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앞줄 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가운데)과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한경DB
1997년 12월3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앞줄 왼쪽)가 지켜보는 가운데 임창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가운데)과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하고 있다. /한경DB
1997년 12월3일 임창열 당시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과 미셸 캉드쉬 국제통화기금(IMF) 총재는 전 국민이 TV로 지켜보는 가운데 구제금융 합의문에 서명했다. 이로써 한국은 IMF가 요구하는 혹독한 구조조정의 길로 들어섰다. 2018년 12월3일은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를 맞은 지 꼭 21년째가 된 날이다.

최근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 부도의 날’이 개봉하면서 외환위기 당시 정부 관료들의 미숙한 대응과 국민이 겪었던 고통 등이 다시 화제가 되고 있다. 포털사이트의 영화 리뷰에는 “영화를 보고 우리나라가 IMF로 갈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알게 됐다” “역사 공부를 다시 했다”는 식의 평가가 적잖이 나오고 있다. 반대로 전·현직 경제관료와 금융계에서는 “무지한 정보로 관객을 현혹한다”는 비판도 잇따른다. 영화적 재미를 위해 가공하거나 각색한 내용 등이 ‘팩트’와 혼재되면서다. 외환위기 당시와 영화 속 내용은 무엇이 사실이고 무엇이 가공일까. 팩트체크를 통해 다뤄본다.

영화 속 인물들은 실존했나

영화의 주인공인 한시현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김혜수 분)은 국가 부도 위기를 가장 먼저 감지하고 IMF와의 협상을 반대하는 인물로 나온다. 한 팀장과 대립각을 세우면서 IMF와의 협상을 지지한 인물은 재정국 차관(주우진 분)이다. IMF와의 협상을 앞두고 재검토를 주장하던 청와대 경제수석이 경질되고 신임 경제수석이 나서 협상을 주도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 밖에 한 팀장의 국가 부도 보고서를 받고 당황해하는 무능한 한국은행 총재(권해효 분·영화에선 총장으로 호칭이 잘못됨)도 등장한다.

‘재정국 차관’은 당시 강만수 재정경제원 차관이라는 해석이 많다. 영화 속에 등장하는 두 명의 경제수석은 부총리 겸 재경원 장관들을 모델로 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경제팀 수장은 강경식 부총리였다가 IMF와의 협상 직전 임창열 부총리로 교체됐다. 한은 총재는 이경식 씨가 맡고 있었다. 이 전 총재는 1995년 8월 취임했다가 4년 임기를 다 채우지 못하고 1998년 3월 사퇴했다. 영화 속 한은 통화정책팀장은 정규영 당시 국제부장을 기초로 한 가공의 인물이라는 게 제작사와 한은 측 설명이다. 정 전 부장은 1997년 3월 한은에 외환위기 가능성을 담은 보고서를 처음 제출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국가부도의 날'이 불러온 21년 전 '그날' 논쟁
한은이 국가부도 먼저 예측?

영화에서는 한 팀장과 팀원들이 경제위기를 예견하고 이를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강만수 전 차관(전 기획재정부 장관)이 2015년 발간한 회고록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에 따르면 한은 간부가 IMF 사태 발생 전에 ‘최근의 경제상황과 정책대응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작성하기는 했다. 그러나 해당 보고서는 기존에 증권사나 연구기관이 이미 언급한 내용을 바탕으로 했다. 한은이 가장 먼저 외환위기를 경고했는지 여부에 논란이 이는 대목이다. 재경원이 1997년 1월부터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같은 해 11월20일까지 환율, 외환보유액, 외환시장 동향과 관련해 작성한 대책 보고서만 83개에 달했다.

영화에서 한은이 IMF 구제금융 신청을 반대하고, 기재부가 밀어붙인 것으로 묘사된 장면도 논란이다. 실제로는 1997년 11월6일 한은 실무진이 한은 총재에게 IMF 구제금융 신청을 건의하고, 같은 달 18일에는 한은이 정부에 IMF 구제금융 요청을 촉구했다. 앞서 정부가 구제금융 신청 전에 금융개혁법을 추진했을 때도 한은 노조 등이 반대해 결국 무산됐다.

선과 악 구도 지나치게 부각한 영화

영화에서 한 팀장은 “구제금융 신청은 경제주권을 내주는 것”이라며 반대한다. “국가 자산을 담보로 미국과 일본 등에 자산유동화증권(ABS)을 발행하면 된다”며 “IMF에 자금 지원을 요청하느니 채무 지급유예(모라토리엄) 선언이라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재정국 차관은 이 같은 의견을 묵살하고 IMF와 구제금융 요청 협상을 ‘날치기’로 진행한다.

하지만 당시 정황을 보면 정부는 IMF를 최대한 피하기 위해 애썼다. ABS 발행과 일본과의 통화스와프 협상 등 구제금융을 피하기 위한 대안을 적극적으로 제시했다. 강만수 전 차관이 사카키바라 에이스케 당시 일본 대장성 차관에게 전화를 걸어 “일본이 중앙은행 간 스와프로 연결차관을 제공해달라”고 애걸했지만 거절당했다.

모라토리엄 선언은 비현실적이라는 지적이다. 모라토리엄은 수출, 수입이 막히는 상황에서 사실상 내수로 버티자는 얘기다.

당시 임창열 전 경제부총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남미나 동남아처럼 식량자급이라도 되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식량자급율이 30%인 한국에서는 국민의 70%가 굶어죽어야 한다”며 “에너지만 봐도 전량을 수입해 오기 때문에 모든 것이 ‘블랙아웃’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신자유주의가 외환위기 사태를 초래한 것으로 묘사되는 것에 대해서도 반박이 나온다. 행정고시(27회) 출신인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은 지난 2일 자신의 페이스북에 “국가부도의 날은 신자유주의자들의 음모가 유발했다는 것이 주제인데, 사실은 경상수지 적자가 누적돼 외환보유액이 고갈돼 터진 경제 재앙이었다”며 “IMF 사태의 원인은 1995년의 재정지출이 무려 43%나 증가하는 등 대규모 재정팽창이 원인 중 하나였을 뿐”이라고 지적했다. 상당수 전문가도 외환위기는 경제 체질 개선을 미뤄온 데 따른 구조적인 이유에다 금융권을 중심으로 한 단기 외채 급증 등이 어우러지며 벌어진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성수영/임도원/고경봉 기자 kgb@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