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과 비상식의 역사 읽기
『두 개의 한국 현대사』
1. 누가 현대사를 두 개로 만드는가?
『두 개의 한국 현대사』는 최근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된 ‘한국사 교과서 사건’으로 시작한다. 이 이슈의 중심에 있는 역사는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를 포괄하는 현대사 부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이런 논쟁으로 불러들이고, 또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입맛대로 현대사를 가져가려 하고 있을까?
이 책은 현대사의 역사적 사실들 중 특히 논란의 중심에 서는 사건들과 또 논란의 중심에 선 사람들이 내세우는 주장 그리고 그 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어떤 사실들이 숨겨져 있는지 등에 대해 하나하나 논거를 가지고 전달하고 있다.
현대사는 지금을 살고 있는 사람들과 그와 멀거나 가깝게, 직간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과거의 역사적 사실이 현재에 영향을 미치고, 현재의 상황은 과거의 역사적 사실 관계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현대사는 일어난 사건과 이를 바라보는 관점을 둘러싸고 극명한 대립을 이룬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과 무엇을 기점으로 현대사를 보는 관점과 태도가 이토록 다르게 될까? 그런 논쟁의 쟁점에 선 한국사의 사건들을 들여다보자.
2. 쟁점에 선 현대사의 사건들
이 책에 나오는 현대사의 쟁점들은 우리가 꼭 알아야 할 사건에서부터 우리가 미처 몰랐지만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들까지 다양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먼저 백범 김구, 그는 이승만 정부 시절 안두희에 의해 암살당했다. ‘백범 김구와 암살범 안두희’에서는 암살의 배후와 그 배후를 숨기려는 사람들에 관한 실체적 접근을 그리고 있다. 4?19혁명으로 국민의 손에 의해 쫓겨난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의미보다 이승만을 추켜세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이승만의 친위쿠데타, 부산정치파동’도 있다. 사건이 갖는 무게와는 별도로 현대사의 이념적 비극을 보여주는 미군 장교의 현지처이자 한국판 마타하리라 보도된 ‘여간첩 김수임 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폭넓게 풀어낸다.
이뿐만 아니라 광복절을 두고 벌어지는 광복절과 건국절 논쟁, 지금까지 이어져 오는 친일파의 내부를 들여다보는 친일파와 , 인간으로서 존엄한 삶을 지키고자 했던 서승 형제의 비극, 불가분의 관계인 김재규와 박정희,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는 박종철과 아무 할 말이 없다는 그의 아버지, 미완의 완성인 1987년 6월,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등 이 책은 한국 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가 있는 사건들을 골라 모두 열다섯 개의 이야기로 엮어냈다. 이 이야기들을 따라가면 어떠한 쟁점으로 어떤 논쟁을 벌였는지, 더 나아가 각자의 입장을 가진 이들은 역사에 어떤 기록으로 남기를 원했는지까지 내다볼 수 있게 된다.
3. 상식과 비상식의 역사 읽기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역사적 사건들은 얼핏 보면 각각 독립적으로 일어난 개별적인 사건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 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전체적으로도 하나의 연관성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현대사는 각 사건의 내용이나 의미뿐만이 아니라 전체적 흐름을 알아야 지금 벌어지는 일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 현대사를 바라보는 우리의 제대로 된 눈은 무엇일까? 그리고 『두 개의 한국 현대사』에 일관되게 흐르는 관점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사람이 가지는 보편적 가치와 교양에 기준한 상식이다. 역사에 있어서도 무엇이 인간이 가져야 할 보편적 상식이고, 무엇이 비상식인지가 그 핵심이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너무나 당연하게 알았던 역사적 사건의 이면을 발견하거나, 전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직면하고 당혹감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당혹감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객관적인 사료들과 자세한 배경 이야기를 통해 역사에 대한 지적 호기심으로 이어지게 된다.
현대사를 둘러싼 각각의 입장과 사람들. 우리는 과연 둘 중 어떤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할까? 역사는 단지 과거의 사실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항상 우리가 살고 있는 현재의 역사이다. 『두 개의 한국 현대사』는 우리가 지금의 역사를 어떤 관점에서 읽어내야 하는지, 우리의 미래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 기준은 바로 상식’이라는 작지만 결코 가벼이 할 수 없는 판단의 단초를 제공한다.
책속으로 추가/b>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 경찰의 조작 사실이 밝혀진 것은 딥스로트(deep throat, 익명의 사건 제보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 사람은 바로 당시 영등포교도소에서 보안계장으로 근무하던 안유였다. 그는 한동안 A씨로 불렸다. 그가 이 사건의 제보자가 된 내막은 이렇다.
