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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든 인디 컬렉션, 이장혁의 겨울 칼바람을 이겨내는 인동초 같은 음악 (part2)

(part1에서 이어옴) 인디음악계의 ‘이본좌’란 애칭으로 통했던 이장혁은 자의식이 강한 뮤지션이다. 자신의 노래에 대한 대중의 반응에 무관심한 그에게서 인기와 트렌드에 민감한 일반적인 대중가수의 모습을 찾아내기는 불가능하다. 이장혁은 자신이 창작한 노래와 사운드에 대한 자기만족 여부가 가장 중요한 ‘별에서 온 그대’ 같은 흥미로운 뮤지션이다.

이장혁에게 ‘영등포’라는 공간의 의미는 각별하다. 대학진학을 무의미하게 생각했던 그는 고등학교 졸업 후,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에서 세차 아르바이트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에게 손을 벌리기 싫어 영등포역 화장실 청소, 건설현장 노가다 등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첫 사회생활이 시작된 영등포에 대한 애증의 흔적은 그의 초기 노래들 곳곳에서 발견된다. 특히 영등포역과 그 주변은 음악적 영감을 안겨준 공간인 동시에 밑바닥 인간군상의 온갖 칙칙한 삶의 풍경을 경험시킨 공간이다. 그곳에서 이장혁은 10살 이상 연상이었던 30대 ‘천사 누나’와의 잘못된 첫사랑으로 정신적 고통을 겪기도 했다.


인터뷰를 앞두고 “영등포역에서 피쳐사진을 꼭 촬영하고 싶다”는 잔혹제안(?)을 했다. 혹 그에게 그곳은 트라우마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20년 세월의 나이테는 칙칙하고 어두운 공간에 대한 기억과 혐오감으로부터 극복하기에 충분한 시간으로 여겨졌다. 예상대로 이장혁은 쿨하게 영등포 지역에서의 촬영을 허락했다. 헌데 그의 데뷔초기 음악을 지배하고 있는 시공간인 영등포역 주변 사진촬영이 이번이 처음이라는 사실에 살짝 놀랬다. 지금은 지하철과 국철로 구분되어 복잡하기 그지없는, 매일같이 바닥 청소를 했다는 영등포역 로비 중앙에 마흔을 넘긴 이장혁이 찾아와 멈춰 섰다.


이장혁 정규 1집에 녹아있는 공간인 영등포역과 그 주변의 쪽방촌, 영등포역에서 신길동으로 넘어가는 구름다리 육교, 그리고 그가 성장하면서 운명적으로 음악과 처음 만났던 동작구 상도동 성대시장과 상도초등학교를 함께 돌아보았다. 살짝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 본 추억여행은 참혹한 여정이 되었다. 영등포역은 이장혁이 일했던 당시와는 달리 깔끔하게 정돈되고 화려하게 변해 있었지만 그의 기억을 되살리게 만드는 옛 공간들이 흔적이 파편처럼 지금도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현재 영등포역은 이장혁이 근무했던 과거의 흔적을 찾기 힘들 정도로 화려하게 변화한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주변과 뒷골목은 과거보다 더 암울한 풍경을 보여주고 있었다. 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봉사단체에서 제공하는 공짜 점심을 얻어먹으려고 길게 늘어선 노숙자들의 장사진은 IMF때 연출된 진풍경의 업그레이드 버전 같았다. 여전히 존재하는 쪽방 촌의 우울한 공기가 기분을 다운시켰다. 이장혁의 노래에 담겨있는 우울함, 절망, 분노의 실체는 딴 나라 이야기나 과거가 아닌 지금도 내 옆에서 뻐젓하게 존재하는 우리 시대의 슬픈 자화상임을 직접 경험한 셈이다.

장혁(오른쪽), 정훈 형제

이장혁은 서울 마포구에서 양복점 경일라사를 운영했던 이방우 씨와 가정주부인 신판조 씨 사이에 2남 중 장남으로 1972년 11월 29일에 태어났다. 그의 형제는 인디 씬에서는 유명인사로 통한다. 4살 터울의 동생 이정훈은 몽고 악기 마두금을 연주하는 록밴드 한음파의 리드보컬이다. 이장혁은 세 살 때 서울 영등포구(지금은 동작구) 상도3동으로 이사해 청소년기를 보내며 성장했다. 아버지는 양복점 재단실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위해 카세트로 음악을 틀어 놓았다. “저희 두 형제는 어린 시절에 언제나 아버지 사무실에서 흘러나왔던 노래를 들으며 성장했습니다. 그 중 만화영화주제가 짱가, 로봇태권브이, 황금날개123 같은 노래들은 외우고 다녔을 정도로 많이 들었고 좋아했습니다.”(이장혁)


