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수의 인터스텔라] 정해인 "내 중심은 자존감... 먼저 배려하면, 거울처럼 돌아와 쌓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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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9.02. 오전 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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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해인이 사랑받는 이유, 자기를 지키며 사랑했기 때문

"세상에 무명은 없어… 더 알려지거나 덜 알려질 뿐"

"안판석, 정지우 감독, ‘존중하는' 마음 닮았다"

"이상형은 선한 여자, 배려가 바탕이 된 관계 추구"

깎아놓은 밤처럼 반듯한 조형미를 지닌 정해인. 김고은과 함께 한 멜로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은 개봉 후 박스 오피스 1위를 달성하며 순항 중이다. 멜로 기근인 한국 영화에 단비같다는 평이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간다. 누군가가 나를 받아들이고, 조금씩 알게 되고, 좋은 기억을 쌓고, 떠났다가, 다시 힘차게 달려온다. 숨이 끊어질 것처럼, 내가 있는 곳을 향해. 한때 ‘사랑하고 사랑받았던 감각’은 무너질 것 같은 시간 속에서 우리를 구한다. 정지우 감독의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뉴트로 감성멜로라는 컨셉으로 세상에 나왔다. 정해인과 김고은, 가을 햇살같이 선선한 두 인간을 아우르며.

정해인이라고 쓰고 나니, 그 하얗고 말간 웃음이 떠올라 단숨에 기분이 좋아진다. 그에게 ‘국민 연하남'이라는 별칭을 안겨준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이하 ‘밥누나')'를 본 건 최근이었다. ‘봄밤'이라는 드라마를 보다 애간장이 타서, 2018년 드라마 ‘밥누나'를 찾아서 동시에 보았다. 사랑스러운 손예진, 자립적인 한지민의 생활연기도 좋았지만, 안판석 감독은 그 맑고 오묘한 사랑의 도화지에 정해인이라는 찬란한 무지개를 띄웠다.

‘밥누나'의 그는 어찌 그리 싱그러운지. ‘봄밤’의 그는 어찌 그리 단단한지. 스마트폰도 없고 이메일도 열지 못해 오직 라디오만이 진심을 전하던 낡고 느렸던 그 시절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 속의 그는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손예진과 정해인, 한지민과 정해인, 김고은과 정해인… 상대도 처지도, 사랑을 훼손하는 타인의 폭력도 다채로운데, 그는 매일 쏟아지는 구정물 속에서도 탄산수를 마시듯 씩씩하게 잘도 견뎠다.

세상의 편견은 무서워서 드라마 속에서나 영화 속에서 사람들은 정해인을 상투적으로 비웃었다. 부모 없이 남매 둘이 산다고(‘밥누나'), 아내 없이 홀로 아이를 키운다고(‘봄밤'), 소년원 출신에 가난하다고(‘유열의 음악앨범')... 그렇게 대놓고 경멸과 모멸을 주입할 때마다 더 불안해지고 더 수치감을 느끼는 건 상대 쪽이었다. 무슨 뒷배가 있길래, 무너지는 법이 없을까. ‘진짜 사랑받고 존중받은 경험'이 있으면 사람은 쉽사리 주눅 들거나 시들지 않는다는 걸, 정해인을 보고 느꼈다.

함께 있을 때면 그는 뭐가 그리 좋은지 상대를 보며 자주 웃었다. 김고은은 영화 속에서 그에게 묻는다. "너는 어쩜, 그렇게 웃어?"

철없어서 고운 게 아니라, 돈이 많아서 친절한 게 아니라, 결코 상대를 훼손하거나 나를 망가뜨리지 않겠다는 믿음만으로 저렇게 강하고 저렇게 예쁠 수 있구나. ‘당신과 나,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눈빛.

얼마 전 본 한 연예 프로그램의 게릴라 데이트에서 누군가 그에게 물었다.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에요?" 1초의 망설임도 없는 답변이 돌아왔다. "선한 여자요." 착한 여자도 아니고, 선한 여자라니. 그 대답엔 성별의 구분이 없었다. "선하다는 말엔 존중과 배려가 포함돼 있잖아요." 남녀 막론하고 ‘선한 인간'을 향한 가없는 추구.

정해인은 검은 양복에 검은 셔츠 검은 타이를 매고 인터뷰 자리에 나왔다. 검은 고양이처럼 맵시 있고 윤기가 흘렀지만, 행동거지엔 거만함이 한 줌도 없었다. 두 손을 모은 단정한 인사에, 밥 한 끼 꼭 사주고 싶은 ‘누나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인터뷰 내내 그가 가장 많이 한 말은 ‘선하다' ‘존중' ‘자존감'이었다.

