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천지제사: 조선 왕실의 행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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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실의 천지제사: 조선 왕실의 행사 1

조선 왕실의 행사 1
  • 저자
    김문식
  • 출판
    돌베개
  • 발행
    2011.10.31.
책 소개
조선 왕실 최대 규모의 행사, 천지제사를 재조명하다! 「왕실문화총서」제2권『왕실의 천지제사』. 이 책은 왕조국가이자 농경사회였던 조선의 왕실에서 치러진 천지제사를 재조명한 책이다. 다섯 가지 국가의 중요한 예제 중 길례에 해당하는 의례 가운데, 하늘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 국토와 오곡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와 선잠제의 네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 왕실 제사의례에 대한 기원과 의의,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던 각각의 의례들이 현대에 어떻게 복원되고 있는지 그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 되짚어보았으며, 제례에 사용된 음악과 무용, 복식 등을 각 서술의 후반부에 배치하여 천지제사를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최고 권위 행사인 왕실의 천지제사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책 정보

책 정보

  • 카테고리
    고중세사
  • 쪽수/무게/크기
    358776g153*224*30mm
  • ISBN
    9788971994474

책 소개

조선 왕실 최대 규모의 행사, 천지제사를 재조명하다!

「왕실문화총서」제2권『왕실의 천지제사』. 이 책은 왕조국가이자 농경사회였던 조선의 왕실에서 치러진 천지제사를 재조명한 책이다. 다섯 가지 국가의 중요한 예제 중 길례에 해당하는 의례 가운데, 하늘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 국토와 오곡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와 선잠제의 네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 왕실 제사의례에 대한 기원과 의의, 역사 등을 종합적으로 다루었다. 더불어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던 각각의 의례들이 현대에 어떻게 복원되고 있는지 그 의미와 상징성에 대해 되짚어보았으며, 제례에 사용된 음악과 무용, 복식 등을 각 서술의 후반부에 배치하여 천지제사를 다각도로 분석하였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최고 권위 행사인 왕실의 천지제사에 쉽게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교보문고에서 제공한 정보입니다.

출판사 서평

조선 왕실 최대 규모, 최고 권위의 행사!
‘왕권의 신성화’와 ‘민본의식’을 상징하는 『조선 왕실의 천지제사』


왕조국가이자 농경사회였던 조선의 왕실에서는 한 해 동안 다양한 행사들이 펼쳐졌다. 행사를 치르는 예법은 오례라 일컬어졌으며, 예부터 내려오는 정해진 규범과 제도에 따라 국가적인 규모로 치러졌다. 오례는 대사大祀·중사·소사로 구분되는 국가 규모의 제사를 뜻하는 길례吉禮, 국장國葬을 포함하는 상례인 흉례凶禮, 군사 의식에 관한 모든 예절을 뜻하는 군례軍禮, 국빈을 맞이하고 보내는 예절을 뜻하는 빈례賓禮, 왕의 혼례나 즉위, 왕세자ㆍ왕세손의 혼례나 책봉 의식과 관련된 예법인 가례嘉禮 등 다섯 가지를 말한다.

이 책에서는 이러한 다섯 가지 국가의 중요한 예제 중 길례에 해당하는 의례 가운데, 하늘신을 위한 제례인 환구제,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인 사직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인 선농제·선잠제의 네 가지 의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하늘과 땅에 지냈던 제사의례를 종합적으로 살펴본다.

하늘과 땅, 곡식의 신에게 지내는 천지제사는, 국가를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이자 왕권 유지 계승의 핵심 요소였다. 따라서 천지의 신에게 지내는 제사의례는, 왕실의 그 어떤 행사보다도 중요시 여겨졌으며 성대하게 치러졌다. 천지제사에 포함되는 환구제, 사직제, 선농제, 선잠제는 왕의 권위를 높임과 동시에 백성을 위한 왕의 선정善政을 상징하는 국가의 대제이자 정치행사였다. 또한 제사 대상과 제사를 주재하는 사람의 지위에 따라 의례 절차를 구분하는 예식의 장이었고, 제복을 갖춰 입은 제관들의 정제된 동작과 제사에 적합한 음악과 무용이 어우러지는 당시의 문화적 역량이 총집결된 대대적인 문화행사이기도 했다.

