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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수다] 박정민의 도장깨기

[스브수다] 박정민의 도장깨기
이쯤 되면 도장깨기가 아닐까. 마치 본인 앞에 놓인 가슴 높이의 허들을 가뿐하게 넘듯 누가 봐도 어렵다고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을 맡아 하나씩 하나씩 해내고 있다. 연기 도장깨기에 나선 박정민의 행보에 관한 이야기다.

박정민은 꽤 오랫동안 미완의 대기였다. 2011년 개봉한 영화 '파수꾼'이 남긴 수많은 가능성 중 하나였지만, 그의 성장은 동시기에 출발한 배우들에 비해서는 조금 더뎠다. TV와 영화를 오가며 활동했지만, 큰 존재감을 보여주지는 못했다. 

2016년 개봉한 '동주'는 박정민의 잠재력이 폭발한 영화. 국내 영화 시상식 신인상을 독식하다시피 하며 대기만성형 배우의 등장을 알렸다.

'그것만이 내 세상', '변산' 그리고 차기작으로 확정된 '타짜3'까지 박정민의 행보를 보면서 든 생각 하나는 배우(俳優)는 배우라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 배우는 매 작품마다 무언가를 배우고, 제 것으로 만들어나가고 있다.       

"작품 준비 때문에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었는데 이준익 감독님이 전화하셔서 대뜸 '너 랩 잘하냐?'고 물으셨어요. "내가 말이야. 래퍼가 주인공인 영화를 하나 준비하고 있는데...아...아니다. 잊어버려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것만이 내세상' 촬영을 끝내고 '이제 뭐하지?'라는 생각을 할때 감독님이 전화왔던 게 생각나더라고요. 그래서 연락 드렸죠. "감독님, 전에 말씀하셨던 거 하실 거에요?"라고 물었는데, 사무실로 오라고 하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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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변산'을 품었다. 전작 '그것만이 내 세상'에서는 피아노를 배워야 했고, '변산'에서는 랩을 배워야 했다. 작품에 들어갈 때마다 뭔가를 배워야 하는 숙제가 붙는게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복이기도 하고, 팔자라고도 생각해요. 근데 배우는 내가 아닌 나를 연기해야 하니까 작품마다 뭔가를 습득해야 해요. 다른 배우들도 마찬가지예요. 그게 도드라지느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이죠. 제가 맡았던 역할이 대부분 특별한 장기가 있는 사람이여서 좀 더 도드라졌던 것 같아요."

박정민은 피아노보다 랩이 더 습득하기 어려웠다고 했다. 그는 "피아노는 못 하는 부분은 영화적 기술로 숨길 수가 있는데 랩은 제가 다 해야 하니까 훨씬 더 어려웠어요. 게다가 '변산'에서는 랩 가사까지 썼거든요."라고 말했다.

"제가 가사를 쓰면 래퍼 얀키 형이 랩을 만들어주는 과정으로 진행됐는데 제가 써볼까 싶더라고요. 극중 '쇼미더머니' 3차 예선에서 어머니에 관한 랩을 하는 장면은 제가 학수의 마음을 가장 오래 들여다봤으니 제가 쓰는 게 맞다고 생각했어요. 가사를 쓴 후 감독님이랑 얀키 형에게 들려드렸더니 이대로 하면 되겠다고 하시더라고요. 그래서 클럽에서 공연하는 장면의 랩과 '쇼미더머니' 1,2차 랩도 제가 써봐도 될까요?해서 결국 많은 랩 가사를 직접 쓰게 됐어요." 

박정민은 노래방에 가면 반드시 랩 노래를 선곡할 정도로 랩을 좋아했다. 그러나 취향으로 듣고, 재미로 부르는 노래와는 차원이 달랐다. 학수는 아마추어지만 실력자인 래퍼였고, 학수를 연기하는 박정민의 랩에 대한 열정을 연기로 보여줘야 했다. 약 1년에 가까운 시간을 랩을 마스터하는데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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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연기가 다 어렵지만 이 영화가 좀 더 어려웠던 건 전 회차에 다 제가 나오는 분량이 있고, 영화 자체가 학수의 감정을 따라가다 보니까 쉽지 않았어요. 게다가 여기에 랩이라는 큰 덩어리가 붙여지니까 더 힘들게 느껴졌던 것 같아요."

