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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2.01 22: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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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단의 행렬이 꽤 길었다. 산쪽 너머에서 숨어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레이먼과 벤의 얼굴이 묘했다. 

"어떻게 들어가지?"
"흠."
"생각이 있어?"

레이먼의 질문에 벤은 잠시 턱을 쓰다듬었다. 말간 얼굴이 묘했다. 로저의 부관들이 뿔뿔이 흩어진 이후에 여러 방향으로 행적이 갈라졌다. 가장 말단에 있던 벤이 설마 왕실 친위대에 들어가 있을 줄은 몰랐다. 

"일단 숨어들어가야겠는데."
"그건 당연한거고. 그런데 어떻게 저 감시를 뚫고 빼오냐고."
"다 쓸어버리면 안되나?"
"생각 좀 하고 말하면 안 돼?"

레이먼이 어이없다는 듯이 말하자 벤이 왜 안되는거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다. 이 파이팅 넘치는 청년은 세상 모든게 힘으로 잘 될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머리가 나쁘진 않은거 같은데 왜 이 머리를 안 쓰려고 하는걸까, 레이먼이 잠시 이마를 짚었다. 벤에 대한 정보는 적었다. 로저의 부관은 여러명이었고, 부관 중에서는 얼굴이나 존재도 모르는 이도 있었다. 레이먼은 로저의 부관 중 가장 알려진 이였다. 아카데미에서 우수한 성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이가 군부에 들어가자마자 메도스의 이름을 따르기로 한 점도 있었고, 그의 뛰어난 재능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래서 로저가 군부를 떠났을 때 가장 먼저 철퇴가 떨어진 것도 레이먼이었다. 레이먼은 로저를 미워하고, 원망했지만, 결국은 자신의 운명에 순응했다. 동쪽의 국경벽 앞에서 다시 로저와 조우했을 때 자신의 주인은 역시 이 분밖에 없다는 걸 인정하고 죽음까지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설마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지만. 

"잠입하는 건?"

벤의 말에 레이먼이 어떻게? 하고 어깨를 으쓱하자 벤이 어딘가를 가리켰다. 상단의 후미에 위치한 여러 개의, 마치 동물을 실어 나를 것 같은, 조악하게 짜인 나무 우리가 보였다. 노예들을 실어나르는 우리이다. 

"노예로 위장해서."
"흐음."

나쁘진 않은 제안이었다. 자국은 아니지만 남쪽의 대다수의 나라는 노예 제도를 운영한다. 벤은 우리 쪽을 훑어보았다. 그리고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가 감시가 제일 허술해."
"숨어들 수 있나?"
"이 정도 규모의 상단에서 노예 관리는 그렇게 빡센 편이 아니지. 그 노예가 상품 가치가 그리 높지 않은 노예라면."
"어떻게 알아?"
"아, 난 북쪽 변경 출신이야."

아무렇지도 않은 벤의 말에 레이먼이 납득했다. 북쪽 국경벽 근처에는 다른 국경 너머에서 노예와 비슷한 존재들이 있다. 북쪽 변경 출신이라면 아마 그런 존재들을 쉽게 보았을 것이다. 그래서 북쪽과 남쪽 변경 사람들은 노예에 대한 역치가 수도보다 훨씬 낮다. 이 나라가 노예제를 운영하지 않음에도 그랬다. 

날이 어두워지면 벤이 봐둔 영역으로 숨어들기로 했다. 상단을 따라 조용히 움직이며 두 사람은 날이 지길 기다렸다. 로저가 있는 곳은 대충 파악했다. 이 상단에서 우두머리로 보이는 사람과 같이 움직이는, 얼굴을 가린 존재들이 모여 있는 작은 마차 쪽이었다. 로저를 발견한 건 아니지만 금발머리라던가 대단한 미인이고, 결박이 풀어지지 않는 남자라는 말 등으로 유추해 보았을 때 마차 안의 사람 중의 한 명은 로저라는 결론을 반쯤은 내린 상태였다. 벤은 자신이 입수한 정보가 절대 틀렸을 리가 없다고 했다. 레인저 부대에게서 들은거라고 했으니까. 레인저 부대가 뭔지 모르는 레이먼이 그 부대에 대해서 묻자 벤은 잠시 말을 고르다가 입을 다물었다. 로저가 알려주지 않으면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했다. 레이먼은 벤을 추궁하지 않았다. 

