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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
연세대 이상민과 우지원
한때 연고대 유명했잖아요..

전 16살이지만 살짝기억을 합니다...

그때 이상민선수와 우지원선수 밖에 기억이 안났거든요...

근데 이상민선수와 우지원선수의 인기가 엄청나더군요..

그런데 그땐 둘중 누가더 인기가 있었나요??
(전이상민선수 한표!! 저 전주에살아서 KCC팬)
둘다 엄청난인기었지만 그래도 누가 좀더 한수 위였나요??


그래고요 또 93년도 기아vs연세대 경기를 봤는데요 우지원 문경은 선수는 있고요 이상민 선수는 없어요??

이상민선수가 문경선수보다 한살 어리고 우지원선수보단 한살 많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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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네임정보가 없는 사용자
작성일2005.01.25 조회수 16,6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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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tf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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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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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음이 나는군요...
보아하니 농구대잔치를 보지도 못한 답변자도 있는것 같은데
자세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슨 개뿔 지식이라고...


단순히 인기면에서는 우지원이 이상민을 압도적으로 앞질렀습니다.
그 이유를 찬찬히 살펴보자면

큰 틀에서 봤을 때,
고려대엔 남학생팬이 연세대엔 여학생팬이 많았습니다.
먼저 91-92농구대잔치 때가 그 시초가 되겠죠.
문경은-이상민-우지원-김훈-김도완 등
당시엔 대단한 미남선수들이 주축이 된 연세대는 성적도 대학 톱을 달리며
매스컴에 크게 노출되었고, 이로인해 연세대는 폭발적인 인기가도를 달립니다.
반면에 고려대는 92학번신입생 김병철전희철이 내외곽에서 투맨쇼를 펼치며
당시 M.J, C.바클리 등 NBA의 화려함에 매료된 남학생들의 눈길을 끌고요.

그것이 이어져 하이틴학교에서는 전무후무한 농구붐이 일었고
남학생여학생 할것없이 친구에 친구의 꼬리를 물고 농구장을 찾습니다.
여학생들은 친구가 연세대팬이니까..
남학생들은 친구가 고려대팬이니까..
그렇게 시작된 명문사학의 팬대결은 결국 남녀학생간의 성대결로 발전,
승부욕까지 생겨나서 더욱 유대감이 생겨나 더더욱 열성적이 되어갔고요.
남자들은 다들 고려대에 가겠다..
여자들은 다들 연세대에 가겠다..
그런 로망을 꿈꾸던 시절이 있었죠.


이런 장황한 이야기를 한 것은 우지원이 인기를 더 얻은 이유입니다.
아무래도 농구자체보다는 유행코드에 의한 팬이 된 많은 여학생들은
농구는 잘 모르지만 연세대에서 가장 잘 생긴 스타에 매료되었던 겁니다.
당시의 농구장은 마치 톱스타 연예인의 콘서트장같은 분위기였죠.
그렇게 '연예인을 해도 성공했겠다'소리까지 들으며
'코트의 황태자'로 불리던 우지원이 더 인기가 좋았던겁니다.
뿐만 아니라, 플레이를 놓고봐도 가드의 공수에 걸친 패턴플레이는
전문성을 갖춘 소위 고수들이 아니면 그 깊이를 알기 힘든데 비해
'3점슛'이라는 화려하고도 쉽게 눈에띄는 장기를 가진 우지원이
가드인 이상민에 비해 출발점부터 눈에 들어올 수 밖에 없던겁니다.
저 역시도 처음 농구에 매료되었던 장면은 3점슛이었으니까요.

하지만 프로가 출범한 현재엔
학생이라는 세대가 달라지면서 자연히 유행코드가 꺾여
농구팬으로 남은 이들은 정말로 농구자체를 즐기는 팬만 남게된겁니다.
물론 당시의 농구붐이 계기가 되어 농구에 빠진 팬들도 상당수고요.
이상민은 꾸준히 업그레이드 되어 대한민국 No.1가드로 성장했고
우지원은 수비약점이 부각된데다 슛 이외의 개인기가 부족한 탓에
트레이드 파문과 벤치생활 등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프로생활을 지내며
예전의 팬들을 상당히 많은 부분 잃었습니다.
덧붙이자면 농구대잔치의 슈터중심의 농구와 반대로 현재의 프로농구는
용병의 무풍지대인 '포인트가드의 천국'이 된 것과 비례하여
이상민이 훨씬 유리한 고지에 서게 되었죠.



p.s.
답변을 완료하고보니 두번째 질문에 대한 대답이 빠졌군요.
님께서 보신 동영상파일은 아마도 91-92농구대잔치 8강PO 1차전 같습니다.
지난해 농구시즌부터 여러개의 농구대잔치 동영상이 돌았는데
농구대잔치 파일들을 보급시킨 2명 중 하나가 바로 다름아닌 접니다.
2003년 크리스마스부터 퍼뜨린 파일들이 꼬리를 물고 널리 퍼진것 같더군요.

