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에 대한 소감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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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 '역사생산자'가 '지식소매상'에게 ②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역사학]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에 대해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가 서평을 <프레시안>에 보내왔습니다. 세 차례에 걸쳐 오 교수의 글을 싣습니다. 편집자. 

(1편 바로가기)

Ⅲ. 인용된 역사서에 대한 코멘트

1. 제1장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

유시민은 독자가 지금 그 책을 읽고 있는 듯 느끼도록 글을 쓴다. 좋다. 의심 많은 나는 이게 함정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읽고 있는 게 아니라, 유시민이 본 헤로도토스의 <역사>의 일부만을, 그것도 유시민의 눈을 통해 읽고 있는 것이다.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를 대비하려고 그랬는지, 아니면 논의를 위한 논리적 장치인지 유시민은 “헤로도토스는 인간의 성취를 기록하고 페르시아 전쟁의 원인을 밝히려고 한 반면, 투키디데스는 오로지 기록하는 데만 관심을 기울인 것 같아서 헤로도토스가 역사 서술의 목적에 대해서 더 깊이 사색하고 고민했다고 평가할 수도 있다”고 말한다.(35~36p) 여기서도 ‘기록만 하기’와 ‘역사서술’을 대비(대립?)시키는데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다 그냥 ‘역사’다.

하지만 그가 두 역사가를 대비시킨 것이 단순히 논리적 장치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을 이야기하기보다는 청중의 주목을 끄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산문 작가의 기록 운운”라는 대목에서 투키디데스가 말한 ‘산문 작가’가 헤로도토스라고 추정하기 때문이다. 정말 둘이 그렇게 대비될까? 유시민이 헤로도토스가 거리의 이야기꾼이었다는 사실에 너무 집착하고 읽은 것은 아닐까? 나는 오히려 투키디데스가 비판한 ‘산문 작가’에서 헤로도토스는 예외였다고 생각한다. 헤로도토스 역시 사마천만큼이나 실증 자료에 기초하였고, 그의 <역사>는 자신의 상상으로 이야기를 지어내는 경향과는 거리가 멀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 시기에 <역사> 정도의 분량을 저술하려면 얼마나 힘이 들었을까? 관련 연구를 충분히 검토하지 못했지만, 파피루스 종이에 써야했고, 자료 수집을 위해서 페르시아, 이집트를 거쳐 흑해까지 답사를 다녔던 점을 감안하면 고생이 막심했을 것이다. 당시의 세계사였다. 이런 고생을 감내하며 ‘역사에서 걸어 나온 사람들’은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의 판단을 한 꺼풀 더 뒤집는 자존심이 있다고 보는 편이 대개 맞다. 먹고 살기 위해 이야기꾼을 했지만, 그것만으로 헤로도토스의 정체성을 논의하면 빗나가기 쉽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조사, 답사, 실증, 균형 감각 등이 증언하는 바이다.

▲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 ⓒ돌베개

2. 제2장 사마천

1) 궁형의 영향

유시민은 사마천이 <사기>를 쓴 첫 번째 목적은 사실을 기록하는 것이고, 두 번째 목적은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당한 치욕, 즉 궁형(宮刑)에 대한 일종의 복수라고 하였다.(63p) 사마천이 겪은 궁형은 이릉에 대한 의리, 특히 조정 신하 누구도 변호하지 않는 상황에서 한 무제(漢武帝)라는 절대 권위에 맞선 결기와 결합하여 사마천의 <사기>를 설명하는 드라마틱한 소재가 되었다.   

얼핏 보면 그렇게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사마천은 궁형을 당하기 전부터 사관(史官)이었고, 아버지 사마담(司馬談)의 대를 이어 역사를 편찬하는 직무를 맡았다. 궁형을 당하지 않았어도 그는 <사기>를 편찬했을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사기>의 완성을 알리는 '임 소경에게 보내는 답장(報任少卿書)'에서도 “이 일을 완성하지 못할 것을 애석하게 여겼기에 극형을 당하고도 부끄러워할 줄 몰랐던 것입니다.”라고 했으리라.

사마천이 태어난 해는 BC145년이고, 47세 때인 BC99년에 궁형을 당했다. 그는 자료 수집을 위해 크게 세 번 현지 답사를 했다. 20세 때 강회(江淮), 월(越) 땅의 회계산(會稽山)에 올라 우(禹)임금이 묻혔다는 굴을 찾아보고 다시 구억산(九嶷山)에 올라 순(舜)임금의 행적을 살펴보았으며, 원수(沅水)와 상수(湘水), 제(齊)나라와 노(魯)나라를 답사했다. 첫 번째 답사 뒤에 조정에서 낭중(郎中)이 되었다. 35세 때인 BC111년, 무제의 명을 받아 파촉(巴蜀) 이남을 답사하였다. 또 36세 때 한 무제를 수행하여 다시 태산(泰山)과 하북성, 내몽고를 답사하였는데, 이 무렵 아버지 사마담이 죽었으니 역사 수집과 편찬은 오롯이 사마천의 몫이 되었을 것이다. BC 91년경, 임 소경, 즉 임안(任安)에게 보낸 편지에 이미 <사기>가 완성되었다고 했으니 그 전에 <사기>는 완성되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다.