해가 지고 땅거미가 어린 산길을 줄지어 가던 행렬이 멈추고 저녁을 준비하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경계가 가장 풀어지는 때가 이 때다. 벤과 레이먼은 조용히 그들이 봐뒀던 곳으로 숨어들었다. 녹아들듯이 숨어들어 두 사람은 마차를 지키는 사람 앞으로 칼을 들이 밀었다. 식사를 준비하던 사람이 화들짝 놀라며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갈색 머리의 젊은 청년은 놀라서 양손을 들어올린 채였다. 벤은 입가에 손을 대며 조용히하라는 제스쳐를 취했다. 

"시키는 대로 하면 죽이진 않으마."

낮은 벤의 목소리에 레이먼이 한숨을 쉬었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름은?"
"위, 윌리입니다."
"저 마차."

노예들이 타는 나무 우리를 턱으로 가리키며 레이먼이 차분하게 말했다. 

"빌릴테니 입을 다물어."
"예, 에???"
"뒤쪽에 구겨져 있던 노예 둘을 여기로 옮겨서 데려왔다고 해."
"어, 어..."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 넌 누가 물으면 그렇게 대답해라. 나머진 우리가 알아서 할테니까."

윌리는 황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너무 당당하게 나무 우리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가진 중장비들이 눈에 거슬렸다. 레이먼이 발발 떠고 있는 윌리에게 손짓해서 말했다. 짚단을 몇 개 가져오라고. 어설프게나마 숨겨두면 나을거였다. 윌리는 식사를 하는 것도 잊고 상단의 어느 쪽으로 들어가서 짚단을 한아름 안고 돌아왔다. 누군가에게 알리지 않을까 경계했지만 정황이 없는 탓인지 그저 순순히 짚단만 건네주며 어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레이먼이 품에서 금화 몇 닢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상인이라면 언제나 돈이 궁한 법이다. 반짝거리는 금화를 품에 받아안으며 그는 입을 닫겠다는 시늉을 했다. 밤이 점점 더 깊어졌다. 상단은 밤을 보낼 준비를 한다. 낡은 노예 우리에 두 사람이 등을 기대자 삐걱소리가 났다. 

"앞으로 어떻게 하지?"
"국경을 넘기 직전이 도망가기 가장 좋아."
"국경 수비군이 있으니까."
"응. 그 때를 노려보자."

차분한 목소리에 레이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눈가를 비비는 그의 눈이 피곤해 보였다. 벤이 레이먼에게 짚단 쪽을 양보했다. 

"쉬어. 피곤하잖아."
"......."
"전쟁을 계속 치르다가 포로로 잡혔으니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 나오자마자 여기까지 따라오느라 고생했어."
"무식해 보였는데 생각보다 배려심이 있네?"
"그렇게 말하지 말라고."

약하게 짜증을 내는 모습에 겨우 그 나이 또래로 보였다. 짚단에 대충 몸을 구겨 뉘이며 레이먼이 작게 물었다. 

"그 분의 부관 중에서 네가 제일 어렸잖아."
"응."
"난 네가 군부를 떠나서 고향으로 돌아갈 줄 알았어."

자신들과는 달리 벤은 선택의 여지가 넓었다. 로저가 그들을 내쳤으니 군부에 더 이상 남아 있긴 어려웠겠지만 다른 이들과 달리 벤은 정말 말석이었기 때문에 조용히 떠난대도 대장군이 해꼬지를 할 가능성은 현저히 낮았다. 벤은 턱을 긁적이더니 한숨을 뱉었다. 

"약속한 게 있어서."
"약속?"
"응. 그런게 있어."
"그... 네 직급에는 어떻게 들어간거야?"

혹시나 바깥에서 웅크리고 자는 윌리가 들을까봐 말을 고르는 레이먼의 의뭉스러운 말을 용케 알아듣고 벤은 어깨를 으쓱했다. 

"뒷배."
"뭐?"
"말 그대로야. 뒷배."
"뒷배가 있다고 거길 그렇게 쉽게 들어가?"
"되더라구."

말도 안된다고 레이먼은 생각했다. 왕실 친위대가 어떤 곳인데. 메도스라는 이름의 핵심 전력이 모여 있으며, 왕을 가장 근거리에서 수호하는 자들이다. 신원이 확실하지 않은 이들을 단순히 뒷배라고 넣어줄 수 있을리 만무했다. 더 묻고 싶은 말이 산더미였지만 말할 생각이 없는지 벤은 눈을 감은 채 어설픈 우리의 바닥에 느긋하게 누워 있었다. 오늘만 날이 아니니까, 레이먼은 그렇게 생각하며 한숨을 뱉었다. 