영화 ‘유열의 음악 앨범'은 1994년부터 2005년에 이르기까지 1975년생 두 남녀의 되풀이되는 만남과 헤어짐을 보여준다. 휴대폰이 없던 시절의 멜로드라마는 이메일과 폴더폰과 라디오 사연에 얹혀 아슬아슬하게 이어진다.

정지우 감독은 드라마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에 등장하기 전부터 정해인을 눈여겨 봤다고 했다. 정해인은 2014년 TV조선 ‘백년의 신부’로 데뷔해 tvN ‘슬기로운 감빵 생활'과 영화 ‘역모-반란의 시대' 등에 출연하며 차근차근 이력을 쌓았다.

교복 입은 정해인이 두 평 남짓한 작은 빵집 문을 열고 들어서면서 영화는 시작된다. 고교 시절 불의로 사고로 인생이 꽈배기처럼 꼬인 소년과 피 한 방울 안 섞인 ‘셰프 언니'와 의지해 알콩달콩 가지런하게 살던 빵집 소녀의 첫 만남.

-영화 보면서 신기했어요. 현우는 부모도 곁에 없고, 친구들은 거칠고, 미래는 막막하고… 그런데 어떻게 망가지지 않고 열심히 살 수 있지?

"(진지하게)영화 속에는 ‘자존감'이라는 단어가 한 번도 안 나와요. 하지만 저는 이 영화를 자존감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 장면이 유독 많아요. 현우는 소년원에서 나와 사회에 벽과 두려움이 있었는데 미수네 빵집에서 일하면서 조금씩 마음이 회복돼요. 영화에서 저는 그때 제일 밝아요. 미수도 행복했죠."

갓 튀겨낸 도넛에 설탕을 묻혀 먹고, 크리스마스 컵케익을 만들고, 트리를 장식한 기억이 그의 마음을 지켰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미수네 빵집을 나와 이삿짐센터에서 일할 때도 정말 열심히 했어요. 현실을 극복하며 사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 뒤 미수와 저는 계속 엇갈리며 다른 길을 가요. 미수는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안정적인 취직자리를 찾지만, 현우는 달라요. 할 수 있는 것, 하고 싶은 것, 잘하는 것을 찾거든요. 그렇게 헤어져 살면서 자존감의 분량이 서로 달라져요. 나는 점점 올라가지만 미수는 내려가죠."

-어느 지점에서 그런 기분을 느꼈나요?

"출판사 2층에서 제가 그래요. "미수야. 가진 게 많으면 좋겠지만, 나는 강력한 한두 개만 있으면 돼." 그 얘기를 듣고 반응하는 고은 씨 연기가, 저는 참 좋았어요. 애써 웃지만, 자신이 초라하다는 느낌… "커피, 달다"하고 웃는데 슬픔이 만져졌어요."

정해인은 김고은에게 처음으로 밥을 차려주었을 때가 좋았다,고 수줍게 웃었다.

-된장찌개가 참 맛있게 보였어요.

"(미소지으며)여자에게 밥을 차려주는 것도 처음이라, 그 밥상 앞에서 긴장이 됐어요. 그런데 사랑하는 여자 앞에서... 사실 나는 되게 불안정한 상태인데. 즐겁고 불안한, 그런 마음이 교차했죠. 미수 대사 중에 이런 말이 있어요. "나는 안전한 게 좋다…" 사람들은 청춘은 아름답고 건강한 거라지만, 그 시대나 지금이나 청춘 안엔 불안, 우울의 자리도 크잖아요. 영화 찍고 사랑하면서 그런 청춘의 희로애락을 같이 겪었어요."

컴퓨터 통신 시대의 사랑법으로 다가왔던 한석규 전도연의 ‘접속(1997년)',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는 질문을 던졌던 이영애와 유지태의 ‘봄날은 간다(2001년)', 그리고 2019년 정해인과 김고은의 ‘유열의 음악 앨범'의 공통점은? 라디오다.

현우와 미수는 시간차를 두고 방을 공유한다. 미수가 살다 떠난 방에, 현우가 제대 후 들어와 산다. 혹 숨결이라도 맡을까 하여 숨이 차도록 높은 산동네 방 한 칸에 새처럼 둥지를 튼다. 화장실 온수를 틀면 싱크대 온수는 안 나오는, 근처엔 만화대여점이 있는 그런 곳.