환구제, 사직제, 선잠제, 선농제는 모두 고대 중국에서 유래하였기 때문에, 각 항목의 서두에서는 고대 중국으로부터의 기원과 제례의 의의를 밝히고 있다. 다음으로 삼국시대~고려시대에 이르는 앞선 왕조의 천지제사의 역사를 살펴본다. 본론으로 들어가 조선 왕조의 국왕들이 실행했던 천지제사를 조명해보며, 왕조가 바뀌는 대한제국의 제례까지 살펴본다. 이어 일제강점기에 단절되었던 각각의 의례들이 현대에 어떻게 복원되고 있는지, 그 의미와 상징성·문제점은 무엇인지를 짚어본다. 조선 왕실 천지제사의 역사는 『조선왕조실록』과 『국조오례의』『춘관통고』『대한예전』 등 실록과 예제 관련서, 『사직서의궤』『친경의궤』『친잠의궤』 등 행사와 관련된 각종 의궤서, 그리고 행사 장면을 그린 기록화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다. 각 서술의 후반부에서는 제례에 봉행된 음악과 무용, 착용했던 복식을 집중적으로 다루어, 조선시대 천지제사와 관련된 수준 높은 문화예술적·시청각적 자료들을 종합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제례’는 현대의 우리들에게 쉬운 주제는 아니지만, 조선시대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왕실에서나 민가에서 크건 작건 간에 제사를 지내왔다. 왕실의 천지제사는 조선의 다양한 의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혼례나 즉위식 등 다른 의례에 비해 대중에게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책에서 만날 수 있는 제사의 공간은, 옛 모습 그대로는 아니지만 현재 우리가 쉽게 찾을 수 있는 가까운 곳에 변함없이 자리하고 있고, 또 해마다 옛 제도에 의거하여 제례 행사가 재현되고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문화행사로 되살아나고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조선 왕실의 천지제사를 최초로 종합적으로 다루었으며, ‘천지제사’라는 낯선 전통문화가 독자들에게 좀 더 쉽게 다가갈 수 있도록 집필·편집되었다.

환구제, 천신을 위한 제례

1. 환구제의 기원과 의미
환구제?丘祭는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 전통사회에서 시행했던 대표적인 제천 행사였다. 제왕이 천신天神에게 올리는 제사의례로, 동아시아 황제국 체제의 오랜 역사와 함께 발전해왔다. 천신에 대한 신앙은 고대로부터 시작되어 점차 환구제로 일원화되었는데, 이는 제왕이 주재하는 제사 가운데 최고 수준의 제사였다. 환구제에는 우주자연의 원리와 근원적 신성神聖으로의 회귀, 천신과 함께 황제의 조상을 제사함으로써 왕통을 신성시하고 절대화하는 정치적 의미, 민생을 근본으로 삼는 민본의식으로 황제권의 정당성을 담보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또한 ‘하늘을 본뜬 둥그런 구릉’을 제단으로 하여 천신에게 제사 지내는 행위에는 모든 존재의 근원인 하늘에 대한 인간의 겸허함이 담겨 있었다. 환구제는 최고신인 천신에 대한 제왕의 제사인 만큼 의미와 상징성이 극대화된 의례 행사였다고 할 수 있다.

2. 우리나라 제천례의 역사
환구단에서 지내는 제천례는 고려시대에 시작되어 조선 전기 세조 대까지 거행하다가 중단되었다. 세조 대 이후 환구제가 중단된 이유는, 천자만 지낼 수 있는 환구제를 국왕은 지낼 수 없다는 명분 때문이었다. 광해군 대에는 여러 가지 명분을 들어 세조 이전에 지냈던 환구단 제천례를 다시 거행하고자 하였으나 대신들의 반대로 좌절되었고, 이후 실록 등에는 제천례에 대한 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조선 후기의 국왕들은 제천례의 역사성과 필요성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명분론에 근거하여 환구단 체천례를 지내지 못했고, 대신 남단과 북단이라는 대안적 장소를 내세워 기우제를 지냈다. 환구제는 고종이 황제국인 대한제국을 건설하면서 명분론의 문제를 해결한 뒤에야 다시 부활할 수 있었다.

3. 제천례의 음악, 노래, 무용과 복식
환구제에 쓰였던 음악과 무용, 복식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은 제사가 행해졌던 국왕 대의 실록과, 당시의 기록물을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세종실록』과 『세조실록』, 『국조오례의』, 『악학궤범』, 『대한예전』 등에는 환구제의 절차에 따라 쓰였던 악장과 선율을 기록한 당시의 악보와, 보태평지무·정대업지무 등 당시 추었던 춤의 내용 및 배치도, 사용된 악기와 악사의 배치도 등이 실려 있다(본문 82쪽-91쪽 참조). 환구제 때 국왕과 왕세자, 절차에 참여했던 관리와 악단·무용수 등이 착용했던 복장은 8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본문 101쪽 표 참조), 이 역시 『국조오례서례』 등의 기록에 남아 있는 그림을 통해 살펴본 것이다.

