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국/클럽 경력

이동국 항목이 너무 길어져서 분리하였다.

1 K리그 데뷔 이후

안정환, 고종수와 함께 K리그의 르네상스를 이끈 3인방 중 한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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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년에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했다. 이 시기 2월에서 4월까지 프리시즌 기간 중 열렸던 아챔에서 고등학교 졸업장도 안 나온 새내기 주제에 2골이나 넣는 등 무서운 활약을 보여주며 리그에서 15경기 7골, 컵 대회 9경기 4골, 그 해 신인왕을 차지, 황선홍의 뒤를 이을 공격수로 주목을 받았다. 몸이 날렵하던 신인시절, 패스를 받은 후 논스톱 180도 터닝슛으로 골을 넣은 장면이나, 골인 후 유니폼을 들쳐올려 얼굴에 뒤집어 쓰고 그라운드를 뛰어다니던 세레모니는 국대경기만 보는 냄비팬들에게도 이동국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또한 동시기 청소년 대표팀, 올림픽 대표팀,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모두 그를 볼 수 있었고, 어디에서건 활약이 빼어났다. 이 시기의 상세사항은 국가대표팀 약력에 기술. 왜냐면 이 시기는 사실 포항 선수가 아니라 대한민국 선수였기 때문.

2000년에 이르러 이동국의 활약이 절정에 달하자 해외에서도 반응이 있었다. 청대와 올대는 지배, 리그와 아챔과 국대에서는 준수한 활약을 하는 어린 철인 스트라이커, 관심이 갈 법도 하다. 베르더 브레멘, 샬케 04 등의 구단에서 러브콜이 있었고 특히 AC 페루자에서는 무조건 오라고 오퍼를 넣으며 이동국을 직접 페루자까지 불러오기도 했다. 그러나 구단 측에서 이동국의 무릎 상태를 보고 으응? 하면서 테스트를 요구하자 포항은 그 따위로 하면 못 보내겠다고 싸우며 거의 100% 확정일 것만 같던 이적이 결렬되었다. 이후 페루자는 잘 알듯 안정환을 영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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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00년 K리그 시즌이 끝나고 이동국은 독일 분데스리가베르더 브레멘에 임대를 가 큰 기대를 모았지만, 고작 7경기를 출전하고 다시 포항으로 복귀하면서 첫 해외 진출이 실패로 끝나고 만다. 이때 로만 바이덴펠러와 만나기도 했다. 그런데 둘다 벤치(...)

협회 차원에서 등 떠밀어 보낸 전시행정 성격이 있는 건 맞으나 이 무릎으로 어떻게 경기를 뛰었냐는 팀닥터의 말은 이따금 나오는 립서비스인 만큼, 부상이 상당히 심각하지만 우월한 우리팀 의료진들은 고칠 수 있다는 식으로 받아들이면 된다. 당시 부상으로 바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태였기에, 브레멘 감독이 지방지와 한 인터뷰에서도 그렇고 장기적 관점으로 데려온 선수가 맞다. 6개월 임대라는 형식이긴 했으나 계약서에 완전이적 조건도 포함되어 있다. 이동국은 7경기를 출전했는데, 당시 부상에서 회복되고 최대 10경기 정도를 전망했으므로, 부상 이후의 컨디션 조절과 팀 적응까지 생각하면 뛸 만큼 뛰었다고 볼 수 있다.[1] 7경기 출장을 낮잡아 볼 수 있는데, 당시 브레멘 팀내 스트라이커 경쟁이 얼마나 개막장이었냐 하면 당시 주전 투톱이 클라우디오 피사로아일톤인데 2013년 기준으로 얘네 둘이 분데스리가 용병 역대 득점기록에서 나란히 1위와 3위를 차지하고 있다.[2] 무득점이긴 하나 7경기 전부 다 교체출전이고 이 당시 분데스리가 득점왕은 20골 언저리에서 성립하고 있었고 중상 정도가 30경기 넘게 출전해서 10골 언저리를 기록했으므로, 통계적으로 봤을 때 투톱 전술에서 교체로만 7경기 무득점은 그리 이상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부상에서 회복한 이후 그 피사로와 그 아일톤의 교체 선수로 7경기를 꾸준히 출전했고, 제법 이른 시간의 교체나 뒤지던 경기에서의 교체도 두 경기 가량 있고, k리그 포항에서 뛰던 라데도 이 때 브레멘 3년차 교체 선수로 활약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에 선수가 없는 것도 아니었으므로 제법 기대를 받았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귀국하게 되는 계기는 일단 브레멘 구단의 입장바꾸기가 컸다. 감독이 이동국은 장기적 관점에서의 영입이며 단기 임대용이 아니라는 인터뷰가 있으므로 이를 바탕으로 볼 때 최소한 현장에서는 받아들여진 것이 맞고, 구단 차원에서는 만족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장 큰 원인은 병역 문제이다. 당시 전시성 행정이건 뭐건 병역을 끝내지 않은 축구선수의 해외진출이 가능했던 것은 2002년 월드컵을 맞아 2002년 6월까지 병역을 유예해 줬던 까닭에 이동국이 진출할 수 있었고[3] 브레멘에서는 사정을 다 알고 나서 연봉도 낮추려고 했고 완전이적 대신 1년 임대연장을 하고 싶어했기에 이동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1년 임대 연장 선수로서는 과연 처우나 기용을 제대로 해 줄 것인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고 다음 1년이 월드컵 선발에 가장 중요했기 때문에 이동국으로서는 돌아오는 것이 당연했다.[4][5]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 탈락하고 아시안 게임에서 금메달 획득에 실패하여 병역면제 특례를 받지 못하게되자 빠르게 상무행을 선택. 부산 원정 해트트릭을 시작으로 서서히 폼을 끌어올리더니 11골 6도움의 만능 활약을 한 이동국 덕분인지 상무는 2004 시즌 8위를 차지한다. 이는 상무가 기록한 K리그 최고 순위[6]. 참고로 입대하기 전까진 미소년 이미지가 있었는데 상무에서 뛰면서 원숙한 외모가 되었다. 상무에 복무하면서 비인기종목임에도 4년에 한번 열리는 올림픽이나 아시안게임 등을 위해 묵묵히 최선을 다하는 다른 종목 선수들을 보면서 마음가짐을 겸허히 가지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2 EPL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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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국의 흑역사 1