그때는 그런 방이 수두룩했고, 그마저도 청춘에겐 고마운 비빌 언덕이었으나. 무언가 시작될 것 같은 설렘과 이대로 끝날 것 같은 불안이 환절기 일교차처럼 방안의 마른 공기를 헤집어놓곤 했다.

-당신의 청춘은 어땠나요?

"제 청춘도 막연하고 불안했어요. 뜬구름 잡는 것 같았어요. 과연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들었죠. 19살에 영화관 앞 매점에서 이 길을 제안받고, 진로를 틀었어요. 연기를 직업으로 완전히 정한 건 군대에서였어요. 막 시작한 신인이었고 학생이었어요. 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많았고 경쟁이 치열해서 항상 불안했어요. 수입도 없었고 모든 것이 막연했어요."

그 불안은 32살 ‘스타'가 된 지금도 사라지지 않는다고 했다.

-무명 시절을 어떻게 버텼나요?

"(단호하게)무명 시절은 없었어요. 저는 그 말을 좋아하지 않아요. 누구나 이름이 있어요. 그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죠. 인지도가 낮은 배우가 정확한 표현이에요. 다행히 엔터테인먼트에 들어가고 나니 소속감이 생겨서 마음이 좀 편해졌어요(웃음).

-남들보다 스타트가 늦어서 조바심이 들진 않던가요? 이 세계는 젊음이 무시 못 할 자본인데요.

"아니요. 절대 늦었다고 생각 안 했어요. 보통의 청년들이 그렇잖아요. 군대 갔다 오고 졸업하고 취업 준비하는 나이가 25~27살이에요. 제 친구들도 26살 즈음에 회사 생활을 시작했고요. 저는 그런 보통의 시간을 살고 있어요. 게다가 26살에 인턴 개념으로 입사해서(FNC 엔터테인먼트) 비빌 언덕이 생겼고, 첫 회사에 지금까지 잘 다니고 있으니까(웃음)."

특유의 건강함을 자랑하는 정해인. 드라마 ‘봄밤'에서.

그의 청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자고 일어났는데 아직도 환한 여름날의 햇살을 본 것만 같다. ‘잘 생겼다'는 칭찬이 단순히 이목구비의 좋은 비례를 넘어설 수 있다면, 정해인에게 ‘잘 생겼다'는 말은 ‘침착한 미래'나 ‘자연광이 스며든 풍경'을 떠올리게 했다. 정지우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여러 번 정해인의 ‘잘생김'을 대사로 써서 관객의 가슴을 후빈다. 나는 한 사람의 ‘잘생김'을 그렇게 다정하게 호명하거나, 대놓고 힐난하는 광경을 본 적이 없다.

-"넌, 어떻게 그렇게 웃어?" "제 안 돌아올 거 같지? 너무 잘 생겼어." 이런 직접적인 대사를 듣는 기분이 어땠나요?

"같이 소년원 갔던 친구 태성이가 저더러 그래요. "잘못은 같이했는데 너만 용서받는 것 같다. 얼굴이 반반해서 그런가? 잘못은 손이 했는데 사람들은 얼굴만 봐." 진심으로 작가에게 물어보고 싶었어요. 왜 그런 대사를 쓰셨는지. 떠나는 현우에게도 (미수와 유사 가족으로 살던)은자 누나가 "너무 잘 생겼다"라거나 수제빗집에서 다시 만나서 했던 첫 말도 "더 잘 생겨졌네"였어요. 이유가 있겠지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진지한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무엇보다 영화 속 ‘은자 누나’ 같은 선선한 어른이 내 인생에도 있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어떤 상황에서든 믿어주고 소란 없이 받아주는 모습에 크게 힐링이 됐습니다.

"빵집에서 처음 만나서도 그러잖아요. "깜빵 얘기 좀 해봐. 하기 싫으면 하지 마." "난 너 믿어." 연기하면서 참 좋았어요. 은자 누나, 김국희 선배 연기가 참 좋았어요. 이해를 못 해도 묵묵히 안아줘서 많이 울컥했어요."

죄책감으로 몸과 마음이 헤진 수세미처럼 망가진 채 찾아간 그에게 묵묵히 따뜻한 수제비를 말아주는 사람. 왠지 부끄러워 "수제비 참 맛있다"며 웃었지만, 정작 그 장면을 촬영하고 집에 돌아가는 길에 울음을 쏟았다고 했다. ‘정해인은 놀랄 만큼 정직한 사람’이라던 정지우 감독의 말이 생각났다.