4. 대한제국 제천례의 의미
대한제국의 제천례는 1897년 대한제국 탄생 과정의 가장 상징적인 행사였다. 세조 대 이후 제천례는 제후국에서 거행할 수 없기 때문에 중단되었지만, 대한제국의 황제는 제천례를 거행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고종은 대한제국의 건설을 준비하면서 도성의 남쪽에 환구단을 건설하고, 황제 등극의를 이곳에서 거행함으로써 대한제국이 자주독립국임을 대외적으로 널리 알렸다. 대한제국이 탄생하는 과정에서는 2박 3일 동안 23가지의 행사가 거행되었는데, 그중에서도 고종이 환구단에서 황천상제와 황지기의 신위에 고유제를 올린 다음 황제로 등극하고, 태극전太極殿으로 돌아와 대한제국의 탄생을 알리는 조서를 반포하는 행사가 그 핵심이었다.

5. 일제강점기, 환구제의 폐지와 환구단의 해체
1908년 환구제는 크게 간소화되었고, 1910년 합방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었다. 일제가 환구제를 폐지한 까닭은 일왕만이 하늘제사를 지낼 수 있다는 논리 아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는 한편, 독립의 구심점으로 작용할 근원을 사전에 제거해 버린다는 의도 때문이었다. 1911년에 환구단 건물과 부지는 조선총독부의 관할로 넘어갔으며, 그 후 환구단과 환구단 부지는 파괴와 해체의 수난을 겪게 된다. 1911년에는 일본거류민단이 환구단을 개방하여 공원으로 조성할 것을 청원했고, 1913년 환구단이 있던 자리에는 철도호텔이 세워졌다. 기록에 의하면 대한제국 시기 환구단 영역은 크게 환구단과 황궁우, 석고전, 광선문(환구단의 정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1913년 이후 황궁우만이 현재의 자리에 남아 있게 되고, 석고와 광선문 등이 다른 지역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현재 중구 소공동 웨스틴조선호텔 부지 내의 환구단 터에는, 제사를 지내던 환구단은 사라지고, 신주를 모시던 황궁우·돌로 만든 석고·환구단에서 황궁우로 가는 삼문만이 남아 있다.

6. 환구제의 현황과 현대적 계승의 의의
2008년,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환구제가 재현되었다. 환구단이 사라져버린 상태이기 때문에, 원래 환구단에서 지내던 제례는 남아 있는 황궁우 내부와, 그 앞의 잔디밭에서 거행되었다. 환구제를 통한 제천의례는 우리 민족의 우주관이나 자연관을 잘 드러내는 역사문화자원이며, 민족의 심성과 주체의식을 잘 반영하고 있는 소중한 무형의 문화유산이다. 환구제를 통한 제천의례는 봉건적 사회질서를 이끌어갔던 국왕의 통치원리를 정당화한다는 한계를 갖지만, 민본이라는 우리 민족의 사회적 요구를 담고 있던 농경의례요 민생의례였다. 따라서 환구제의 계승은 우리 민족의 하늘과 그 속에 담긴 보편적 가치를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관념 속에서 자유ㆍ평등을 실현하는 자주적인 국가의 가치를 되새기는 일이 될 것이다.

사직제,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

1. 사직제의 기원과 의미

사직제는 토지와 곡식의 신에게 국가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는 제사이다. 사람은 땅이 아니면 설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길러질 수가 없는데 나라는 백성을 근본으로 하므로, 나라를 세우면 우선적으로 사직을 세워 백성을 깃들게 하고 길러주는 그 공덕에 보답하는 것이라 하였다. 사직제는 천자만 지내는 환구제와 달리 제후, 지방관, 일반 백성들까지 정해진 규모와 형식에 따라 지낼 수 있었다. 전통사회에서 거행된 사직제는 국가의 건립과 국가 경영의 근간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던 의례라고 할 수 있다.