2007년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미들즈브러에 진출하지만,[7] 리그전에서는 무득점, 칼링컵과 FA컵에서 3, 4부 리그 팀을 상대로 2골만을 넣는 극심한 부진 끝에 1년뒤 방출되었다.

솔직히 말해,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06-07시즌 2월 25일 EPL 28라운드 레딩FC와의 홈경기에서, 80분 경에 야쿠부와 교체 투입 되어 EPL 데뷔전을 가졌다. 경기는 0:0으로 상황이었고, 미들즈브러 홈팬들은 아시아에서 온 스트라이커를 박수로 환영해 주었다. 경기가 끝나기 1~2분 전, 스튜어트 다우닝이 좌측에서 멋진 크로스를 올려주었고, 이동국은 논스톱 왼발 슛을 때렸으나, 안타깝게도 공은 오른쪽 크로스바를 맞아 버리며 나갔다. 비록 득점은 하지 못했으나, 경기 자체가 워낙 재미없었고, 양팀을 통틀어 가장 극적인 순간이었기에 팬들은 안타까워 하면서도 큰 박수를 보내주었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자 카메라는 연신 이동국을 쫓아가며 TV 화면으로 그를 내보내었다. 이 경기 임팩트가 꽤나 있었는지, 스카이스포츠로 부터 평점 7점을 받았고[8] 미들즈브러 팬들은 "아시아에서 제대로 된 친구 한명 공짜로 잘 대려 왔구나!" 하며 그의 활약을 기대하였.....으나....

그 뒤로는, 선발 교체를 오가며 조금씩 기회를 얻었지만 데뷔전의 10분이 그의 EPL 커리어 하이 였다 (...)

이런 부진한 활약을 본 영국 언론에선 한국의 이동국은 오지 않고 그의 탈을 쓴 유학생이 축구 선수 행세를 한다고 대차게 깠다(…). 그리고 그의 별명 라이온 킹은 거짓말이고 사실은 품바가 심바의 가죽을 뒤집어 쓴거라고 조롱하며 품바라는 별명이 탄생. 게다가 최악의 외국인 선수 1위에 랭크되면서 확인 사살까지 당했다.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떨어지는 피지컬. 아무리 기술이 좋아도 쓰지 못하게 하면 그만인 현대 축구에서 피지컬과 경합 능력은 상대의 압박을 견뎌내며 살아남기 위한 필수요소이지만, 이동국은 거친 유럽 수비수와 몸싸움이 제대로 되지 않아 부딪히기만 하면 나가떨어지곤 했다. 당시 미들즈브러는 스튜어트 다우닝을 제외하면 미드필더진이 완전히 전멸한 상태여서 전방 공격수들의 개인 기량과 피지컬에 크게 의존하는 팀이었기에 이동국을 도와줄 사람도 없었다.

게다가 십자인대 부상이라는 큰 부상을 겪고 제대로 실전 경험을 치르지도 않은채 이적한 것도 컸다. 부상 여파로 제대로 된 폼일리가 없는 이동국에게 미들스브러는 실전 경험을 꾸준한 출전으로 끌어올려줄 만한 입장이 아니었고, 몇 안되는 기회에 실전에서 폼이 올라오지 않던 이동국은 도리어 폼이 떨어지고 다시 출전을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 된 것이다.