날이 밝고 아침이 되자 윌리가 두 사람 앞에 엉성한 아침 식사를 내밀었다. 독이라도 들었나? 싶어서 레이먼과 벤이 그를 빤히 바라보자 윌리가 당황하며 자기 손가락을 푹 찍어서 음식들을 맛보고선 두 사람에게 건네주었다. 그 행동에 벤이 인상을 찌푸렸지만 음식을 버리는 성격은 아닌지 윌리가 건넨 걸 맛있게 받아먹는 것과는 달리 레이먼은 여전히 노골적으로 윌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런 걸 왜 줘?"
"노, 노예들한테 아침 식사를 주는 건 당연한데요..."

노예라고 둘러대라고 했더니 너무 충실하게 대해준다. 어이가 없어서 레이먼이 웃었다. 노예상 주제에 자신들을 정말 노예라고 생각하는건지. 

"근데 진짜 식사 대접 안하면 제가 이 상단의 주인 어르신한테 혼나서요..."

아침 일찍 윌리는 추궁을 받았다. 비어있던 우리에 왜 못보던 노예들이 들어있냐, 라는 말에 윌리는 더듬더듬 뒤쪽 우리에서 다른 무리와 함께 있던 노예들이 소란을 일으켜서 이쪽으로 분리했다고 말했다. 덩치가 크고 성격이 괄괄해서 검투사로 데려갈 노예들이라 다른 노예들에게 해꼬지 할까봐 분리했다는 말에 윌리의 상관은 어설프게 납득했다. 대신 검투사로 이용할 노예라면 먹이는 걸 소홀히 하지 말라는 분부까지 받았다. 검투사 노예는 비싸니까 말이다. 

윌리는 두 사람에게 작은 팔찌 같은걸 내밀었다. 이게 뭔데? 두 사람이 빤히 윌리를 바라보자 윌리가 팔찌를 가리키며 이것저것 설명을 했다. 






로저의 양 팔과 양 다리에 팔찌와 발찌가 채워졌다. 팔꿈치 위쪽에 하나씩, 그리고 발목에 느슨하게 하나씩. 팔에 붙는 팔찌는 좀 타이트한 편이었다. 팔찌와 발찌가 붙자마자 존은 콧노래를 부르며 로저의 몸을 결박하던 것들을 풀어냈다. 몸이 자유로워지자마자 로저가 존을 걷어찼다. 마차 안에서 나뒹구는 그를 향해 로저가 달려들자 갑자기 팔과 다리에 엄청난 격통이 오며 그대로 나뒹굴었다. 

"오, 젠장. 겁나 아프네."
"그러니까 마차 안에서 하지 말라고 했잖아."

닉의 손 안에 무언가를 휘감은 채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로저의 팔과 다리에 채워진 것이 그의 사지를 잘라버릴 것처럼 옥죄고 있었다. 

"이, 이게..."
"결박을 풀어주는데 아무 조치도 안할거라고 생각했나? 노예 검투사들에게 쓰는 족쇄다."
"으으윽-"
"니키, 적당히 해."

존의 말에 닉이 짜증을 내며 존에게 손에 들린걸 휙 던졌다. 그건 아마 로저의 팔다리를 제어하는 장치일 게 뻔했다. 로저가 이를 갈았다. 존이 로저의 팔다리를 조이던 것을 풀어내자 로저가 숨을 뱉으며 자신의 팔과 다리를 주물렀다. 

"생각보다 힘이 좋아서, 작정하고 제대로 조정하면 팔다리 근육 끊어버리는 건 일도 아니야."

로저가 발목에 붙여진 걸 손으로 풀어내려고 했지만 단단하게 금속으로 채워진 건 악력으로 풀리지 않았다. 

"그냥 손으로는 못 풀어. 물론 칼로도 못 풀어. 잠금 장치 자체가 특수해서 이 제어장치와 연결된 열쇠 아니면 못 풀어."
"빌어먹을."
"이 장치와 멀어져도 조여져 올거야."

이런 기계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노예들이 있는 곳에서만 쓰는 물건일 게 뻔했다. 이런 비인간적인 물건이 자국에 유통될 리가 없을테니까 말이다. 

"마차가 편하겠지만 계속 갇혀 있었으니 갑갑하겠지."

