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inion] 그리고 그곳에 해적들이 있었다 - 해적이야기 둘 [공연예술]

뮤지컬 <해적>
글 입력 2019.05.17 0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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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 관련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03. 앤




당신들의 신은 내가 태어났을 때 축복해주지 않았다.

당신들의 교회는 사생아의 이름을 기록해주지 않았다.

당신들의 신은 나의 서툰 기도를 허락해주지 않았다.

당신들의 교회는 사생아의 이름을 혼인서약에만 기록해준다고 했다.

(...)

당신들의 신은 나의 항해시대에 초대받지 않았으니

내가 죽는 그 날에 초대받지 못하리라.

당신들의 교회는 이미 무너졌으니

사생아가 지어 올린 그 신전을 질투하라.

물속에서 솟아오른 나의 신을 질투하라.



루이스는 아버지를 따라, 잭은 보물을 찾기 위해 배에 탔다. 이들과 달리 자신의 존재를 위해 배에 올라탄 여성이 있다. 앤은 동경보다는 자신이 진정으로 숨 쉴 수 있는 곳으로 탈출하기 위해 바다를 택했다. 사생아라는 출신, 이익관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결혼, 술집 주인 생활과 같은 현실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곳은 바다였고, 앤은 잭과의 내기를 통해 바다에 타게 된다.


물론 바다에서의 생활도 마냥 순탄치는 않다. 배에는 아이와 여자를 태우지 않는다는 규칙이 있었다. 쓸데없는 규칙이지만, 앤은 그에 따를 수밖에 없기에 자신의 이름을 ‘앤소니’로 바꾸고 배에 올라타게 된다. 부잣집 딸로 태어났지만 사생아고, 오빠들 사이에 끼어 다섯 살 때부터 사격 수업을 받았다. 한 문장 안에서도 그의 인생이 평탄하지 않았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사생아로 태어났기에 교회와 사회는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았다. 자신이 세상에 존재했다는 흔적을 혼인서약에라도 남기기 위해 결혼까지 했을 만큼 자신의 존재를 외치고 싶었기에, 앤은 역설적으로 교회와 사회에서 벗어나 해적선에 탔다. 그리고 자기 자신의 법과 질서 안에 자신의 이름을 세우기로 한다. 육지에서는 자신을 인정해주는 신을 만날 수 없기에 포세이돈의 품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기로 한 것이다.




04. 메리




내가 누구인지 몰랐을 때 바다가 보였어.

그 순간 나는 떠나간다 저 바다 넘어.

내가 누구인지 몰랐을 때 단검을 얻었어.

그 순간 나는 승리한다 이 세상 넘어.

(...)

이 칼날이 내 손 안에서 나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자기 자신의 존재를 위해 배에 올라탄 또 다른 여성이 존재한다.


‘앤’이 ‘앤소니’로 배에 탑승한 것처럼, ‘메리’는 ‘마르코’로 살아왔다. 부잣집에서 태어난 앤과는 달리 메리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유산 때문에 죽은 오빠의 낡은 옷을 메리에게 입혔다. 메리는 그때부터 ‘메리’가 아닌 ‘마르코’로서 살아왔다. 그는 유령이 되기 싫어 무작정 탈출해 바다로 왔다. 마르코로 살아가면서 메리로서의 자신이 점점 사라지고, 죽은 오빠의 옷이 익숙해지는 것이 무서워 바다로 탈출한 그는 단검을 손에 쥐게 되고, 해적이 되었다.


앤과 메리는 처음에 서로 다른 해적선에서 만나 싸우다 한눈에 반한다. ‘반한다’는 것이 단순 성애적인 사랑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둘 다 여성으로서의 성별을 숨기고 배에 올라탔고, 각자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서로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에 둘은 서로에게 끌리게 되고, 적군에서 아군이 되어 함께 보물섬으로 떠나간다.



늦었어. 죽으려면 아까 죽었어야지.

내가 이 노래를 부르기 전에 죽으려면 그때 죽었어야지.

너 이제 죽을 수 없어 내가 가만 안 둬 마르코 난 너의 포로니까.

싸움은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는데

누구에게도 두 손 들고 항복한 적이 없는데

앤소니 내가 졌어. 인정.

이름은?

마, 마리아.

마리아.

너는?

앤. 그냥 앤.

앤. 그냥 앤. 이름이 맘에 들어.

감사.

총 잡은 손이 맘에 들어.

매우 감사.


