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마도를 보면 가슴에서 불이 솟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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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8>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제8장 우리는 왜 이렇게 어렵고 힘든가

희뿌연 갈매빛 연무 속에 잠겨있는 긴 해안선이 띠처럼 풀어져 이어지고, 해안선 뒤편으로 산의 연봉들이 아스라했다. 다정하고 평화로워 보였다. 부산항이었다. 비오는 날을 제외하면 대마도에서 부산은 아스라하지만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 보인다. 날씨가 청명하니 지금 더욱 또렷하게 보였다. 항해하는 도중 기관 고장을 일으키긴 했으나 해룡호는 어느새 대마도 해역을 지나고 있었다. 이제 몇 시간 후면 부산 항구에 닿는다.
오민균은 식민지하의 조국을 떠날 때와 해방을 맞아 귀국하면서 바라본 조국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 그땐 바라본 산천이 눈물겨웠다. 그러나 지금은 벅찬 감격만이 가슴에 꽉 찬다. 저런 아름다운 산천이 일본에 할퀴고 찢겼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른 생도들도 감회어린 시선으로 부산항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길자 임순심 역시 어깨동무를 한 채 난간에 기대어 고국 산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런 땅을 잃어버렸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
조병헌이 악몽을 꾸고나온 사람처럼 휴 한숨을 내쉬었다.
"역사, 그런 게 우리에게 있었나? 역시 역사를 모르면 역사에 배반 당하게 돼있나봐. 일제 강점기 36년만이 아니야. 임진왜란을 생각해봐."
장지성은 대마도를 옆에 끼고 가니 임진왜란이 더욱 절실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역사에 헌신한 선구자들이 있기에 우리가 위안을 받는 거야. 돌아보면 참 많이 다치고 죽었어. 이름도 명예도 없이 사라진 이름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데 일본에 줄을 서서 봉사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는 것이 문제야. 일제의 우산 밑에서 부와 권세를 쌓고 탐욕을 채우며 떵떵거렸던 사람들이야. 세상이 바뀌었다고 그들이 쉽게 물러설까?"
"물러서야지. 역사는 관대하면 또 역습을 당하게 되어있어. 그러니 준엄해야지. 물정 몰랐던 나에게도 역사의 죽비가 내려져야 돼. 너무 몰랐던 책임을 져야지. 일본 군국주의를 뒷받침한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원죄가 있지. 각자의 내면을 따질 것없이 친일의 일파인 것은 분명해. 역사는 디테일한 구석까지 들여다보진 않으니까 개인적 사정은 중요하지 않아. 우리가 일본 군가를 부르며 행군하면서도 내면에 흐르는 혈관 속에 조선 독립을 갈구하고, 민족해방의 비원이 파동치고 있었다고 해도 알아주는 사람은 없어. 큰 흐름 속에서 그것은 하찮은 것이지. 역사는 개인적 삶의 고뇌를 보살피는 것이 아니거든. 문학이라면 몰라도."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앞으로가 중요하다는 것이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어떤 태도로 조국 앞에 나서느냐가 우리 삶의 기준이 되어야겠지. 그것이 친일의 멍에에서 벗어나는 일이야."
"옳은 말이다."
모두가 동의했다.
"우리가 이렇게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온 것은 그나마 개인적 안락을 버리고 광야에서 조국의 독립을 외친 선혈들의 거룩한 이름이 있었기 때문이야. 그런 분들이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얼마나 쓸쓸했겠나. 그래서 돌아가면 나라의 독립을 위해 헌신한 분들에 대한 예의부터 차려야지. 국립묘지를 조성하고, 동상을 세우고, 강연회를 열어서 국가정체성을 세워야 해."
"하지만 그들의 헌신에 대해 수용할 준비가 되어있을까? 우키시마호 침몰 사건과 티아라 해병단 화재사고로 우리 동포가 그렇게 많이 죽었어도 침묵을 지키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불안해."
"왜놈보다 더 왜놈이 되어버린 세상이 되어있는 게 마음에 걸려. 이런 것 때문에 꿈쩍도 안하는 거 아니겠어? 선량한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고문한 경찰과 헌병과 밀대들, 그들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은 용서하지 말아야지. 그건 복수가 아니지. 그런 자들이 복수의 프레임을 걸어 저항하고, 역습을 가해오겠지만 걷어내야지. 못된 놈은 대가를 치르게 해야 나라의 기강이 서. 순수한 피가 민족의 제단에 뿌려져야지."
오민균이 나섰다.
"이시하라 선생님 말씀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 아래 형성된 기득권층이 연합군 쪽에 붙어 그들이 나라의 중심세력으로 등장할 것이라고 우려하시더군요. 물적·인적ᐧ정보 자원이 풍부한 그들이 연합국을 구워삶고, 그들이 원하는 정치 질서를 재편하면서 기득권을 유지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들에게는 자본력과 정보력, 머리를 쓰는 테크노크라트 자원이 풍부하다는 것이지요. 그런 세력이 양심 세력을 조롱하고 경멸한다는 겁니다. 그들 정신의 근저에는 독립이 무슨 의미냐, 잘 살게 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일제가 아니었으면 우리가 경부선 철도 하나 부설할 수 있었겠느냐고 말한다는 겁니다. 여전히 상투 틀고 지게 지고 살 것이라는 것이지요. 세련된 그들이 미군이 들어오면 맨먼저 달려가 줄을 댈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렇게까지 할라구?"
장지성이 부정했다.
"아닙니다. 그들은 어떤 무엇도 하는 세력입니다. 민족이 어떻고, 정의가 어떻고, 진실이 어떻다는 것은 개소리일 뿐, 현실세계에서는 물성의 물량이 최고의 가치고, 이런 물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힘센 자를 잡아야 한다. 그 세력이 조선 반도에 200만이 넘는다고 해요. 반면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은 많아야 10만이고, 그것도 힘이 없으니 거품에 그친다는 것이지요. 결국 친일세력에 기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이죠. 역사를 희롱하거나, 돈의 노예거나, 친일의 자손이거나 그 세력이 10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다, 세습까지 하며 세상의 주류로 살아간다. 그만큼 뿌리가 깊다는 것으로 역사 청산은커녕 역으로 몰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끔찍하지요."
"프랑스 드골 장군 같은 사람이 나와야 하는데, 그런 지도자는 안보인단 말인가?"
프랑스의 샤를르 드골 장군은 프랑스에 나치의 괴뢰정권을 세웠던 페탱과 그 부역세력을 과감히 숙청했다.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 성공으로 파리에 입성한 그가 맨먼저 착수한 작업은 반역자를 역사의 이름으로 청산한 것이었다. 그는 한때 괴뢰정권 수반 페탱의 부관으로 복무했지만 파리에 개선한 후 가장 먼저 페탱을 단죄했다. 드골은 "독일군에 의해서가 아니라 프랑스의 비겁자들에 의해 위대한 파리가 파괴되었고, 고문받았다. 그러나 마침내 해방되었다. 파리의 수모를 청산하지 않고는 파리의 영광과 자존을 지킬 수 없다"면서 과감하게 부역자를 단죄한 것이다.
"프랑스는 2차대전 중 독일에 고작 3년 지배를 받았잖나."
"3년이 아니라 3일을 지배받았어도 나치에 협력한 프랑스인은 독일군보다 더 나쁘다고 했습니다. 독일군에 몸을 판 위안부는 삭발을 해서 거리로 내쫓았고, 공무원, 우편배달부, 은행원, 교사 등 직업, 성별, 연령을 불문하고 처벌했지요. 이중 지식인과 언론인을 더 분명하게 단죄했습니다. 언론인과 지식인이 수백 명 처형되었습니다. 자신의 영혼뿐만 아니라 국민의 영혼을 사술(詐術)로써 기망했다고 해서 더큰 사회적 책임을 물은 것입니다. 오피니언 리더에게는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을 적용한 것이죠."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 사람도 있고, 실제로 억울한 사람도 있었을 것 아닌가. 그런 사람은 예외가 아니었나?"
"일일이 가리기엔 시간이 없죠. 물론 억울한 사람도 있지요. 그러나 결국 격류에 묻혀갔습니다. 엄혹한 시대에 목숨을 내놓은 애국자들도 있었는데, 세밀한 기준까지 적용하며 친절하게 가려낼 수 없다고 일거에 청산해버렸습니다. 억울한 것은 억울한대로 후일 개인사에 맡기고, 대의에 충실하겠다는 것이죠."