존은 마차 문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손짓하자 그가 마차 앞으로 두 마리의 말을 끌고 왔다. 뒤에서 닉이 못마땅한 얼굴로 존을 보고 있었다. 팔찌와 발찌를 찼으니 그들을 벗어나 도망가는 일이 요원하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로저 테일러가 위험인물이라는 건 변하지 않는다. 존이 느긋하게 말 안장을 내보이자 로저는 아직까지 아릿한 팔을 매만지며 결국 존이 원하는 대로 순순히 말 안장 위로 올라갔다. 로저는 이를 갈았다. 말 고삐를 쥐며 생각했다. 그냥 묶여 있을 때 죽여버리는건데, 아주 거추장스러운 족쇄를 달아버렸다. 





"그냥 달고만 있으라는건가?"
"노예들은 이게 없으면 그 억지로 채워지는데 그럼 풀 수가 없거든요. 근데 이건 제가 잠그지 않을거니까 그냥 달고만 있으면..."
"우리가 그걸 어떻게 믿는데?"
"제 목숨을 쥐고 계신 분들한테 거짓말을 할 수는 없는데요."

윌리가 벌벌 떨며 말하자 벤이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팔에 족쇄를 채웠다. 작은 팔찌처럼 보이는 그걸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남쪽은 노예를 이런 식으로 통제하나보네. 사슬로 만든 쇠고랑보다 낫군."
"북쪽은 사슬로 묶고 다녀?"
"뭐 거긴 여기 기준으로 미개한 놈들이 많으니까. 그래서 더 철혈의 벽을 넘으려고 하는거고."

벤의 행동을 보고 레이먼도 투덜거리며 자신의 팔에 족쇄를 채웠다. 윌리가 두 사람이 들어가 있는 우리의 문을 닫으며 간절하게 빌었다. 

"제발 튀는 행동 하지 말아주세요. 목숨도 중요하지만 전 일도 중요해요."
"일이 해결되면 알아서 사라져줄게."
"제발요."

덜덜 떠는 윌리가 손을 모아 빌었다. 그런 그를 보며 벤과 레이먼은 피식 웃어버렸다. 돌아갈 때 쟨 죽이지 말고 가야겠다, 태연하게 말하는 벤의 모습에 레이먼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예들을 실은 상단 행렬이 외진 도로를 지나가고 있었다. 윌리는 긴장한 채 우리를 끌며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었다. 그런데 앞쪽에서 누군가가 와서 윌리를 불렀다. 

"윌리, 영주성으로 들어갈거야."
"뭐? 왜? 거긴 통과하지 않기로 했잖아."
"주인 어르신이 그러는데 국경이 열린대."

그 말에 벤과 레이먼의 얼굴이 변했다. 국경이 열린다니, 남쪽처럼 폐쇄적인 국경이 열리는 일은 정말로 드물었다. 

"수도에서 대상인이 온다나봐."
"대상인?"
"그래. 상단인데 그런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칠 수야 없잖아. 대상인이 오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상단들이 모일텐데 말야."

우리도 한 몫 잡아야지! 일행이 한 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윌리는 벙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구나, 하고 대충 말했다. 말을 타고 있는 일행은 우리 안에 들어가 있는 벤과 레이먼을 흘긋 보고는 웃었다. 

"어쩌면 국경 안에서 검투 시장이 열릴지도 모르지."
"여긴 노예 매매가 금지된 곳이잖아."
"이렇게 과열됐을 땐 가끔 법이 살짝 무시되기도 하는 법이지. 어쩌면 국경 근처에서 검투 시장이 열릴지도 모르지."

남쪽 변경백은 의뭉스러워서 알 수 없는 인물이니까, 키득키득 웃으며 검투 노예들 관리를 잘하라고 말을 남기며 윌리의 곁을 떠났다. 다른 일행들에게도 소식을 전해줘야 한다고 말이다. 벤과 레이먼은 그들의 대화를 조용히 들으며 눈빛을 교환했다. 

"대상인이라는 건 아우젠 상단의..."
"아마도 그럴 거 같은데."
"아우젠이 내려온다는 건 수도에서 전하의 허락이 있어서?"
"아마도."

