖에는 말을 잘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이제 나는 안다”고 말한다. 세계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공선옥(56)이 오랜만에 중단편을 묶은 소설집 ‘은주의 영화’(창비)를 펴냈다. 소설집으로는 ‘명랑한 밤길’ 이후 12년 만이다. 우리 시대 약자들 목소리를 주로 담으면서 질펀한 입담으로 삶의 밑바닥과 그 애환을 보여주는 공선옥 특유의 문체와 이야기가 여전히 살아 있다. 이번 소설집에는 특히 일상화된 폭력과 그 그늘, 야만의 시대에 대한 회상, 늙어가는 일의 고독, 해체된 가족의 쓸쓸한 후일담들이 중심에 있다.

“세상 모든 것이 다 뜨거웠어. 하늘의 해, 닭백숙이 끓는 솥, 아궁이 앞에 앉아 불을 때는 나, 양손으로 닭날개를 잡고 햇빛 속을 뚫고 걸어오는 아버지, 장독, 나뭇잎, 흙도 뜨거워서 나는 숨을 못 쉴 지경이 되어부렀단다.”
표제작인 중편 ‘은주의 영화’에서 은주의 이모 상희는 카메라 앞에서 이렇게 회상하기 시작한다. 이모는 ‘절름발이’인데, 오일팔 때 군인들이 집 마당까지 들어와 개와 달구(닭) 새끼들에게 총질을 하는 걸 보고 오금이 저렸다가 끝내 다리 한쪽이 마비된 여성이다.

은주의 카메라 앞에서 털어놓는 이모의 회상은 아버지의 폭력과 그로 인한 엄마의 가출, 그 엄마의 허망한 죽음까지 이어진다. 아버지가 꾸리는 보양탕집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딸을 두고 손님들이 오일팔 피해자라고 안쓰러워하자, 엄마에게 폭력을 휘둘렀던 아버지는 말한다.

“아따, 그런 말 하지들 마쑈. 저 아래 누구 집, 누구 집 해서 죽은 사람들이 얼매나 많은디. 우리 집 가시내는 직접적 피해를 입은 것도 없고 단지 달구새끼 때문에 충격을 좀 먹은 것을 가지고 무슨 피해자는 피해자여. 어어어, 당최로다가 그런 말은….”

한 개인에게는 일생의 상처가 되는 건 어떤 폭력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큰 폭력 앞에서 작은 폭력은 폭력의 반열에 낄 수도 없는가. 개인을 넘어선 시대의 폭력은 고문 끝에 죽임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의문사 주인공 이철규의 변사 사건을 암시하는 ‘철규’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 길고 복잡한 회상은 은주의 카메라가 기록하거니와 은주는 자신이 카메라 속에 빨려 들어간 느낌이다.

소설집 말미에 배치한 ‘읍내의 개’는 시골 마을의 일상화되고 무감각해진 폭력을 드러낸다. 종길이는 미자를 강간하고, 영기는 난실이와 미자에게 동시에 ‘씨’를 심는다. 취조 받으면서 실실 웃는 종길이에게 경찰이 던진 말. “넥끼, 개같은 놈아, 개들도 너같이 억지로는 안 한다더라. 또 웃네, 또 처웃어이.” 이 ‘개같은’ 읍내를 떠나는 미자의 귀에 전두환 대통령이 체육관에서 취임한다는 뉴스가 들리자, 그녀는 중얼거린다. “너희들은 뭐냐, 오라, 개같은 정권의 개들이구나이? 개들이야이? … 새 시대 새 대통령의 시대가 열렸다는데 어디를 간들 읍내보다 못하겠는가. 개같은 읍내여, 안녕.”

뿔뿔이 흩어진 가족의 쓸쓸함을 다룬 ‘염소 가족’은 잔잔하면서도 서글프다. 둘째아들은 소년시절 염소를 키웠던 기억을 살려 대학 졸업하고 잠시 시골집에서 염소를 키웠는데, 그 염소들이 달아나는 바람에 애를 먹었다. 그 염소들은 그의 가족 구성원들과 다를 바 없다.

“어머니 염소가 말이지요, 언덕을 넘어간 것 같아요, 장차 이 언덕에는 바람만 가득 차겠죠. 염소란 염소는 다 사라진 이 넓은 초원에 바람만 설렁설렁할 겁니다. … 바람 찬 언덕을 넘어갔는데 언덕 아래도 바람이 불었구나! 그래서 네가 그날 아침의 햇살과 옥수수 그늘을 너의 보금자리 삼는다는 것을 알지. … 나의 염소 가족들은 언제쯤 한 마리도 빠짐없이 모일 수 있을까.”

상대적으로 격한 서사가 전개되는 다른 작품들에 비해 ‘오후 다섯 시의 흰 달’은 납치할 생각까지 품으면서 남의 아이를 마지막 희망으로 삼는 노년을 잔잔하지만 인상적으로 그려낸다. 이밖에도 문학이 그 본령대로 소비되지 않고 행사용으로 전락한 현실을 그린 ‘행사작가’, ‘순수’가 조롱거리가가 되고 그 순수가 순수하게 받아들여지지 않는 서글픈 현실을 그린 ‘순수한 사람’, 해고 노동자의 설움이 배어든 ‘설운 사나이’, 어두운 시대 성장기 시골 마을의 폭력이 담긴 ‘어머니가 병원에 간 동안’ 등이 이번 소설집의 목록이다.

공선옥은 “소설이라는 물건이 세상에 의미가 있기는 할까? 나는 혹시 노래를 익혀 ‘밤무대 가수’로 사는 것이 더 낫지 않았을까?”라고 자문하면서 “소설이 세상에서 그리 유용한 물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기는 해도 어쨌거나 그럼에도 아랑곳없이 나는 앞으로 사는 동안은 소설을 쓰면서 살게 될 것”이라고 다짐한다.

조용호 문학전문기자 jhoy@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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