배우에게 정직함이란 무엇일까. 눈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고 아무리 곤경에 처해도 정해인의 눈에서 회피나 비굴을 발견한 기억이 없다. 어떤 상황에도 해인의 검은 눈동자엔 원망의 부유물이 뜨지 않았다. 마음의 청결을 반사하듯 흰자위조차 맑았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와 ‘잊어야한다는 마음으로'를 좋아한다는 정해인. 군대 운전병 시절 즐겨 들었던 라디오는 세상과 연결된다는 느낌을 주어서 좋다고 했다.

-현장에서 즐거웠나요? 사랑받고 보호받는 느낌이었습니까?

"감독님은 배우 정해인보다 사람 정해인을 존중하는 느낌이었어요. ‘해인 님' ‘고은 님' 주연 배우는 물론 조연과 단역 배우의 이름도 다 외워 ‘님'을 붙여 호명했어요. 촬영장은 하루가 지나가는 게 아쉬울 정도였어요. 매시간 즐거웠어요. 한 장면 촬영 후 컷을 하면 감독님과 저는 서로에게 빨리 다가가 말하고 싶어 뛰곤 했어요. 그 마음이 너무 좋아 심장이 뛸 정도였어요."

-해인 씨만큼 고은 씨의 웃음도 예뻤어요. 동그라미와 세모의 하모니처럼… 서로 진심이 통했나요?

"실제로 많이 설렜어요. 진심을 다해서 통했어요. 집에서 기르는 강아지도 예뻐하면 더 알고 주인을 따라요. 사람은 더해요. 진심으로 대하면 그 마음이 거울처럼 돌아와요. 이제까지 제가 한 멜로에서 다 그랬어요.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면 돌아와요. 다만 먼저 받으려고 하면 안 돼요. 순서가 중요해요."

나는 여리고 싹싹한 두 남녀가 만나고 헤어지는 몇 번의 순간, 다양한 장소에 애틋함을 느꼈다. 해인이 동네 할머니를 업고 가다 고은을 다시 만난 산동네 어귀, 게딱지처럼 다세대 주택이 늘어선 서울 언덕배기의 풍경, 가진 것 없는 청춘 남녀가 펩시콜라 티셔츠를 입고 밥 해 먹던 단칸방, 해인이 일하던 헌책방과 무릎 꿇고 억울하게 얻어맞던 헬스클럽, 고은이 처음 출근했던 사보 인쇄소, ‘은자 누나'의 재래시장 지하 수제빗집, 그리고 둘이 잠시나마 한 건물에서 일했던 삼청동의 호젓한 출판사까지.

여름날 거미줄처럼 섬세하게 이어지던 두 사람의 만남이 급커브를 도는 장면은 해인이 고은이 탄 차를 전력 질주로 따라가며 북촌의 언덕을 오르내릴 때였다. 사랑인지, 혈기인지 그건 모르지만, 드는 생각은 오직 하나였다. 저러다 죽겠구나. 범인 잡는 액션 영화도 아닌데 감독이 사람을 잡았구나. 잡을 수 없을 걸 알면서도 저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달리는 저 마음의 중심엔 뭐가 있을까.

허진호 감독의 영화 ‘봄날은 간다'에서 유지태는 이영애를 떠나보내며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고 애처롭게 묻지만, 해인은 차를 멈추고 다가온 고은에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한 호흡에 말해버린다. "사랑해."

-왜 그렇게 달렸어요?

"놓치면 끝이다, 라는 생각… 절박감이죠(웃음). 영화 속에서 ‘사랑해'라는 말은 그때 딱 한 번 나와요. 촬영장에서는 정말 뛰다가 죽는 줄 알았어요. 고은 씨가 "뛰지 마, 다쳐" 멈춰 세우지 않았다면 달리다 죽었을지도 몰라요(웃음)."

드라마 ‘봄밤'에서는 아이가 있는 미혼부 유지호 역을 맡았다. 아이와 있으면 더 소년같아 보이는 정해인. 데뷔 6주년을 맞아 그의 팬클럽은 ‘정해인의 핸더랜드'는 미혼부 한부모 가정에 기부를 하기도 했다.

이야기를 나눌수록 배우 정해인만큼이나 자연인 정해인의 자존감은 높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내가 흔들림이 없어야, 내가 단단해야 오래 활동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감사하게도 저는 사랑받으면서 행복한 일을 하고 있어요. 행복이 끝날 것 같은 공포감이 몰려올 때면 부모님, 남동생, 팬… 나를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을 떠올렸어요. 그게 큰 힘이 됐어요."

-‘밥 잘 사주는 예쁜 누나'와 ‘봄밤'으로 정해인의 전성기를 열어준 안판석 감독에게는 무얼 배웠나요?