나는 궁형의 분노나 그에 대한 복수가 <사기> 편찬의 목적이나 동기가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궁형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이 사관으로서 <사기> 편찬을 완성했다고 설명하는 쪽이 사실에 부합한다는 말이다.

2) 개인 편찬?

유시민은 “사마천이 역사 기록을 관리하는 공무원이었지만 <사기>는 국가의 공식 역사서가 아닌 개인 저작이다.”라고 하면서 그 예로 한 고조 유방과 맞서 싸운 항우(項羽)를 본기(本紀)에 놓은 것을 사례로 들었다. 또 “국가 공인 역사서에서 이렇게 했다면 목이 열 개라도 모자랐을 것”이라고도 했다.(70p)

그럴까? 난 생각이 다르다. 첫째, <사기>는 ‘24사(史)’ 또는 ‘25사(史)’로 표현되는 중국 정사(正史)에 들어간다. 정사란 국가 공인(공증!) 역사서라는 말이다. 둘째, 역사서의 편찬 양식으로 볼 때 본기-세가-열전-표-서(지) 등으로 구성되는 기전체 역사서는 사마천의 <사기>가 처음이다. 그래서 <사기>는 기전체이면서도 후대 정사들과는 달리 왕조사, 국가사가 아닌 통사(通史)이다. 또 본기, 세가를 구분하는 확실한 기준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항우가 본기에 편재된 것은 두고두고 의문을 샀고, 공자(孔子)가 세가에 들어간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 오류로 지적되기도 했다. 유시민이 사마천이 항우의 인물됨과 역사적 성취를 높이 평가한 듯이 인용하고 있지만, 실제 내용은 항우가 왜 천하를 차지하지 못했는지에 대한 평론이다. 사마천은 항우가 ‘황당하다’고 말했다.

사마천은 세습 사관이었고, 그렇기 때문에 정부의 지원 아래 자료 수집이 가능했고 답사도 가능했던 것이다. 궁형을 당한 뒤에도 그는 사관이었다. 그러므로 <사기>를 요즘 생각하는 개인 저작으로 보는 건 틀렸다.

3. 제3장 이븐 할둔

전주대에서 학생들과 아침세미나에서 읽은 책의 하나가 <역사서설>이었다. 이슬람 문명에서 나온 역사책이라 좋은 경험일 것으로 생각했지만, 학생들은 조금 힘들어했다. 내가 처음 읽었을 때를 생각하니 이해할 수 있었다. <역사서설>을 읽었을 때 느낌은 매우 지루한 자료집(사료 모음)이었다. 지루한 만큼 정확하고 성실한 조사에 기초한 것이리라는 신뢰를 주는 책이었다. 이 글을 쓰며 다시 훑어보았지만 여전히 느낌이 비슷하다.

유시민은 <역사서설>이 정교(政敎) 일치 시대의 산물이라고 했지만 ‘알라의 이름으로’를 빼면 <역사서설>은 나무랄 데 없는 역사책이다. “선량한 지배권이라 함은 백성에게 친절과 보호를 베푸는 것이다. 왕권의 진정한 의미는 군주가 백성을 보호할 때 실현된다.”는 할둔의 말을 인용하여, 할둔의 주장이 맹자(孟子)의 왕도정치와 비슷하며, 인류가 진화하며 만들어내는 최소한의 윤리적 규범이라고 유시민은 평가했다. 매우 동감이 가는 대목이다.
  
4. 제4장 랑케

흔히 알려진 대로 사실 자체에 대한 랑케의 강조는 역사학이 유럽 중세 신학에서 분리되어 새로운 학문 체계를 갖추는 과정을 반영한다. 현실에 대한 랑케의 수구적 가치관과 태도는 알려진 바 있지만, ‘있는 그대로’의 서술을 강조하는 그의 진의가 왜곡되었다는 논의도 있다.

유시민은 랑케가 “진보를 절반만 인정하면서 역사에 대한 신학적 해석으로 나아갔다. 모든 시대가 다른 시대와 동등한 가치를 지니며 신과 직접 만난다는 랑케의 논리가 ‘공평한 신’이라는 관념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하였다.(132p) 

내가 보기엔 신학적 해석으로 간 게 아니다. 유시민도 인용하고 있듯이 랑케의 말은 “어떤 시대의 가치는 그 시대에서 출현한 무엇이 아니라 그 시대의 실존 그 자체, 그 시대 자체의 고유함에 있다”는 것이다. 서울에서 부산으로 가는 사람에게는 수원, 대전, 대구가 거쳐 가는 곳이겠지만, 그런 목적성이 없다면(보수-진보 프레임으로 대표되는 근대주의 사관은 이런 목적론의 전형이다. 목적지를 자본주의로 놓던 사회주의로 놓던.) 수원, 대전, 대구 역시 그냥저냥 사는 고유의 세상이라는 말과 같다. 랑케가 그들의 기독교 전통 속에서 이걸 ‘공평한 신’이라고 표현했다고 해서 신학적 해석이라고까지 단정하는 것은 과하지 않을까?