"그런 반면에 우리는 일제의 개 노릇을 한 자들이 새 세상의 주류로 떠오른다? 생각만해도 끔찍하네. 이들은 동물적 촉수로 점령국 미국에 재빨리 안길 걸? 조선에 대해 뭘 모르는 미국에게 오판하지 못하도록 바르게 인도해야 할 사람은 없고, 하인이 되어서 비위 맞추느라 정신이 없었던 자들은 그 시종 근성으로 그들을 떠받들 거야. 조선에 아는 것없는 자들의 심부름꾼이 되니 그들이 어느새 한반도 전문가가 되고, 영달을 추구하는 길을 확보하는 거야. 이렇게 되면 완전 주객전도지. 영혼이 없는 세력과 영혼을 가진 세력의 싸움이 전개될 것인데, 영혼이 없는 것들의 일방적 승리가 예견돼. 외세에 아교풀처럼 빌붙는 스킬이 있잖나."
"독립운동을 했다고 해서 다 나라를 구한 것은 아니잖나. 그것이 무슨 훈장처럼 과시하며 설쳐대는 모습도 민망하지 않나?"
"좀 설치면 어때. 부역세력들이 쇠고기 안심 뜯으며 거드름 피우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잖나. 난 그들이 더 설치기를 바라네. 우리가 역사에서 배워야 할 것은 공이 아니라 과야. 만주에서 독립군 때려잡은 자들이 신생 조국의 주인이 된다면 나라 꼴이 뭐가 되겠나. 나 역시 일본육군사관학교 생도로서 반성할 것이 있지. 그래서 현해탄 바닷물에 몸과 마음을 확실하게 씻고 고국으로 돌아가려고 해. 영혼을 세탁하지 않으면 조국의 품에 안길 자격이 없어."
"옳은 말이야. 앞으로 해방 조국에서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하지. 백번 회개하면 뭘해. 어떻게 사느냐가 준비되지 않으면 안돼. 그게 우리의 과제야."
두서없이 의견을 나누는 사이 배는 대마도에 접근했다. 조병헌이 말했다.
"대마도를 보면 가슴에서 불이 솟아. 해구(海寇)들이 습격한다고 우리 수군이 철수해버렸다는 게 말이 되나?"
그는 조선조 때, 우리 수병이 철수해버린 역사를 틴식했다. 한뼘의 땅이라도 지켜야 할 군인이 도망을 가버린다? 작은 불편 하나로 해양진출과 대륙진출의 전초기지가 되는 우리의 중요한 전략 자산을 영영 잃어버렸다는 것, 그것이 가슴 아픈 것이다.
야트막한 산과 산이 연해있는 한쪽 기슭에 숨듯이 히타카츠 항과 이즈하라 항이 자리잡고 있었다. 수십 척의 고깃배들이 정박해 있는 것으로 보아 풍부한 어장임을 말해주고 있었다. 리아시스식 해안과 거북이가 둥둥 떠서 놀고 있는 것같은 작은 섬들이 연이어져 있는 게 한폭의 수묵화 같았다. 대마도는 고길자에게도 추억이 서린 곳이었다.
"나는 쓰시마에서 여러해 물질을 했지요. 성산포나 화순항에서 돛배로 몇 시간이면 닿는 곳이에요. 해류가 흐르는 곳이어서 잘 흘러가지요. 지금도 이즈하라 부둣가에 우리 마을 사람들이 살고 있어요. 이즈하라에서 가리비, 전복, 소라, 문어, 도미를 잡았어요. 갓 잡아온 해물로 이시야키(돌판구이)를 만들어 팔기도 했죠. 헌데 이 섬이 우리 영토라는 것을 여태 몰랐네요."
고길자는 대마도 해역에서 물질을 하며 번 돈으로 막내동생을 농업학교까지 보냈다.
"얼마전 지도에서 대마도가 조선땅이라는 지명을 발견했습니다."
오민균이 도서관 자료에서 찾아낸 내력을 설명했다.
대마도가 조선땅이었다는 사실은 '조선왕조실록'에 나와 있었지만, 1851년 런던과 뉴욕에서 발행된 해양지도에 조선령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산에서 대마도까지는 49km, 그러나 일본 후쿠오카에서는 132km 떨어져있다. 가장 가깝다는 이키 섬에서는 48km다. 이키 섬을 기준으로 일본이 더 가깝다고 주장하는데, 우리의 오륙도를 기준으로 하면 거리가 20km밖에 되지 않는다. 섬 크기는 남북으로 82km, 동서로 18km, 면적은 제주도의 3분의 1 크기다.
설명을 듣고 생도들이 놀랐다. 근거 중심으로 논리를 전개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는 것이다.
"옛날부터 대마도는 우리 땅이라 하여 조정에서 가난한 섬 주민들에게 세금을 걷기보다 탕감해주고, 구호용으로 양식을 제공했습니다. 대마도는 농사짓기가 척박한 땅인데다 농토도 빈약했지요."
대마도는 일본 본토에서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은 땅이었다. 백제인의 후예가 원주민으로 살고 있었고, 그후 수령은 일본보다 조선의 벼슬을 받고, 조선인 행세를 했다. 대마도는 고려 중기 여몽연합군이 일본 원정을 한 후 고려의 영토로 편입시켰다. 조선조 들어와 노략질하는 왜구들을 못견디고 섬을 비워버린 것이 화근이었다. 그후 일본령이 되었다.
"되찾을 수 없을까?"
찾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다. 미국 영토가 된 오가사와라(小笠原)군도를 일본이 반환 받았던 선례가 있듯이, 그것을 예로 삼는다면 되찾을 수 있는 근거는 충분했다. 일본이 오가사와라 군도를 되찾은 것은 삼국접양지도(프랑스어판)였다. 일본의 하야시 시헤이가 1785년 편찬한 삼국통람도설의 부도(付圖)인 이 지도에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 것(朝鮮ノ持ニ)'이라고 표기돼있다. 대마도 역시 한국령으로 표기되어 있다.
이 지도를 근거로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오가사와라군도를 반환받았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 지도를 근거로 대마도를 반환받을 수 있는 것이다. 오가사와라군도는 이오지마(硫黃島)를 포함해 한때 미국이 점령하고 있었다. 일본군이 미군을 피하느라 섬의 주민들을 모두 소개시키자 미국이 자국민을 이주시켜 점령해 살았다.
1951년 미일간에 체결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대마도는 일본령으로 인정되었고, 오가사와라군도는 미국령으로 확정되었다. 그후 일본은 자기 영토임을 내세워 오가사와라군도 반환을 꾸준히 요구했으나 샌프란시스코 조약 때문에 좌절되었다.
그러나 일본은 포기하지 않고, 국제적으로 공인된 물증이라며 삼국접양지도 프랑스어판 지도를 일본으로의 이전을 제시했다. 이 물증은 1862년에 제정된 국제합의정신, 즉 △선점(Occupation), △공인(Recognition), △시효(Prescription) 항목이었다. 결국 미국은 1968년 이를 받아들여 오가사와라 군도를 일본에 반환했다.
오가사와라 군도가 일본 영토라고 판단한 근거는 삼국접양지도 표기다. 같은 지도에 대마도는 조선땅이라고 표기되어있다. 오가사와라는 일본령이고, 대마도는 조선령이라는 논리는 자동적으로 성립되는 것이다.
일본은 오가사와라 군도를 되찾아오는 데만 방점을 두다 보니 한국과의 대마도 영토문제를 좌시했다. 그 후 이를 의식한 일본이 미국에 반환 근거로 제시한 삼국접양지도를 변조해 배포했다. 그러나 변조하고 날조한다고 해서 물증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프랑스어판 원본이 그대로 살아있고, 그 이외 근거 자료도 차고 넘치기 때문이다. <출처 : http//blog.daum.net/dogamk/일본이 대마도를 반환해야 하는 이유>

그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대마도가 일본 영토로 확정되자 이승만 정부는 대마도를 돌려줄 것을 요구했지만 묵살되었다. 일본이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좌절하는 데는 미국이 동아시아 정책을 펴는 데 있어 일본 편향의 영향이 컸다. 요시다 시게루를 비롯한 일본 외교 라인의 로비 활동이 무력화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때 한국은 전쟁 중이었다.