2. 우리나라 사직제의 역사
사직제는 고대부터 시작되었고 한국에서는 백제가 가장 빨랐다. 국가를 의미하는 ‘종사’宗社는 종묘宗廟와 사직社稷을 합한 단어이며 둘 다 가장 등급이 높은 제사인 대사大祀에 속했지만, 실제 위상은 종묘보다 사직이 높았다. 조선의 사직제는 국가제례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사직은 민생에 관련된 최고의 신이라는 점이 강조되었고, 농업과 관련된 신들과 연결되어 기우제祈雨祭, 기고제祈告祭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태종은 사직제를 직접 지낸 최초의 국왕이었고, 상대적으로 권력이 강했던 국왕들은 사직단으로의 행차가 잦았다. 숙종 대에는 최초로 사직단에서 기곡제를 행했고, 영·정조 대를 거쳐 제도가 정비되고 기능도 강화되었다. 특히 정조는 기곡제를 친제로 정례화했으며, 그의 명에 의해 제작된 『사직서의궤』(1783년)에는 당시까지의 사직제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담겨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는 환구제가 중심이 되면서, 사직제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낮아졌다.

3. 사직제의 음악, 노래, 무용과 복식
사직제는 국토와 오곡의 신, 즉 지기地祇에 지내는 제사에 속한다. 제사의 대상이 다르므로 제사 지낼 때의 세부 절차와 내용은 물론 악무樂舞의 쓰임도 환구제와 비교하면 부분적으로 달라진다. 사직제의 형식과 내용은 『국조오례의』, 『국조오례서례』, 『조선왕조실록』, 『사직서의궤』, 『사직서등록』, 『춘관통고』의 기록에 남아 있으며, 사직제에 쓰인 악·가·무와 복식도, 이들 자료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살필 수 있다. 국왕이 친제親祭했던 사직제 행사를 그린 18세기 그림 《사직단국왕친향도병풍》(국립중앙박물관)을 통해서는 사직단의 구체적인 모습뿐 아니라 사직제 참여자의 복식을 색채까지 상세히 살필 수 있고, 종묘제례 장면을 그린 《종묘친제규제도설병풍》(국립고궁박물관)의 인물 모습과도 비교할 수 있어 흥미롭다.

4. 대한제국 이후의 사직제
대한제국이 탄생하고 환구단이 복원되면서 국가제례의 서열에도 조정이 있었다. 조선시대 국가제례에서 사직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었다. 실제로는 종묘에 대한 관심이 높았지만 형식적인 측면에서는 사직이 종묘보다 높았다. 그런데 환구단이 복원되면서 환구단-종묘-영녕전-사직의 순서로 서열이 바뀐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들어와 사직제가 폐지되고, 사직단의 규모는 계속해서 축소되었다. 1911년 사직단의 건물과 부지가 조선총독부 관할로 인계되었고, 1922년 경성부는 사직공원을 조성했으며, 1932년에는 사직단 북쪽 땅의 일부를 떼어내 학교 부지 안에 포함시켰다. 오늘날의 사직단과 사직공원은 대체로 이때의 모습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해방 이후에도 사직단의 규모는 축소되는 과정을 밟았다. 1962년 도로공사로 사직단의 정문이 원래의 위치에서 14미터 후방으로 옮겨졌으며, 그 영역이 오늘에 이른다.

5. 사직제의 현황과 현대적 계승의 의의
1985년에 사직단의 복원 계획이 세워지고, 착수된 지 3년 만에 마무리되었다. 1988년 9월 21일에는 사직대제를 처음으로 재현하였으며, 2007년부터 매년 9월에 종로구와 전주이씨 대동종약원의 주관으로 거행되고 있다. 현행 사직제는 모두 10가지 절차로 진행된다. 신을 맞이하는 영신례迎神禮, 폐백을 올리는 전폐례奠幣禮, 음식를 올리는 천조례薦俎禮, 첫 잔을 올리는 초헌례初獻禮, 둘째 잔을 올리는 아헌례亞獻禮, 마지막 잔을 올리는 종헌례終獻禮, 복주를 마시는 음복례飮福禮, 제기를 치우는 철변두撤?豆, 신을 보내는 송신례送神禮, 폐백과 축판을 태우는 망료례望燎禮의 순서이다(224-225쪽 사진 참조). 절차는 『대한예전』의 예제를 기본으로, 그보다 간소화해서 진행하고 있다.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사직대제는 대한제국 때의 황제례에 입각해 복원한 의례이다. 따라서 사직제의 복원은 일제에 의해 단절된 전통문화를 회복함으로써, 한국 문화의 우수성과 가치를 재인식하는 계기를 제공한다. 더구나 사직제는 그 절차에 악·가·무가 결합된 유교의례의 정수를 담고 있다는 특징을 갖는다. 현재 제례악이 남아 있지 않는 등 복원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지만, 이런 부분이 학술적 고증을 통해 뒷받침된다면 종묘제례와 함께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이를 위해서 사직제의 원형 복원을 위한 종합 계획이 수립되어야 할 것이다.