“한 형태의 문화가 존속된다는 것은 그 속에, 사회화와 지식 전달의 기제가 작동하고 있고, 수용된 의미와 재현의 범위를 나타내주는 절차들이 존재하며, (...) 어떤 문화의 개념과 재현들이 계속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 문화의 구성원들 스스로가 이 모든 것들의 기능을 유지해야 한다. 어떤 지속적인 문화형태가 있다면, 거기에는 반드시 인식적 권위와 통제의 원천이 존재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토마스 쿤의 <과학혁명의 구조>에 대한 배리 반즈의 설명이다. 역사는 자유가 지속적으로 증가해 온 선형적 진보의 과정이며 현재는 그 정점이라는 식의 역사관, 흔히 ‘휘그적 역사관’이라고 부르는 그것에 대한 비판이다. 이런 과학사 인식을 뒤엎고 시대의 고유한 ‘패러다임’ 이론을 주장한 쿤의 주장에 대한 요약 설명이다. 랑케의 말과 같지 않은가?  

5. 제5장 마르크스

1) 기계적 유물론

유시민이 적절히 지적했듯이 “단선적, 기계론적 역사이론은 스탈린이 사망한 1950년대까지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조직의 ‘정통이론’으로 군림했다.” 단선적 역사이론이란, 1938년 스탈린의 <변증법적 유물론과 사적 유물론>에서 주장한 ‘역사 5단계설’로, 원시공산제→고대노예제→봉건제→자본제→공산제 식으로 역사가 쭉 발전=진보한다는 관념이다. 중국도 1980년 이후 ‘역사법칙이라는 도식을 가지고 사실을 휘두른다[以論帶史]’는 비판이 제기될 때까지 중국 공산당혁명을 이 5단계 발전도식에 맞추느라 엄청 고생했고, 아직도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다.

1980년대 초, 선배들 덕에 정문길 교수의 <소외론 연구>를 입구로 삼아 <경제학철학초고>를 통해 마르크스는 접했던 나는 제대 뒤 만연했던 소련 교과서의 도식적 역사관을 보고 답답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의심이 많았던 나는 조선을 ‘봉건제’로 규정하는 당시 한국 역사학계 일각의 개념화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했고, 역사학도답게(!) 사실을 반영하지 못한 스탈린화(化) 된 도식적 발전단계론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도식의 약점을 ‘보편-특수’, ‘나선형’ 등으로 가리려고 하는 시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요즘은 조선시대를 봉건사회라고 부르는 경향이 많이 줄어들었지만, 실제 내용상으로는 여전히 도식적 근대주의의 프레임에서 허덕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단 마르크스가 <경제학철학초고>, <자본>,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을 썼다는 걸 안다면, 그리고 그 통찰과 치밀함을 보았다면 마르크스가 도식화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가 도식을 만들기에는 자료와 생각이 너무 많은 사람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더구나 마르크스가 도식화가 필요할 정도로 현실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지 않는다. 1848년 ‘공산당선언’을 쓸 때를 제외하고.

하지만 기계적 유물론에 그의 책임이 없지는 않다. 도식적 5단계 역사발전론을 마르크스 자신이 말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1859, 김호균 옮김, <정치경제학비판을 위하여>, 중원문화, 2009; 홉스봄 해제, 성낙선 옮김, <자본주의적 생산에 선행하는 제형태>, 지평, (1978?)1988. 이는 1857~8년에 마르크스가 쓴 <정치경제학비판요강>의 일부이다. 김호균 옮김, 그린비, 2000)

마르크스의 견해와 구 소련의 도식적 발전단계론을 구별하는 데는 홉스 봄의 정리가 타당하다는 게 내 판단이다. 홉스 봄이 정리한 ‘속류(俗流) 마르크스주의’의 몇 가지 요소는 이렇다.(홉스 봄, <역사론> 10장 역사가는 마르크스에게 무엇을 빚지고 있는가(1968), 강성호 옮김, 민음사, 2002)

① ‘경제적 역사 해석’은 “경제적 요소는 근본 요소로서, 그 밖의 다른 요소들은 경제적 요소에 종속된다”는 신념일 뿐이다.

②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토대와 상부구조’의 모델은 ‘경제적 토대’와 ‘상부구조’ 사이의 지배와 의존이라는 단순한 관계로 해석되어 왔다.(실제로는 상이한 수준=Dimension이라는 것!)

③ ‘계급적 이해와 계급투쟁’. 수많은 속류 마르크스주의 역사가들이 <공산당선언>의 “이제까지 존재한 모든 사회의 [서술된]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다”라는 첫 문장 이상을 읽지 않았다는 인상을 받는다. 

④ ‘역사법칙과 역사적 필연성’. 인간사회가 역사 속에서 체계적이고 필연적으로 발전했다고 마르크스를 이해한 결과, 장기적인 운동에 대한 일반화의 수준에서 우연적인 것은 대부분 배제되었다. 개인이나 우연의 역할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생긴 기계적 결정론이다.(이 부분은 뒤에 ‘사실’을 논할 때 좀 더 자세히 논의할 것이다. “백남운은 이런 도식적 유물사관에 입각해 서술한 유럽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역사서와 별로 다를 게 없다”(165p)는 유시민의 말은 적절하다.)
 
2) 마르크스와 역사학

유시민은 “마르크스는 역사가도 역사학자도 아니었다.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경제학자, 사회학자, 정치학자 또는 혁명가라고 한다. ……역사서 혹은 역사이론서라고 할 만한 책은 하나도 쓰지 않았다. 그나마 역사서와 비슷해 보이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도 정치비평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147p)

내가 보기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는 정치비평서이기도 하지만, 당대사(contemporary history)이다.