'변산'은 실제로 전북 부안군 변산면에서 대부분의 분량을 촬영했다. 화기애애한 촬영 현장이었다. 박정민은 "공기도 좋고 조용하고, 영화에서 묘사된 것처럼 노을이 아름다운 곳이었요. 다 같이 모여서 생활하고, 촬영하고 식구처럼 지내니까 그렇게 좋을 수 없더라고요. 그런 분위기가 영화에도 잘 묻어나온 것 같아요"라고 웃어 보였다. 

"이 영화의 내용이 새롭다고는 볼 순 없지만, 형식 자체가 도전적이고 모험적인 데가 있잖아요. 이준익 감독의 뒤돌아보지 않는 용기가 아니면 이런 영화는 만들어질 수 없었다고 봐요. 저 역시 '내가 언제 이런거 해보겠어?'라는 마음으로 힘들어도 즐겁게 임했던 것 같아요."

박정민은 '동주'에 이어 '변산'까지 이준익 감독이 만든 청춘 3부작 중 2편에 출연했다. 그의 이름을 아로새긴 영화 '파수꾼'까지 유독 청춘 영화와 인연이 깊었다. 열정과 치열함에 있어서는 연기한 캐릭터만큼 그 자신의 생애도 뒤지지 않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친구들에게 '난 영화과에 갈거야'라고 말하곤 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여름에 한국예술종합학교 입시를 봤는데 보기 좋게 떨어졌어요. 그래서 일반 대학(고려대학교 인문학부)를 일단 갔어요. 그리고 다시 도전했고, 두 번째엔 합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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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미로운 건 연극과가 아닌 영화과였다는 것이다. 그는 클린트 이스트우드와 주성치처럼 자신이 연출하는 영화에 연기까지 하는 영화인이 되기를 꿈꿨다. 박정민은 "영화과를 다닌다면서 카메라로 찍은 결과물을 컴퓨어로 어떻게 옮기는 줄도 모르는, 기본도 안 된 놈이었다"며 무모한 열정만 있던 시절을 회상했다.  

"제가 연출한 영화엔 늘 제가 주인공이었어요. 그런데 교수님들의 가차 없는 혹평을 들으면서 제가 그 어떤 것에도 재능이 없다는 걸 느꼈어요. 극단 차이무에 들어가서 일을 도왔어요. 몇 년간 막내 생활을 하면서 선배들이 연기하는 걸 지켜봤는데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어요. '나도 저 무대에서 서고 싶다'는 강한 열망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 학교보다는 극단 생활이 더 중요해졌어요. 제대를 하고 나서는 '저 무대에 서야 겠다'는 열망이 더 강해졌고, 그럴려면 연기를 제대로 배워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제대 후에 연기과로 전과를 한 거에요"

그 선택의 순간은 지금도 특별한 의미로 기억된다고 했다. 밑도 끝도 없던 자신감이 끝을 알 수 없는 열등감으로 바뀌었던 시기였다고도 고백했다. 인생을 바꾼 선택에 영향을 준 친구도 있었다. 단편 영화 '척추측만'과 '뎀프시롤:참회록'의 연출로 주목받고, 영화 '차이나타운'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배우 행보를 걷고 있는 조현철이었다.

"그즈음 내면에 많은 변화들이 일었어요. 열등감이 크던 시기였거든요. 고등학교 때 조현철이라는 친구가 있었어요. 이상하게도 그 친구랑 저는 행보가 비슷했어요. 제가 한예종 영화과를 가겠다고 한 후 얼마후에 그 친구도 한예종을 가겠다는 거예요.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여서 애니메이션과를 가려나 보다 했는데 그 친구도 저처럼 일반 대학을 다니다가 재수를 해서 영화과에 들어왔어요. 대학에 들어와 단편 영화를 찍으면서 저는 엄청나게 헤맸어요. 그런데 그 친구는'척추측만'이라는 엄청난 영화를 찍어서 학교에서 난리가 났어요. 친구랑 실력 차이가 워낙 크니까 열등감이 생기고 '영화는 내 길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을 하면서 좌절하기 시작했죠. 그러면서 연기로 자연스럽게 진로를 틀게 된 거에요. 재밌는건 그 친구도 지금 연기를 하고 있다는 거죠. 저랑 능력치 자체가 다른 친구라 저는 지금도 그 친구가 무서워요. 천재과거든요. 그 친구가 어떤 성과를 낼지 기대감이 커요. 제가 좋아하고 응원하는, 저보다 잘돼도 배 하나 안 아플 그런 친구예요." 