선농제·선잠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

1. 선농제·선잠제의 기원과 의미
선농제와 선잠제는 국왕과 왕비가 농사의 신인 선농先農, 양잠의 신인 선잠先蠶에게 지내는 제사이다. 농사와 양잠에서 생산되는 음식과 의복은 민생의 근간이 되는 물품이므로, 고대로부터 국왕들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한해의 풍년을 기원했다. 선농제와 선잠제에 앞서, 왕과 왕비가 백성들에게 스스로 직접 농지를 경작하고 누에치는 모범을 보임으로써 이를 권장하는 친경親耕과 친잠親蠶의례에 대한 기록들이 먼저 보인다. 친경과 친잠의 의례는 권농과 권잠의 기능을 가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천지天地와 산천山川, 사직社稷과 조상의 신에게 바치는 곡물(?盛)과 그 의례에 착용하는 제복祭服을 마련하는 것을 정성스러운 의식으로 성화聖化하는 것이고, 그에 병행한 선농제와 선잠제는 그 성화의 직접적인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2. 우리나라 선농제·선잠제의 역사
우리나라에서 선농제는 고대부터 행해져 『삼국사기』부터 그 기록이 나타나며, 고려시대부터 왕의 친경의례가 행해졌다. 선잠제는 조선시대부터 기록에 나타난다. 성종 대에는 국왕이 직접 밭을 가는 친경親耕이나 왕비가 직접 뽕을 따는 친잠親蠶이 시작됐고, 영조는 국왕이 곡식을 수확하는 것을 살피는 관예觀刈, 곡식의 종자를 보관하는 장종藏種, 왕비가 누에고치를 받는 수견收繭 의식을 시작했다. 영조는 이러한 의식에 많은 애착과 자부심을 가졌는데, 이는 이들 의례가 단순한 행사가 아니라 자신이 지향하는 정치의 성격을 상징적으로 드러내주는 의식이었기 때문이다. 친잠의식은 영조 대 이후로는 행해지지 않았다. 영조 대의 친경의식은 두 번의 행사(1739년, 1767년)를 기록한 『친경의궤』에 상세히 기록되어 있으며, 영조 대인 1767년의 친잠의식을 기록한 『친잠의궤』가 남아 당시 행사의 전모를 알 수 있다. 정조 대에는 사직제가 대표적인 기곡제로 자리 잡으면서, 친경의례는 시행되지 않았다. 대한제국이 수립된 뒤 고종이 다시 성대한 친경의식을 부활시켰으나,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하고 순종이 황제위에 오른 뒤의 친경의식에는 다수의 일본인이 참여함으로써, 우리 전통 의례의 주체가 바뀌고 있음을 백성들에게 보여주는 행사가 되고 말았다.

3. 선농제·선잠제의 음악, 노래, 무용과 복식
왕과 왕비가 직접 참여하는 친경의·친잠의와, 그에 부수되는 의례로 왕이 직접 곡식을 베는 것을 보는 의례인 친림관예의親臨觀刈儀 그리고 친경이 끝난 후 술을 내려 위로하는 의례인 친경후로주의親耕後勞酒儀 등은 모두 선농과 선잠의 범위에 해당된다. 이들 의례에는 모두 악무樂舞가 수반되므로 각 의례의 절차에 따른 음악의 구성, 악현과 악기, 악장과 일무 등이 포함된다. 친경과 친잠의를 처음 시작한 선종 대의 악현과 일무, 악기 등의 구성과 배치는 『국조오례서례』에서 살펴볼 수 있고, 그 외에 『증보문헌비고』, 『국조보감』 등의 기록에서 관련 내용을 찾아볼 수 있다.
조선 전기 친경례 참여자의 복식은 『국조오례의』에서 확인할 수 있는데, 1767년의 『친경의궤』에서는 약간 변화한 모습을 보인다. 그 구체적인 형태는 친경례에 대한 유일한 기록화인 영조 대의 〈친경도〉를 통해서도 엿볼 수 있는데, 이 그림은 일제강점기에 발행된 논문집에 흑백으로 실린 사진으로만 접할 수 있다(275-281쪽 참조). 친잠례는 왕실 행사 가운데 유일하게 여성이 주도했던 행사로, 행사에 참여한 여성들의 복식은 『국조속오례의보서례』, 『친잠의궤』 등을 통해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고, 『명성황후국장도감의궤』나 조선 후기의 각종 진찬의궤와 진찬도에 보이는 복식과 비교하여 미진한 부분을 유추해볼 수 있다.