"우리가 주장해서 그렇지, 실상은 옛적부터 대마도는 일본 땅 아니었던가?"
오민균이 답했다. 그는 육사에 입교하자마자 이 분야를 집중 캔 적이 있었다.
"아닙니다. 세종 임금은 '대마도는 본시 우리땅이다(對馬島本是我國之地)' 라고 실록에 기록했습니다. 세종은 이종무로 하여금 대마도를 습격한 왜구를 토벌하도록 하고, 행정 관할을 경상도에 예속시켰습니다. 대마도주의 가계(家系)도 조선인입니다."
일본은 메이지 이전엔 수백 개의 번으로 구성된 소국가연합체제였다. 섬 하나가 소국인데 중앙정부는 각 번을 통제할 능력이 없었고, 칼을 든 거친 수령들을 다스릴 방법도 마땅치 않았다. 말하자면 군벌, 또는 토벌(土閥)자치주의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천하통일을 하기 전까지 소국들은 수많은 전쟁을 치렀다. 토벌하고 약탈하고 죽이는 호전성의 사무라이 정신이 배태되어 이것이 일본정신으로 자리잡았다. 소국끼리 전쟁을 벌이다 보니 남자들 씨가 마르고, 수령들은 종을 번식시키기 위해 여자들에게 수태하기 쉬운 옷을 입고 다니도록 조령(條令)을 내렸다. 누구 씨를 받든 받으라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은 남녀칠세부동석이라는 엄격한 예법의 나라 조선보다 성의식이 개방되었다. 이를 보고 조선은 왜놈을 천시하는 풍조가 생겼다. 다른 관점에서 보자면, 여자를 억압하는 구조에선 인류의 반의 역동성을 살리지 못하는 우를 범한 셈이 되었다.
조선은 남자세계의 무능이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다. 정묘·병자호란 양란(兩亂)을 겪으면서 수만 명의 여인들이 청나라로 끌려갔는데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고, 돌아와도 화냥년이라고 멸시했다. 사대부의 무능이 순박한 아녀자를 험한 꼴 당하게 만들어놓고, 돌아온 그들을 향해 모욕한 것이다. 이렇게 상층부의 자기 부정과 책임 회피는 체질이었다.
1년 생도 이정길도 나섰다. 그 역시 학구파였다.
"우리나라 성씨는 300개 정도 되지만 일본은 20만개가 넘는다고 해요. 혈통주의를 무시한 결과지요. 고래로 일본은 잦은 전쟁으로 남자들의 씨가 마르고, 종이 멸종할 위기에 처합니다. 지방 수령들이 여인들더러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 밖으로 나가도록 조치합니다. 그러면 남자의 씨를 손쉽게 받을 수 있겠지요. 그것이 기모노의 유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해서 종을 번식시키고, 번의 전략 자산을 확보하게 됩니다. 남자를 밭 가운데서 만나 애를 만들면 다나카(田中), 나루터에서 만나면 와타나베(渡邊), 소나무 아래서는 마쓰시다(松下), 대나무밭에서는 다케다(竹田) 또는 오타케(大竹), 보리밭에서는 무기타(麥田), 산인지 들인지 분간이 안된 곳에서는 야마노(山野), 오동나무 아래에서 행해졌다면 키리모토(桐本)라고 이름지었다고 합니다. 씨의 정체를 모르니 이렇게 종자를 받은 장소를 택해 작명하고, 가문의 시조로 삼는다는 것이죠.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그들을 근본없는 불상놈들이라고 경멸했지요. 하지만 혈통 중시의 순혈주의가 얼마나 폐쇄적입니까. 개방성과 역동성, 다양성의 세계관을 놓쳐버립니다. 여자의 정조를 따져서 열녀비 세워 추앙하며 인간의 기본적 애정 추구 욕구와 자연 순환의 법칙을 거부했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주어진 성을 사용하여 사랑을 추구하고 종을 번식시키는데 이것을 근본적으로 차단했던 것입니다. 이런 문화 속에서는 상상력과 개방성이 고갈되죠. 성 윤리의 타락을 말하지만 내면적으로는 우리가 더 타락했습니다. 권력있고, 재산 있으면 성을 아무렇게나 사용했습니다. 한마디로 위선이죠. 남자나 여자가 성을 자유롭게 사용한 것이 일본의 에너지를 확장시킨 힘의 원천이 되었다고 봅니다."
"이정길 대단하구만. 시실이든 아니든 그럴 듯한 입담이야. 독특한 애정관이고…."
그러면서 모두들 한바탕 웃었다.
"울릉도 독도에 관해서는 내가 한마디 할 수 있지."
장지성이 나섰다. 그는 육사 숙소에서 늙은 군인을 만났다. 예과를 마치고 본과(항공사관학교)로 올라간 1944년 3월 어느날, 늙은 병사가 장지성 구대에 배치되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젊은이들을 최전선으로 내보내고, 후방은 나이 먹은 예비역들을 재소집해 병참선과 후생을 지원토록 배치했다. 늙은 병사는 동해쪽의 시마네현 은기 출신으로 장지성에게 특별히 친근하게 다가왔다. 그는 장제스(蔣介石)가 일본 육사시절 그의 구대 당번병을 했으며, 그래서 장제스 총통과 같은 성씨 발음의 장지성에게 친근감을 나타낸 것이다.
"장 생도, 장제스 총통과 일가붙이인가?"
"왜요?"
"성이 같잖나. 내가 그의 당번병을 했거든. 그는 참 따뜻한 사람이었지. 하찮은 나를 인격적으로 대해주었어. 우리 조상은 대대로 어부였다네. 고기를 많이 잡는 비법을 알고 있지."
"어떻게요?"
"배를 타고 서쪽으로 멀리 나가면 '도쿠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그 섬이 황금어장이야. 거기 가서 그물만 던지면 만선을 이룬다네."
그는 이렇게 '도쿠도' 어장을 자랑했는데 '도쿠도'란 독도의 일본식 발음이었다. 일본이 말하는 '독도'라는 지명의 '다케시마(竹島)'는 1944년 현재 현지에서는 없었다. 독도를 일본 발음으로 '도쿠도'라고 했고, 섬 도(島)를 '시마'라고 부르다 보니 '도쿠시마'가 됐고, 그것이 전화되어 오늘날 그들이 말하는 다케시마(竹島)로 부르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 전화의 과정을 고려치 않고 대나무가 자란다는 뜻으로 다케시마로 부른다면 그것은 더욱 의미 상실이다. 독도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대나무가 자라지도 않았고, 자랄 수도 없는 바위섬이다. 지명은 지역특성과 연관시켜 붙이는 것이 관례인데, 험악한 바위섬의 지형조건상 독도는 대나무가 자란다는 뜻의 죽도가 애초에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장지성은 당시 '도쿠도'가 조선의 영토이고, 독도라는 섬이 있는지 알지 못했지만, 어부 출신 늙은 병사가 황금어장인 '도쿠도'라고 말함으로써 독도의 존재를 알았다. 독도는 일본 어민들로부터 대대로 불려온 지명이었다는 사실을 그때 알게 된 것이다.
"일본은 기회만 있으면 인접국과 영토분쟁을 일으키지. 그것으로 국가기반의 틀을 쌓는 명분으로 삼았어. 독도도 분쟁을 일으킬 소지가 있어. 우리가 우리 영토를 확실하게 지켜야 해. 영토분쟁을 미끼로 두 번 다시 침략하지 못하도록 명토박는 일이 필요해."
그 말은 이미 현실이 되었다. 일본은 1905년 시마네현 행정고시 제40호를 통해 독도를 자국영토라고 주장했다. 일본이 러일전쟁 수행과정에서 독도를 군사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편의적으로 취한 조치를 가지고 자기영토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를 근거로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독도가 일본 땅이라고 주장했다.
강화조약문에서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포함한 한국에 대한 모든 권리, 권원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라고 한 규정을 독도가 표기되지 않았다고 해서 자기들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한국의 3,300여개의 섬 중에서 대표적인 섬만 선언적·예시적으로 열거했을 뿐인데, 독도를 표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측이자 넌센스다. 그들 식으로 한다면 조문에 3,300개의 섬 지명을 모두 거명해야 한다는 뜻이고, 거명하지 않았기 때문에 특정한 도서는 자기들이 임의로 연고권을 주장해도 무방하다는 뜻이 된다.