사람 일이란 알 수 없는 것이다. 박정민은 연극 무대에 서는 배우를 꿈꿨지만, 영화 '파수꾼'의 오디션에 합격해 영화로 먼저 데뷔를 하게됐다. 그 과정도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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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영화과에 남궁선이라는 누나가 있었어요. 그 누나의 단편에 나오는 배우는 뜬다는 속설이 있었어요. 김수현, 이유영, 정소민 배우가 대표적이었죠. 대뜸 오리엔테이션에서 그 선배를 만나 '저 연기하고 싶은데 출연시켜주세요'라고 졸랐어요. 과방에서 오디션 비슷한걸 했는데 누나가 한숨을 쉬더라고요. 제가 대사를 워낙 못치니까 '세상의 끝'이라는 영화에서 대사 없는 역할을 맡게 됐어요. 그 영화를 찍고 군대를 갔는데 영화제에서 상을 많이 받았어요. 그 영화를 윤성현 감독이 본거에요. 제대 후 연기과로 전과를 막 한 직후였는데 윤성현 감독이 오디션을 보러왔으면 좋겠다고 연락이 온거에요.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보다는 연극무대에 관심이 많았던 때였거든요. 오디션도 되게 못봤어요. 감독님도 '이게 아닌데' 하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 정도였죠. 그런데 15일 뒤에 같이 해보자는 연락을 받았어요. 그렇게 '파수꾼'에 출연하게 됐어요." 

2011년 개봉한 '파수꾼'은 그해 최고의 독립영화로 각광받았다. 감독 윤성현은 물론이고 주연배우였던 이제훈, 박정민, 서준영 등은 충무로의 샛별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박정민은 "내 의지와 계획과는 상관없는 데뷔였지만, 영화가 보여준 결과는 놀라웠죠. 그 영화로 지금의 소속사를 만났고 차기작이라는 것도 생겼어요. 제 인생을 바꿔놓은 영화에요"라고 의미를 부여했다. 

박정민에게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 세 명을 꼽아달라고 했다. '파수꾼'의 윤성현 감독, '동주', '변산'의 이준익 감독, 그리고 예상 밖의 인물인 배우 박원상을 꼽았다.

"중학교 때 대관령에 있는 친구 별장에 놀러 갔는데 웬 아저씨들이 있는거예요. 어쩌다가 같이 어울려서 놀았는데 웬 아저씨가 "나 영화배우야. 좀 있으면 내가 출연한 영화가 개봉을 해"이러시는 거에요. '뭔소리지?' 하고 넘겼는데 정말 얼마후에 영화 속에서 그 아저씨를 봤어요. '와이키키 브라더스'였어요. 그 영화를 보고 감명을 받아 배우의 꿈을 키우게 됐어요. 한예종 입학증을 받아놓고 어느날 '그 아저씨를 만나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극단 차이무에 계셨어요. 연락이 닿았는데 당시 박원상 선배가 문소리 선배랑 '슬픈 연극'이라는 2인극을 준비하고 계셨어요. "놀러 가도 돼요?"라고 물었다가 제가 그 연극의 스태프로 일하게 됐어요. 차이무에서 막내일을 하면서 배우의 꿈이 커진 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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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민은 2016년 '쓸만한 인간'이라는 제목의 책 발간했다. 글 쓰는 것을 좋아했던 박정민이 오랜 기간 자신의 블로그에 남겨온 흔적을 모아 만든 산문집이었다. 소박하고 진솔한 글은 팬뿐만 아니라 독자의 마음까지 파고 들었다. 하지만 그는 "연예인의 인지도를 빌려서 다른 영역을 쉽게 침범하려는 모양새가 다른 이들에게 박탈감을 줄 수도 있을 것 같아 더이상의 책을 낼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 책의 제목처럼 박정민이라는 배우의 '쓰임'이 궁금해진다. 박정민은 "이제껏 그랬듯 저를 잘 써먹을 감독님을 기다리고 있고요"라고 말했다. 차기작은 '타짜3'다. 또 한 번의 도장 깨기 같은 미션이 기다리고 있다. 이번엔 포커를 배워야 한다.

"권오광 감독님이 뭘 또 배우게 해서 죄송하다고 카드를 내미시더라고요. 사실 영화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뭘 준비해야 할지 애매할 때가 있어요. 그런데 이런 특정된 미션이 있으면 재밌어요. 그 과정을 통해서 확실히 빠르고 깊게 캐릭터에 밀착되거든요. 그런 기술이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확실히 도움을 줘요. 공감 능력이 떨어져서 그런지 역할이 가진 어떤 기술이 캐릭터를 이해하는데 확실히 도움이 되죠. 이번 영화도 재밌을 거 같아요. 기대하고 있어요"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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