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승아!' '시장 이전 철회하라!' 훈민정음 창제 후 내걸린 한글 투서 [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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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08.12. 오후 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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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민정음의 창제이유를 밝힌 서문.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서 서로 통하지 않음으로써 우매한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겨 새로 28자를 만들었다’는 유명한 내용이다. |간송미술관 제공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 1443년(세종 25년) 12월 30일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은 50여일 뒤인 1444년 2월 20일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1445) 등과 독설이 난무하는 논쟁을 벌인다.

최만리는 우선 “언문(한글)은 중국의 제도와 문화를 따르는 사대주의에 어긋나는 부끄러운 문자”라 포문을 열었다. 최만리는 “설총(655~?)의 이두는 비속한 말이지만 그나마 중국 글자를 빌려서 어조(語助)에 사용했기 때문에 학문을 일으키는데는 일조했다”고 나름 평가했다. 그러면서 “전하는 무엇 때문에 저속한 글자를 만들어 평지풍파를 일으키느냐”고 닦아세웠다. 이어 “만약 언문으로도 족히 입신출세할 수 있다면 어느 누가 무엇 때문에 노심초사하여 성리학을 공부하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언문은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기예일뿐(不過新奇一藝耳)”이라고 사정없이 깎아 내렸다. 최만리는 예서 멈추지 않았다,

“주상께서는 ‘백성들이 만약 옥사에 휘말릴 때 언문으로 억울한 사연을 쓰고 또 언문 법조항과 재판기록을 읽을 수 있다면 억울한 지경을 당하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그러나 형벌은 재판관이 얼마나 공평하게 처리하느냐에 달려있지 문자해독 여부와는 관계없는 일입니다. 말과 글이 같은 중국에서도 억울한 옥사는 일어납니다.”

세종이 글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그림을 곁들인 한글번역본으로 편찬한 <삼강행실도>(시도유형문화재 제160호). 한글이 창제되기 10년전인 1434년 세종은 <삼강행실도>에 글을 모르는 백성들이 이해할 수 있게 삽화를 섞었지만 그 또한 불편하게 여겼다, 세종은 결국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10일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했다. 사진은 훈민정음 창제후 한글로 번역한 <삼강행실도>(시도유형 제160호).

■“설총은 옳고 난 그르다는거냐”

속사포처럼 쏟아낸 최만리의 상소에 세종은 조목조목 반박하기 시작한다.

“설총(655~?)이 이두를 만든 이유가 뭐냐.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함이 아니냐. 지금의 언문도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다. 그렇다면 너희는 설총은 옳다 하면서 너희의 군상(君上)이 하는 일은 그르다는 것이냐.”

세종은 애써 창제한 한글을 ‘새롭고 기이한 한가지 기예’라고 폄훼한 최만리에게 무척 빈정이 상한 것 같았다.

“아니 내가 늘그막에 할 일이 없어 글자를 만들었겠냐. 말이 지나치다.”

세종의 독설은 다른 신하들에게까지 번진다. 처음에는 한글창제에 찬성했다가 반대로 돌아선 김문(?~1448)을 ‘이랬다 저랬다 인사’로 비판했다. 세종은 특별히 홍문관 응교 정창손(1402~1487)을 콕 찍어 야단쳤다.

<월인천강지곡>(국보 제320호). 세종이 죽은 부인(소헌왕후)를 추모하기 위해 석가모니를 찬양하는 노래인 월인천강지곡을 지으면서 부인을 위한 ‘비밀메시지’를 담았다고 한다. 즉 <월인천강지곡> ‘기이’편에 “(부인은)~눈에 보이는듯 생각하소서. 귀에 들리는 듯 생각하소서”라는 대목을 넣었다는 것이다.

세종은 일전에 정창손에게 “만약 한글로 <삼강행실도>를 번역해서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백성들이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이라고 기대한 바 있다. 그러나 정창손은 “한글 <삼강행실도>를 배포한다고 충신·효자·열녀가 나오겠느냐”고 반문하면서 “사람의 행실은 사람의 자질에 달렸지 언문번역에 달린 것은 아니”라고 반기를 들었다. 세종은 임금의 말에 정면으로 토를 단 정창손을 소환해서 “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용속(庸俗)한 선비”라고 꾸짖었다. 세종은 생각할수록 화가 치밀었다.