<정치경제학비판요강>(1857~8년 저술)이 향후 <자본>(1860년 이후 저술)을 저술하기 위한 사전 작업인지 어떤지에 대해 나는 소견을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이 두 저술을 위해 마르크스는 숱한 통계 자료와 영국 의회 문서, 영국 공장 감독관들이 하원에 제출한 공식 보고서를 검토했고, 역사, 기술, 과학 분야의 저작을 조사했다. 마치 실록(實錄)을 편찬한 사관처럼 마르크스는 사초(史草)를 만들었다. 사초를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19세기 새로 등장한 자본주의사회라는 ‘현대사’를 자본-노동을 축으로 관찰, 이해하려고 했다. <브뤼메르 18일> <요강> <자본>에서 보이는 그의 사료 검토와 서술은 어떤 역사학자에게도 밀리지 않는 탁월성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다만 ‘과거의 특정 시대를 국민국가사 중심으로 연구하는’ 요즘 한국 대학의 교수 같은 아이덴티티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뿐이다.

이런 점에서 유시민이 <공산당선언>을 마르크스 역사학을 대표하는 저술로 선정한 점은 적절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유시민 자신도 잘 알겠지만 ‘선언’은 가슴 뛰게 하지만 그 주체의 진수를 보여주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3) 역사종말론

역사종말론의 맥락에서 유시민은 프랜시스 후쿠야먀의 <역사의 종말>을 검토하였다. 내키지는 않지만 이 책이 ‘오래되었지만 중요한 역사학의 이슈를 되살려 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인류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보편적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이라고 한다.(167p)

나는 후크야마의 책이 의미 있는 이유는 유시민이 말한 질문과는 별 상관이 없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이 말한 이슈는, 사실과 태도를 혼돈하거나, 수구적인 역사관을 답습하는 연구자를 제외하면 이제 거의 던지지 않는 질문, 무의미한 질문이기 때문이다.(이 이슈는 뭔가 세계를 아우르는 큰 역사가 있다고 생각하는 상상의 산물이고 역사학적으로 무의미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호모 히스토리쿠스> 2부 3.진보사관의 함정 참고. 좀 더 고증적인 논의로는, 라인하르트 코젤렉, 크리스티안 마이어, <개념사 사전 2 – 진보>, 황선애 옮김, 푸른역사, 2010)

내가 보기에 후쿠야마의 책이 선풍을 일으킨 것은 1980년 이후 시장 중심의 자본주의(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가 풍미하면서 벌어진 불안감을 달래주는 초콜릿이었기 때문이다. 분명 맹전도 끝나고 체제 논란까지도 사라진 듯한데, 뭔가 찝찝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던진 안심하라는 주문(呪文), 즉 자본주의가 끝이라는 강변이었다.

후쿠야마는 “인간 사회 진화의 종말은 더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역사의 근거를 이루는 여러 원리나 제도가 더는 진보하거나 발전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라고 했다. 유시민은 이를 ‘지성적인 문장’이라고 했다.(168p) 하지만 왜 내 눈에는 ‘무지하고 현실을 애써 합리화하는 수구적인 문장’으로 보일까?

유시민은 “<역사의 종말>은 철학, 경제학, 정치학을 뒤섞은 사변적 정치선언문으로,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구체적이고 진지한 질문에는 전혀 응답하지 않는다. 헌팅턴의 표현에 따르면 이 책은 서구 중심주의에 사로잡힌 지식인이 터뜨린 ‘환상과 편견의 꽃망울물’일 뿐이다.”라고 했다. 이미 말한 대로 내 생각도 헌팅턴과 같다. 유시민도 동의하는 듯하다. 그런데도 그런 책이 제시한 역사학의 이슈가 왜 그리 중요하다고 여길까? 그 이슈는 후쿠야마가 제시한 것이 아니라 유시민이 원래 가지고 있던 질문 아닐까? 즉 후쿠야마의 책이 없었어도 가능한 유시민의 질문 말이다.
     
6. 제6장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1) 당대사

나름의 고민을 가지고 있지 않은 시대는 없다. 사람마다의 인생이 그렇듯이. 다만 어느 시대보다 더 어려운 시대는 있다. 일제 강점기 역사학자들이 살았던 시대가 그렇게 보인다. 이들은 당대사와 싸웠다. 유시민의 표현대로 “식민지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러나 당대 현실을 극복하려는 목적의식이 곧 역사 이해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백남운이 그렇다. 유시민의 말대로 그의 역사학이 ‘민족해방투쟁의 방법’이었다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원시 씨족공동체→노예제→봉건제→자본제라는 그의 조선사 도식은 속류 발전단계론자들의 한계를 그대로 가지고 있다. 

하지만 당대사는 여전히 중요하다. 유시민은 “당대사를 기록하고 서술하는 것이 역사가의 가장 중대한 임무라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다. 오늘 한국 역사가와 역사학자들 가운데 이 임무를 수행하는 데 열정을 꽅는 이가 많지 않은 것은 실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190p)

나도 동의한다. 대학 역사학과가 과거의 국민국가사 중심으로 커리큘럼이 짜여져 있어서, 당대사의 기록이나 서술을 위한 교육이 어렵다. 1990년 전후로 시작된 기록관리 운동이 기록학과로 이어졌고, 기록학개론이 역사학과 수업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지만, 아직 당대사는 역사학과의 주요 영역이 아니다.