"부드러운 카리스마요. ‘밥누나'할 때 안판석 감독님이 소리 지르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어요. 현장의 스태프들 모두를 차별 없이 존중해줬어요."

-정지우 감독과 쌍둥이 같네요.

"네. 그래서 제가 두 분을 만나게 해드린 적이 있어요. 서로 너무 좋아하셨고 귀한 만남이었어요(웃음). 그분들은 사람에 대한 존중이 몸에 배어있어요. 그리고 두 분 다 앵글 철학이 확고하세요. 드라마 ‘봄밤'은 16부작인데 57회차 촬영을 했어요. 16시간짜리 영화인 셈이에요(웃음).

어느 날 제가 안판석 감독님께 ‘왜 이 앵글로 찍으셨냐'고 물은 적이 있어요. 그때 들은 설명을 잊을 수가 없어요. "우리는 같이 연기하는 거야. 걱정할 거 없어. 네가 연기할 때 카메라도 같이 연기한다." 거리의 나뭇잎 하나, 차의 뒷모습, 달빛, 공기… 감독님은 카메라로 저와 함께 감정을 만들고 계셨던 거예요."

-섬세하고 애틋하군요. 그래서 멜로를 하는 거겠지요.

"(웃으며)좋은 대본을 봤는데 그게 늘 멜로였어요. 제 계획은 아니었지만, 멜로가 삶의 희로애락을 정직하게 담을 수 있어서 좋아요."

안판석 감독에게 발탁되어 손예진과 첫 멜로를 하며 크게 성장했다는 정해인. 지금의 그의 해맑고 단단한 이미지가 이때 만들어졌다.

-매 연애마다 성장한다는 기분이 드나요?

"네. 확실히 성장하고 있어요. 아이 아빠였던(미혼부) ‘봄밤'의 유지호는 썩 괜찮은 남자는 아니었어요. 괜찮은 척하지만, 숨기려고 아등바등했던 남자죠. 무너지고 깨지면서 같이 커나갔어요."

생각해보면 해인은 한 번도 백마 탄 왕자를 연기한 적이 없다. 그를 통해 나는 연애는 ‘밀고 당기기'의 저급 기술이 아니라 한 인간이 한 인간을 온전히 ‘존중하고 배려하는 법'을 배우는 고급 기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특별히 아끼는 한국 영화가 있습니까?

"허진호 감독님의 ‘8월의 크리스마스'요. 한석규 선배님을 좋아해요. 에너지가 부드러우면서 강해요. 말하는 느낌도 어찌나 선하신지(웃음)."

선해서 약한 게 아니라 선해서 강할 수 있다니! ‘8월의 크리스마스'의 한석규도 사랑하는 이를 배려하느라 죽기 전까지 성실하게 시간을 썼더랬지.

-혹 정약용 6대손이라는 가계도가 당신의 성장 환경에 영향을 미쳤나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웃음). 다만 저는 유년 시절을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보냈어요. 부모님이 맞벌이하셔서요. 오히려 함께 산 할아버지에게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배우로 보낸 지난 6년의 시간 동안 당신이 배운 게 있다면 무엇이죠?

"(한참을 생각하다)중심에 자존감에 있어야 건강하게 오래 할 수 있다는 거예요. 일이든 사랑이든. 제가 드리고 싶은 말은 정말 하나예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껴주세요. 그게 다예요. 저는 제 영화도 관객분들의 자존감을 조금이라도 단단하게 만든다면 더 바랄 게 없겠어요."

바른 인성이 배어나는 정해인의 미소.

하나의 배역이 탄생하기까지, 배우들의 인생은 저 멀리서 천천히 달려온다. 배역은 새로운 창조라기보다, 실존과 가상의 두 인물이 만나야 할 지점에 정확히 도달하는 ‘예정된’ 조우라고 할 수 있다. 정해인은 그렇게 이 시대가 원하는 낭만과 현실의 지분을 조화롭게 장착한 채 세상에 나왔다.

정해인이 사랑받는 이유는 그가 자기를 지키며 사랑했기 때문이다.

타인을 보호하면서도 내가 부서지지 않는 법을 젊은 그가 우직하게 보여준다. 사랑은 격정 어린 파멸이 아니라 라디오 주파수처럼 지직거리며 끈기 있게 맞춰가는 것이라고. "나는 좋은 사람입니까?" "당신은 좋은 사람입니까?" 그 무섭고 순진한 질문을, 나와 네가 연결되어 그 답이 완성된다는 진실을, 정해인이 알려줘서 고맙다. 가을, 사랑하기 참 좋은 계절이다.

[김지수 문화전문기자 kimjisu@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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