만화 그리기를 좋아해 처음으로 만화영화 감독이 되고픈 꿈을 가졌던 이장혁은 상도초등학교에 진학하면서 라디오에서 듣고 마음에 들었던 김만준의 ‘모모는 철부지’, 이태원의 ‘솔개’, 송창식의 포크송을 하모니카를 부르고 다니길 좋아했다. “경남 거창에 있는 외가 집을 가면 막내이모가 보던 가요노래책이 있어 번안곡이나 팝송을 한글로 적어 부르는 게 재미있었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어머니 때문에 동네학원에서 피아노를 치기 시작했지만 당시에는 음악에 관심이 많지는 않았습니다.”(이장혁)

초등학교 5학년이 되자 학교친구들 사이에서 팝송을 한글로 적어 부르는 놀이가 유행했다. “당시 인기가 많았던 듀란듀란, 컬쳐클럽, 마이클잭슨의 히트 팝송들을 발음되는 대로 한글로 적어 친구들이 경쟁하듯 불렀습니다. 교실에서 담임선생님도 가끔씩 노래를 시켰는데 저는 교과서에 나오는 동요를 불렀습니다. 아마 그때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제 목소리가 잘 나오는 것 같아 노래를 잘 불렀다는 생각을 처음 했던 것 같아요.”(이장혁) 이장혁은 야구를 좋아하기 전까지 장래 희망을 물으면 만화영화 감독이라 말했다. “그땐 만화영화 감독이 그림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는 걸 잘 몰랐죠.(웃음)”(이장혁)


야구를 좋아했던 이장혁은 피아노학원을 그만두고 동네 뒤에 위치한 ‘국사봉’에 올라가 학교친구들과 야구를 하면서 또 꿈을 꿨다. “강남중에 들어갔는데 마침 반 짝꿍이 야구부 선수였어요. 서로 캐치볼을 받았는데 차원이 다르더군요. 슬프게도 그때 야구선수가 되고 싶은 꿈을 또 버렸습니다.”(이장혁) 어릴 때부터 아버지 양복점에서 원단 샘플 뒤에 부착된 종이에 그림을 그렸던 이장혁은 중1때 교내 사생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는 재능 보였다. “미술도 1등을 하고 나니 이상하게도 재미가 없어 그리기가 싫어지더군요.”(이장혁)

1986년 여름, 강원도 인제군 현리로 떠난 교회수련회에서 선배들이 기타를 연주하며 들려준 노고지리의 ‘찻잔’은 처음으로 기타를 치고 싶은 강력한 감흥은 안겼다. 중2때 집에서 함께 잠을 잤던 아버지가 아침에 돌연사 상태로 발견되면서 사춘기에 접어든 그는 극심한 정신적 혼란기를 겪었다. “삶의 구심점을 잃어버린 거죠. 저는 꿈과 현실이 헷갈릴 정도로 자주 꿈을 꿉니다. 가끔 꿈에 아버지가 등장하는데 돌아가신 게 아니라 멀리 가셨다가 돌아온 것 같은데 아버지 모습이 산사람이 아닌 좀비 같으신 꿈을 꾸고 나면 육체적으로 너무 힘이 듭니다.”(이장혁) 아버지가 세상을 뜬 직후, 같은 동네로 이사를 하면서 집에 전축이 생겼다. “그때 처음으로 레드 제플린 4집 음반을 구입했습니다.”(이장혁)


결핍과 자유라는 자의식으로 몸살을 앓기 시작하면서 음악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기타를 연상하며 매직으로 여섯 줄을 그은 50cm 자를 잡고 코드 연습을 했다. 노래를 만들고 싶어 기타가 있던 성대시장 중심 상가 2층에 세 들었던 개척교회에 몰래 들어갔다. 불을 켤 수 없어 달빛이 들어오는 창문 옆에서 제목도 없는 노래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유치한 클래식 연주곡 같았지만 노래를 만들 수 있겠다는 생각에 기타를 열심히 쳤던 기억이 납니다.”(이장혁) 중3 때, 기타를 잘 쳤던 같은 반 친구 황구화에게 자극받아 엄마를 졸라 5만원짜리 세고비아 클래식 구입했다. 이 시기에 이장혁은 산울림을 비롯해 들국화, 시인과 촌장, 신촌블루스, 어떤 날 등 동아기획 뮤지션들의 창작음악에 빠져 들기 시작했다.(part3로 계속)

글, 사진. 최규성 대중문화평론가 oopldh@naver.com
사진제공. 이장혁
편집. 권석정 moribe@tenasi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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