2) 김부식 

신채호가 싫어했던 김부식은 정말 나쁜 사람인가? ‘사대주의자’라서 그렇다는데, 사대는 평가의 대상인가? 설명 없이 평가는 가능한가? 역으로 묘청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타당한가? 고구려인이 현재 대한민국 국민과 일치하는 것도 아니고 일치한들 1910년대의 역사-현실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나아가 신채호가 싫어했으니까 유시민도 싫어해야 하나? 자명한 듯 이어지는 서술에는 ‘일단 그렇다 치고’ 넘어가서, 미처 설명되지 않은 데가 참 많다. ‘일단 그렇다 치고’ 넘어간 데가 많은데, 이들 중 하나라도 설명해야 하지 않을까? 신채호를 절대선(絶對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7. 제7장 에드워드 카아

유시민은 카아의 <역사란 무엇인가>가 어렵다고 했다.(219) 유심히 보니 어려운 데가 나와는 핀트가 달랐다. 유시민의 설명으로는 영국이나 서양사에 대한 배경 지식이 없이 읽을 때 어렵다는 것이다. 나도 그랬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진짜 어려웠던 것은 정작 다른 데 있었다. 오류 내지 혼선이 낳은 주제, 사실과 해석에 관한 그의 서술에 있다.

카아는 말한다. “역사가는 필연적으로 선택을 하게 된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딱딱한 속알맹이가 객관적으로 그리고 역사가의 해석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이지만, 그러나 뿌리 뽑기는 매우 어려운 오류이다.”(E. H. 카아, 김택현 옮김, <역사란 무엇인가>, 까치, 1997, 22~23p)

나는 ‘역사적 사실이 역사가의 해석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는 믿음은 어리석은 오류’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는다. 지금 <역사의 역사>를 읽은 독자들이 독후감을 쓰면 다 내용이 다를 것이지만, 이 책의 존재, 이 책을 쓴 유시민이란 존재, 그 책에 대해 서평을 쓰고 있는 오항녕이란 존재 등의 사실은 변치 않고 ‘역사가의 해석과 독립하여’ 존재한다. 독자들의 독후감이 다르다는 사실이 이 책의 존재를 부정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오히려 독자들의 독후감이 다르다는 사실은 이 책의 집필과 독서라는 객관적 사실의 물증이다. 선택이라는 말 자체에 이미 객관적 사실이 전제되어 있다.

카아의 말을 하나 더 보자. “어떤 산이 보는 각도를 달리 할 때마다 다른 형상으로 보인다고 해서, 그 산은 객관적으로 전혀 형상을 가지고 있지 않다거나 무한한 형상을 가진다고 할 수는 없다. 해석이 사실들을 확정하는 데에서 필수적인 역할을 한다고 해서, 그리고 현존하는 어떠한 해석도 완전히 객관적이지 않다고 해서, 이 해석이나 저 해석이나 매한가지이며 역사의 사실들에 대해서는 원칙적으로 객관적인 해석을 내릴 수 없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앞의 책, 23p)

여기서 카아는 산(=사실)은 객관적으로 있는 것이고, 나아가 객관적인 해석도 가능하다는, 자신이 부정했던 입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이 상반된 두 진술을 놓고, 두 진술이 모순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는다면, 카아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는 학자일 뿐이다. 바로 이 카아 자신의 혼돈된 서술이 사실과 해석이라는 역사학의 기본 질문을 어렵게 만든 이유이다.

“역사는 사실이 아니라 해석이다”가 아니라, “역사는 사실이기도 하고 해석이기도 하다”는 말이다. 사료=텍스트라고 이해하는 논자들에 의해, 심지어 카아 같은 역사학자 자신들에 의해, ‘역사는 해석’이라는 기괴한 논리가 아무 거리낌없이 남발되지만, 그럴수록 몰이해만 깊어질 뿐이다.

아무튼 카아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말을 통해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친숙한 역사학자이다.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그의 설명은 엄밀한 학술적 명제라기보다 시적(詩的) 표현이다. 과거의 흔적을 지금의 역사가가 선택하여 뭔가를 이야기하는 것이 역사일진대, 이를 그 이상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그래서 나는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대화’라는 멋진 표현에서 카아의 고충을 읽는다. 아마 이런저런 정의를 내리고 고치고 하다가 도달한 일종의 선(禪)의 화두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8. 제8장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

<서구의 몰락>, 참 길게도 쓴다, 아는 것도 많다는 느낌이 들었던 책이다. 20세기는 장밋빛 진보의 희망에서 서구의 몰락으로 급전직하한 시대임에는 틀림없다.

대학 시절, 서양사 시간에 너무나 감동적으로 소개하시는 교수님을 보고 뭉클했던 <역사의 연구>. 나중에 이 책이 원래 12권이라는 것을 알고 소개하신 교수님이 정말 다 읽으셨을까, 소박하게 의심했던 책이다. 논문이나 소개글만 읽었지, 나는 <역사의 연구>를 읽지 못했다. 따라서 유시민의 글에 대한 코멘트는 생략한다.