당시 야쿠부 아이예그베니마크 비두카가 각기 10골 넘게 넣었으며 결국은 실력으로 보여줘야 했다는 의견이 많다. 그것이 맞는 말이긴 한데 당시 보로의 주전공격수였던 야쿠부나 비두카나 연계 그런 건 잘 모르는 대신 박스 안에서만 돌아다니는 걸 대강 공 주면 피지컬로 받아내서 어찌어찌 골 넣는 타입이다. 이동국이나 툰카이 산리, 미도, 아폰소 알베스, 제레미 알리아디에르 같은 보로의 보조 공격수들의 기록은 좀 많이 좋지 않은데, 이들의 공통점은 주전 공격수들보다 기술이 좋으면서도 최소한 180이 넘는 떡대로 주전 공격수들을 기술로 몸싸움으로 보조해 줄 수 있는 역할을 기대했던 거 같은데...망했다. 덕분에 툰카이 산리는 날개로 많이 뛰었으며 그냥 좀 유망했을 뿐인 알리아디에르야 그렇다 쳐도 토트넘에서 괜찮은 모습도 보이던 미도마저 시망 상태가 됐다. 실제 비두카도 가고, 야쿠부도 가고,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지만 이동국도 사라져 아폰소 알베스가 뛰던 시즌 보로는 강등되었다. 막강한 피지컬과 괜찮은 슈팅력을 자랑하던 비두카와 야쿠부가 없자 제법 정확하던 다우닝의 크로스 성공률은 급락, 차라리 올리지 않는 게 공격의 맥을 끊지 않아 도움이 되는 그런 수준으로까지 떨어지게 되었다.[9] 아폰소의 피지컬이 프리미어에서도 수위급이던 야쿠부 비두카급은 아니었고, 떡대 공격수의 우산효과 없이 기술 좋은 브라질인 아폰소가 혼자 보로의 최전방에서 뭘 해보기엔 무리였다. 보조 공격수 노릇하던 반 시즌의 모습은 좋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미들즈브러 고위층의 주먹구구식 운영이 참 돋보일 뿐이다. 공짜 집어오고, 유망주 집어오고, 재활용품 주워오고, 하지만 이게 없었으면 EPL 진출하지도 못했을 거다. 시즌에 대한 큰 그림 없이 겨울 이적시장 적극 활용하고, 어엇 먹히네? 싶어서 팀의 스타일을 적극 바꾸다 실패하고... 비두카와 야쿠부가 결별 후 이내 부상으로 몰락한 걸 보면 나름의 선견지명일 수도 있겠지만, 반 시즌 좋은 모습을 보여준 공격수를 과감하게 신용만 하기보단 지금까지와 비슷한 스타일의 피지컬 쩌는 공격수 하나는 영입해 놨어야 하지 않았나 싶다. 피지컬 타입은 원래 비싸지만, 뭐... 강등보단 싸겠지!

어쨌든, 팀의 미들진은 시망상태라 볼 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시간이 지나며 이동국 자신도 이점을 깨닫고 한국시절과는 달리 밑으로 내려와 적극적으로 움직이며 링크 플레이를 해주는 등 나름대로 적응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러나 풀타임 레귤러가 아닌 리저브의 포지션이었기 때문에 매번 출장시간은 짧은 편이었고 결정적인 찬스에서는 종종 골 포스트를 맞추기도 하는등 운도 좀 따르지 않았다. 결국 골을 넣지 못하고 언론의 비난에 시달리게 되며 출장시간도 점점 줄어들게되자 선수본인도 골에 대한 조급증이 생겨났는지 후기에는 이런 변화된 플레이가 점차 사라지고 무리하게 골을 노리는 무모한 플레이를 일삼다가 자멸하게 된다. 본인이 인터뷰에서 말하길 어느 경기에서 넣어야 되는 걸 많이 못 넣었는데 그 때 이후로 동료들의 신뢰도 잃어 패스도 잘 안 왔다고.

또한, 06-07 시즌이 끝나고 아시안컵이 열렸는데 이동국은 부상과 팀적응을 위해 대표팀 소집을 거절하는 입장이었으나, 당시 프리미어리그 삼총사(설기현, 이영표, 박지성) 세 명이 모두 소집에 응하지 않아 공격진에 구멍이 난 상태였기 때문에, 베어벡 감독과 홍명보 코치가 이동국을 설득하여 억지로 합류 시켰다. 그러나 몸상태가 올라오지 않아 올림픽 대표팀과 20세 이하 대표팀에까지 합류하여 훈련을 받는등 최악의 컨디션이었고 몸상태가 좋지 못해 결국 아시안컵 본선에선 많은 기회를 받지도 못했다. 결국 제대로 대회에 뛰어보지도 못하고 팀에서 시즌 준비도 하지못하는 아주 어정쩡한 휴식기로 남게되었다.

말하자면 부상 회복 이후 잠깐 출전-> 이후 k리그 휴식 -> epl 윈터 브레이크 -> 교체로 가끔 출전 -> 도무지 폼이 올라오지 않음 -> 잘하면 될듯도 해서 다음 시즌을 기약 -> 여전히 폼이 안 올라옴(...) -> 적은 기회에 조급해져 무리한 플레이 -> 시망테크.

잔인하게 말하자면 이적 실패의 정석이라 할만큼 이동국은 여러 오류를 한꺼번에 안고 떠났는데, 결과적으로 이 처참한 실패는 한국 축구 전체에 좋은 사례로 남았다. 이후 해외 진출을 하는 선수들은 가능한 위험요소를 줄이려 애쓰고 현실적으로 대처하게 되었다.

3 K리그 복귀 이후

3.1 2008년

이동국의 흑역사 2

보로에서는 이동국을 급처분하려고 중동, 일본, 유럽 등을 알아봤지만 입질이 없었고, 이에 주급이라도 어떻게 하고 싶어서 공짜로 보낼 생각을 했다. 이때 포항이 손을 내밀었는데 포항은 이동국의 현재 기량 저하 및 선수의 의지를 존중해서 공짜로 풀어줬던 과거를 생각해 조금은 낮은 연봉을 제시했다. 그러나 이동국의 당시 상처 받은 자존심[10]에는 친정에서 서운하게 대한다고 비춰졌을 수 있고[11] 거기에 6개월 후면 프리로 풀리는 입장이라 포항과 결별하게 된다.

