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17일 김기식씨와의 만남은 인터뷰라기보다 대화에 가까웠다. 준비해간 질문지는 헝클어졌고 얘기는 한국사회, 그리고 진보 진영의 ‘10년 후’로 수렴됐다. 3개월 뒤 지방선거도, 2012년 총선·대선도 그에겐 상수가 못 됐다.

그의 공식 직함은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하지만 아직도 ‘김 처장’이다. 박원순씨가 수많은 조직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도 영원한 ‘박변’(박원순 변호사)이듯, 사람들은 그를 김 처장이라 불렀다. 그의 참여연대 사무처장 임기는 2007년으로 끝났다. 그리고 그해 겨울, 한국을 떠났다. 기자가 그를 마지막으로 본 건 2007년 11월 말, 서울 동숭동 대학로의 한 주점에서였다. ‘김기식 환송회’랄 수 있는 자리였다. 이름을 대면 알 만한 시민단체 허리급 인사들이 모여 소주잔을 주고받았다.

그때 그는 정치권의 러브콜을 받는 한 선배 활동가에게 “이번에는 그 흐름을 끊어달라”고 부탁했다. 자신 역시 찾는 데가 많았다. 한 대선주자 캠프에서는 그를 모시기 위해 ‘12고초려’를 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관심은 딴 데 있었다. “대선 뒤 새로운 모색을 위한 최소한의 명분과 사람은 남겨야 하지 않겠나.” 집으로 돌아가는 택시 안에서도 그는 중얼거렸다. ‘무엇을 할까. 무엇을 해야 할까.’

그리고 2년이 흐른 뒤, 싫다는 그를 설득해 인터뷰 지면에 등장시킨 것은 그때 그 질문의 답을 구했는지 궁금해서다. 김기식씨는 ‘활동가 386’의 대표주자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로, 시민운동 1세대인 박원순·최열의 뒤를 잇는 차세대 리더로 꼽힌다.

김기식(45). 1986년 구국학생연맹사건으로 구속, 1987년 6월 항쟁 무렵 집시법으로 다시 구속. 5년 동안 인천에서 노동운동. 1993년 ‘참여민주주의를 위한 사회인 연합’을 거쳐 1994년 박원순·조희연과 함께 참여연대 창립.
그가 참여연대와 함께한 세월은 17년. 1993년 준비모임부터 시작해 스물여덟 살 때 창립(1994년), 서른네 살 때 낙선운동(2000년) 그리고 서른여섯 살 사무처장까지, 그의 말마따나 “젊다 못해 어린 나이에 세상 겁 없이 살았다”고 표현할 만했다. 그리고 마흔세 살이 되어 “이제까지 옳다고 생각한 모든 것을 회의해보겠다”라며 홀연히 미국으로 떠났다. 스탠퍼드 대학 동아시아태평양 연구소 객원연구원 자격으로 머물다가 올 1월 귀국했다. 지금은 ‘조용히’ 지낸다.

지방선거를 앞두고 시민사회는 5개 야당과 4개 시민단체로 구성된 연석회의(‘5+4’)에서 정치권의 후보단일화·정책연합의 중재 구실을 하고 있지만, 그는 그 테이블 ‘밖’에 서 있다. 자신의 모든 공식적인 활동을 6월 지방선거 뒤로 미뤘다.

“2년 동안 떠나 있었던 처지에서 작년 하반기부터 시작된 흐름을 존중한다. 수많은 사람이 노를 저어 여기까지 왔는데 옳고 그른 게 있다 하더라도 배가 산으로 가면 안 되지 않나. 지난 2년의 흐름에서 보면 불가피하고 필연적인 귀결이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진보·개혁 진영의 반이명박 선거연합에 대한 그의 평가다. 단어 선택에 신중했지만 ‘최선’이 아니라는 생각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지난 대선 때 이런 생각이었다. “양자 구도만 되면 유권자가 찍어줄 거라는 생각은 오만한 발상이다. 더군다나 승리할 수도 없다.” 그런데 지금은 달리 말한다. “최선을 생각하지만 늘 차선을 선택할 용의가 있고,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이다. 그건 합리적인 선택이다.”

뭐가 달라진 것일까? 그의 설명은 간명했다. “지난 대선은 진보가 집권 여당이었지만 지금은 보수가 집권당이다.” ‘심판론’이 통할 수 있는 환경이란 얘기다. 지난 대선에서 보수 세력이 썼던 방식이다. “선거는 기존의 권력을 잡은 쪽에 대한 심판과 미래 비전에 대한 선택, 두 가지 동력으로 돌아간다. 지금은 비전 동력은 미약하지만 심판 동력은 존재하다. 진보·개혁 진영의 선거연합론이 비현실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가 강조하고 싶은 건 대동단결보다는 비전 쪽이었다. “지금은 새로운 비전을 내놓은 게 아니라 각자가 가진 정책의 공통분모를 현실적 수준에서 조율하고, 약간 이견이 있는 부분은 정치적으로 두루뭉술하게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런 점에서 ‘무상급식’ 의제는 의미가 크다. 이명박 반대, 4대강 반대, 부자감세 반대 등 모두 부정적인 의제인 반면 무상급식은 진보 세력의 세계관·철학을 반영하고 있어 보수와의 대립구도를 명확히 하면서 국민 지지를 얻을 수 있는 상징적인 사례다.”