4. 대한제국의 선농제와 선잠제
선농제와 선잠제는 1908년(순종 1) 국가제사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큰 변화를 겪게 된다. 즉 향사이정享祀釐正으로 국가와 황실의 각종 제향이 폐지되는 한편, 선농단과 선잠단 신위가 사직단에 합사合祀되고 제단과 부지는 국유로 이속된다. 이에 따라 선농단과 부지는 동양척식회사의 소유로 곧바로 넘어갔고, 같은 해 선농단 신위와 선잠단 신위가 사직단으로 옮겨 배향되었다. 이 조치로 선농단과 선잠단은 제단으로서의 기능을 완전히 잃어버리게 되었다. 선잠제는 1908년 신위가 사직단에 합사된 이후 폐지되었다. 하지만 황후의 친잠례는 그대로 유지되어, 1909년에는 창덕궁 내의 서향각書香閣에 어친잠소御親蠶所를 두고 친잠례를 거행하였다. 이듬해인 1910년에는 창덕궁 내의 친잠실에서 고치를 따는 수견식收繭式도 거행하였다. 황족과 대신의 부인들이 참관했던 이 행사는 국가의례로서 시행한 마지막 친잠례였다. 식민지가 되면서 친잠례는 사라졌으나, 왕후의 사적인 친잠은 창덕궁 후원의 잠실에서 계속되었다. 한편, 선농단과 선잠단은 1908년 사직단으로 신위가 옮겨진 후 일제에 의해 공원화된다.

5. 선농제·선잠제 복원의 현황
선농제의 복원은 1979년 지역주민에 의해 처음 시도되었으며, 당시에는 마을제사의 형식을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그러다가 1994년 서울 정도 600년을 기념하기 위해 서울의 뿌리 찾기 사업이 추진되면서 복원이 본격화되었고, 동대문구청의 지원을 받아 행사규모에 있어 국가의례의 형식을 갖추어나가게 되었다. 선농제는 1979년에 처음 복원한 이래 현재까지 매년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선농단에서 거행되어왔다. 이곳은 1476년(성종 7)에 세운 제단으로, 대부분의 시설이 훼손된 채 현재는 방형의 제단만 남아 있는 형편이다. 선잠제의 복원은 선농제보다 늦은 1993년에 처음으로 행해졌다. 성북구청의 주관 아래 선잠단을 활용하여 지역문화를 알린다는 취지로 행사가 시작되었다. 그 후 2003년부터는 성북구청의 지원 아래 지역민으로 구성된 선잠제 보존위원회를 두어 이를 주관하게 하고 있다. 매년 5월 성북구민의 날에 개최하는 선잠제는 지역 행사인 아리랑 축제와 연계해서 실시하고 있다. 행사 절차는 왕비의 선잠단 어가행렬과 선잠제향, 그리고 환궁 행렬 등으로 이루어진다. 선잠단을 활용한 재현 행사임에도 불구하고, 의례의 복원보다는 이벤트성 행사에 초점이 맞추어져 진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6. 선농제·선잠제 계승과 복원의 의의
선농·선잠제의 복원 의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선농제와 선잠제는 지역민을 위한 새로운 화합의 장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특히 선농제는 전근대사회에서 관민이 하나가 되는 신성한 제사이자 즐거운 축제였다. 행사를 마친 후 수고로움을 나누기 위해 베푼 노주연勞酒宴은 국왕과 신하가 함께 어우러지는 흥겨운 잔치였으며, 이와 같은 축제적 요소는 환궁 과정에서 벌어지는 부대행사에서도 찾을 수 있다. 특히 궁궐에서 도성 밖 선농단까지 길거리에서 벌어지는 어가의 행렬과 무대, 노래와 춤, 그리고 시의 헌상 등은 서울 도심 전체를 축제의 분위기로 만들게 된다. 이로써 보면 선농제와 선잠제는 선농단과 선잠단을 활용하여 벌어지는 한국 제축祭祝문화의 상징으로서, 새로운 도시 축제를 만들어 갈 수 있는 매우 훌륭한 유산이다. 한편 선잠제는 조선시대 국가제례 가운데 왕비가 참석하는 유일한 행사였고, 후궁과 세자빈, 내외명부 등 여성들이 참석하였다. 이러한 선잠제의 복원은 전통시대 여성들의 궁중문화를 살피는 데 매우 좋은 사례가 되리라 여겨진다. 다음으로, 선농단과 선잠단의 복원에도 여러 가지 의의가 있다. 일제에 의해 파손된 수많은 문화유적지에는 궁궐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신을 담고 있던 제사공간도 포함되어 있지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사회적 관심이 부족하다. 선농단과 선잠단은 물론이고 수많은 제사공간들을 봉건사회의 잔재로 치부해 방치하거나 근대화의 개발논리 속에서 우리 스스로도 허물어 버린 것이다. 따라서 오늘날 선농제와 선잠제의 복원이 갖는 의미는 그 제사의식을 복원하는 것과 동시에,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이며 그것을 왜 복원해야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제공한다는 데 있다. 아울러 오늘날 의례의 복원이 역사와 동떨어진 정치적 의도나 상업적 목적에서 이용될 가능성도 경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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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책머리에