1987년 1월 17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가 오리털 파카를 뒤집어쓴 채 영등포교소도에 들어왔다. 며칠 후 대공분실 수사관들이 찾아와 특별 면회를 신청했다. “교도관이 참석해서는 안 되고 기록도 하지 말라”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규정상 불가능했다. 그래서 기록은 하지 않는 대신 안유 보안계장이 면회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런데 안유 보안계장은 면회 온 수사관들이 “당신 둘이 죄를 덮으면 1억 원씩 주고 가족의 생활을 보장하겠다. 조만간 가석방으로 꺼내주겠다”라며 회유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안씨는 이 사실을 당시 구속된 수사관과 한 건물에 수감됐던 재야인사 이부영에게 알려주었다. 이부영은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사무처장으로 1986년 5·3사건을 주동한 혐의로 구속되어 있었다. 이부영은 민주화 운동가들을 도와주던 교도관 출신의 전병용을 통해 재야인사 김정남에게 이 사실을 전달했다. 김정남은 이를 다시 함세웅 신부에게 전했고, 김승훈 신부가 ‘고난의 제의’를 맡았다.
사제단의 폭로에 경찰은 처음에는 부인했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해서 고문 경찰관들이 구속되었고, 전두환의 5공 정권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_ 중
6월 10일의 시위는 그날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서울에서는 시위에 참여했던 학생과 시민 등 600여 명이 명동성당으로 몰려들어 농성 투쟁을 시작했다. 이들은 매일 명동성당 앞에서 집회를 열며 민주항쟁의 열기를 이어갔다. 집회에는 학생뿐만 아니라 ‘넥타이 부대’로 불리는 사무직 노동자들이 대거 참여함으로써 민주화는 소수의 열망이 아니라 전체 국민의 요구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지방에서도 연일 시위가 계속되었다. 시위가 끝나지 않고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전두환은 5월 14일 안보관계장관과 군·치안책임자 회의를 소집했다. 이 자리에서 전두환은 “경찰력으로 더 감당할 수 없으면 헌법상 대통령에게 부여된 권한을 발동할 수밖에 없다”라면서 군대 동원을 암시했다. 그에 따라 군은 출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전두환이 군부 동원을 지시했다는 소문은 금방 퍼져나갔다. 다시 군부가 나서면 광주보다 더 큰 희생이 벌어질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민주세력은 위축되지 않았다. 6월 18일 국본 주최로 전국에서 ‘최루탄 추방대회’가 개최됐다. 이날 시위대는 경찰의 진압을 완전히 무력화했다.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등 전국 주요 도시의 중심부는 시위대가 장악했다. 곳곳에서 파출소가 습격당하고 전경들이 무장해제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_ 중
직선제 개헌은 6월 항쟁에서 쟁취하고자 했던 민주주의의 작은 부분에 불과했다. 15년 만에 직선제가 부활된 것은 민주주의에서 커다란 진전이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의 첫걸음에 불과했다. 민주세력은 직선제 개헌의 승리를 바탕으로 민주주의와 인권을 확고히 구축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하려 했다. 하지만 이제 국본과 같은 조직은 그 역할을 더는 수행할 수 없었다. 야당은 대권 행보에 집중하더라도 민중은 자신들의 권익을 확보하기 위해 또다시 새로운 투쟁을 시작해야 했다.
이제부터는 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언론, 재야 등 각 부분의 운동과 지역을 바탕으로 민주주의를 실질적으로 쟁취하고 심화하기 위한 활동이 필요했다. 그 같은 민중의 활동은 7월부터 새롭게 시작되었고, 그 첫걸음을 내디딘 것은 노동자들이었다. 노동자 대투쟁으로 불리는 한국 현대사의 새로운 대중운동이 7월부터 9월까지 전개되었다. 노동조합 결성의 자유, 노동 3권을 비롯한 근로기준법의 실질적 보장, 노동자의 인권 신장과 사회적 지위 향상 등 당연히 가져야 할, 그러나 개발 독재, 군부 독재정권 아래서 누리지 못한 노동자의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에 노동자들이 나선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쟁과 더불어 각계각층에서,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민주적 권리를 찾기 위한 투쟁이 계속되었다. 각 부문과 지역의 민주화를 위한 심화 투쟁은 6월 항쟁의 승리, 즉 6·29선언으로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6·29는 단순한 직선제 쟁취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6·29는 6월 항쟁에서 한국의 민주세력과 민중이 쟁취하고자 했던 진정한 민주주의, 진보를 위한 새로운 공간을 열어주었다. _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