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직필]경기 위기, 일본이 반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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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9.11. 오후 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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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사상 처음으로 물가가 하락하면서 일본형 장기 불황이나 D의 공포(디플레이션)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물가가 내리면 저금리가 정착되는 동시에 경제성장률이 하락한다. 돈을 쓰지 않고, 빌려서 투자하지도 않으니 당연한 결과다.

이런 상황은 한국만의 현상이 아니다. 일본, 독일,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등 선진국은 물가가 하락하면서 장기 국채금리가 마이너스 상태에 빠졌다. 스위스는 거액 예금에 대해 마이너스 금리를 적용할 계획이다. 역사상 처음으로 은행이 보관료를 받을 정도로 금리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가가 내리면 투자를 해도 이익이 남지 않으니 아무도 돈을 빌려가지 않는다. 따라서 물가와 금리의 방향성은 비슷하다. 그렇다면 왜 물가가 오르지 않는 것일까? 가장 큰 이유는 기술 혁신으로 생산성이 빠르게 진보하면서 모든 산업이 최악의 공급과잉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또한 기계는 사람에게서 일자리를 빼앗기 시작했다. 고령화사회를 맞아 보수화된 투자가는 원본을 지킬 수 있는 채권투자(예금)에만 집중한다. 최악의 양극화도 한 요인이다. 사상 최대의 가계부채로 이자를 내기 위해 소비를 줄이고 있다. 사회를 구성하는 거의 모든 것이 역사상 ‘최초’ 혹은 ‘최고’인 상황이 동시에 발생하면서 물가가 하락하고 금리가 낮아지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사례가 1930년대 미국의 대공황과 오늘날 일본의 장기 불황이다. 대공황 당시 미국에서는 수백만명이 굶어 죽고, 실업률은 25%, 물가는 무려 27% 하락했다. 1990년대 이후 일본도 장기불황이 이어지면서 국가 전체가 30년째 멈춘 듯하다. 임금은 20년 전과 비슷하고 돈을 아무리 풀어도 금리는 마이너스이고 인구는 줄고 있다.

미국과 일본 모두 공황에 돌입하기 이전에 엄청난 버블이 발생했지만, 공황 이후의 대응은 매우 달랐다. 당시 미국은 사회 전체를 완전히 개조할 정도로 자본주의를 손보면서 케인스 경제학을 과감하게 채택했다. 반면 1990년대 초반 일본은 장기불황을 순환적인 경기 조정으로 오판했다. 이후 20년 이상 단기 대책만 남발하다 아베 총리 집권 후 과감하게 돈풀기에 나섰지만 효과는 미미한 상황이다.

구조적 전환으로 인식하지 못한 일본은 1989년부터 장기불황이 정착된 2000년까지 11년 동안 총리가 무려 9명이나 바뀌었다. 장기불황에 진입한 1990년대 일본의 부동산과 주식 등 자산가치는 무려 1500조엔이나 줄어든 것으로 추정되는데(이는 당시 개인금융자산 전체와 맞먹고 3년간 국내총생산(GDP)에 해당하는 금액), 불과 200조엔만 경기 부양에 사용했다. 위기를 맞아 강력한 경제 리더십과 과감한 정책이 필요한 시기에 1년짜리 정부는 단기 경기부양에만 매달렸던 것이다. 결국 미국과 일본의 차이는 상황에 대한 판단과 경제 리더십 차이에서 발생했다.

앞서 제시한 저물가와 저금리의 원인을 살펴보자. 4차 산업혁명, 공급과잉, 고령화와 인구 감소, 사상 최대의 부채와 안전자산 선호 등이 동시에 발생하고 있는 것은 역사상 처음 있는 수축사회로의 전환이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돈을 무제한으로 풀면서 마이너스 금리마저 용인하는 현대통화이론(MMT·Modern Monetary Theory)에 주목하고 있다.

이런 상황을 한국에 적용해보자. 핵심은 현재의 경기침체를 주기적으로 나타나는 순환적 경기 침체로 볼 것인지(일본형)? 아니면 구조전환이 필요한 시스템 위기(미국형)로 볼 것인지가 가장 중요하다. 나는 당연히 구조적인 시스템 전환으로 본다. 내년이면 한국이 경제개발을 시작한 지 60년이 된다. 제조업 생산능력과 수출이 줄어들고, 물가 하락과 초저금리가 동시에 나타난 적은 없었다. 여기에 미·중 패권대결에 따른 보호주의마저 정착되고 있다. IMF 외환위기나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와 완전히 성격이 다르지 않은가?

지난 시절 한국의 성공은 세계적 차원에서 파이가 커지는 팽창사회에서 이뤄냈다. 그러나 지금은 거의 모든 영역에서 제로섬 원칙이 통용되고, 일부 영역에서는 파이가 줄어들기도 한다. 따라서 가장 시급한 것은 현재 상황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회 전체를 바꾸려는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또한 현실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강력한 경제리더십도 절실하다. 경제를 넘어 정치, 사회 모든 분야를 바꾸지 못하면 ‘한국형 대공황’은 불가피해 보인다.

지금 일본이 자행하는 경제침략은 20여년 전부터 이어진 구조전환의 실패를 군국주의로 돌파하려는 시도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향후 한국의 전략은 1990년대 일본과 정반대로 가면 될 듯하다. 반면교사가 있는데 배우지 못하면 일본보다 더 참혹한 미래가 기다릴 수도 있다.

홍성국 혜안 리서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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