1995년, 에드워드 사이드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특강을 들은 적이 있다. 그의 <오리엔탈리즘>(박홍규 역, 교보문고, 1992)을 충격적으로 읽은 경험이 있어 경청했는데, 거기서 헌팅턴 얘기가 나왔다. 

사이드는 말했다. “그는 나쁜(bad) 사람이다.”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이 이슬람과 기독교 국가(문명)의 대립을 부추긴다고 본 것이다. 내 기억에 헌팅턴은 당시 미국 국무부 자문교수였다. 아무튼 이 기억이 내가 <문명의 충돌>을 쉽게 읽지 못했던 이유였다.

나중에 전남대 이영철 교수에게서 헌팅턴만큼 충실한 자료와 논리로 글을 쓰는 정치학자가 없다는 말을 듣고서야 그의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중동에서는 이슬람과 기독교의 대립이 사라지지 않고 있으니, 사이드가 볼 때 ‘정의(正義)의 충돌’을 ‘문명의 충돌’로 치환하는 듯 보였을 수도 있겠다.

9. 제9장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1) 질문의 힘

<총, 균, 쇠>(김진준 옮김, 1998, 문학사상사)를 처음 접했을 때의 느낌은, 번역하느라 정말 힘들었겠다는 느낌이었다. 자화수분, 키노아 등 용어와 이름, 다양한 지역과 시대에서 등장하는 단어와, 다이아몬드의 논리를 정확하게 옮기는 것이 녹록치 않았으리라 짐작되었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가 인류 역사에서 존재했던 각 문명의 불균등한 전개를 살핀 이유는, 어떤 문명을 정당화하려는 것도 아니고, 유럽 중심적 시각을 가진 것도 아니었다. 단계적 발전이나 진보 관념에 얽매어 있지도 않다. 그는 다르게 전개된 역사와 문명을 설명하고 이해하려는 것이다.

2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지만, 또 이 책의 풍부한 정보와 재미도 기억에 남지만, 가장 인상에 남았던 것 세 가지가 있었다. 첫째는, “왜 흑인들이 백인들처럼 그런 ‘화물(성냥, 의약품, 우산 등 백인이 들고 온 근대 문명의 산물)’을 만들지 못했는가?”라는 뉴기니 섬 얄리의 질문에서 시작하여 각 문명의 차이와 불균등에 대한 원인 탐구를 밀고 나가는 다이아몬드의 뚝심이었다. 내가 보기에 질문과 그 질문을 밀고 나가는 힘이야말로, 학자에게는 가장 큰 덕목이다.

둘째, 그는 역사적 과학과 비역사적 과학을 방법론, 인과 관계, 예측, 복잡성의 세 측면에서 설명한다. 비역사적 과학이란 물리학, 화학, 분자생물학 등,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가 거의 없고 일반적인 원리나 법칙의 수립이 가능한 학문 분야를 말한다. 역사학의 성격을 실험실 실험의 불가능성, 목적이나 기능에 대한 탐구의 불가피성, 선험적 예측의 어려움, 변수의 복잡성으로 설명하였다.

셋째, 50쪽이 넘는 참고문헌이다. 각 장, 절 별로 그는 자신이 참고했던 저서와 논문을 소개하였다. 다이아몬드에게 계발 받은 역사학도들이 관심 있는 주제를 조사, 연구할 때 좋은 디딤돌이 되리라 생각했다.

다만 아쉬운 점은 있었다. 다이아몬드가 자신의 과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다른 경로로 독자가 알 수 있으리라 생각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루기가 버겁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문명을 만드는 또 하나의 요소인 인간의 욕망, 목적, 태도, 의지 등이 빚어내는 양상에 대한 서술은 적다. 그것이 이 책이 환경, 지리 결정론으로 보일 수 있는 약점이 된다.

얄리의 질문에 대한 다이아몬드의 대답을 유시민은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라고 요약하였다. 그러나 그 대답은 많이 아쉽다. 듣는 이로 하여금 애써 탐구한 자신의 노력을 허무하게 느끼게 만들지 모른다는 점 외에도, 아메리카 ‘발견’ 이후 100년만에 인구가 10% 수준으로 떨어진 인디언에게, 반 이상의 사람이 잡혀오던 중 사망했던 1천 5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아니 취직 시켜준다는 유인에 속아 위안부가 된 조선의 여성들에게, ‘우연히!’란 답변은 너무도 무기력하고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이는 서술의 냉정함과는 다른 문제이다.

이와 관련해서 유발 노야 하라리는 말했다. “기술은 이야기의 절반에 불과하고, 마침내 사람들이 기술로 무엇을 할 것인지에 따라 모든 것이 결정된다는 사실이다.”(하라리, 조현욱 역, 「한국의 독자들에게」, 2015) 하라리의 말에 따르면 다이아몬드는 ‘모든 것이 결정되는 부분’을 아직 다루지 않았거나 빼놓은 것이다.
   