아우젠이 비행선을 지원한 것을 비롯해 왕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레이먼도 벤도 알고 있었다. 그런 아우젠이 로저가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남쪽 국경으로 온다고 하자 두 사람의 머릿 속에 생각이 많아졌다. 벤은 레이먼과 합류하면서 수도에 로저가 남쪽 국경 근처를 통과할 것 같다는 연락을 왕에게 넣었다. 왕은 그걸 염두에 두고 아우젠을 보낸 것이 틀림없다. 

"어쩌면 탈출이 좀 더 쉬워질 수도 있겠어."

레이먼의 말에 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동력이 생기니까."
"되도록이면 그 검투 대회인지, 그거에 말려들지 않도록 주의해야겠어."
"응. 눈에 띄는 건 별로 좋지 않지."

두 사람 사이에서 여러가지 이야기가 타인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용히 오고갔다. 윌리는 들어도 못 듣는척 하며 혹여 누군가가 우리에 큰 관심을 가질까 신경을 곤두세웠다. 






비행선 위에서 내려다 보는 세상은 어쩐지 자신이 사는 곳과는 전혀 다른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아우젠의 비행선이 폭파된 후, 그는 어디서 또다른 비행선을 조달해왔다. 과연 대륙 최고 부자라 불릴만 했다. 침묵 속에서 가만히 창밖만 바라보는 브라이언을 아우젠이 못마땅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아우젠은 평소처럼 화려한 차림 그 자체였다. 왕의 명령만 아니면 저런 남자를 데려갈 마음조차 안 먹었을 것이다. 

"말해봐."

아우젠의 말에 창 밖에 계속 시선을 두던 브라이언이 그에게 얼굴을 보였다. 

"그곳에 가면 정말로 로저를 만날 수 있어?"
"아마도."
"아마도?"
"네가 시장을 크게 연다면 가능하겠지."

대상인이 온다는 건 변방에서는 거대한 기회다. 하지만 대상인이라고 변방에서 시장을 크게 여는게 꼭 이득과 직결된다고 말할 수도 없었다. 아우젠은 지금 어마어마한 물품을 비행선에 싣고 가는 중이었지만 이 모든 물건들이 그에게 꼭 흑자만을 줄 리는 없었다. 그리고 남쪽 변방에서 아우젠이 원하는 물건은 별로 없었다. 애초에 수지가 별로 맞지 않아서 아우젠은 남쪽으로 가는 걸 꽤 꺼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다른 변방보다 대시장이 열리는게 훨씬 드물었다. 지금은 잉게 버크 아우젠이 매점매석권까지 지니고 있는만큼 취급할 수 있는 품목의 숫자는 더더욱 늘었고, 그 품목은 생활과 직접적으로 연관된 물건들이 다수다. 아우젠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상황이 된다. 수도의 물가를 유지하면서 남쪽 변방에서 쓸만큼의 물품의 수요를 충당해야 했기 때문이다. 

"남쪽 변경백이 있는 영주성으로 로저가 지나갈 가능성이 높아지지."
"그 많은 상인들 속에서 로저를 어떻게 찾아?"
"못 찾을거라고 생각하는 네가 더 이상한데."

브라이언은 고개를 갸웃하며 웃었다. 

"그 화려한 애를 어떻게 못 알아봐."
"데리고 있는 놈들이 로저를 꽁꽁 싸매고 있을거란 생각은 안해?"
"남쪽 국경에 대해 잘 모르니 한가지 알려주지."

테이블 위에 브라이언은 작은 지도를 펼쳤다. 국가의 수장들이나 볼 수 있는 정밀한 지도다. 아무리 아우젠이라고 이만큼 정밀한 지도를 구할 수 없다. 아카데미에서도 볼 수 없는 지도다. 브라이언은 한 지점을 가리켰다. 

"로저가 사라진 곳. 동쪽 변경백 하이만의 영토."
"나도 알아."
"이곳은 현재 영주가 사망한 상태야. 영토가 비어 있지. 북쪽 변경백이 그 빈틈을 메우고 전쟁을 소강상태로 만들기 위해 들어간 상태야."
"내가 물품을 대고 있으니 안다고."
"여긴 철혈의 벽이 있는 북쪽 화이트만의 영토. 여긴 대대로 메도스에게 충성하지. 이번 북쪽 변경백 역시 메도스의 복수를 기치로 내걸고 동쪽 변경으로 군사 이동을 하는걸 허락했어. 그리고 여긴 로저의 대부가 있는 서쪽 변경백 시드만의 영토. 시드만은 로저를 굉장히 아끼고 자기 딸을 로저의 부인으로 삼고 싶어하지."