제1부 환구제, 천신을 위한 제례

1 환구제의 연원과 의미
2 중국 원구제 형성의 역사
3 한국 제천례의 유래
고대의 제천례|고려시대의 제천례
4 조선 전기의 제천례
태조 대|태종 대|세종 대|세조 대
5 조선 후기의 제천례
광해군 대|효종 대 이후|영조 대|정조 대
6 대한제국의 제천례
대한제국 이후의 환구단|환구단의 제도|환구제의 신위와 배치|환구제의 의식 절차|황궁우와 석고단
7 환구제의 악*가*무
환구제의 의식 절차와 음악|악현과 악기, 일무|악장과 선율
8 제천례 참여자의 복식
국왕과 왕세자의 면복|향관의 제복과 배향관의 조복|배향관의 흑단령
9 환구제 복원과 현대적 의미
환구제 복원의 현황|환구제의 특성|환구제의 현대적 의미

제2부 사직제, 국토와 오곡의 신을 위한 제례

1 사직제의 연원과 의미
2 중국의 사직제와 사직단
3 한국 사직제의 유래
고대의 사직제|고려의 사직제
4 조선 전기의 사직제
태조 대|태종 대|세종 대|세조 대|성종 대|연산군 대
5 조선 후기의 사직제
숙종 대|영조 대|정조 대|정조 대 이후
6 대한제국의 사직제
대한제국 이후의 사직단
7 사직제의 의식 절차와 사직단
의식 절차|사직단의 제도
8 사직제의 악*가*무
9 사직제 참여자의 복식
악사와 공인의 복식
10 사직제의 복원과 현대적 의미
사직제의 복원 현황|사직제 복원의 현대적 의미