그들도 '도쿠도'(독도)가 시마네현 주민들로부터 대대로 전해 내려온 고유지명이라는 것을 모르지 않았을 것이지만, 일단 시비를 걸어놓고 보자는 전략일 것이 분명하다. 여기에 초기 우리 지도자들이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한 책임도 적지 않다.

한반도 분할 통치도 마찬가지다.
일본은 태평양전쟁의 임계점에 도달하자 1945년 7월 불가침조약을 맺었던 소련을 중재자로 내세워 연합국에 항복 문제를 타진했다. 항복 조건은 한반도와 대만은 일본이 그대로 보유한다는 조건이 붙어있었다. 한반도와 대만은 태평양전쟁 이전 일본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기득권을 인정해 달라는 것이었다.
일본의 중재 요청을 받은 소련은 전세가 연합군 쪽으로 기울자 8월 8일 일본과의 불가침조약을 폐기하고 지체없이 만주로 진격했다. 미국의 참전 요청을 받아들인 군사행동이었다. 소련은 연해주를 거쳐 함경도 나진·봉기·기륭에 상륙했다. 8월 23일엔 '편의상 그어진' 38선 경계선의 개성까지 진군했다. 그대로 남하할 수도 있었지만 미국이 그은 선을 넘을 필요성은 없었다. 무엇보다 미국과의 신의와 협력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소련에 종전을 주선해 달라고 요청했을 때 상응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그것은 점령하고 있던 만주국과 한반도 일부를 양보한다는 조건이었다. 이는 러일전쟁 때 논의되었던 '거래'를 다시 꺼낸 것이었다. 러일전쟁 때 일본은 소련에 한반도를 반분하자고 제의했다.
그러나 소련은 1945년 8월의 전황상 일본의 제안을 거부해도 전승국의 일원이 될 수 있다고 판단하고 과감히 미군 편에 섰다. 소련은 일본과의 논의 과정에서 연해주와 만주는 진공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막강한 일본 관동군은 전선이 확대된 중국 남부와 인도차이나, 남태평양전선으로 이동시켜 사실상 무주공산이었다. 그래서 소련군은 소만국경에서만 전투를 벌였을 뿐, 별다른 저항없이 밀어붙여 러일전쟁 때 일본에 잃어버린 북방 4개 도서를 탈환하고, 한반도에 진입했다. 일본 본토를 향해 밀고 올라오던 미군의 전방 부대는 그 시간 오키나와를 공략하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과의 불가침조약 체결과 비밀 교섭과는 별도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미·소간의 협력을 강화하는 이중적 행태를 보였다. 국제질서는 힘이 센 쪽에 붙어야 이익을 챙긴다는 냉철한 현실론을 소련이 실증적으로 보여준 셈이다. 연합국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카이로회담(1943.12), 얄타회담(1945.2), 포츠담회담(1945.7)에서 소련은 참전 대가로 러·일전쟁 이전 장악했던 연해주와 만주를 되찾는 것을 미국으로부터 양해를 받았다.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은 여기에 동의하고 소련의 참전을 독려했다. 루즈벨트는 친소파였다.
루즈벨트는 미 국방성이 일본 관동군의 취약성을 바탕으로 올린 '소련군 참전 불필요 리포트'를 묵살하고, 소련군의 대일전 참여를 계속 요청했다. 일본의 만주 관동군의 군사력을 과신한 측면도 없지 않지만, 루즈벨트는 빨리 전쟁을 끝내려면 소련의 협력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대 독일전에서 소련은 영국 프랑스보다 엄청난 인적·물적 손실을 보고 고전 중이었다. 그래서 피로해진 소련을 끌어들이느라 루즈벨트는 적극적인 친소 정책을 폈다.
미국과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은 한반도는 일본 제국의 영토이고, 전승국의 전리품이며, 전승국으로서 점령 통치할 권한을 갖는다는 내용으로 정리되었다. 애초부터 코리아가 주권을 행사할 권리를 갖는다는 것은 거론되지 않았다. 한반도에는 일본의 지배를 받아 신음하고 있는 한민족이 살고 있다는 현실적 인식이 그들에게는 없었다. 일본이 패망하면 일본의 일부인 한반도도 패망한다고 보는 인식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 예일대학의 존 루이스 가디스 교수는 그의 저서 '냉전-새로운 역사'에서 "코리아는 미국에게 일종의 덤으로 주어진 영토"로 간주했다. 이에 착안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얄타회담에서 미국·중국·소련 세 나라가 한반도를 20-30년 신탁통치(식민지 지배)할 것을 제안했다. 이때 스탈린은 '신탁통치 기간은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고 제시했다. 상트페테르브르크에서 극동까지는 지리상 너무 멀고, 소련 영토 또한 광대했으며, 점증해가는 위성국을 관리하는데도 힘에 겨웠기 때문에 한반도 식민지 관리에 신경쓸 여력이 사실상 없었다. 미국 또한 확실한 코리아 대책이 수립된 것이 아니어서 그 문제는 있는 듯 없는 듯, 적당히 넘어갔다.
2차대전 종전 직전 병사한 루즈벨트의 뒤은 해리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경계했지만, 루즈벨트의 정책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어서 포츠담 회담장(1945.7)에 국무부의 딘 러스크 육군 대령을 데리고 나가 소련 군사실무자와 식민지 한반도 점령 대책을 협의토록 지시했다. 이 자리에서 러스크는 38선 분할을 제시했다. 미·소 군사실무 책임자들은 두 나라 군대의 한반도 작전 전개 능력과 진격 거리에 비춰볼 때, 소련지상군이 육상전을 펴고, 미 해·공군이 바다와 공중전을 지원하는 형태의 공동작전을 펴는 것이 합당하다고 평가했다. 소련지상군은 한반도에서 200km 안에 있지만, 미 지상군은 약 3,000km 밖의 태평양제도에 있었기 때문에 소련 지상군의 한반도 진격이 현실적인 방안이었다. 38선은 한반도의 일본군 무장해제를 위해 두 점령군인 미군과 소련군이 잠정적으로 작전범위를 나눈 선에 불과했다.
회담을 마치고 미국으로 돌아간 러스크 대령은 1945년 8월 10일 국방부 작전국의 작전참모 찰스 본스틸 대령을 만나 한반도에서의 미국 점령지 획정을 다시 논의했다. 그때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 북부에 상륙해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완전히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러스크와 본스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테이블에 펼쳐놓고 황급히 한반도의 가운데 지형을 가로로 일직선으로 자르는 38선을 그었다. 그들이 북위 38도선을 선택한 것은 소련과의 분할 균형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도 서울이 미국 점령지역 안에 속한다는 점 때문이었다.
생각없이 그어진 일직선상의 38선은 일본 점령지의 무장해제 구역을 지정한 연합군총사령부의 일반 명령 제1호로 공포되었다. 러스크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38선 획정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데 미 국무부와 국방부는 미군이 언제 어디서 그들의 항복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국무부는 가능한 북쪽인 만주의 주요 지점을 포함한 중국 본토에서 항복을 받아내기를 원했다. 하지만 미국 국방부는 미군이 거의, 혹은 전혀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한 지역을 책임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미국 국방부는 중국 본토에 진출하는 것을 전혀 원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시아 대륙에서 군사력을 어느 정도 유지하는 방법, 즉 한반도에 일종의 발판을 두어 상징적인 의미를 갖자는 절충안에 합의했다.
1945년 8월 10일의 회의에서 찰스 본스틸 대령과 나는 한반도 지도를 펴놓고 긴박한 상황이라는 압력하에서 미국의 점령 지역을 고르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다. 본스틸과 나는 한국 전문가가 아니었지만, 수도 서울은 미군 (점령)지역에 있어야 할 것으로 믿었다. 우리는 또한 미국 국방부가 미국의 점령지가 방대해지는 것에 반대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내셔널 지오그래픽 지도를 사용하면서 우리는 서울 바로 북쪽이 편리한 분계선이 될 것이라 추정했지만, 자연적·지리적 경계선을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38선을 생각해냈고, 이를 3성조정위원회에 추천했다. 3성위원회는 이 제안을 별 논쟁없이 수용했는데, 놀라운 점은 소련측에서도 전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나는 소련이 양국의 군사적 상황을 고려해 더 남쪽의 경계선을 주장할 것이라 예상했었다.