그런데 이 이적은 이 웹툰을 보면 알 수 있듯 포항 입장에서는 그냥 뒤통수 얻어맞은거다. 상처받은 자존심이고 뭐고 그냥 포항에 오기 싫었다고 밖에는...다만 이런 세부사정이 잘 알려지지 않아서 포항팬들도 그냥 애증의 관계 정도로 얘기하지만 사정을 아는 포항팬 입장에서는 그냥 배신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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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성남 일화 천마로 이적해 재기를 노렸지만[12] 두두 등의 외국인 삼인방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경쟁에서 밀리고 감독의 전술적 지시에 따르지 않는 모습을 보이며 그래도 이동국을 기대하던 성남 팬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던 김학범 감독이 물러나고[13] 신태용 감독대행이 부임하면서 결국 전력외 판정을 받고 이적한다.[14]

3.2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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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감바 오사카로 떠나버린 조재진의 공백을 메꿀 선수를 찾던 '재활 공장장' 최강희 감독의 눈에 띄어 전북 현대 모터스에 입단했다. 이동국의 전북 입단 당시 안티가 그렇게 많은지 몰랐다고 한다. 심지어 팬들마저 우리 감독이 맛이 간거 아니냐(...) 팀을 리빌딩 한다더니 양로원을 맨들라고?... 하는 반응을 회고하며 쓴웃음을 지었다.[15] 이동국은 전북 입단 후 리그 최고 수준의 미드필더진-루이스, 에닝요, 최태욱-의 지원 사격과 최강희 감독의 무한한 신뢰를 바탕으로 팀 공격의 중심에 서서 골폭풍을 일으켰다. 이때 득점 페이스가 워낙 좋았기 때문에 '리그와 FA컵에서 동시에 득점왕을 석권하는 게 아니냐'는 소리도 나왔다. 비록 FA컵은 실패했지만 리그에서는 20골을 작렬하며 2009 K-리그 득점왕에 등극했다. 또한 K리그 MVP까지 차지하며 여전히 국내 최고 수준의 공격수임을 증명했다.

이동국에게 몰아주는 전술로 득점왕을 먹은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있으나, 패스를 몰아준다고 해서 아무나 득점왕이 될 리도 만무하다. 오히려 원톱 자원이 한명 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자신있게 원톱 전술을 밀어붙일 수 있던 것은 이동국이기 때문이었다.

이동국은 시즌 26골을 넣으며 국내파 공격수로는 K리그 역사상 가장 높은 득점률을 기록했다.

3.3 2010년

2010 시즌은 월드컵 이후 개인의 심리적 슬럼프와 부상이 겹쳐 약간 부진한 와중에도 9골을 넣으며 에닝요와 더불어 전북의 공격진을 이끌었다. 리그 득점 순위에서도 8위를 기록. 23라운드 울산전에서는 부상 복귀 후 첫 경기였지만 특유의 골 감각으로 결승골을 뽑아내기도 했다.

동갑내기 친구인 김은중과 함께 누가 먼저 100골을 달성할지를 놓고 경쟁했다. 2010시즌이 종료된 현재 99골을 기록하며 통산 100골에 한골만을 남겨두었고 97골을 넣은 김은중을 제치고 현역 득점 1위 타이틀을 단독으로 보유하게 됐다.

그리고 마침내 2011년 3월 20일 K리그 부산 아이파크전에서 전반 32분에 개인 통산 100호골을 집어넣었다. 그리고 뒤이어 후반 19분 개인 통산 101호골을 집어넣어 팀의 스코어를 3:2로 뒤집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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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상 중인데 최강희 감독의 발언이 압권. 낫지 않으면 세탁기에 돌려버리겠다니(...)

3.4 2011년

2011년 8월21일 포항과의 홈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여 3-1 대승을 이끌었다. 기록 영상 특히 두번째 골은 전북도 속고 포항도 속았다

2011년 8월 그의 트위터에 아랍어를 모르겠다고 글을 남겼는데, 바로 사우디아라비아 프리미어리그의 알 나스르에서 그를 아시아 퀴터 1순위 영입 대상으로 삼아 홈페이지에 사진과 여러 정보를 올렸기에 관심을 모았기 때문이다.

2011 아시안 챔피언스리그에서 맹활약을 하며 전북의 4강행에 기여했다. 8강전 세레소 오사카전 1,2차전에서 무려 6골을 넣었는데, 2차전에선 4골을 넣으며 6:1로 크게 이기며 1차전 패배(3:4)를 확 뒤엎으며 팀의 4강진출에 기여했다. 현재 모두 9골을 기록하며 득점 1위에 올라 이 대회 득점왕으로서도 유력하다.

10월 3일 상주 상무와의 경기에서 2골 1도움을 기록하며 역대 K리그 한 시즌 최다 도움 기록을 갱신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레전드로 진화하는 중. 역대 최다 골 기록도 딱 1골 차이다!

10월 30일 정규리그가 종료하면서 도움 15개를 기록해 도움왕을 차지했다.어슬렁거리다 주워먹기만 하지 연계 못한다고 까던 동까들 보고있나? 이로서 K리그 사상 최초로 개인 타이틀 전부 획득[16]이라는 위업을 달성했다.

