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률 외피 쓴 ‘부당국가’와 맞대결…조국은 왜 둔감했을까 [이범준의 법정&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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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8.31. 오전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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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미스 슬로운 존 매든|2016년 프랑스·미국

입법 로비스트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채스테인·오른쪽 여성)이 총기규제 강화 입법안을 통과시키려 하자 반대세력이 그를 의회 청문회장으로 불러낸다. 반대편 의원이 슬로운의 부도덕한 로비를 폭로하자 슬로운도 자신의 경력까지 날릴 강수로 맞선다. 메인타이틀 픽쳐스


“모든 절차는 적법했다. 하지만 국민 정서상 조금의 괴리가 있는 부분은 인정한다”던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며칠 만에 “법과 제도를 따랐다 하더라도 그 제도에 접근할 수 없던 많은 국민과 청년들에게 상처를 줬다”고 했다. 서울대 법대 교수이자 법무장관 후보자가 “법을 어기지 않았다”고 했다가 “법대로 했지만 잘못했다”고 물러서야 했다. 이쯤 되니 위법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너무한다고 지지자들은 말했다. 이를 두고 김민아 경향신문 기자는 “조 후보자로 인해 다수 시민이 담장 안쪽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게 되었다”며 “조 후보자는 ‘계급’이라는 판도라의 상자를 활짝 열어젖혔다”고 했다. 성채 안의 계급은 자신들을 위한 법을 구축해 놓고 있었는데, 다른 사람도 아닌 조 후보자가 성채 안의 풍경을 드러내고 말았다는 얘기다. 우리나라 헌법은 법 앞의 평등을 보장하고 있지만, 실은 법 자체가 평등하지 않았던 것이다. 2019년 현재 대한민국의 법령은 11만4527개다. 이 법들이 거대한 성채 안과 밖을 가르는 촘촘하고 위력적인 벽돌이었다.

영화 <미스 슬로운>의 주인공 엘리자베스 슬로운(제시카 채스테인)은 입법 로비스트다. 미국을 비롯해 많은 나라에서 로비는 합법이고 한국도 별반 다르지 않다. 기업은 대관(對官)업무라는 이름으로, 로펌은 입법지원이란 서비스로, 시민단체는 시민운동으로 부를 뿐이다. 우리 편에 유리한 법을 만들겠다는 본질은 같다. 슬로운은 인도네시아 정부 의뢰로 이 나라가 수출하는 팜오일에 대한 미국의 관세 인상을 저지한다. 비누에도 쓰이는 팜오일이지만 빵에 발라 먹는 누텔라 세금이라고 이름 붙인다. 비영리재단을 내세워 캐스팅보터인 의원을 인도네시아 휴양지로 부른다. 팜오일 생산이 환경에 주는 영향은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은데 굳이 세금을 올려봐야 생필품값만 오른다고 설득한다. 이 정도는 슬로운의 일 가운데 아주 쉬운 편이다. 로비회사의 신입사원을 교육하는 사례다. 이 밖에 케이크란 무엇인지 따져 사치세가 붙지 않는 쿠키로 둔갑시키고, 단역배우들을 모아 가짜 시위를 조직하는 것도 어렵지 않은 일이다.

로비, 법령 장악하려는 선제적 활동

법원은 사후적 부조리 확인에 그쳐


영화선 ‘총기규제 법안’ 놓고 암투

합·불법 오가며 거대 권력에 ‘한 방


국민도 조 후보자 계기 법 장벽 목격

‘민주주의 회복은 양심’ 주장처럼

자신에게 예민했다면 위기는 없어


우리나라 로펌도 같은 일을 한다. 몇 해 전 환경단체와 지역주민들은 “송전선을 땅에 묻어달라고 했더니 국회가 이 비용을 주민과 지방자치단체에 물렸다”며 헌법소원을 내고 헌법재판소 앞에서 시위를 했다. 국회가 전기사업법을 개정하자 뒤늦게 헌재로 찾아가 없애 달라고 한 것이다. 전에는 ‘지자체와 주민은 전기사업자에게 전선로를 땅에 묻어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고만 돼 있었다. 하지만 국회가 조항 하나를 추가했다. ‘지중이설에 필요한 비용은 그 요청을 한 자가 부담한다’는 내용이다. 수익자 부담 조항이 추가되면서 전기사업자와 지자체, 주민의 관계는 역전됐다. 여기에는 로펌이 개입한 설득과 로비가 있었다. 마찬가지로 휘발유값 상승을 막으려 정유사와 주유사의 거래원가를 공개토록 정부가 법령을 바꾸려 하자 이를 저지한 게 로펌이고, 놀이동산 수륙양용차도 선박법상 선박이라 선장을 두라고 하자 전복, 좌초, 침몰 가능성이 없다면 선박이 아니라는 법제처 해석을 이끌어낸 것도 로펌이다. 뒤늦게 소송을 벌이는 게 아니라 법령을 장악하고 바꾸는 것이다.