우리 2명의 대령을 포함해 위원회의 누구도 20세기 초에 러시아와 일본이 38선을 기준으로 조선을 분할하자고 협상한 사실이 있다는 점을 알지 못했다. 만약 그 역사적 사실을 알았다면 우리는 다른 분계선을 선택했을 것이다. 38선을 기준으로 과거 일본과의 한반도 분할을 모색했던 러시아는 우리의 38선 제안을 38선 이북에서의 소련의 세력권을 인정해 주는 것으로 해석했다. 우리 모두는 이 나라에 대해 무지했다."<출처 : http://kk1234ang.egloos.com>

한반도 분할은 러스크 대령의 삼각자와 동아시아 지도 한 장으로 하룻밤의 작업 끝에 최종 확정되었다. 단일종족, 단일언어, 단일민족 공동체를 이루고 사는 수천 년 역사의 지역민의 의사와 상관없이 러스크와 본스틸의 소박한 상황 인식 아래 그어진 국경선은 민족공동체를 영영 허리 부러진 불구로 만들어버렸다. 일직선상으로 그어진 선은 형제자매가 이웃해 사는 마을과 마을을 분리하고, 건너 마을에 사는 친인척과도 적이 되어야 하는 패륜적인 경계선이 되어버렸다. 이는 강과 산 지형에 따라 부족이 모여살고 있는 현실을 외면하고 서방 열강이 식민 지배를 위해 편의적으로 직선으로 국경선을 그은 것과 같았다. 그 결과 일가친척이 국경선 너머 타부족과 살게 되고, 타부족이 내 부족 안에 들어와 사는 꼴이 되었다. 식민지에서 해방되었어도 이로인해 부족간에 내전이 일상화되었다. 즉, 아프리카 제국과 같은 대결장이 한반도에도 제공된 것이었다.
미국의 대일전은 미국 단독전쟁이었던만큼 미국이 일본을 차지한 것과 같이 한반도 전부 차지하겠다고 나서도 소련이 반발할 이유는 없었다. 그간 양대국은 협력 관계를 유지해온데다 소련은 큰 희생없이 북방 4개 도서와 광대한 연해주를 먹은 것으로 성과를 거두었으니 미국에게 더 이상 영토 확장적 야심을 드러내진 않았다.
당초 연합국의 일본 전후 처리에 있어서 홋카이도와 도호쿠(東北)지방은 소련, 도호쿠를 제외한 혼슈(本洲)와 오키나와 사이판 등 북서태평양 제도는 미국, 영국은 규슈(九州), 중국은 시코쿠(四國)를 분할통치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 단독 전쟁으로 항복 문서를 받았기 때문에 미군이 일본 전역을 점령했다. 따라서 미국이 한반도까지 전부 차지하겠다고 나서도 소련이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일본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하고, 미국의 핵우산 밑으로 들어가 오늘의 번영을 이루었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외교의 힘이 컸다. 요시다 시게루를 비롯한 일본 외교 라인이 패망한 일본을 재건하기 위해 불철주야 뛰었다. 양갱, 전병, 예쁜 색상의 떡 따위를 앙징맞게 포장해 싸들고 외교관 부인들에게 보내는 정성을 보이면서까지 실리 외교전략을 구사했다. 이런 정성스런 떡 하나가 주변 아시아인을 참혹하게 만든 전범국가는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영토를 보존하는 힘이 되었다. 네 토막으로 나뉠 운명의 국토는 정성이 담긴 센베이와 기모노를 곱게 차려입은 게이샤의 웃음으로 온전하게 보존한 것이다. 그것이 번영의 전부일 수는 있으나 상당 부분 영향을 끼쳤다.
동아시아에서의 2차대전 전후 처리는 태평양전쟁을 독자적으로 수행했던 미국의 입장과 태도에 따라 좌우되었는데, 미국은 한반도와 일본의 전후 처리에서 확연히 구분되는 조치를 취했다. 미국은 '일본은 인종적·지리적·사회적·경제적으로 하나의 단위'라면서 분할 점령할 필요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역사·문화·인종·전통 등 모든 분야에서 일본보다 더 단일공동체인 한국은 반대로 두 동강이가 났다. 무한 피해를 입은 한국은 구체적 계획이나 준비도 없이 '편의적으로 적당히' 국토의 가운데를 잘라버린 것이다. 미 국무성 실무진의 야간작업대 위에 올려진 지도 한 장과 삼각자에 의해 지리적·역사적·문화적·인종적 실체로서의 최소한의 존엄성과 정체성마저 존중받지 못한 채 한반도는 분단의 고통을 떠안게 된 것이다.
하지 중장의 미 7함대 소속 24군단의 일부 병력이 1945년 9월 8일 인천에 상륙했을 때, 무장해제된 일본군 대신 일본 경찰이 환영 인파에 발포해 인천시민 2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수십 명이 다쳤지만 전승국 미군은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않았다. 오키나와에서 인천에 상륙한 미군 7보병부대 보병으로 참전한 마리오 베네딕토는 다음과 같이 당시를 회고했다.

"우리가 인천에 도착했을 때 한국인 단체(항만 노동단체)가 유인물을 전달했다. 미군이 일본인들의 목을 쳐달라는 요청이었다. '우리(한국인)는 잔혹한 일본 경찰에 의해 죽고 다쳤다. 그들은 여전히 너무나 야만적이고 비인간적이다. 세계의 어디에서도 일본과 같은 행위를 볼 수 없다. 일본제국주의자들이 여러분의 소중한 동료와 형제들을 살해한 것을 기억해달라'고 한 후 △일본 군대의 무장해제와 범죄자 처단 △행정권 인수와 일본인 재산 몰수 △평화와 민주주의 구현 등 3개항의 요청을 전달했다. 그러나 미군사령부는 이를 묵살했다." <출처 : 미 참전용사 프로젝트 </span>'Korea Labor Union'-Appeal to US Army>

미국이 기본적으로 친 일본, 비(반) 한국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미국은 서울 입성 다음날인 9월 9일 서울 종로구 조선총독부로 가서 그때까지 펄럭이던 일장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올림으로써 지배권을 행사했다. 8.15 해방이 되고도 한달 가까이 서울의 하늘에는 일장기가 펄럭이고 있었던 것이다.
일장기를 내리고, 조선총독으로부터 항복문서를 받은 미군은 그 길로 38분계선으로 달려가 이미 38선에 와있는 소련군과 만나 2차대전 승전의 팡파레를 올렸다. 서로 춤추고 노래하며 전승국의 기쁨을 만끽했는데, 그것은 두말할 것없이 히틀러·무쏠리니·히로히토를 차례로 물리친 연합군으로서 극동에서 다시 만난 재회의 환희였다.
연합군이 승리의 미주에 흠뻑 취한 사이 한반도 민중은 철저하게 구경꾼으로 전락했다. 미 태평양사령부는 한국을 독립국이 아니라 식민지로 접수했으며, 주민의 실존적·시민적 지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일본군국주의와 마찬가지로 국민에게 군림하고 호령했다. 영토와 주민을 일본으로부터 획득한 전리품으로 인식했을 뿐, 한반도 주권을 인정하고 민족 정체성을 인정한다는 해방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과정에서 불행히도 미·소 두 거인은 점차 대립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본래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기 전 루스벨트 대통령은 동북아시아의 평화체제는 일본을 철저히 분쇄하고, 우방국가인 소련·중국과 협력하여 평화를 유지하자는 구상으로 추진되었다. 그런데 루스벨트가 병사한 뒤 권력을 승계받은 헨리 트루먼 대통령이 이를 백지화했다. 이는 일차적으로 소련이 원인을 제공했지만 공산주의를 싫어한 트루만의 개인적 소양이 더 컸다.
소련은 전후 팽창정책을 추진하여 폴란드 등 동유럽 8개국을 공산 위성국으로 장악하고, 중국대륙에 공산 정권이 수립되도록 지원하고, 이런 사이 세계대전 중 우방국가였던 소련이 연합군에서 탈피하여 서방을 위협하는 국가로 변신하자 미국이 긴장했다. 이렇게 국제환경이 변화하자 미국은 일본마저 소련과 중국의 세력권에 흡수되어 소련·중국·일본 간에 하나의 블록이 형성되면 태평양 제해권은 물론 미국의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고 보았다. 반면 일본은 군국주의를 지탱한 기조가 반공산주의여서 근원적으로 소련과 보폭을 함께할 수 없었고, 또 불가침조약을 일방적으로 폐기한 배신감으로 미국의 품에 급속도로 다가갔다.