울산 현대 호랑이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는 1차전 PK를 얻어내며 원정 승리에 기여했다. 2차전 홈경기에서도 PK를 얻어냈지만, 본인이 찬 공은 그만 실축. 그래도 2:1로 승리하며 또 다시 챔피언 트로피를 드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12월 7일 열린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최우수선수상(MVP), 팬들이 뽑은 상, 도움상, 베스트일레븐 공격수 등 4개 부문에서 상을 받아 4관왕에 올랐다. 이동국은 시상대에 자주 오른다며 너스레를 떨면서도 '2009년에 이어 큰 상을 또 받게 돼 영광이고 감사한다'며 '올 한해 우승만을 위해서 매일 땀을 흘린, 이제는 가족과 같은 팀 동료들과 같이 받는 상이라 생각한다'고 소감을 전했다. 이번 MVP에 오르며, 통산 두 번째 MVP를 차지했다. AFC 챔피언스리그 MVP까지 차지하면서 클럽 커리어로는 이제 이룰 것을 거의 다 이룬 셈.

시즌 후 1박 2일에 섭외되었다.

2011 시즌까지 개인통산 115골을 기록, 역대 득점 1위 우성용과 단 1골차이다. 특별한 이변이 없는 이상 2012 시즌 기록 경신은 확실하며, 단지 그 시점이 언제냐가 문제일 뿐이다.

시즌이 끝나고 중동에서 굉장히 파격적인 조건의 오퍼가 들어왔다. 건물 몇 채와 맞먹는 수준이었다고. 주위에서는 '가지 않는것은 미친짓이다.'라며 중동으로 갈 것을 권유했지만 이동국은 계속 망설이고만 있었다. 아내가 왜 중동에 가지 않느냐라고 묻자 '감독님'이라고만 대답했다고. 결국 이적하지 않고 전북에 잔류했다. 하지만 감독님이 떠나고 말았다.

3.5 2012년

2012년 3월 3일 K리그 개막전에서 성남을 상대로 2골을 넣으며 개인통산 117골을 기록, K리그 통산 최다골 신기록을 달성했다.

2012년 3월 3일이후 5골과 도움을 계속하며 기록을 달성중 5월 26일 수원과의 경기에서 2어시를 기록하며 122 득점 50 도움으로 50-50과 100-50 달성.

26골 6도움으로 데얀에 이어 득점 2위를 거두며 개인통산 리그 141골을 기록했다.

3.6 201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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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현대 모터스의 선수단 물갈이로 인해 주전급 선수의 최대 절반 정도가 바뀐 상황에서 조성환의 뒤를 이어 주장 완장을 차게 되었다. 대전의 장신 용병 케빈이 영입되면서 같이 기용될 때에는 좀더 후방으로 빠지며 플레이메이커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2012년 4월 3일에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ACL) 조별리그 F조 3차전 우라와 레즈와 원정경기에서 출전했다. 이날 체력 안배를 위해 선발출장하지 않았는데, 팀이 1-0으로 끌려가자 후반 교체투입되어 1골 2도움을 올리며 전북의 3-1 역전승에 기여했다. 또한 통산 19골을 달성하며 18골의 레안드로(감바 오사카)를 누르고 아시아 챔피언스 리그 득점 단독 1위가 되었다. 이동국의 기량이 떨어지지 않아[17] 또한 골을 넣은 뒤 이동국이 보여준 골 셀러브레이션이 화제가 되었다. 대중들에게 최근 영 좋지 못한 팀에서 착잡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박지성을 응원해달라는 뜻으로 2010년 5월 박지성이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골을 넣고 보여준 산책 세리머니를 재현했고, 이를 언론이 앞다투어 보도한 덕분에 이동국의 이름은 네이버 실시간 검색 1위까지 올랐다. 그리고 사이타마 스타디움은 사이타마 둘레길로 개칭당했다

8월말에 FC 서울전에서 김용대의 태클 이후 인대 부분파열 부상으로 전치 6주 진단이 나왔다. 부상중에 최근 전북과 2년 계약연장에 합의하고 '전북에서 ACL 우승컵을 꼭 들고 싶다.' 라는 소감을 밝혔다.

그래도 부상 여파 속에서도 11월 28일까지 리그 13골 2도움으로 상당히 활약했다.

3.7 2014년

2년 연속 완장을 차, 최강희 감독의 신임이 두터움을 보여주었다.

리그에선 제4 라운드까지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으나, AFC 챔피언스리그에선 득점을 올리며 건재함을 과시했다. 그리고 드디어 3월 29일 에서 열린 제5 라운드(vs 성남)에서 팀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는[18] 시즌 1호골이자 결승골을 터뜨려서(1:0 승리), 지난해의 상대 전적 2연패의 수모를 갚았다.

7월 20일 전주 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16라운드 경기에서 상주 상무를 상대로 1골 2도움을 기록하며 K리그 역사상 세번째로 60-60 클럽 가입 대기록을 세웠다. 더욱이 이날 경기는 18시즌 532경기를 마지막으로 유니폼을 벗는 최은성 은퇴 경기였기 때문에 전주 팬들에게는 더욱 각별한 날이 되었다. 레전드의 은퇴를 축하하는 레전드의 헌정포그리고 7월 25일 서울에서 까마득한 후배의 마지막 경기에 나서 여전한 발리슛 득점을 기록하며 다시 기관총 세례