제3부 선농제*선잠제, 농사와 양잠의 신을 위한 제례

1 선농제*선잠제의 유래와 의미
친경의례와 선농제|친잠의례와 선잠제
2 중국 왕실의 선농제와 선잠제
3 한국 선농제*선잠제의 유래
고대의 선농제와 친경의례|고려의 선농제와 친경의례
4 조선 전기의 선농제*선잠제
태조 대|태종 대|성종 대 친경의식|성종 대 친잠의식
5 조선 후기의 선농제*선잠제
숙종 대|영조 대의 친경의례|영조 대의 친잠의례|정조 대의 적전의례|고종*순종 대의 적전의례
6 선농단과 선잠단의 제도
적전|선농단과 선잠단|시일|축식*폐백*희생|제계
7 친경의궤와 친잠의궤
친경의궤|친경하는 장면을 그린 그림, 친경도|친잠의궤
8 친경의식
예행연습|친경의식에 참여한 사람들|친경의식에 사용된 물건들|적전에서의 친경의식
9 친잠의식
선잠에 작헌하는 의식|친잠하는 의식|친잠의식의 마무리|축하 의식과 상전
10 선농제*선잠제의 악*가*무
선농제 의례 절차와 음악|선잠제 절차와 음악|악현과 악기, 일무|
선농제의 악장과 선율|선잠제의 악장과 선율
11 선농제 참여자의 복식
12 선잠제 참여자의 복식
영조 대의 친잠례 복식|왕비의 예복과 수식|왕비의 상복|
명부와 상궁 이하의 친잠복|의장차비
13 선농제*선잠제의 폐지와 복원
선농제와 선잠제의 폐지와 변화|선농제의 복원|선잠제의 복원|선농제와 선잠제 복원의 과제와 방향
14 선농제*선잠제 복원의 현대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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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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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대학원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화콘텐츠학을 강의하고 있다. 논저로는 「조선시대 왕실혼례의 추이와 특성」(『조선시대사학보』41집), 『한국역사민속학강의』(공저, 민속원, 2010) 등이 있다.
김지영
글작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 중이다. 조선시대 국가 의례에 대한 공부에서 출발해 예치론에 기반한 국가 통치, 정치 문화, 일상 문화로 연구 분야를 확장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예교의 가늠자─조선시대 경상도 지역 지리지 풍속조 연구〉, 〈조선시대 사위의례에 대한 연구〉, 《왕실의 천지제사》(공저), 《즉위식, 국왕의 탄생》(공저), 《조선의 국가의례, 오례》(공저), 《길 위의 조정》, 《숙종대왕 이순의 성인식》, 《대한제국의 전례와 대한예전》(공저) 등이 있다.
이은주
글작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직물학과에서 석사학위를 받고 서울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안동대학교 한국문화산업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며 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 경상북도 문화재위원, 한국문화재보호재단 비상임이사로 활동 중이다. 논저로는 「조선시대 백관의 時服과 常服 제도 변천」(『服飾』55권6호), 『17세기 무관옷 이야기』(공저, 민속원, 2005), 『왕실의 천지제사』(공저, 돌베개, 2011) 등이 있다.
박례경
글작가
연세대학교 대학원 철학과에서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책임연구원을 역임하였고 延世大學校, 韓國航空大學校 강사. 현재 延世大學校 國學硏究院 동아시아고전연구소 전문연구원으로 재직중이다. 역대 예제와 예제 현실의 예경학적 토대에 관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논저로는 「조선시대 국장에서 조조의 설행 논의와 결과」, 「규범의 근거로서 친친 존존의 정당화 문제」, 「주자가례 속의 인간과 사회―새로운 종법 이해와 재구성의 고례적 맥락에 대한 성찰」, 「덕치의 상징체계로서 유교국가의 즉위의례」, 「정현 예학의 지향점」, 『동양철학의 세계』, 『왕실의 천지제사』, 『왕실의 혼례식 풍경』, 『조선시대 왕실문화 도해 사전』 등이 있다.
송지원
글작가
서울대학교에서 국악이론 전공으로 음악석사, 한국음악학 전공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학교 비전임교수로 강의하고 있으며 국악방송에서 〈국악산책〉을 진행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음악사상사, 음악문화사, 음악사회사 분야의 연구를 통해 인간과 문화, 사회, 사상의 관점에서 조선시대를 읽어내는 연구를 수행하고 있으며 공연예술 및 축제와 의례에 대한 관심도 크다. 2002년 제3회 이혜구 학술상과 2013 년 제17회 난계악학대상을 수상했다. 한국공연문화학회 회장과 문화체육관광부 국립국악원의 국악연구실장,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연구교수, 책임연구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정조의 음악정책』, 『한국음악의 거장들』, 『조선의 오케스트라, 우주의 선율을 연주하다』, 『조선왕실의 음악문화』, 『음악, 삶의 역사를 만나다』(공저), 『새로 쓰는 예술사』(공저) 등이 있다.
김문식
글작가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학예연구사를 거쳐 현재 단국대학교 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장, 한국고전번역학회 회장, 성호학회 회장, 문화재청 문화재위원으로 있다. 조선의 경학사상, 조선후기 사상가, 정조 시대, 국왕 교육, 국가 전례, 대외인식에 관한 다수의 논문과 저서를 발표하였으며, 최근에는 조선시대의 국가 전례 및 왕실 문화에 나타나는 예악 국가로서의 특징을 연구하고 있다.지은 책으로 『조선후기 경학사상 연구』, 『정조의 경학과 주자학』, 『정조의 제왕학』, 『조선후기 지식인의 대외인식』, 『왕세자의 입학식』, 『정조의 생각』, 『조선 왕실의 외교의례』, 『원행을묘정리의궤』 등이 있다. 공저로는 『조선의 왕세자 교육』, 『조선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조선 국왕의 일생』, 『왕실의 천지제사』, 『즉위, 국왕의 탄생』, 『조선시대 국왕 리더십 관』, 『국왕 리더십의 유형과 실제』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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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승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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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대학교 국사학과에서 대학원 석사 및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체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외국어대학교 대학원 글로벌문화콘텐츠학과에서 문화콘텐츠학을 강의하고 있다. 논저로는 「조선시대 왕실혼례의 추이와 특성」(『조선시대사학보』41집), 『한국역사민속학강의』(공저, 민속원, 2010)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