2) 빅 히스토리

유시민은 다이아몬드의 책을 인류사라는 관점에서 하라리와 같이 다루었는데, 그는 “20세기가 저물어 가던 무렵 ‘빅 히스토리(big history)’ 또는 ‘인류사’라는 역사 서술의 새로운 흐름이 태동했다. 이 조류를 선도한 역사가들은 물질세계와 자연, 생명과 인간에 대해 과학자들이 밝혀낸 최신 정보와 지식을 역사 서술에 끌어들였다.”고 하였다.(83p) “역사의 진보라는 것이 과연 있는가? 인류는 일관된 방향성을 가진 보편적 역사를 구축할 수 있는가?”(169p)에 대해 하라리의 크게 다른 대답을 듣게 될 것이다, 라고도 했다.

내 생각에 인류사와 ‘빅 히스토리’가 같은 것 같지는 않다. 얼핏 보면 같은 듯하지만, 다이아몬드가 말하는 인류사는 토인비가 말하는 문명사와 비슷하다. 반면 내가 이해하는 빅 히스토리는 ‘전체사’의 느낌이 강하고, 프로젝트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래서 다이아몬드나 하라리가 걱정하는 바와 포괄적 서술의 가치나 의의는 유시민의 언급으로 대신하고 다른 측면에서 빅 히스토리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인류사’, ‘지구사’ 등의 용어로도 섞어 쓰는 ‘빅 히스토리’에 담긴 ‘전체론적 오류’를 생각해보겠다. 이런 경향은 의외로 역사가들 사이에서 매우 흔하게 나타난다. 원래 모든 메타-역사학자들은, 즉 헤겔 같은 역사철학자들은 이런 오류의 제물이다. 역사학에서는 대문자 역사, 즉 History라는 말을 쓰는데, 마치 ‘절대정신’ 같은 ‘빅 브라더 역사’가 있어서 그것이 자유나 이성 같은 목적을 향해 진보하는 것처럼 역사를 설명하는 견해는 가리킨다.

빅히스토리는 물리학, 고생물학 등 과학의 연구성과와 컴퓨터 기술의 비약적 발전을 토대로 제시된 논의라는 점에서 대문자 역사의 관념론과 다르다. 내가 알기에 빅히스토리의 기원은 1945년에 시작된 유네스코 역사 프로젝트(UNESCO History Project)이다. 이 프로젝트는 당초 “과거를 그 전체로써 다시 캡쳐하고, 모든 인간의 기억을 종합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나중에 ‘탈-중심적’ 방식으로 역사 이해를 증진하고, ‘중심’보다는 ‘주변’이나 ‘현장’의 역사를 주된 대상으로 삼고자 방향을 틀었지만,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 1965년, 그 프로젝트의 2권에서는, BC 1200년부터 AD 500년까지 고대 사회에 대한 전체 진실을 담아내겠다고 약속했다. 이를 위해 37명의 기고자와 자문가가 참여했다. 역사학에서 보면 큰 규모의 연구진이었다. 그 결과? 한 비평가의 말에 따르면, “정말 드물게도, 그렇게 박식한 사람들이 그렇게 오래 역사에 대해 힘들여 연구한 결과로는 너무 볼 게 없었다.” 시작은 창대했으나, 끝은 미약하였던 것이다. 모든 것을 설명하려던 프로젝트는 거의 아무 것도 설명하지 못한 채 끝났다.

최근 몇몇 역사학자와 자연과학자들이 과거 유네스코가 했던 것보다 훨씬 큰 스케일의, 그리고 헤겔이 했던 오류를 반복하지 않을 방식으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가 있다. 그것이 바로 이름 하여 ‘빅 히스토리’. 

“빅 히스토리는 문자의 발명과 기록으로 시작되는 역사 시대 그리고 인류의 등장과 진화로 설명되는 선사 시대를 살펴보는 데 초점을 맞춘 인문학적 역사 분석을 우주의 탄생인 빅뱅이나 별과 태양, 지구의 형성, 생명체의 등장과 진화 등 자연과학적 지식을 토대로 하는 역사 분석까지 확대시킨다. 그리고 137억 년에 걸쳐 나타난 다양한 기원들을 과학적 지식과 근거들을 통해 살펴본다. 또 빅 히스토리는 단순히 분석 대상의 시간적, 공간적 범위만 확대시킨 것이 아니라 빅 히스토리의 시각과 틀 속에서 전체적인 구조와 패턴을 이해하고, 전혀 다른 것으로 간주되었던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살펴보면서 이들 사이의 상호 관련성을 찾고자 한다. 따라서 빅 히스토리야말로 오늘날 우리 시대가 요청하는 스토리텔링을 통한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진정한 융합 연구라고 볼 수 있다.”(빅 히스토리에 대한 좌담회. 프레시안 2013년 2월 1일)

나는 몇 년 전, 조선시대 전자문화지도 구축이라는 프로젝트에 참여한 적이 있다. 얼핏 보면 빅 히스토리의 논리가 전자문화지도와 비슷한 듯 보인다. 전자문화지도는 3D를 포함한 각종 자료를 인터넷상에 구현하여 서로 연결해줌으로써, 자료이용을 효율화, 개방화하고, 개별 연구에서 수행할 수 없거나 발견할 수 없었던 규모와 소통의 연구를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자문화지도는 빅 히스토리와 달리 특정 시기, 특정 주제에 대한 논의였다.
빅 히스토리는 이름에 걸맞게 130억 년이 넘는 우주의 역사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유네스코 프로젝트와 비슷한 시기에 “기록된 역사 전체를 IBM 컴퓨터에 프로그래밍하는” 방식이 진지하게 거론되었다는 점이다. 전체론이 기술력을 등에 업고 프로젝트로 재등장하는 셈인가? 