8월 16일 포항 원정경기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2:0 승리를 이끌었다. 이날 경기는 여러모로 의미가 있었는데 전북이 최근 포항전 상대전적이 5경기 무승[19]을 기록하며 자칫 징크스로 굳을 뻔한 상황을 타개했고, 더구나 1위 전북과 2위 포항은 불과 승점 1점 차이였는데 단숨에 4점으로 도망가는 의미있는 승리였다. 그리고 이동국이 전북 소속으로 기록한 100호 골이기도 했다. K리그 역사상 한 팀에서 100골 이상을 기록한 선수는 데얀(122골 서울) 김현석(110골 울산) 윤상철(101골 안양 LG)에 이어 이동국이 4번째인 진기록이다.
이동국 전북 소속 100호골

11월 7일자 리그 13골로 여전히 득점 선두. 그 나이에 아직도 득점왕 경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시즌 몇 경기를 앞두고 종아리 부상으로 시즌 아웃(......). 게다가 산토스도 13골로 현재 공동 득점 1위에 그 뒤를 11골로 임상협이 바짝 추격하고 있다. 그런데 37라운드에서 전남 드래곤즈스테보가 2골을 넣으면서 13골로 동률이 되어, 스테보가 득점왕이 될 확률이 높아졌다.[20] 하지만 스테보가 결국 골을 넣지 못 하여 이동국과 산토스의 득점왕 대결이 이어졌다. 만약에 산토스가 골을 넣지 못 한다면 출전 시간이 이동국이 더 적기 때문에 이동국의 득점왕이 확정된다. 결국 산토스가 포항을 상대로 골을 집어넣으면서 이동국은 아쉽게 득점왕을 놓치게 되었다. 득점왕을 놓친 것은 아쉽지만 팀을 우승으로 이끈 활약과 리더십을 인정받아 2014 K리그 클래식 MVP, 팬타스틱상을 수상했다. 둘 다 2009, 2011 시즌 이후 3번째 수상이다. 이로써 K리그 MVP 최다 수상자가 되었다.

3.8 201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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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오가 임대 복귀를 하고,[21] 에두가 팀에 합류했다. 에두가 수원 삼성 시절에 상당한 클래스를 보여줬기에 이번에는 지난 시즌보다 더 치열한 경쟁이 예상. 최강희는 이동국 - 에두 투톱도 기대하고 있다며 다양한 전술을 시도할 것이라 밝혔다.

2월에 허벅지 부상을 당해 아챔 1라운드 경기인 가시와와의 경기, 2라운드 산둥 원정, 그리고 K리그 개막전인 성남과의 경기에서 뛰지 못 했다. 그 사이, 에두는 산둥 원정과 성남과의 경기에서 연속으로 골을 넣으며 맹활약 중. 3월 14일 FC 서울과의 K리그 2라운드 경기에서 교체 출전하며 처음으로 전북 4가 전부 출전했다. 그리고 3월 17일, 아챔 3라운드인 빈즈엉과의 경기에서 풀타임을 뛰며 2골을 넣으며 에두와의 치열한 경쟁을 예상하게 했다. 막, 부상에서 회복한 데다 복귀전 후, 훈련에서 또 가벼운 부상을 당해 3월 국가대표 평가전에선 김신욱과 함께 제외되었다.

4라운드에서는 다시 후보에 있었는데 에두의 골 결정력이 물이 오른 데다가 상대는 미드필더들이 매우 탄탄한 포항 스틸러스라 투톱을 쓰는 것은 무리라 판단되었기 때문. 53분, 문상윤과 교체투입되었고, 71분 멋진 크로스로 에두의 결승골을 어시스트하며 여전한 클래스를 입증했다.

5월 16일까지 10경기에 나와 3골 2도움을 기록하며 득점순위 공동 7위를 기록 중이다. 기존의 시즌들에 비해 완전한 주전이라고 보기는 애매한 상황. 경쟁자인 에두가 20경기 출전 중 4경기 교체 출전인 반에 이동국은 19경기 출전 중 9경기 교체 출전이다. 시즌 초반에 부상을 당하고 그 사이에 에두의 활약이 엄청나다 보니 에두를 쉽게 포기할 수 없어 부상 복귀 후에도 주전과 벤치 사이에 절묘하게 걸쳐진 상황. 그래도 뛰면 뛸수록 폼을 어느 정도 회복을 하고 있다. 애매한 출전 속에서도 8골 3도움을 기록했다.[22]

그렇게 2015 시즌부터 슬슬 로테급으로 급이 내려가는 가 했는데 7월 9일 에두가 반 년만에 30억 받고 이적했다... 문제는 그 다음 경기를 이동국이 경고 누적 때문에 뛸 수가 없는 것.

결국 끝까지 선수단을 잘 이끌고 필요할때는 본인이 골도 넣어주면서 분위기를 다잡은 끝에 2015년 전북의 K리그 클래식 2연속 우승에 커다란 기여를 한다. 이로서 전북에서만 우승 4번이라는 커리어를 가지게 되었다! 2015년 11월 22일 현재, 33경기 13골로 득점 4위에 올라 있다.대체 폼이 언제 죽는 거야[23][24][25]

시즌 후 통산 4번째 K리그 MVP를 수상했는데, 이게 상당히 논란이 되었다. 주장으로써 팀을 잘 이끌고 37세라는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많은 골을 집어넣고 폼을 최소한의 노쇠화로 유지해내는 등 대단한 활약을 했지만, 공격포인트 1위에 오른 염기훈이 더 적합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옆동네우승만 하고 이름값만 높으면 모두 다 해먹는 참사가 발생하고 말았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이다?