“내가 너희를 부른 것은 처음부터 죄주려 한 것이 아니었다. 최만리의 상소를 받고 한 두가지 말을 물으려 했을 뿐이다. 그런데 너희가 사리분별없이 말을 바꿔 대답하니 아니되겠다. 너희의 죄는 벗기 어렵다.”

세종은 마침내 최만리는 물론 직제학 신석조(1407~1459), 직전 김문(?~1448), 응교 정창손, 부교리 하위지(1412~1456), 부수찬 송처검(1410~1477), 저작랑 조근(1417~1475) 등을 의금부에 가뒀다. 대부분은 다음날 풀려났지만 정창손은 파직됐다. 또 ‘갈지자’ 행보를 했다는 이유로 ‘김문은 국문하라”는 명을 내렸다.

<선조국문유서>(보물 제951호). 1593년(선조 26년) 임진왜란 와중에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친 선조는 포로가 되어 왜적에 협조하는 백성들에게 한글교서를 내려 “백성들이여! 돌아오라!”고 권했다. 당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이 논쟁에서 드러났듯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이유는 단 한가지였다.

세종이 친히 밝혔듯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서로 통하지 아니했기 때문”이었다.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이를 딱하게 여기어 새로 28자를 만들었으니…”(<세종실록> 1446년 9월29일)

어리석은 백성들을 위한 문자였으므로 쉽게 만들어야 했다. 예조판서 정인지(1396~1478)의 언급처럼 ‘지혜로운 사람은 아침나절이 되기 전에, 어리석은 사람도 열흘이면 배울 수 있는 문자’를 창제했다. 정인지는 “이로써 백성들은 송사에 휘말릴 때 언문 법조항이나 판결문 등을 자세히 보면 그 실정을 알아낼 수 있게 됐다”고 평가했다.
1586년(선조 19년) 무렵 이응태의 부인(원이엄마)이 죽은 남편을 위해 쓴 한글편지. 조선판 ‘사랑과 영혼’의 사연을 담았다. 한글은 이렇게 글 모르는 여인들이 마음속에 간직한 사랑의 마음을 표현한 도구이기도 했다.|안동대박물관 소장


■도둑과 사형수가 창궐한 세종의 치세

세종은 훈민정음 창제를 강행하게 된 계기가 있을까. 세종에게는 늘 ‘해동의 성군’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하지만 세종이 즉위할 무렵(1418년)은 조선이 개국(1392년)한 지 불과 26년이 지난 뒤였다. 어수선했다.

“복역 중인 미결 사형수가 190명에 이르자, 세종은 ‘근래 기근이 겹쳐 도적이 흥행하고 분쟁이 더욱 성하여 사형수가…내가 부끄럽게 여겨 깊이 반성한다’고 말했다.”(<세종실록> 1439년 12월15일)

옥사에 자리가 없을 정도로 사형수가 넘쳐났다는 것이다. 이 뿐이 아니다.

“서울 한복판에서 도둑을 맞는 집이 없는 날이 없고…이제는 내탕고의 금작(金爵)과 봉상시의 은찬(銀瓚)까지도 털리니…. 백성이 원망해서 그 도둑의 고기라도 씹고자 해도 어쩔 줄 모르고…. ”(<세종실록> 1436년)

왕실의 재산을 관리하는 내탕고에서 금으로 만든 술잔(금작)이, 제사를 관장하는 봉상시에서 제기(은찬)까지 잇달아 털렸다는 것이다.

세종은 모두 “과인이 부덕한 탓”이라 했다. 우선 백성들이 법을 너무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조선초에는 중국의 형법, 특히 <대명률>에 따라 법을 집행했는데, 어려운 한문으로 쓰여진 법전을 쉽게 이해하기 어려웠다. 그나마 법을 집행하는 관리들이야 한문을 알고 있으니 법전을 공부하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백성들은 달랐다. 글을 모르니 무엇이 법에 저촉되는지 알 수 없었다. 세종은 1432년(세종 14년) 11월7일 “법전 중에서 대죄를 받는 조항만 뽑아 이두문으로 번역하여 백성들에게 배포하라”는 명을 내린다.

하지만 이두문 역시 백성들에게는 쉽게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정인지가 훈민정음 서문에서 “이두는…모두 글자를 빌려 쓰기 때문에 혹은 간삽(艱澁)하고 혹은 질색(窒塞)하여…그 만분의 일도 통할 수가 없었다”고 토로하지 않았던가. 세종도 최만리의 상소에 “설총의 이두가 백성을 편리하게 한 것이라면 언문(훈민정음) 역시 백성을 편리하게 하려 한 것”이라 반박했다. 세종은 이두문 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다. 일반백성들에게는 이두문도 ‘대략난감’이니 아예 현명한 백성이면 하루,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10일이면 습득할 수 있는 혁명적인 글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창제한 것이 훈민정음이다.