어떤 종류의 역사 기록은 디지털화할 수 있고, 그것이 유용할 수 있다. 또 학제간 소통이 필요하다는 점에서는 공감한다. 하지만, 빅 히스토리에 대해 내가 느끼는 시큰둥함도 이전 경험이나 오늘 논의와 무관하지 않다. 왜 소통과 탐구가 ‘전체’를 전제로 해야 하는가, 또는 전체를 전제로 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 말이다.

과거는 결코 전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과거는 늘 성글게 남아 있다. 또 사람들마다 관심이 다르다. 그래서 역사는 ‘모든 역사’가 아니라 ‘어떤 역사’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기술의 발달은, 그리고 ‘융합’과 같은 적절한 슬로건은 ‘빅히스토리’라는 프로젝트를 언제든지 소환할 가능성이 있다.

Ⅳ. 사실이란 무엇인가

역사학 개론서를 보면 역사에 대한 개념 정의는 있으나 정작 사실에 대한 정의는 없다. 마치 화학개론에서 화학에 대한 정의는 내리고 원소에 대한 정의가 빠진 것과 비슷하다. 이는 대학의 역사학개론 수업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실에 대한 정의가 빠진 것이 역사학에서 발견되는 대다수 오류의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잠정적으로 내린 사실에 대한 정의는 이렇다. “사실은 인간의 행위로 인해 발생한 흔적이다. 그 흔적은 구조, 의지, 우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인간의 경험 또는 흔적을, 사실(事實), 사실(史實), 사건(事件)으로 불러도 비슷하다.

구조는 조건이라고 불러도 된다. 인간은 맨땅에 태어나지도, 살아가지도 않는다. 타고 나거나 살아갈 때 주어진 조건이 있다. 충청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전라도에서 태어났다는 것, 한국에서 태어났다는 것, 얼굴이 누렇다는 것, 태어나보니 자본주의 사회라는 것…….  아무리 어떤 성심여고 학생이 예뻐서 여자 친구로 삼고 싶어도 완산고등학교 학생이 성심여고로 등교하면 안 되고 누구도 출석으로 인정해주지 않는다. 

그렇지만 방과 후 교문 앞에서 기다릴 수는 있다. 이를 의지라고 하며, 의욕, 욕망이라고 불러도 된다. 사람에겐 상황을 선택할 수 있는 의지가 있다. 조건대로 살지 않는 이유이자 힘입니다. 생각하고 고민하면서(때론 생각하지 않고 고민하지 않으면서), 뭔가 비전을 만들고 추구하고 가치를 부여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연이 개입한다. 우연이란, 내가 정의한 바로는, 서로 목적이 다른 두 개 이상의 행위(사실)가 만나거나, 서로 목적이 같은 두 개 이상의 행위(사실)가 만나지 못하는 것이다. 약을 사러 가다가 차에 치듯이. 소풍 가는 날에 하필 비가 오듯이. 가끔 우리의 인지 능력 부족 때문에, 즉 무슨 일인지 몰라서 설명할 수 없기 때문에 우연으로 보이기도 한다.

모든 사건(사실)은 이 구조, 의지, 우연이라는 요소로 구성된다. 구조만 생각하면 결정론에 빠지고, 의지만 생각하면 목적론에 빠지며, 우연만 강조하면 상대주의 또는 불가지론에 빠진다. 구조를 놓치면 변혁과 개혁의 비전을 잃고, 의지를 놓치면 도덕적 책임을 느끼지 못하며, 우연을 놓치면 비극 또는 희극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잃는다.
그러나 사건마다 그 배합 비율이 다르고, 강도가 다르다. 더구나 의지의 산물이 구조로 바뀌기도 하고, 구조를 의지로 바꾸기도 한다. 이래서 사실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 당연히 사실로 점철된 인생을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동시에 여기에 역사공부의 가치와 의의가 있다. 사실을 이해하는 훈련, 그 사실에 담긴 구조와 의지와 우연을 이해하는 훈련을 거치면서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내가 역사학개론 <호모 히스토리쿠스>를 쓰면서 1장을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닌 ‘사실이란 무엇인가’로 시작했던 이유이다. 
   
에필로그 : 서평의 숙명

유시민의 <역사의 역사>는 본받고 싶은 격조 있는 독후감이다. 유익한 데다 재미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저것 흠을 잡은 것은, 원래 선(善)은 악(惡)보다 잘 드러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꼭 선한 이를 질투해서만은 아니다.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의 말에 따르면, 모든 민족에게서 지옥에 대한 묘사는 생생하고 정밀하며 세부 구조도 매우 상세한데 비해, 천당에 대한 묘사는 재미없고 생기 없고 공허한 모습을 드러낸다고 한다.

내가 생각하기에, 사람들이 지옥에 가지 않으려고 그런 것 같다. 무서운 줄 알아야 가지 않으려고 애를 쓸 테니. 서평도 그러하다. 흠을 드러내는 것은 내가 그런 잘못을 범하지 않으려고 비판하는 것이다.(끝)


오항녕 전주대학교 교수, 역사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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