인터뷰 내내 그의 입에서 빈발했던 표현은 “혁신과 통합의 조화와 균형”이었다. “통합 없는 혁신도 현실 대안이 못 되지만, 혁신 없는 통합은 지속되기 어렵다. 대선과 총선 두 번의 연이은 패배에서 국민의 메시지는 진보·개혁 세력의 혁신이었다.”

ⓒ참여연대 제공2000년 삼성SDS 주주총회장에서 삼성의 경영권 세습을 비판하는 김기식씨(왼쪽 두 번째).
2008년 6월 초, 촛불시위가 정점에 달했을 때 그는 후배들에게 ‘우려’의 이메일을 보냈다. 촛불을 ‘신화화’하는 분위기가 읽혔고, 총선 패배 두 달 만에 찾아온 촛불은 진보 진영의 새로운 모색과 혁신의 추동력을 약하게 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다. “반이명박 연합론의 현실적 필요성이나 국민적 요구를 이해하고 인정한다. 그러나 네거티브 전선은 우리 미래를 담보하지 못한다. 불가피하게 혁신과 새로움을 억압하는 담론적 효과를 낸다. 지난 대선에서 500만 표 참패는 분열의 결과가 아니다. 콘텐츠의 한계가 확인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혁신적인 콘텐츠를 만들고, 그에 걸맞은 세력을 재편하고 결집해내야 국민의 신뢰를 다시 얻을 수 있다. 내용 혁신이 우선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반이명박’이 이번 지방선거에서 통하는 이유

진보 진영 일부에서는 이런 비판도 나온다. 만날 ‘경쟁력 위해 센 놈 밀어주자’는 이명박과 ‘이기기 위해 센 놈 내보내자’는 야권의 논리는 다를 게 없지 않나. “반이명박 전선으로 보수 정권을 심판해야 한다는 것에 진보 정당도 동의한 것 아닌가. 그 흐름이 이어지고 있는 것인데 지금 와서 딴소리를 하면…. 단지 민주당 문제가 아니다. 지난 대선, 총선은 진보·개혁세력의 패배였다. 민주당을 비판한다고 진보 정당의 문제가 감춰지는 게 아니다. 연합론의 문제를 극복할 수 없는 진보 정당의 한계가 무엇인지 되짚어야 한다.

물론 연합론은 기존 질서를 강화하고 혁신을 억제하는 효과가 있다. 야당의 분열을 고착시키고, 각 당의 기득권 그리고 각 당 내부 정파들의 기득권을 강화한다. 그럼에도 반이명박 전선의 심판론이 유의미한 것은, 저쪽(보수)의 문제로 인해 이쪽(진보)이 가진 심판의 동력은 커졌고, 그 결과 지방선거에서 일정한 승리를 거두면 집권세력을 견제하는 힘이 생기니까….”

그렇다면 2012년에도 이런 구도가 유효할까? 그건 아니라고 말했다. 단호했다. “반이명박 구도는 이명박 개인이나 보수 내 특정 정파(친이계)의 문제로 귀착될 수 있다. 반이명박 전선은 박근혜라는 보수 내 다른 대안으로 투영될 수 있다. 보수에 대한 심판으로 가야 한다. 아직까지 한국사회에서 합리적 보수는 정치적 실체로 존재하지 않는다. 이명박이라는 특정인이 아닌, 한국 보수의 실체를 드러내고 국민이 판단하도록 해야 한다. 보수와 다른 비전과 담론을 내놔야 한다. 국민들이 진보에게 다시 정권을 주고 싶은 마음이 생기려면 혁신은 필수다. 진보의 정체성을 담는 정책뿐만 아니라 행태·인물·조직·사고·정서 모든 면에서 혁신이 필요하다.” 

화제를 시민사회로 돌렸다. 정당과 시민사회가 선거연대를 위해 이번처럼 전국 단위의 협상을 벌인 경우는 처음이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부동산중개업’이라는 비아냥도 나온다. 시민단체가 정치협상장의 거간꾼 노릇을 하고 있다는 비판이다. 시민사회 내부의 고민은 적잖다. 불가피성을 인정하면서도 지방선거 뒤가 걱정이다. 남는 자산은 무엇이며, 또 중립성의 훼손은 어쩔 텐가. 그는 ‘독립성’의 개념을 들어 반박했다.