정조(재위 1776~1800)가 원손 시절 외숙모에게 보낸 한글 편지. 한글은 일반백성 뿐 아니라 임금에게도 좋은 소통의 도구였다.|국립한글박물관 소장

■존속살인소식에 낯빛이 변한 세종

훈민정음 창제의 또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 인륜을 범하는 강상죄가 많았다는 것이다.

특히 1428년(세종 10년) 10월3일 경상도 진주에서 일어난 김화의 존속살인은 세종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 날짜 <세종실록>은 “세종이 김화가 아비를 살해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깜짝 놀라 낯빛이 확 변했다”고 기록했다.

“(존속살인 소식에) 세종은 ‘모두 과인의 탓’으로 돌린 뒤 급히 신하들을 소집해놓고는 효제(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의 우의)를 돈독히 하고, 풍속을 후하게 할 방책을 마련하라는 명을 내렸다.”

세종의 명을 받은 집현전은 조선과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각 110명을 선정해서, 글을 모르는 백성을 위해 삽화(그림)을 그리고, 그림 설명과 시(詩)까지 붙인 <삼강행실도>를 제작·반포했다.(1434년 4월27일) 그러나 그림책조차 한계가 있었다. 세종은 그날 교서를 발표하면서 근본적인 한계를 털어놓았다.

“다만 백성들이 문자를 알지 못하니 비록 <삼강행실도>를 나눠준다 해도 남이 가르쳐 주지 아니하면 역시 어찌 그 뜻을 알아서 감동하고 착한 마음을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세종은 백성들이 글자를 깨우치지 않는한 ‘말짱 도루묵’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다. 그랬으니 훈민정음을 창제한 세종이 한껏 고무되어 “내가 만일 언문으로 삼강행실(三綱行實)을 번역하여 민간에 반포하면 어리석은 남녀가 모두 쉽게 깨달아서 충신·효자·열녀가 반드시 무리로 나올 것”(<세종실록> 1444년 2월20일)이라고 기대한 것이다.

■저잣거리에 나붙은 한글벽서

우여곡절 끝에 창제·반포한 훈민정음(한글)의 핵심가치는 바로 ‘소통’이었다.

글을 몰랐던 ‘어리석은’ 백성이라도 아무리 길어도 10일이면 습득할 수 있는 문자였으니 오죽하랴. 따라서 이젠 마음만 먹으면 백성 스스로의 생각과 입장을 글로 쓸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급기야 훈민정음이 반포된지 3년만인 1449년(세종 31년) 10월 5일 기념비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최초의 한글벽서가 저잣거리에 붙은 것이다. <세종실록>을 보자.

“하연을 영의정부사로…삼았다. 하연은 까다롭게 살피고 또 노쇠하여 행사에 착오가 많았으므로, 어떤 사람이 언문(한글)으로 벽 위에 쓰기를, ‘하 정승(河政丞)아, 또 공사(公事)를 망령되게 하지 말라’고 했다.”

이 무슨 벽서인가. 누군가가 73살의 연로한 나이에 영의정부사가 된 하연(1376~1453)을 조롱하는 벽서를 붙였다. 하연과 개인적인 원한 관계를 품은 인물이 붙인 벽서일 수도 있고, 당시 세력을 떨친 하연에 대한 시중의 여론을 반영해서 쓴 벽서일 수도 있다. 어쨌든 “백성들의 억울함을 풀어주기 위해 한글을 창제했다”는 세종의 의도와 부합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은 불과 창제 3년만에 꽉 막힌 백성과 양반, 백성과 임금 간 언로를 조금이나마 풀어주는 가교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이다.

정조가 1795년(정조 19년) 큰 외숙모 여흥 민씨에게 보낸 편지.|국립한글박물관

■시장상인들의 농성과 한글투서

1485년(성종 16년) 7월17일 종로 시장바닥에서 의미심장한 사건이 일어난다. 성종은 몇몇 사람들의 진언을 청취하고 한성부(서울), 그리고 평시서(시전과 도량형, 물가를 관장하던 관청) 등과 의논한 뒤 “시전(시장)을 옮기라”는 명을 내린바 있다. 그러나 종로상인들이 반발했다. 이들은 정부정책에 항의하고, 일부 권세에 빌부터 이권을 챙기는 고관대작과 그 자식들을 탄핵하는 가두농성을 벌인다.