이렇게 양자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트루먼은 루스벨트의 동북아시아정책을 대폭 수정하여 일본을 소련에 대항하는 동반자로 이끌어 적국의 지위에서 우방국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적과의 동침을 실현시킨 것이다. 이후 한반도에서 6·25전쟁이 터지자 일본과의 외교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동북아시아 공산권 봉쇄정책의 대리인으로 일본을 내세웠다.<이상 한국학중앙연구원 민족문화대백과 '한일기본조약' 중 일부 인용.>
이렇게 해서 이른바 냉전(The Cold War) 체제가 형성되었다. 그 실험무대로 제공된 곳이 한반도였다. 전승국의 군사적 편의에 따라 그어진 잠정적 38도선은 냉전이 격화되는 과정에서 이념의 대리전을 치르는 최일선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분단 초기, 분단 극복의 여러 기제들 또한 작동하고 있었다. 정치 지도자들이 분열을 극복하고 내부역량을 결집시켜 나갔다면 분단구조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런데 변화하는 국제정세를 감지하지 못하고, 비좁은 울에서 피터지는 싸움만 벌이다 둘 다 비참한 최후를 맞는 투견 꼴이 되었다. 내 집에서 남의 집 잔치에 온 취객처럼 의미없이 주먹질하다 세상에 없는 불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왜 싸우는지 모르고 싸운다면 싸움의 기원이나 싸움이 부른 비극을 알 리가 없다. 내가 왜 여기서 싸우는지 그 이유를 알 필요도 없고 알려고도 하지 않으면서 피터지게 싸우는 극도의 허무주의. 다만 싸우니까 철저히 응징하겠다는 물리적 복수심의 악순환. 이것이 해방 공간의 무의미한 대결상으로 나타났으니 얻는 것이라고는 황폐한 몰골 뿐이었다.
점령군으로 온 미군 장교단은 매서운 추위와 이상하게도 인분 냄새 가득한 한반도에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가난하게 사는 주민은 더럽고, 일상 또한 좀도둑질과 거짓말을 하며 매우 비위생적으로 산다. 부자로 넉넉하게 살면 도둑도 될 수 없고, 거짓말도 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그저 멸시와 냉대와 경멸을 안가질 수 없다. 그들은 '신이 저버린 땅'을 하루 빨리 벗어나자는 생각으로 떠날 날짜만 쟀다. 명령에 따라 왔을 뿐, 주둔의 의미와 가치가 없는 땅으로 여겼다.
이런 상황에서 독특한 양극 제제가 남북 사이에 들어섰다. 미·소의 괴뢰성을 띤 이들 체제는, 금방 괴물이 되어갔다. 기득권을 확보한 특수 신분들이 남이 넘볼 수 없는 똬리를 틀더니 어느새 대를 이어 세습까지 하면서 또다른 의미의 식민지 폭력을 행사한다. 이는 남이나 북이나 별 차이가 없다. 외세의 식민주의와 내부의 식민주의가 동시에 존재했다. 이런 가운데 사람들은 정서적 불안과 허무주의, 절망감에 갇혀 살게 되는데, 그것이 곧 국민의 기질과 성향으로 굳어졌다. 내일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늘 불안하고 초조하고 조급하고 상대방을 부정하고 불신하는 풍조다. 배가 불러도 이런 인성은 쉽게 타개되지 않았다.

배가 부산항에 도착하자 모두들 짐을 챙겼다. 임순심은 항구를 바라볼 뿐, 짐을 꾸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얼굴을 들고 어디를 다시 찾아갈 수 없다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런 몸으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자격지심. 그러니 친구들도 만날 수 없다. 부모형제 얼굴은 더욱이나 대할 수 없다. 엄연한 피해자인데, 그녀가 죄인이 되어버렸다. 보상을 받긴 커녕 벌을 받는 꼴이 되었다. 그녀는 고국에 돌아오자 두렵기만 했다.
"임순심씨, 고향이 어디라고 했지요?"
오민균이 그녀에게 다가가 물었으나 그녀는 대답하지 않았다.
"순심씨의 지난 날을 아는 사람은 없어요. 나도 몰라요. 그리고 그것은 임순심씨 책임이 아니죠. 절대로 아니죠."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임순심 결심이 선 듯 말했다.
"길자 언니를 따라갈 거예요. 제주로 가서 해녀가 될 거예요."
"해녀가 되신다. 그래요. 마음 정하는대로 하세요. 나는 순심씨가 택한 길을 무조건 환영합니다."
"오생도님은 서울로 가시나요?"
"아니오. 충청도 고향집에 가서 잠시 쉬었다가 서울로 올라갈 생각입니다. 학업을 계속하든지 군대를 가든지 알아봐야지요."
그녀 두 눈에 눈물이 어른거렸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자신은 꿈에 그리던 호향을 갈 수 없다. 누구는 따뜻한 부모님의 품으로 돌아가는데, 그녀는 그럴 수가 없다. 그녀는 왈칵 울음이 쏟아지려는 것을 참았다. 일본군을 칼로 찔렀을 때 전사가 된 듯 자신감이 생겼지만 막상 고국에 돌아오자 겁부터 나는 것이었다.
오민균이 행낭에서 리본이 달린 조그만 봉투를 꺼냈다.
"여동생들에게 줄 선물인데 드리겠습니다. 조그만 성의입니다."
리본을 헤치고 봉투를 뜯자 흰 바탕에 안개꽃이 화사한 실크 머플러가 나왔다. 임순심이 머플러를 받아 머리에 둘렀다.
"잊지 않을 게요."
"언젠가 만날 날이 있겠지요."
선장실에 있던 강태선 선주가 나와 하선하는 생도들에게 큰 소리로 전송했다.
"여러분 그동안 고생 많았소. 잘 가시오. 신생조국에서 큰 역할들 하시오. 나는 제주로 가요."

새 출발선에 서서

종로 거리에 가을의 기색이 완연했다. 플라타나스 잎들이 갈색으로 물들고 조락한 잎들이 거리에 뒹굴고 있었다. 일군의 청년들이 목총을 집총한 채 구령에 맞춰 이찌 니, 이찌 니, 이찌 니 산 지를 외치며 어디론가 달려가고, 웃옷의 카라 깃을 세운 행인들도 부지런히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건물 벽과 가게 문짝에 선전벽보들이 나붙어 있었다. 오민균은 길을 가다 말고 한 벽보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조선의 사태는 금후 일본과 공동선언(포츠담선언)한 상대국 사이에서 교섭한 쌍방의 합의에 따라 비로소 통치권의 수여가 이루어지며, 그 위에 국가 시설 등에 대해서도 정당한 권한을 가진 자와 쌍방의 의지가 합치된 범위 내에서 정연하게 공식적인 접수가 이루어진다. 이전까지는 조선에 대한 제국의 통치권은 엄연히 존재하며, 이 기간 동안 총독부는 통치의 모든 책임을 짊어지고 항상 조선의 강복을 고려하면서 각 방면에서의 치안 확보, 민생안정 등 행정을 시책하고 있다.
(중략)조선통치 책임의 지위에 누가 설 것인가는 결정되지 않았다. 조선통치의 책임과 이 통치를 위한 시설 일체는 현재 여전히 총독부의 손 안에 있다. 
1945.8.20
조선총독부 정무총감 엔도 류사쿠

오민균은 벽보를 읽다 말고 다가가 찢어버렸다. 이런 벽보가 몇 달째 여전히 붙어있는 게 불쾌했다. 미군이 들어오기 전의 공백 기간 동안 지도자들이 총독부 관리들을 몰아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안타까웠다.
미군이 주둔한 지 두세 달이 되는동안 우리 지도자들이 행정 깊숙이 접근하지 못한 것도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군에게 덤벼들어 담판을 지었어야 했다. 그는 그때까지 고향에 박혀있었다. 그가 움직여서 딱히 무엇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지리멸렬하게 나갔다면 젊은 동기생들과 힘을 합쳐 뭔가 목소리를 냈을 것이다. 세상이 바뀌든 안바뀌든 목소리를 냈어야 했다. 그런데 지도자들끼리 서로에게 총구를 들이대기만 했다.
