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인 메뉴로 바로가기 본문으로 바로가기

NAVER 연예

제어되지 않는 여성의 욕망·자동차의 과속 위험성 보여줘 [한국영화 100 일제강점기 조선영화]

⑤ 영화 ‘미몽’ / 중산층 가정 부인의 방종과 일탈 그려 / 악녀가 내뱉는 농중조, 신세타령 해석 / 영화대사, ‘인형의 집’ 노라 떠올리게 해 / 日帝가 기획 관여… 교통질서 계몽영화 / 영화에 나오는 1930년대 경성 매혹적 / 정숙한 역 맡았던 문예봉, 새 모습 흥미
◆악녀, 재발견되다

신여성, 모던걸, 자유부인, 아프레걸, 팜므 파탈, 된장녀, 페미녀에 이르기까지 한국 사회의 주류적 가치에 반하거나, 그로부터 자유로운 여성들을 일컫는 명칭 계보는 상당히 길고 역사가 깊다. 그리고 지난 100년간 한국영화는 이들 여성을 끊임없이 (대부분 악의적으로) 재현해 왔다. 이 여성들은 공통점이 있다. 가정이라는 사적 영역에 갇혀 있지 않고 남성의 전용 영토인 공적 영역으로 진출한 여성이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여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많은 영화 속에서 이들 여성의 주체적 욕망은 자본주의 페티시즘에 굴복한 소비욕, 혹은 허영으로 묘사됐다. 나아가 이 절제되지 못하는 소비욕은 금전에 대한 욕망으로, 이는 다시 금전을 제공하는 남성에 대한 욕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결국 여성의 욕망은 물적인 소비욕과 바람기로 요약되곤 하는 것이 상례였다. 물론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처벌받는다. 양주남 감독의 영화 ‘미몽’(1936년)은 이 계열의 원조쯤 되는 영화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영화 ‘미몽’에서 주인공 애순(문예봉)이 거울을 보면서 단장하고 있는 장면.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어느 중산층 집의 부인인 애순(문예봉 분)은 남편 선용(이금룡 분)과 딸 정희(유선옥 분)를 돌보지 않고 바깥으로만 도는, 유흥과 소비에만 관심 있는 여성이다. 그녀는 어느 날 백화점에 갔다 창건(김인규 분)을 만나 서로 호감을 가진다. 남편과 싸우고 집을 나온 그녀는 호텔에서 창건과 어울리다 범죄에 연루된다. 부잣집 자제인 줄 알았던 창건이 기대와 달리 범죄자임을 안 그녀는 애인과 공범을 가차 없이 고발한다. 이후 그녀는 호감을 가진 남성 무용가(조택원 분)가 탄 기차를 쫓아 택시를 탄다. 그녀의 재촉에 운전을 서두르던 운전사는 애순의 딸 정희를 친다. 정희를 병원에 데리고 온 애순은 과거의 죄를 뉘우치고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농중조(籠中鳥)라는 한자어가 있다. 새장(조롱) 안의 새를 일컫는 말로 1926년 이규설 감독의 영화 제목이기도 하다. 이는 가정에 갇혀 있어야만 하는 여성의 신세를 한탄하는 말로 쓰였다. 극 중 애순은 자신을 억압하는 남편에게 “그럼 날 방안에다 꼭 가둬 두시구려, 나는 조롱에 든 새는 아니니까요”라고 말한다. 남편의 “귀여운 종달새”를 거부하고 집을 박차고 나선 ‘인형의 집’ 노라를 떠올리게 하는 대사다. 그러나 노라의 정당성은 식민지 조선, 나아가 근대화와 탈근대화 시기까지의 한국영화에서 거의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저 ‘집 나간 주부’라는 모티브만 그럴듯하게 착취됐을 뿐이다. 애순처럼 허영심과 바람기가 가득 차 아이까지도 버린 악녀가 내뱉는 “조롱에 갇힌 새”라는 호소는 호강스러운 신세타령이자, 자기변명으로 해석될 뿐이다.

돌이켜보면, ‘미몽’은 애초 당대 영화계나 한국영화사에서 그다지 높은 지명도를 얻지 못했던 영화였다. 당시 신문기사 2∼3개에 단신으로 언급되는 정도이며, 한국영화사의 체계적인 첫 번째 통사로 꼽히는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에서도 지나치듯 언급된다. 그러나 필름이 발굴돼 공개된 2006년 이후, 즉 70년이 지난 시점에 와서 이 영화는 재발견됐다. 많은 연구자가 100년의 한국영화사가 행한 여성에 대한 억압의 기록을 검토하고 있고, 그 과정에서 소위 ‘악녀’의 계보는 악덕이 아닌 여성에 대한 억압의 증거로, 그리고 이 억압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자 했으나 사회적인 화형에 처해졌던 마녀들의 계보로서 재해석되고 있다. 그 목록의 가장 앞에 이 영화의 애순이 있다.
영화 ‘미몽’에서 갑작스러운 교통사고로 쓰러진 딸 정희를 향해 달려가는 애순의 모습.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매혹의 거리, 거리 속 여성