상인들은 길을 가로막고 호조판서 이덕량(1435~1487)과 참판 김승경(1430~1493)에게 “대체 뭐하는 분들이냐. 시장 이전 계획을 철회하라”고 외쳤다. 이 소식을 들은 성종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임금이 멋대로 결정한 것도 아니고 “시장을 옮겨야 편해진다”는 백성들의 요구에 따라 옮기려는 것인데, 이제와서 “‘불편하다. 철회하라’고 외치는 이유가 뭐냐”고 화를 냈다. 그런데 보고를 마치고 돌아간 이덕량이 금세 다시 돌아와 한글로 쓴 투서 2장을 들고 왔다. 누군가 이덕량의 동생 집에 몰래 던진 한글투서였다. 투서는 판서·정승 등 고관대작을 비웃고 헐뜯는 말로 가득했다. 이덕량은 한글투서의 내용을 요약해서 보고했다.

“시장이전은 공도(公道·공평하고 바른 도리)에서 나온 것이 아니랍니다. 판서가 제 자식을 위해, 참판이 뇌물을 받기 위해 이전하려 하는 것이라 합니다.”

투서는 “(신숙주의 아들인) 신정(?~1482)이 탐장(貪贓·부정한 방법으로 재물을 취함)으로 법에 저촉됐고. 영의정 윤필상(1427~1504)은 재물을 증식하다가 홍문관의 논의를 초래했다”는 등 고관대작의 이름까지 적시하며 탄핵했다. 이덕량은 한편으로 호조의 낭청(실무관직)이 시장의 철물전 앞을 지나다가 들었다는 말을 성종에게 그대로 전했다.

“호조 낭청이 철물전 앞을 지나는데 어떤 사람이 ‘철물은 매우 무거워서 옮겨 놓기가 어렵다. 만약 면포 7~8동(同)만 (호조에) 뇌물로 준다면 이전계획은 철회될 것’이라 했답니다.”

이덕량은 이 말을 전하면서 “주무관청의 수장인 신은 이런 오명을 듣고서 마음이 아픔을 견디지 못하겠다”면서 “투서한 자를 잡아 처벌해달라”는 주청을 올렸다.

성종은 이에 맞장구를 치면서 “윗사람을 업신여기는 풍조가 성행하니 이것은 국가의 기강이 무너진 사례”라면서 “언문 익명서를 보낸 자들을 끝까지 색출하라”는 명을 내린다. <성종실록>은 이 한글투서사건으로 의금부에 붙잡힌 사람만 79명에 이른다고 썼다.

■한글투서는 실패로 끝났지만

아마도 세종에 버금가는 성군이라는 성종도 이런 식의 집단적 의사 표현에는 두려움을 느꼈던 것 같다. 성종은 이 사건은 풍화(風化·정치와 교육의 힘으로 풍습을 교화시킴)에 관계되는 일이므로 죄인들을 끝까지 추국하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시장상인들의 가두농성과 한글투서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성종은 “끝까지 범인을 색출하라”는 명을 내렸지만 누구에게 어떤 벌을 내렸는지는 실록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투서에서 탄핵 대상 인사로 지목된 영의정 윤필상은 “시정(市井) 사람들의 입에도 오르내리고 대간(홍문관·사간원)의 논박으로 당했다”면서 사직을 청하기도 했다.(<성종실록> 1485년 7월21일)

하지만 저잣거리 상인들이 정부정책에 반대하고 고관대작의 비위를, 그것도 세종대왕이 ‘어리석은 백성을 위해’ 창제한 한글로 고발한 의미심장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1818년(순조 18년) 서울 본가에 있었던 추사 김정희(1786~1856)가 대구 감영에 있었던 아내 예안 이씨에게 보낸 편지이다. 당시 김정희의 생부 김노경(1766∼1837)이 경상 감사로 대구 감영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김정희 내외는 시부의 봉양을 위해 교대로 대구에 내려가 있었다.|국립중앙박물관 소장

■‘필적을 감정하라’ 연산군의 한글말살정책

그런데 한글은 연산군 시대에 들어 고비를 맞는다. 1504년(연산군 10년) 7월19일 왕비(신씨)의 오라버니이자 연산군의 처남인 신수영(~1506)이 한글 익명서 3장을 연산군에게 보여줬다. 이것이 파국을 불렀다.