 

뮤지컬 <해적>은 기본적으로 루이스의 성장 이야기이다. 유서를 쓰려고 하던 17살 아이가 해적선을 타고,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고, 그를 이어 항해일지를 완성한다. 루이스와 함께 모험을 떠난 잭, 앤, 메리도 그와 함께 성장한다.


그리고 성장 이야기이면서 동시에 소수자들의 연대를 그리고 있기도 하다. 인물들은 ‘기준’에서 벗어난 비주류들이며 사회적으로 약자의 입장에 서 있는 소수자들이다. 아이인 루이스, 싸움을 싫어해 ‘해적답지 않은 해적’의 모습인 잭, 여성이면서 동시에 성 소수자인 앤과 메리. (서로에게 반할 뿐만 아니라 특별 공연에서는 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이 등장하기도 한다.) 루이스의 아버지 역시 싸움을 싫어한 겁쟁이 해적이었고, 늙은 선장 하워드는 노인에 속하고, 장애인에 속하는 ‘외다리’ 역시 (적군이지만) 해적선에 타고 있었다.


육지에서도 쫓겨나고 바다에서도 길을 잃은 사람들은 하나둘씩 해적선에 탔다. 육지에서, 사회와 법과 질서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이지만 바다에서는 밀려난 소수자들이 서로 연대하고 각자의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뭔가 모자라고 슬픈 사람들이지만, 완벽하지 못한 사람들이 이루는 화음이 때로는 더 아름답게 들릴 수도 있는 법이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불완전이 또 다른 불완전을 도와줄 수 있기에 우리의 해적들은 서로가 서로를 품을 수 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존재한다. 이 극은 성별 구분 없이 캐스팅이 이루어져 화제가 되었다. 루이스/앤, 잭/메리를 여성 배우가 연기하기도, 남성 배우가 연기하기도 하는 것이다. 하지만 남성 배우가 둘, 여성 배우가 하나로, 여성 배우의 비율이 더 적다.


앤과 메리는 남성으로 분하여 살아가는 여성으로 존재하였기에 서로를 더 이해할 수 있다. 메리는 ‘평생 오빠(남성)로 살아온 여성’ 캐릭터인데, 남성 배우가 연기하는 것은 소수자의 목소리를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내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또한 앤, 메리 서사는 루이스, 잭의 서사보다 적다. 물론 작품의 서술자이자 주인공이 루이스여서 상대적으로 둘의 서사가 드러났겠지만, 앤과 메리 역시 중요한 메시지를 전달해주는 인물이기에 서사가 더 보완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작가가 쓴 다른 작품에서도 그랬지만, 사실 이 극의 서사가 매끄럽게 기승전결이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다고 보기에는 어렵다. 삐걱거리는 이들의 항해처럼 가끔은 끊어지고, 승-결이 탄탄하게 갖추어져 있지도 않고, 장면 사이가 매끄럽게 이어지지도 않는다.


그러나 이들의 이야기가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그 서사 사이를 채워 넣을 수 있는 충분한 이야기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단편적인 이야기만 제공한 채 찝찝하게 끝나는 이야기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해 비어있는 서사를 채울 수 있게 만드는 이야기는 다르다. 이 작품은 다행히도 후자에 속하고, 관객들은 인물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며 사이사이의 빈 서사를 자신의 상상으로 채워 넣을 수 있다. 루이스의 항해일지처럼, 보이는 것을 먼저 채우고, 그다음에 우리의 이야기를 차곡차곡.




 

아버지는 평생 바다 냄새를 풍겼고, 칼리코 잭은 문을 열어 루이스를 찾아왔고, 앤 보니는 규칙을 깼고, 포세이돈 메리는 유령선을 탔다. 루이스는 항해일지를 썼다. 단순 소문과 악담이 아닌, 있는 그대로 쓰인 ‘진짜 목격자’의 항해일지.


어쩌면 이들에게 보물을 찾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육지에서, 사회에서 밀려나는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서로 연대해야 했고, 함께 있어 줄 동료가 필요했다. 이들의 항해는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어찌 보면 현실적인 결말이기도 하다. 결국 이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기록해준 것은 국가도, 교회도 아닌 ‘소설을 쓰려고 학교를 그만둔’ 루이스였다.


소수자의 이야기를 기록해주는 또 다른 소수자. 저 바다만큼이나 낭만적이어서 자꾸 눈물이 나왔다.




김효경.jpg


[김효경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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