2015 AFC TOP TEN GOALS - 이동국

3.9 2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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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챔 개막전 결승골 득점 후 날개 세레모니 뒤에는 첫 골 넣으신 이다

전북의 김신욱영입으로 아챔 개막전 도쿄와의 경기에서 이동국-김신욱 투톱 공존의 가능성을 보였다. 장쑤전에서는 동점골을 기록하고 후반 추가시간에 강한 황사바람에 넘어졌고 그는 퇴장 당했다.[26] 현재 조별예선 2경기 연속 득점이다. 특히 도쿄전에서 결승골 영상을 SNS올리며 2016시즌 첫경기 첫골에 의미를 두고 매우 기뻐했다.

조별예선 3차전 빈즈엉과 홈경기에서 후반 종료전 추가골을 득점하여 아챔 3경기 연속 골을 기록했다. 이로써 AFC 챔피언스리그 통산 30골을 기록하여 개인 통산 득점 랭킹 1위에 등극했다. 또한 축구 잡지 월드 사커가 선정한 세계 500대 선수에 이름을 올렸다.#

K리그 3, 4, 5 라운드 연속 득점으로 나이를 잊은 활약을 보였고 8라운드 수원 FC전에서 PK 골을 성공시켜 250개의 공격포인트를 기록했다. 5월 4일 기준 184골-66도움 으로써 4도움을 더하면 70-70 클럽 가입까지 노릴 수 있다. 250개의 기록중 120골 37도움이 전북에서 기록한 것이다.#

시즌 중반 부상을 당해 잠깐 쉬고 8월에 복귀를 하였는데 복귀전에서부터 득점포를 가동시키며 여전히 지지않는 전북의 공격에 더욱 무게감을 실어주었다. 다만 아직 몸상태가 확실히 올라오지 않았는지 몸놀림이 가벼워 보이지는 않았다. 9월에 들어서 10일 전남과의 경기에서 트레이드 마크인 발리슛으로 득점포를 쏘았고, 발리깍는 노인. 한준희 해설은 이동국의 역대득점에서 발리슛의 비율을 확인해 봐야 한다고까지하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13일 AFC 4강 진출이 걸린 상하이 상강과의 경기에서 후반에 교체로 두입되어 두골을 몰아치며 부상 당하기 전보다 더 물오른 득점력을 보이고 있다.

4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K리그에서의 활약

이동국이 대표팀이 아닌 소속 클럽에서 이룩한 수많은 업적들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2009년 전북에서 득점상을 차지하며 팀의 우승을 이끌어 MVP에 올랐고 2011년 도움상, K리그 통산 최다 득점 및 최다 공격포인트를 기록하였다.

신인상과 득점상, 도움상을 모두 기록한 것도 K리그에는 이동국 선수가 유일하다. 그밖에도 AFC 챔피언스 리그/2011년 준우승과 최다득점, MVP에 선정되기도 했다. 또한, AFC 챔피언스 리그 통산 최다 득점 기록도 현재 이동국 선수가 가지고 있다.

이러한 K리그에서의 활약과 동료 선수들과 축구전문가들의 후한 평가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안티들의 공세에 시달리고 있다. K리그 득점상을 차지했더니 '주워먹기만 하고 패스도 할 줄 모른다.' 고 비난하고, 도움상을 차지했더니 '어차피 국내용이다.' 고 비난하고, AFC 챔피언스 리그에서 맹활약했더니 이젠 '그래봤자 아시아용' 이라고 비난하는 식이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던지?

K리그에서의 어마어마한 활약상이 주목받지 못하는 것은 역시 유럽에서의 부진이다. K리그, 그리고 최근 몇 년간의 활약상을 봤을때 '아이러브사커'나 포털사이트 댓글에서 불거지는 이동국 vs 박주영의 논란은 이동국과 박주영을 비교하기가 힘들다는 것이 정론이다. 또, 박주영은 프랑스리그에서의 활약상이 있었지만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특히 미들즈브러에서는 사우스게이트 감독의 신임을 얻어 출장기회를 꽤 많이 잡았음에도 별다른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다.