영화의 주 내용은 총기규제 강화 법안을 두고 벌어지는 로비전이다. 법안을 저지해달라며 찾아온 거물 의원의 요구를 슬로운은 거절한다. 제 마음대로 행동한 슬로운에게 로비회사 경영진은 경고하고 당장 사건을 맡아 성공시키라고 한다. 슬로운은 오히려 총기규제 강화 법안이 통과되도록 반대편에서 움직여 온 로비회사로 옮긴다. 워싱턴 거물이 슬로운을 찾았던 이유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성공시키기 때문이다. 총기규제 TV토론에 나간 슬로운은 함께 회사를 옮긴 팀원들과 질문과 답변을 준비한다. 상대 토론자는 이전 로비회사 동료다. 동료이던 상대는 말한다. “막강한 국가권력이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는 겁니다.” 슬로운이 준비된 발언을 한다. “그런 식이면 운전면허제도도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겠네요. 개인의 자유를 정부가 제한하지만 이유가 합당하기에 받아들이는 겁니다. 일본에서는 7년을 훈련받아야 독이 든 복어를 손질할 수 있어요.” 상대는 무기 휴대 권리를 규정한 헌법을 제시한다. “수정헌법 2조는 운전하는 권리나 복어를 만질 권리를 명시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무기를 휴대할 권리를 보장하고 있어요.”

토론방송을 지켜보던 슬로운의 팀원들은 사무실에서 준비된 대사를 외친다. “이 법안의 어떤 내용도 무기 휴대 권리를 침해하지 않아요~!” 그런데 슬로운은 다른 말을 한다. “수정헌법 2조가 서명되던 때는 평균 수명이 38세였고 문제가 생기면 곧잘 총싸움으로 해결하던 시절이었어요. 그 옛날 옛적에는 이치에 맞는 일이었겠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상대는 이런 슬로운을 놓치지 않는다. “미합중국 헌법은 오랜 시간을 통해 검증됐고 그래서 반박되지 않는 권위를 갖게 됐습니다. 지금도 변함이 없습니다. 분명한 뜻으로 쓰인 헌법을 슬로운 같은 자들에게서 보호해야 합니다.” 마침내 슬로운은 200년도 넘은 헌법을 부정한다. “반박할 수 없는 건 없어요. 아무리 헌법이라도요. 당신이 방금 얘기한 바로 그 권리 말이에요. 그것도 말 그대로 ‘수정’ 헌법에 있어요.” 치밀하게 계산된 발언이었다. 곧이어 슬로운은 자신의 팀원이 고등학교 시절 총기난사 사건의 피해자라고 말해버리고는 방송카메라를 비추게 했다. 주변 사람도 모르던 팀원의 트라우마까지 이용했다.

슬로운은 남자를 사귀는 대신 성매매를 하고, 잠을 줄이려 매일 각성제를 먹고, 기술자를 동원해 의원들을 도청한다. 총기규제의 정당성이 아니라 입법로비의 치열함을 관객들은 보게 된다. 총기규제 강화를 지지하는 쪽도 반대하는 쪽도 합법과 불법을 넘나드는 것은 같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다. 게으른 언론은 습관적으로 전관예우, 유전무죄라고 써대고 영악한 로펌은 이런 기사들을 즐기고 활용한다. 세상의 부조리가 마지막으로 법원에서 확인될 뿐인데도, 언론은 애꿎은 판사 탓만 하면서 대충대충 하루를 보낸다. 세상을 뒤집는 것은 판결이라기보다 입법이다. 판결은 논리적 정당화를 요구받지만 입법은 이유가 필요 없다. 판결은 사후적이지만 입법은 선제적이다. 판결은 특정한 사례만을 판단하지만 입법은 사회를 조직하는 규범이다. 많은 이익집단이 이런 메커니즘을 알고 있다. 다음 선거에서 표를 몰아주겠다거나 전국에서 후원금을 보내겠다는 정도는 기본이다. 국회에서 법안의 문제점을 검토하는 전문위원들을 구워삶고, 전직 보좌관들을 고용해 의원들에게 얘기를 넣는다. 청와대 고위관계자를 움직여 의원을 압박하는 경우도 있다.

젊은 시절의 법학자 조국은 낡은 자본주의를 부수고 사회주의노동자동맹이라는 새로운 성을 쌓으려다 실패했다. 그러고는 자신도 모르게 한 발짝 한 발짝 귀족의 성채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터는 의식하며 살았지만, 정작 자신을 보호하는 촘촘한 성벽은 몰랐던 것 같다. 현재 대한민국 법령 11만4527개 가운데 법률은 헌법을 합쳐도 1455개에 불과하다. 국회가 만들지 않는 나머지 대통령령, 총리령, 부령, 각종 규칙, 자치법규가 11만3072개다. 사회 모든 분야가 전문화되니 국회가 선을 긋는 역할만 하면서 이렇게 됐다. 그래서 현대 국가를 행정국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런 법령들은 갈등을 드러내지 않아 감시를 쉽게 벗어난다. 여기에 자율성이 강한 대학 입시요강이나 장학금 규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는 가늠조차 할 수 없다. 이런 작은 벽돌들, 디테일들이 모여 거대한 성을 만드는 것이다. 손에 쥔 것도 없는 여당 지지자와 야당 지지자가 이유도 없이 갈려 싸우는 동안, 군사독재 잔당과 86 운동권들은 자신들의 성벽을 높이고 있었다. 이게 바로 법의 힘이다.

“법률의 외피를 쓴 ‘불법국가’가 등장했을 때 민주주의를 회복하는 단초는 시민의 양심과 사상적 결단에서 비롯한다.”(조국, <양심과 사상의 자유를 위하여>, 2001)

조국 후보자가 불법국가에서 나아가 부당국가에도 조금 더 예민했더라면 이런 위기를 맞지 않았을 것이다.

<시리즈 끝>

이범준 사법전문기자 seirot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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