언문(한글)로 쓴 익명서에는 “개금·덕금·고온지 등 의녀 3명이 ‘지금 임금은 신하를 파리 머리를 끊듯이 죽이고 있으니 오래 가지 못할 것’이라고 수근댔다”는 등의 끔찍한 내용이 포함돼있었다.

연산군은 이 한글익명서를 접하고는 길길이 뛰었다. 연산군은 현상금으로 내건 배 500필을 의금부 문앞에 매달아놓고 고발을 독려했다.(7월19일) 급기야 이튿날인 7월20일에는 “언문(한글)을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말며, 이미 배운 자도 쓰지 못하게 하며, 모든 언문을 아는 자를 적발하여 고하게 하되, 알고도 고발하지 않는 자는 이웃 사람을 아울러 죄주라”는 명령을 내린다. 심지어 한글과 한자를 아는 모든 백성과 사대부들에게 각각 한글·한자로 4통씩 쓰게 해서 책으로 꾸며 의정부와 사헌부, 승정원, 대내(임금이 거처하는 곳)에 1권씩 보관토록 했다.(7월25일) 이것이야말로 요즘의 필적 및 DNA 채집자료의 축적이라 할 수 있다.

■한글을 쓴 여성요원을 관리로 선발한 연산군

그렇기에 연산군에게 ‘한글 말살자’라고 악명이 붙는다. 그러나 연산군의 한글말살정책은 제한적이었다. 한글을 쓰거나 알고도 고하지 않는 자는 처벌했고, 구결(口訣·한문에 토를 넣어 읽는 한국적 한문독법)을 단 책은 다 불살랐지만 한문을 한글로 번역한 책은 금하지 않았다.(7월22일) 또 1504년(연산군 10년)에는 병조정랑에게 “역서(曆書·책력)를 한글로 번역하라”고 명했으며, 1년 뒤인 1505년(연산군 11년)에는 “새로 지은 악장을 진서(한문)와 한글로 인쇄하라”고 지시한다. 또 1506년(연산군 12년)에는 “공·사노비와 양녀(良女)를 막론하고 한글을 아는 여자를 각 원(院)에서 2명씩 선발하라”는 명까지 내린다. 가부장적인 질서를 중요하게 여기던 조선시대, 한글을 아는 여성들을 선발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조치가 아닐 수 없다.

한글을 대하는 연산군의 이중성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연산군은 비록 자신을 비방하는 한글익명서에 발끈해서 ‘한글사용금지’라는 철퇴를 내리기도 했지만 그것은 홧김에 내린 조치였을 뿐이다. 이미 백성들의 삶에 파고든 한글을 강제로 막을 수 없었다. 임금의 뜻을 백성들에게 쉽고 빠르게 알리기 위해 한글보다 더 좋은 소통로는 없었기 때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소장자 배익기씨가 2015년 불에 탄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일부를 보여주고 있다. 상주본의 주인은 지금 국가(문화재청)로 되어있지만 배씨가 거액의 돈을 요구하며 내놓지않고 있다,

■선조의 한글 담화문, ‘왜놈 품에서 벗어나라’

단적인 예가 임진왜란 중인 1593년(선조 26년) 9월 선조가 내린 한글담화문이다. 당시 민심은 최악이었다. 임금은 평안도 의주로 줄행랑쳤고, 명망대신들은 제 살길을 찾아 뿔뿔이 흩어졌다. 백성들이 어떻게 그런 임금과 조정을 믿고 따를 수 있었겠는가. 백성들 중에는 포로가 되어. 혹은 첩자가 되어 왜적의 길잡이를 자처한 이들도 많았다. 다급해진 선조가 이런 백성들과의 소통을 위해 선택한 것이 바로 ‘한글 담화’였다.

“왜놈들에게 휘둘려 다닌 것이 너희의 본마음이 아닌 것은 과인도 알고 있다.~나라가 너희를 죽일까 두려워 여태껏 나오지 않는구나. 의심하지 말고 서로 권하여 다 나오너라. 나라가 너희를 따로 벌주지 아니할 것이다.”

선조는 그러면서 “왜놈을 데리고 나오거나, 나올 때 왜놈들이 하는 일을 자세히 알아내거나, 붙잡혀 갇힌 조선 백성을 많이 구해 내거나 하는 등의 공이 있으면 평민이든 천민이든 가리지 않고 벼슬도 줄 것”이라고 했다.