“시민운동이 비정치적이어야 한다는 담론은 이미 깨졌다. 시민단체가 정치를 바꿔내는 과정에 국민 의사를 반영하려는 노력은 당연하다. 시민단체들은 자신의 비전과 노선에 따라 정치적 입장을 가질 수 있다. 다만 시민단체가 특정 정당에 종속변수로 편입되는 게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 독립성의 핵심이다. 참여와 영향은 다르다. 정치 과정에 영향을 미치는 것과 정당에 뛰어들어 직접 정당인으로 뛰는 것은 다른 문제다. 또 지금은 낙선운동 때처럼 단체들이 결합하고 있는 게 아니다. 개인 자격으로 시민사회 인사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성을 부여하지 않았고 그분들 역시 자임하지 않는다.”

시민단체들의 독자적인 프로그램은 따로 준비되고 있다. 그는 조만간 전국의 시민단체들이 단일 대오로 지방선거 대응기구를 만들어(가칭 ‘2010지방선거네트워크’) 유권자 행동에 나설 것이라고 전했다.

김기식의 ‘진보혁신 프로젝트’

시민운동에 관한 그의 고민은 좀 더 장기적이고 본질적이다. “시민사회운동의 독자적 힘이 역사적으로 소멸하느냐, 새로운 중흥기를 맞이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있다고 느낀다. 소통 면에서다. 형식과 내용 둘 다. “1980년대 민주화 운동은 집회나 시위를 통해 대중과 소통했다. 1990년대 시민운동은 절차민주주의 공간이 열리면서 입법 청원, 공청회, 공익 소송으로 시민을 대변했다. 그런데 2000년대 중반 이후 새로운 소통방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단적으로 ‘촛불 대중’은 자신들의 이익과 주장이 대행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직접 행동으로 나섰다. 이런 적극화된 시민을 시민운동이 안지 못하고 있다.”

ⓒ뉴시스지난 2005년 삼성그룹 불법 로비자금제공 관련 기자회견을 열고 있는 김기식 참여연대 사무처장
내용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종종 참여연대가 크고 작은 전투에서는 승리했지만 정작 전쟁에서는 이기지 못했다고 뇌까려왔다. 사회경제적 이슈에 대해 목소리를 높여왔지만 가파른 양극화의 속도를 쫓아가지 못했다. 그는 이제 그 한계를 넘어설 때가 되었다고 느끼는 것 같았다. “조세나 사회복지 등 사회경제 영역은 계층적·이념적 균열이 발생하는 의제들이다. 이제 시민사회도 세력 분화가 필요하다. 다른 한편, 복지사회는 사회운동 진영의 노력만으로 안 된다. 정치사회와의 조응 관계 속에서 성과가 나올 수 있다. 시민단체의 요구를 받아 안을 정당이 있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유력한 정당이 없다.”

자 이제, 그가 답할 차례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물었다. 그는 곤혹스러워했다. “나는 평론가가 아니라 운동가다. 말로 하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가다.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아니라 현실과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가는 사람이다”라고 전제했다.

“지난 반세기 동안 보수·진보가 20년씩 사회 변화를 주도했지만 지금은 보수든 진보든 국민적 합의를 이뤄낼 만한 비전을 제출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되게 하는 힘은 없고 안 되게 하는 힘으로 버틴다. 하지만 현실은 지나친 경쟁으로 마치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위기 공감대 위에서 합리적 보수·진보가 대안 경쟁을 벌이는 구도가 한국사회 전체를 위해 바람직하다. 만약 이명박 정권이 합리적 보수의 길을 걸었다면 진보의 혁신이 훨씬 처절한 성찰과 반성 속에서 진보의 재구성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권이 너무 퇴행적이다. 앞으로 10년은 보수의 적은 진보가 아니고 진보의 적은 보수가 아니다. 누가 먼저 자신의 혁신 능력을 국민에게 보여주느냐이고 그 세력이 승리할 것이다.”

김기식 구상은 ‘정치·시민사회를 아우르는 혁신 세력들의 네트워크’쯤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정치할 생각은 없느냐고 물었다. “학생운동 시절 내 별명이 단무지다. 한번 결심하면 문제를 단순하게 생각하고 끝장을 보고 마는 성격인데 정치인은 그런 마음이 안 생긴다.”

그는 귀국한 뒤 부인에게서 “당신이 신데렐라냐?”라는 핀잔을 듣는다. 매일 밤 12시 땡 하면 귀가하기 때문이라고. “세상 돌아가는 것에 감을 잡기 위해” 사람들을 만나면 주로 그들의 말을 듣는다고 했다. 혁신에 대한 시대적·대중적 요구는 무르익었으나 정작 주체는 숙성이 덜 되었다는 체감. 어쩌면 한 번 더 패배의 교훈을 얻어야 혁신의 동력이 형성될지 모르겠다는 우울한 예감도 들지만, 예단할 필요는 없겠다. “당분간 진보랑만 싸울 생각”이란다. 김기식의 ‘진보혁신 프로젝트’를 위한 구호 두 가지. 솔직해지자, 현실을 직시하자. “앞으로 내가 일선에서 일할 수 있는 시간을 10년 조금 넘게 보고 있다. 시민운동으로부터 주어진 기득권에서 나는 자유롭다. 새로운 선택을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기자명 박형숙 기자 다른기사 보기 phs@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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