허나 유럽리그에서의 부진을 이유로 이동국이 K리그에서 세운 업적까지 폄하할 이유는 없다. 물론, 아시아권 안이라는 한계가 있지만 K리그 안에서는 이동국에 비길할만한 현역 스트라이커가 몇 명 없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이동국의 유럽리그에서의 부진과 실력 논쟁에 관계해서는 클럽 경력이 아니라 이동국 문서 본문에 상세히 설명되어 있다. 현재 넷상에서의 논란은 대부분 저 문제를 돌파하지 못한 채 서로 눈 감고 허공에 주먹질하는 쉐도우복싱에 가깝다.
  1. 비록 골은 없었지만 교체선수로서 도움도 기록했다는데 공식 기록에는 없다. 도움 기록은 세계적으로 잘 정리되거나 확립되지 않았으므로, 도움성 패스 정도는 한 것이 전해지는 것일 수도 있으나 미지수이다.
  2. 힐링 캠프 당시 이동국 증언에 따르면 브레멘으로 이적 당시 에이전트에게 주전 투톱이 있긴 한데 별 건 아니라는 얘기를 듣고 갔다고 한다. 이적하고 나서 어느 정도 몸상태가 올라오니까 이적 1년차였던 피사로와 2년차였던 아일톤이 갑자기 골을 넣기 시작했고, 쟤네 못한다던데 왜 저러냐고 되물으니 자기도 잘 모르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고 한다.
  3. 차범근은 분데스리가에 진출했다 한 번 돌아가서 병역을 마치고 다시 분데스리가에서 뛰었다.
  4. 의문을 가질 사람들이 있겠는데, 안정환이나 설기현도 2002년 6월 이후 다른 처리가 없으면 박주영처럼 아예 말뚝 박을 준비를 하지 않는 이상 돌아가야 되는 상황이었다. 이 분데스 진출을 실패라고 하는 것은 지나치게 편향된 시각일 뿐이다.
  5. 우리들이 잊고 있는데... 지금의 이 군대..관련문제 는... 차범근 의 이적(다름슈타드..)때 에도 있었던 문제다. 그냥 관련사항 만 따져보면 그때와 같은 경우 이다. 물론 이동국 은 그후 프랑크푸르트 진출이 없었지만..
  6. 다만 정규리그가 아니라 K리그 컵대회까지 포함한다면 삼성 하우젠컵 2007에서 기록한 7위가 최고 순위.
  7. 보로 측에서 5억원이라는 똥값 이적료를 제의했다. 포항은 k리그 내에서 팔아도 그거 두 배는 너끈한 이동국을 팔 리 없었으나 선수 개인의 의지와 구단의 이미지 때문에 K리그 복귀시 포항으로 복귀, 타팀이적시 이적료 50% 라는 조항을 달고 그냥 공짜로 보냈다.
  8. 보통 경기 종료 10분정도 전에 교체출전 한 선수는 공격 포인트를 기록하지 않는 이상 5~6점을 주는 경우가 보통이며, 별활약이 없을 경우에는 아예 평점을 매기지 않는 경우도 있다.
  9. 에이 받아라 크로스 외엔 보로가 마땅한 수단이 없기도 했지만.
  10. 선수들은 연봉을 자존심으로 생각해 가격을 낮추거나 비지니스 식으로 협상하려는 프론트와 의견 대립이 심한 경우가 많다.
  11. 다만 포항이 보로에 간판스타인 이동국을 이 항목에도 상술 되어있듯 K리그 복귀시 포항과 계약이라는 항목을 걸고 공짜로 보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 그런데 돌아올땐 거액을? 선수만 자존심이 있고 구단은 자존심이 없나? 그리고 계약건에 대해서는 아래 웹툰을 참고하자.
  12. 계약금도 있고 8억이라는 연봉이 거액이라면 거액이고 리그 최상위 정도이긴 한데, 어지간한 용병들은 다 8억 이상씩은 받고 있기도 했다.
  13. 김학범 감독은 애초에 이동국의 영입을 바라지 않았지만, 성남이라는 팀은 특성상 곽모 사장님의 파워가 절대적이라 그냥 사다줬고, 억지로 써야만했다. 이는 훗날 김학범 감독 인터뷰에서도 밝혀진 내용.
  14. 당시 부진의 주범으로 지적되었던 고참급들과 함께 이적하는데 신태용은 이들의 이적에 반대하면서 전부 팔든가 전부 남기든가 둘 중 하나라고 했는데 쿨하게 전부 팔았다고...
  15. KBS전주 특별기획 - 특집 다큐 최강희
  16. 신인상(1998), 득점왕(2009), 도움왕(2011), MVP(2009)
  17. 이런 농담이 나올 정도로 골을 넣고는 있지만 이번 시즌 들어 기량이 슬슬 떨어지는 것이 눈에 보인다. 이것이 시즌 초라서거나 국대에서의 심리적 압박에 의한 것일 지도 모르겠으나.쓸모없는 걱정이였어
  18. 18일 광저우 패배 이후 상주와 무를 썰었고 포항에 패하며 가라앉는 중이었다.
  19. 기록상 1무 4패지만 1무도 FA컵 승부차기 끝에 패한 것이라 사실상 5전 전패나 다름없다.
  20. 마지막 라운드에서 산토스의 수원은 포항 스틸러스와 원정 경기를 가지고, 이동국의 전북은 홈 경기이지만 울산 현대와 상대하는 반면, 전남은 인천 유나이티드와 홈 경기를 갖는다. 상대적으로 스테보가 골을 넣을 확률이 높았다.
  21. 그 뒤, 수원 삼성에 입단했다.
  22. 참고로 서울에서 부활했다는 박주영은 현재 15경기 5골 1도움이다.
  23. 득점과는 별개로 올 시즌 이동국은 이전보다 확실히 폼이 떨어졌다는 평을 상당히 많이 받고 있다. 나이를 생각하면 그 동안 폼이 안 떨어지는 것이 더 이상하긴 했다.
  24. 16년 2월 6일 최강희 감독 인터뷰에 따르면 체력 안배를 하느라 조절하면서 뛰었다고 한다. 이렇다면 폼이 떨어졌다고 보인게 단순히 기량저하라고만 판단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6 시즌을 15보다 더 잘 뛸지도...
  25. 13골 5도움으로 득점 및 공격포인트 4위를 기록했지만 리그 32R 이후로 공격포인트를 추가하지 못했다. 최강희 감독은 이에대해 이동국의 부진이 원인이 아니라 팀내 조직력을 문제 삼았다. 기사
  26. 당시 장쑤 선수가 넘어져 있었는데 전북 선수들이 그냥 경기를 진행한것에 화가 났다고 한다. 기사 경기영상 그건 심판한테 따져야지 사실은 시간끌기가 안통하자 퇴장으로 시간을 지연시킨거라 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