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도겸 칼럼] 차(茶)는 귀한 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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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4.11.03. 오후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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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뉴시스】 하도겸 박사의 ‘문화예술 산책’ <22>

차는 애인과 같다. 해괴해서, 넣으면서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한다. 보고 싶어도 자주 보면 안 된다. 그렇게 일정 시간이 흘러 다시 뚜껑을 열었을 때 보이차는 어김없이 전혀 다른, 멋지고 매력적인 참된 모습을 보여준다. 재회하는 그때 나 자신은 어떤 모습을 해야 할까? 다시 만나는 날까지 나도 바꾸고 고쳐서 더 맑고 밝은 사람이 돼야 할 것이다. 그래야 한껏 보이차답게 알맞게 변한 애인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애인보다 더 멋있게 변화한 나를 생각한다면 차는 애인인 네가 아니라 바로 ‘우리’가 돼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어느 순간 하나 된 ‘나’가 되어 있을 것이다. 기나긴 인생을 같이 가는 동반자로서 도반처럼 보이차는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면서 내게 나를 알려준다. 내 마음을 알려준다.

차를 우려낸 지 오래된 사람도 차 맛이 몸 상태에 따라 쓰고 떫어서 못 먹는 날도 있다. 매너리즘에 빠져 너무 익숙해 하다 보면 초심을 잃게 되기도 한다. 괜한 감각이나 느낌에 충실하게 돼 그런 일이 종종 벌어지기도 한다. 부처님 말씀처럼 감각(육근의 경계)을 넘어서 그것을 여의고 다시 초심으로 돌아가 차와 자신의 품성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한다. 차를 마시면 방광이 깨끗해지고 신장이 좋아지고 눈이 맑아진다. 그래서 중풍에 걸릴 위험이 매우 줄지만, 뒷골이 당겨 아픈 날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내가 욕심을 부리고 애착을 쌓고 불만불평을 하면서 스트레스를 받으면 내가 모르는 나에 대해서 채움과 비움의 차(레)는 말해준다. 이제 그만 놓아주라고.

함께 우리나라에 들여와 몇 년이 지나면 같은 차종인 경우에도, 부산에서 마시는 차와 서울에서 마시는 차 맛이 다르다고 한다. 지유명차 부산점의 최병기 대표는 심지어 부산점과 해운대점에서 보관한 같은 차마저도 맛이 다르다고 하니 참으로 땅과 그 환경과 교류하는 신비한 영물이 아닐 수 없다. 크고 둥근 떡처럼 생긴 생차라는 뜻의 청병 가운데 맛이 좋은 지유명차 중에 차 맛의 표준이라고 하는 ‘97난창강대청전’이 있다. 1996년에 거둬들인 찻잎으로 만든 이 차는 지유명차가 차를 고르는 기준이 될 정도로 차품이 참으로 좋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도 4년이 된 이 차가 부산으로 오면서 부드러운 맛이 더 강해졌다고 한다.

보이차의 맛은 보관한 장소와 깊은 상관이 있다. 기후가 서울보다 따뜻한 부산에 안정되다가 갑자기 올봄에 들어오면서부터 맛이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차의 변화가 서울보다는 더 잘 익는 편이라서 그런 것 같다. 찻잎이 따지는 순간 자기의 본성을 숨기고 있다가 결국 부산까지 와서 긴 시간에 걸친 믿음과 사랑 속에서 보이차는 자신다운 맛과 멋을 색깔과 맛 향으로 드러낸다. 작년까지 마시면 부대끼던 ‘97난창강’이 부산에 와서 갑자기 부드러워진 것은 왜일까? ‘차품인품덕(茶品人品德)’이란 말이 있다. 차의 품격도 보관하는 사람의 품격도 모두 덕스러워야 한다.

보이차를 우리며 손님을 대하고 있으면 마음이 한없이 느긋해진다는 최 대표는 차를 우리면서 같이 마시는 즐거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보이차 판매장의 위치에 대해 부산점의 위치를 처음 고를 때 대로변보다는 이면도로 쪽을 더 눈여겨봤다. 근처에 술집이 없었으면 하는 점을 고려했다. 자동차 소음과 매연의 영향을 받지 않게 사람과 차 모두에게 좋은 환경을 찾은 것이다. 저절로 고요한 휴(休)의 공간, 복닥대지 않고 편안하게 있을 수 있는 곳으로 차의 마음을 배우며 잡생각을 떨쳐주는 공간을 연출한다. 50평 규모로 판소리, 남조고악(고려와 교류) 등의 음악 공연도 자주 하는 이곳에 얼마 전에는 얼후(중국 현악기) 공연도 했다. 차를 마시는 게 아니라 차가 돼 차의 말을 알게 되고 차에게도 음악을 선사하며 차와 진정한 사랑을 나누는 ‘물아일체’의 경지를 추구한다.