아마 14문경은 8우지원 10김훈 15김재훈 석주일11번... 그렇죠?
확인해보시기 바랍니다. 아마 맞을테지만.
93년 연세대라면 배번이 14문경은 10우지원 4김훈 15김재훈 11석주일 이니까요.
그냥 파일이 퍼져나가는 과정에서 한 분이 93년이라고 잘못 소개했나보죠.

아무튼 본론으로 돌아가서 그 게임 탑에 선 174cm의 가드가 5번 김도완입니다.
이상민은 물론 91학번, 2학년진학예정학생으로 연세대에 있었고
당시 부상 중으로 카메라가 연세대 벤치를 비출 때
최희암과 유재학 뒤켠에 잠시 비치기는 합니다.
잠시 김도완 선수에 대해 논하자면 단신핸디캡을 상쇄하기위해
지나친 허슬플레이가 부담이 되는 선수였고 대회마다 부상을 달고 살았습니다.
빠르고 활동반경이 큰 가드였지만 시야와 코트비전에서 다소 부족했고
한국은행으로 진로를 잡았다가 96년 팀해체와 함께 은퇴합니다.

아무튼 그 당시 연세대 가드진이 좀 복잡하게 얽히게 되는데
91년 이상민이 1학년 시절엔 오성식-이상범의 투톱체제로 갑니다.
이상민은 고교무대에서 이미 슈퍼유망주로 기대를 모았고
성인무대 처녀출전인 90-91농구대잔치에서 신선한 활약을 펼쳤지만
그래도 국내 최고의 가드들이었던 선배들의 아성을 무너뜨리진 못합니다.
이듬해인 92년에 드디어 국가대표가드 오성식과 주전경쟁을 펼칠듯 하지만
오성식이 삼성전자와 SBS간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려 1년간 선수자격 박탈,
그래서 이상민이 주전에 무혈입성했고 김도완과 투가드로 나서게 됩니다.
이상민이 스타로 자라난게 바로 그 1992년 2학년 때 입니다.

그 동영상은 정확히 이상민에겐 1학년 겨울방학기간입니다.
따라서 이상민이 아직 톱스타로 군림하기는 이전이었죠.
팀에서 완전히 자리잡기 이전의 동영상이라 이해하시면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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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kr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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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였죠

연대랑 고대

특히 고대 선수들은 최고..;;

전희철-현주엽-양희승-김병철-신기성(전부 국대 ㅡㅡ;;)

연대는

서장훈-김택훈-우지원-문경은-이상민정도..


암튼 그때가 그립군요

본론으로 들어가서 당시 이상민 선수의 인기는 우지원 선수의 그것을 능가했습니



그때 별명이 산소같은 남자였고(우지원 선수는 황태자) 인기투표를 하면 우지원

선수를 제치고 1등을 했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이상민은 예상대로 최고의 포인트가드가 되었고

우지원 선수는 그냥 그럭저럭 컸네요

아쉬움이 크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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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상민 선수 팬인데요;;;


워낙 어렸을때라;; 기억은 잘안나지만;;

지금은 이상민 선수가 훨씬;;; 인기;; 많지만;;;

그때 당시는 두분모두 대단 했던걸로...

앗 그리구 우지원 스티커도 나왔었죠;;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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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지금 12살이지만..

문경은이 나이가 많기때문에..

아무도 문경은이 나이많으니깐 농구를 못할수도 있지 않나요?

그리고 이상민은 농구를 잘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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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공개율 100%최근답변 2024.04.17.
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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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90년대 중반부터 거론을 하자면 고려대 농구부는 남학생들이 좋아하는 농구 만화같은 이미지라서 역시 남학생 팬들이 많았고 반대로 라이벌 연세대 농구부는 김훈, 우지원, 이상민 같은 선수들이 연예인 못지 않게 잘생긴데다 언론 노출이 많아 특히 전국의 여학생 팬들로 팬텀이 형성되 요새 웬만한 아이돌보다 높은 인기를 얻었으며 이런 선수들이 출전하는 농구대잔치 경기는 역시 아이돌 콘서트장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형성이되었다고 합니다.

물론 고려대 농구부도 오빠부대는 몰고 다녔지만 이것은 연세대가 우세한 편이었고요.

당시 서장훈과 우지원은 부업으로 연예인과 다름 없는 생활을 했으며 경기 중 이상민이 부상으로 실려 나갈 때 전국이 여학생 팬들의 눈물바다가 되었다고 해도 말 다한 거죠.

이런 농구대잔치 세대 선수들은 97년 출범한 프로무대로 올라와서도 인기는 거의 그대로 가져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