'어째 자꾸 늪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군.'  
오민균은 이정길이 약도에서 알려준대로 종로통의 종각 네거리에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간판을 찾았다. 화신백화점 맞은편 4층의 붉은 벽돌건물 벽면에 조선건국준비위원회(건준) 간판이 붙어있었다. 건준은 인민위원회(인공)로 확대 개편되었지만, 간판은 그대로였다. 건준은 전국 규모의 건국준비 단체여서 하루 아침에 해체될 수 없었고, 지역 일부에서는 지역 자치기관으로 사실상의 행정조직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인민위원회라는 이름을 함께 쓰는 곳도 있었다.
계단을 올라 3층 사무실로 들어서자 책상들이 길게 놓여있고, 헤드테이블마다 조직부, 운영부, 선전부, 정책부 팻말이 꽂혀있었다. 오민균이 선전부로 다가가자 그때까지 책상에 엎드려 무언가를 쓰고 있던 이정길이 뒤를 돌아다보더니 환히 웃었다.
"왔네? 벌써 연말이니 석달이 넘었군. 그래, 부모님은 평강하시고?"
"물론."
하지만 그런 의례적인 안부가 중요한 게 아니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천천히 얘기하자구. 잠깐 따라와 봐. 인사시켜줄게."
그가 안쪽 별도의 미술실로 오민균을 안내했다. 책상에서 포스터를 그리고 있던 중년 남자가 일손을 멈추고 두 사람을 돌아보았다.
"인사하게. 이쾌대 선생님이야."
오민균이 정중히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정길과는 일본육사 동기생입니다."
"오, 그래요? 반갑소. 얘긴 많이 들었소."
그가 부끄럼이 있는 소년처럼 조용히 웃었다. 모두 소파로 자리를 옮겨앉자 이정길이 길게 설명했다.
"이쾌대 선생님이 8월 16일 YMCA 강당에서 열린 건준 출범식 때 태극기를 그려서 회의장에 붙이셨어. 조선총독부에서 일장기가 내린 것은 9월 9일이지만, 이 선생님은 해방 다음날 맨먼저 태극기를 붙이신 거야. 모두들 태극기를 보고 우셨다네. 무릎 꿇고 절을 한 분도 있었다는군. 얼마나 간절했으면 그랬겠나. 이 선생님이 아니었으면 우린 지금도 태극기의 존재를 잘 몰랐을 거야. 그렇지요?"
이쾌대는 조용히 웃다가 "문양만 알고 있었으니 태극기가 서툴렀지요" 하고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이 선생님은 태극기의 괘가 복잡하시대. 국기는 이미지고 상징인데, 역서(易書)의 기호를 넣었다는 것이 오히려 국기의 뜻을 좁힌다는 것이지. 사람들이 괘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뜻을 모르는데 어떻게 기계적으로 따르느냐는 것이지. 외국인은 사괘를 얼굴에 숯검정을 붙여놓은 것처럼 장난스럽게 본다는 것이야. 세 개, 네 개, 다섯 개, 이렇게 괘가 복잡하게 그려져 있는 것을 깊은 뜻이 있는 것으로 이해하기보다 그저 작대기로 안다는 것이지. 안그렇습니까, 선생님?"
이쾌대가 조용히 웃었다.
"그건 이정길 씨의 의견이고. 하지만 맞아요. 국기는 심플하게 한 눈에 표상되어야 하는데 네 귀의 괘가 네 귀퉁이마다 복잡하니 사람들이 잘 이해를 못해요. 그러려니 하고 볼 뿐이고, 일본놈들에게 핍박당했으니 우리가 아껴야 한다고 애처롭게 보는 대상일 뿐이지. 일본놈들 좋아하지 않지만 단 하나 그럴싸하다는 것은 그들의 국기요. 히노마루는 에도 시대 일본 항구를 들락거리던 외국 배들과 구분하기 위해 흰 천 가운데에 사발을 엎어놓고 원을 그린 뒤 거기에 붉은 칠을 해서 깃발로 사용한 것이 유래인데, 단일성과 압축성, 단결력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지. 그 단순한 깃발이 왜놈의 정신을 상징해요. 선동적이고 애국심을 불러일으키지요. 우리도 국호가 정해지고, 정부가 수립되면 단순명쾌한 새 국기를 제정할 필요가 있소."
"그래도 우리의 애국자들이 품에 담고 다니던 국기 아닙니까?"
"하지만 의미를 잘 모르시지."
"그래서 답이 나와 있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렇지. 태극 문양만 그대로 살리면 우리 전통의 문양이 나오는 거지. 새롭게 디자인할 필요도 없소. 고래로 우리 선혈들이 지킨 태극 문양, 그 안에는 우리 혼, 우리 정신, 우리 역사가 함축되어 있소. 그리고 심플하니 아름답지 않소?"
"생각을 못해봤지만 그럴 듯하군요."
오민균이 동의했다. 이쾌대가 다기를 풀어 차를 끓이는 사이 이정길이 이쾌대 가문에 대해 소개했다.
"이쾌대 선생님 형님이 이여성 선생이야. 몽양 선생의 핵심 참모시지. 고보를 졸업하던 1918년에 김원봉, 김약수 선생과 함께 만주로 망명해서 무장 독립기지 건설에 나섰던 분이셔."
이여성은 경상도 칠곡의 대지주 출신이지만 토지를 모두 머슴들에게 분배해준 실천적 사회주의자였다.
"이여성 선생은 사회적 책무의식을 가지고 사신 분이라서 존경하게 되었어. 보수주의자의 가치로 사신 분이지, 그런데 사회주의자로 몰렸어. 이쾌대 선생님은 아름다운 풍경도 좋지만, 공장에서 쇠망치를 휘두르는 힘줄이 솟는 근육질의 청년상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야, 사실주의 작가시지. 안그렇습니까?"
이쾌대는 조용히 웃으며 이정길이 말하는 것을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차 한잔씩을 나누고 미술실을 나와 인근 선술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병헌, 장지성 생도들은 어떻게 지내는 거야?"
오민균이 막걸리를 들이켠 뒤 물었다.
"장지성 선배는 나주에서 교편잡는다고 하더군. 민립중학교 수학교사로 나간다더라구. 조병헌은 경성 2고보(경복중학) 동창들과 어울려 군사단체에 참여했다나봐."
"나도 군사단체를 알아보려고 해."
"군벌체제에 참여하기보다는 이승만 박사도 귀국하시고, 김구 선생도 귀국셨으니까 상황을 좀더 살피고 방향을 잡아도 되지 않을까. 그분들도 군사조직을 휘하에 둘 것이야. 그중 자넨 우리한테 붙으면 더 좋지 않겠나?"
이정길은 그의 형 이정남 주선으로 몽양 여운형 사무실에 출근하고 있었다. 이정남은 건준 청년부장 일을 맡고 있다가 인공이 확대 개편되자 박헌영 사무실로 자리를 옮겨갔다.
"형님은 박헌영 선생 쪽이고, 난 몽양 선생 편이야. 사람들은 몽양을 잘 모르는 것같애. 이상하게 그분에겐 정적이 많아."
"왜 그렇지?"
"글쎄. 잘나면 시기의 대상이 되는 것 아닌가? 선생은 그들을 정적으로 보지 않는데, 그들은 적으로 몰아붙여서 공격을 하지. 그렇다고 몽양 선생은 대꾸도 안하셔."
"정치란 자기가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실천하는 것이지. 그걸 위해 설명하고 설득하는 작업이 필요하잖나. 정적에게도 동의를 구하는 것이야, 그런데 대응을 하지 않으면, 그들이 해석하는대로 돌아가잖나. 오해가 기정사실이 되어버릴 수 있다구."
"그러게 말이야. 하지만 살벌하다고 하시는 거지. 체질에 안맞다고 맞대응을 거부하시고, 억울해도 외면하셔. 박헌영 선생과도 틈이 벌어졌어. 박은 자꾸만 사상의 선도(鮮度)로 피아를 구분하려 하고, 몽양 선생은 다 함께 더불어라는 포용성을 지니고 계시지. 난 몽양 선생의 노선이 좋아."