실제로 김해성을 지키던 장수 권탁(1544∼1593)은 이 문서를 가지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절체절명의 순간에 임금과 백성이 소통할 수 있었던 도구가 바로 한글이었다.

■마음을 전하는 소통의 도구

한글은 백성과 사대부, 백성과 임금 사이 만의 소통도구였던 것은 아니었다. 1458년(세조 4년) 세조가 계유정난의 공신인 홍윤성(1425~1475)을 무고한 김분의 극형을 결정하려던 차에 “처벌을 감해달라”는 부인(정희왕후)의 한글편지를 받고 ‘유배형’으로 감해주었다. 채홍사를 두고 기녀를 선발했던 1505년(연산군 11년) 중급관리 한곤이 첩 채란선에게 “예쁘게 꾸미지 말라. 예쁘게 꾸미면 뽑힐 것이 틀림 없다…”는 내용의 한글편지를 보낸 것이 발각되어 대역죄로 능지처참의 혹형을 받은 적도 있었다.

한글은 정치에도 활용되었다. 광해군 연간의 권신 이이첨(1560~1623)은 “다른 이들을 모함에 빠뜨리는 가장 음험한 함정은 밀계를 사용했는데, 그 중 가장 은밀한 사항은 언문(한글)로 자세하게 말을 만들어 김상궁(개시)에게 보내 재가를 얻었다”(<광해군일기> 1613년 8월11일)는 기록이 그것이다.

1453년(단종 1년) 4월 14일, 어린 궁녀인 중비와 자금, 가지는 평소 사모했던 소천시 별감인 부귀, 수부이, 함로 등에게 “한번 만나보자”는 내용의 한글 연애편지를 보냈다. 또한 1465년(세조 11년) 9월4일 세조의 후궁이었던 덕중은 임영대군(세종대왕의 4남)의 아들인 귀성군 이준(1441~1479)에게 마음을 빼앗겨 ‘연모한다’는 연애편지를 보냈다가 들통이 났다. 물론 한글 연애 편지 사건의 결말은 비극으로 끝났다. 궁녀와 별감의 3대3 미팅은 6명 모두에게 “함길도와 평안도 관비로 평생 소속한다”는 처벌을 받았다. 그리고 임금(세조)의 여인으로 다른 종친을 사랑한 덕중은 교수형의 극형을 받았다. 1998년 경북 안동의 이응태 무덤에서는 1586년(선조 19년) 아내(원이엄마)가 죽은 남편에게 보내는 애틋한 한글 편지가 발견되기도 했다. 한글은 때로는 비극을 낳기도 했지만 여인의 애끓는 마음을 전해주는 매개체가 되기도 했다. 물론 임금(정조)이나 사대부(추사 김정희·1786~1856) 역시 왕실 및 가문의 여인과 소통하는 도구로 거리낌없이 활용됐다.

■훈민정음의 참뜻

훈민정음은 온갖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1894년(고종 31년) 11월 ‘법률과 칙령은 모두 한글로써 으뜸을 삼되 한문의 번역을 붙이며 혹은 국한문을 혼용할 수 있다’고 공포한 고종의 칙령에 따라 명실상부한 공식문자로 인정받았다. 실로 450여년만의 일이었다. 이후에도 일제강점기를 만나 또한번의 혹독한 시련기를 거쳤으니 훈민정음은 그야말로 지난한 싸움을 극복한 셈이다.

그런 훈민정음이 요즘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러나 개봉된 영화가 역사를 왜곡했다는 등의 논쟁이 벌어지고, 혹은 모처럼 찾아낸 <훈민정음 해례본>의 소장자가 얼토당토 않은 거액의 돈을 요구하는 등 좋은 얘기가 아니고 ‘구설’이라는게 유감이다. 이 즈음에 글을 몰라 법을 어기고 인륜지사도 깨우치지 못했던 백성에게 길어야 10일이면 터득할 수 있는 문자를 안겨준 세종대왕의 마음씨와, 그렇게 터득한 문자로 과감하게 ‘주의 주장’을 내건 백성들의 외침을 다시 더듬어본다. 훈민정음이 임금과 백성을 이어준 소통의 가교였음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참고자료>

김흥식, <한글전쟁-우리말 우리글 5천년 쟁투사>, 서해문집, 2014

김슬옹, <조선시대의 훈민정음 발달사>, 역락, 2012

KBS, <천상의 컬렉션-훈민정음 해례본>, 2018

선임 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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