이 영화가 일제 당국이 기획에 관여한 교통질서 준수를 위한 계몽영화였다는 사실은 흥미롭기도 하고 다소 어이없기도 하다. 당시 일제당국은 계몽영화의 효과를 높이기 위해 관객의 관심을 끌 수 있는 오락적인 요소를 도입하는 추세였는데, 그 일환으로 유부녀의 방종과 일탈이 영화 속에 뜬금없이 포함된 셈이다. 아니 포함된 정도가 아니라 주와 종이 바뀐 이상한 ‘계몽’영화가 나오고 말았다(실제 교통질서를 준수하자는 내용의 메시지는 영화 속에서 2∼3분의 분량밖에 되지 않는다).

‘미몽’이 보여주는 1930년대 중반의 경성은 화려하고 다채롭다. 1931년에 새롭게 건립된 화신백화점, 백화점 내 미용실, 애순이 머물던 호텔, 서울역, 그리고 애순이 택시를 타고 지나치는 광화문에서 서울역을 거쳐 용산역에 이르는 대로변의 풍경들. 오늘날의 관객이 보더라도 꽤 화려하고 이국적인 당시 경성이라는 도시의 외관은 근대가 가져다준 매혹의 풍경이었다.

이 풍경 속에 여성이 있다. 근대 도시 내 ‘거리의 여성’은 말 그대로의 의미 외에 우리가 흔히 아는 비유적 의미를 가진다. 이 여성들은 위험하고 매혹적이다. 이 위험과 매혹은 모두 이중적이다. 그들은 가정, 나아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고, 남성의 시선과 폭력으로부터 스스로를 위험에 빠트릴 수도 있다. 또한 그들은 도시 풍경과 소비문화에 매혹돼 거리로 나선 매혹의 주체들임과 동시에 매혹의 대상이 된다. 이 매혹과 위험의 이중성은 근대가 창조해 낸 도시를 질주하는 교통수단들에서도 공통적으로 느껴지는 바다. 말하자면, 거리의 여성과 도시를 질주하는 자동차는 모두 위험과 매혹을 전달하는 근대가 만들어낸 새로운 풍경들이었던 셈이다. 어쩌면 영화의 창작자는 제어되지 않는 여성의 욕망과 제어되지 않는 탈것의 속도가 공히 가지는 위험성을 보여주고 싶은 무의식적 동기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일제강점기 대표적인 조선의 여배우였던 문예봉(왼쪽)과 김신재.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 속 문예봉이란 대배우

‘미몽’은 2005년 11월, 한국영상자료원이 중국의 영상자료원을 통해 들여온 일제강점기 영화 필름 3편 중 하나였다. 이 영화는 2007년 말 자료원이 국내의 어느 수집가로부터 무성영화 ‘청춘의 십자로’(1934년·감독 안종화)를 수집하기 전까지, 2∼3년간 영상자료원이 보유한 가장 오래된 한국극영화 필름이라는 영예를 갖기도 했다. 그리고 여전히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이기도 하다.

이 외에 이 영화의 역사적 가치를 거론하면서 문예봉이라는 배우를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1917년생인 문예봉은 어려서부터 연극인 아버지를 따라 공연장을 전전했고, 15세의 나이에 전설적인 명작인 ‘임자 없는 나룻배’(1932년·감독 이규환)에 나운규와 출연해 영화에 데뷔했다. 이후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1935년·감독 이명우)의 주연을 맡았고, ‘장화홍련전’(1936년·감독 홍개명), ‘나그네’(1937년·감독 이규환) 등에 출연하며 “3000만의 연인”으로 등극했다. 일제 말 친일영화의 출연이라는 오점, 이후 월북영화인으로 활동했던 경력으로 오랫동안 한국영화사에서 잊혀졌지만, 영상자료원이 2000년대 중반 이후 그녀의 출연작 몇 편을 발굴해 공개하고, 한국사회의 레드 콤플렉스가 완화하면서 일제강점기 최고의 여배우로서 지위를 되찾고 있다. 순종적이고 정숙한 캐릭터를 주로 맡았던, 그리하여 조선의 얼굴과도 같았던 문예봉의 완전히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 영화는 흥미롭다.

조준형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세상을 보는 눈, 글로벌 미디어 세계일보

기자 프로필

이 기사는 언론사에서 연예 섹션으로 분류했습니다.

광고

AiRS 추천뉴스

새로운 뉴스 가져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