벌써 30대가 된 두 아들의 아버지인 최 대표는 스스로 ‘독재자’라고 한다. 보이차에 관한 신념이 대단하기에 독재자처럼 가족들에게 권하기까지 한다. 그러한 점은 큰 며느리에게까지 뻗쳐 결혼하자마자 좋은 보이차를 많이 마실 수 있게 강권하다시피 했다고 한다. 임신 전부터 마신 덕분인지 손녀가 태어나서 돌이 지날 때까지 감기 한 번 안 걸리고 병원 한번 안 갔다. 생후 13개월인 손녀도 부모와 같은 ‘강성숙전·맹송숙전·04대엽숙병’등 비교적 젊은 숙차를 좀 연하게 타서 먹인다. 반생반숙을 주면 가끔 기분 좋아한다는 이 아기는 매우 건강한 모습으로 자라갈 것이라고 손녀 자랑에 여념이 없다.

좋은 보이차는 안 팔고 몇 년 묵히면 큰돈이 될 수 있다. 짚신 장사가 오히려 헌신 신는다는 속담이 있다. 차를 파는 사람들은 좋은 물건은 고객에게 먼저 드리고 쉽게 구할 수 있는 저렴한 것은 내가 먹는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돈을 생각하면 적어도 차 장사를 해서는 안 된다. 차는 그런 물건이 아니라 내 마음의 도반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마진이라는 개념으로 회사가 운영된다. 좋은 차를 다루고 마시면서 그냥 먹고 살만한 인건비 개념으로 한 번 장사를 해보자고 출발한 게 지유명차의 운영방침이라고 한다. 원가 등에 인건비만 붙여서 소비자 가격을 책정하고 그것으로 우리가 밥 먹고 살 수 있는지를 시험해 본 것이다.

본사와의 관계 역시 연대 의식이 강한 도반들끼리 모였기 때문에 일반 가맹점 형식의 관계는 아니다. 그래서인지 가맹비도 없고 다른 가맹점에서처럼 본사에 내는 특별한 비용이 없다고 한다. 그냥 찾아오는 고객을 ‘일기일회’의 정신으로 친절하고 편하게 하다 보니 밥은 안 굶고 안 망한 것 같다고 그간의 장사 소회를 얘기한다. 차가 좋고, 차를 아끼는 인연들이 오니 그냥 박리다매로 가자는 주의가 신뢰를 얻고 있다. 보이차는 커피와 같은 기호식품이 아니라 생활 음료다. 생산자와 유통판매자 그리고 소비자 모두 기뻐야 하는 삼희(三喜) 식품이다. 착한 가격에 고객에게 드려야 양심적으로 찜찜하거나 거리낄 게 없다. 그렇게 몇 년간 거품이 없는 가격으로 손님들에게 신뢰를 얻어냈나 보다.

가격을 떠나 제대로 된 제법에 따라 만들어진 차에 깊이 감사한다. 차를 다루면서 만나는 사람들은 정말 좋은 사람들뿐이었다. 인간으로 살고 있다는 게 행복이라는 걸 알려준 게 바로 차가 아닌가 싶다. 환갑을 넘은 나이지만, 힘닿는 데까지는 장사를 계속하고 싶다는 최 대표는 회사에 다니는 장남이 함께 포차사로서 같이 일했으면 좋겠다고 희망한다. 최초의 부자간 대를 잇는 점장, 아니 손녀까지 3대를 잇는 지점이 탄생하는 것까지도 꿈꾼다. 그래서 비움과 채움의 차를 우리고 나누는 한국차문화협동조합의 차예사(茶睿士)과정이 계속 만원이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나 보다.

* 이 글은 미디어붓다(www.mediabuddha.net)에 연재 중인 ‘우리문화이야기 6’을 수정 보완했다. 이 글은 칼럼니스트의 의견을 지면에 옮긴 것에 불과하며 다른 의견이 충분히 가능하다.

dogyeom.h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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