그 말이 브라이언의 입에서 나오자 아우젠의 시선이 브라이언을 향했다. 하지만 그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북쪽도, 서쪽도 통과할 수 없어. 메도스에게 매우 호의적인 곳들이다. 하지만 남쪽을 지키는 남쪽 변경백 보이만은 다르지."

브라이언의 긴 손가락이 남쪽 변경백의 영주성을 가리켰다. 

"보이만은 아주 의뭉스러운 사람이야. 남쪽의 위태로운 상황을 유지하기 위해 오랜 시간 자체 외교를 이어온 사람이야. 능구렁이 같은 놈이지."
"그게 로저를 찾는 것과 무슨 상관이지?"
"보이만은 중앙과 떨어져 있는 대신 국경의 군소국가들의 상황을 봐주는 면이 있지."
"구체적으로 어떤?"
"국경성 바깥에서 노예 시장이 형성된다."

아우젠이 눈을 크게 뜨며 브라이언을 보았다. 

"로저를 빼돌린다면 아마 노예 시장을 통해서 빼돌릴 가능성이 높겠지."
"왜?"
"그 앤 예쁘니까. 예쁘장한 얼굴은 노예로써 가치가 높아. 그리고 과거 세탁하기도 좋지."
"넌 어떻게 그런걸 알지?"

브라이언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해주고 싶지 않은 듯 했다. 아우젠은 추궁하려 했지만 브라이언이 다른 말로 화제를 돌렸다. 

"대상인으로 인해 대시장이 열리면 분명히 노예 시장도 어딘가에서 열릴거야. 그곳을 중점적으로 뒤져서 로저를 찾을거야."
"찾고 나선 들고 튈거고?"
"당연하지."

아우젠은 길게 기른 손톱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지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의문이 가는 점이 있어. 중앙에서 네가 내려가잖아. 메이 공의 아들이 내려오는거라고. 그런데 태연하게 노예 시장을 열 수 있을까?"
"당연하게도 열릴거야."
"왜?"
"아무것도 모르는 학자 출신의 한량이라는 이미지는 참 써먹기 좋거든."

싱긋 웃는 브라이언을 질린다는 듯이 아우젠이 바라보았다. 남쪽 변경백은 중앙의 정보가 그리 밝지 않은 경향이 있다. 이곳의 폐쇄적인 특성상 그건 당연하다. 메이 공은 브라이언이 정계에 진출하기 전까지 학자로써 꽁꽁 숨겨왔으니 브라이언에 대한 남쪽 변경백의 정보는 매우 제한되어 있을 것이다. 

"가끔 보면 너도 참 영악해."
"정치하는 인간이 영악하지 않으면 어떻게 정치를 하지?"

뜨겁게 김이 올라오는 차를 아우젠의 종자가 내오자 브라이언은 부드럽고 우아한 동작으로 찻잔을 받아들며 뜨거운 차로 입술을 살짝 축였다. 

"너같은 앨 좋아하는 로저가 가끔 안타까워."
"입 조심해, 잉게 버크 아우젠."

브라이언이 뚜렷한 티존 아래로 보이는 강한 눈매를 숨기지 않은 채 잉게 버크 아우젠을 지긋하게 노려보았다. 

"로저가 이런 내 모습을 모를거라고 생각해?"
"뭐?"
"네가 아는 것보다 우리 사이는 훨씬 오래되고 깊어."

네가 따라올 수 없는 시간이지, 브라이언의 다물린 입에서 함축된 언어가 들려오는 듯 했다. 잉게 버크 아우젠은 어금니를 물면서 살짝 주먹을 쥐었다. 비행선의 선수가 남쪽 변경백의 영지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존나 중구난방이라 재미없는데도 읽어줘서 고마워 

 
2019.02.04 13:54
ㅇ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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센세 재미없다뇨 말도 안돼요 ㅠㅠㅠㅠㅠㅠ 등장인물이 늘어나면서 보여지는 장면도 많은데 정말 모든 장면장면이 마치 영화처럼 눈 앞을 훑고 지나가요 ㅠㅠㅠㅠㅠ 마지막 브리... 너무 안타깝고 ㅠㅠㅠㅠㅠㅠㅠ 왠지 노예로 잠복한 레이먼이랑 베나디 검투 할것 같아 불안하고 ㅠㅠㅠㅠㅠㅠㅠ 센세 잘읽었어요 ㅠㅠㅠㅠ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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