"그래서 눌러있는 거야?"
"응. 그런데 두 분의 노선 차이도 별게 아닌데 서로 대립하고 있다구. 있으면 얼마나 있을라구."
그러면서 이정길이 길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전라도 광주 벽돌공장에서 공원으로 숨어지내던 박헌영이 8월 19일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해방 다음날 결성된 장안파 공산당에 대항하여 김형선·이관술·김삼룡·이현상과 함께 공산당 재건(재건파)를 결성했다. 9월 열성자대회를 열어 장안파를 흡수해 조선공산당 중앙기구를 구성하여 책임비서에 취임했다. 이론, 투쟁경력, 조직력, 추진력 면에서 박헌영을 따를 자는 없었다. 때문에 그는 쉽게 공산당 제 세력을 통합해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것이다.
박헌영은 8월 테제, 즉 <현 정세와 우리의 임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해방 정국을 민주주의 혁명단계로 규정해 노동자뿐 아니라 농민 및 양심 있는 지주·자본가와도 연합하여 혁명전선을 결성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그 실천에 있어서 모험주의적 노선에 편향된 경향이어서 연합전선 취지와는 다소 거리를 두게 되었다. 몽양은 온건노선이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귀국하여 독립촉성중앙협의회(독촉)를 창설하자 조선공산당도 10월 23일 함께 참여했다. 그러나 11월 16일 친일파를 우선적으로 숙청해야 한다는 주장을 내세우면서 선 건국, 후 친일파 숙청을 내세운 독촉과 갈등을 보이고, 이승만과의 연합을 포기했다. 이념 때문이 아니라 친일파 처단 방식의 차이 때문에 갈라서게 된 것이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안이 발표되었을 때, 조선공산당이 찬탁으로 노선을 결정하면서 우익 세력인 김구 임정과 대립했다. 이때 이승만의 독촉은 찬반에서 미온적 태도를 보였다.
1946년 2월 15일 좌익세력의 총결집체인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이 결성되자, 여운형은 허헌·김원봉·백남운과 함께 민전 의장단의 일원으로 선출되었다. 7월 조선공산당 위폐사건을 계기로 미 군정의 좌익세력에 대한 탄압이 강행되면서 미 군정이 박헌영 등 공산당 핵심 간부에 대한 체포령을 내렸다. 박헌영은 9월 5일 관 속에 누워 영구차 행렬로 위장해 북한으로 탈출했다.
박헌영이 서울에 부재한 가운데 1946년 11월 3일 조선공산당·조선인민당 및 남조선신민당이 합쳐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자 부위원장에 추대됐으며, 계속 북한에 머물면서 '박헌영 서한'을 통해 남로당을 지휘했다.
사회주의 계열이면서도 공산주의자가 아닌 여운형을 중심으로 한 지식층이 1947년 5월 근로인민당을 조직하자, 좌익계는 남로당과 근로인민당으로 양분되었다. 이에앞서 1946년 8월 29일 북한에 북조선노동당(북로당)이 결성되었다. 1949년 6월 남북의 노동당이 조선노동당으로 통합, 발족되고 김일성이 실질적 지도자로 등극했다. 남로당은 김일성 지배 하에 들어갔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인용>
남한의 인민위원회(인공) 실무 조직은 박헌영 계열이 장악했고, 몽양은 소외되었다. 조직의 운영방식이 조직적인 사람과 낭만적인 사람의 차이였다. 몽양은 우파 세력을 끌어들여 세를 확장하려고 했지만 고하가 이끄는 한민당 계열은 도리어 그를 회색주의자, 기회주의자로 매도하고 나서 몽양의 입지는 좌우 양쪽에서 밀려 갈수록 약화되었다.
"너 정치할 거니?"
오민균이 묻자 이정길이 이미 준비되어있었던 것처럼 대답했다.
"공부할 거야. 경성대학 갈 거야. 형이 공부하라더군. 넌 어떡할 거야?"
"이범석, 이청천, 이응준, 이종찬 선배들을 찾아가려고 해."
"이종찬 선배는 귀국하지 않았고, 귀국해도 자숙한다고 하던데? 군 출신들은 각자 군사조직을 만들어 각자도생하는 것 같애. 그런데 경찰이 문제야. 조선총독부는 인공은 물론 제 정당을 인정하지 않고, 경찰을 우대하고 있어. 뭔가 정리가 안되는 분위기야. 국민 정서와 완전히 달라. 국민정서는 그게 아닌데 말이야."
"야, 우리가 언제 총독부 허가받고 움직였냐? 밀어붙여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고하 등 우파들이 터무니없이 모략하는 거야. 답답한 영감탱이야."
"고하라니? 한민당을 창당한 동아일보 사장 말이야?"
오민균도 고하 송진우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항일투쟁을 하다가 수차례 옥고를 치른 사람이다. 진영 논리에 따라 이분법적으로 나누어서 볼 인물이 아니다.
"맞아. 쪽바리 새끼들을 한반도에서 몰아내려면 서로 뭉쳐야 하는데 서로 겐세이를 놓는단 말이야. 그는 건준-인공을 인정하지 않아. 공산당과 손잡는다고 씹어대잖아. 일제 강점기 가장 피해를 본 세력인데 말이야."
"공산당 세력이 인공을 접수한 거는 사실 아닌가?"
"맞아. 하지만 합작이 뭐가 나쁜가. 그들이 무슨 철천지 원수야? 같은 하늘 아래서 독립투쟁해왔잖아. 미 군정도 공산당 인정했잖나. 몽양 선생의 기질과 성향 그대로 우파, 중도파, 민족주의 세력, 사회주의 세력, 공산주의 세력 모두 합쳐서 큰 강물을 이루어 나가면 대해에 이를 수 있지. 그러면 총독부 놈들 장난 못치고 도망간다니까. 분열하니 흔들어대는 거야. 물론 그들에게 놀아나는 놈들이 문제지만 말이야. 우리가 먼저 빌미를 제공하고 있어. 왜놈들은 본시 틈만 보이면 역습해오는 놈들 아니가. 지금도 끊임없이 미군정 놈들과 야합해서 계속 주인행세하고 있잖나. 지도자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가워. 거룩한 독립투쟁만 한 것이 훈장은 아니잖나. 지금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포스트 해방'의 디자인이 없어. 권력투쟁의 스킬에 익숙하지도 않고, 체질에도 안맞는 묘한 이념의 모자를 쓰고 너도나도 갈기갈기 찢기고 뜯고 있기만 해. 이런 때 친일 부역세력들은 배신의 병원균을 최대한 번식시켜서 나라를 도륙내려고 하잖나. 그들이 숨쉴 공간을 마련하는 거야. 결국 백성의 의식구조를 황폐화시킬 거야. 그러면서 전리품 챙기듯 이익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모두 쓸어갈 거야. 위선의 불야성은 이렇게 불을 밝히고 있단 말이야."
"답답하군."
"일본놈들 똥구녕 빨았던 놈들의 인생관은 절대로 바뀌지 않아. 친일 과정에서 이익도 사유화하고, 권력도 사유화하면서, 그러나 책임은 타자화하면서 자기만 잘되면 그만이라는 태도. 그러니 8.15 광복이 왔다고 독립이 된 게 아니야. 그런데도 지도자들은 그런 현실 인식이 없어. 일제 앞잡이들이 벌써 미 군정의 마름으로 충실히 길을 닦아주고 있잖아. 그런 면에서 고하도 이용당하고 있지."
"난 헷갈려서 뭐가 뭔지 모르겠어."
"고하는 좌익 계열이 건준-인공에 참여해 조직을 장악했다고 비판했는데, 현실을 보자고. 한민당에도 좌익이 없나? 사회분위기로 보면 사회주의가 대세가 아니냔 말이야."
이정길이 계속 불만을 터뜨렸다.
정치결사체는 이념이나 노선상의 이유로 뭉치는 것보다 학연과 지연·혈연 중심으로 참여하는 경우가 많았다. 학교 선후배, 혹은 집안의 형·삼촌이 특정 정파에 가담하면 그를 따라 관계를 맺게 된다. 한민당은 호남 지주계급 출신의 일본 유학파가 중심을 이루었고, 그래서 지주계급 특유의 자유주의적ᐧ민족주의적 우익 멘탈을 가지고 있었다. 고하를 비롯해 인촌 김성수, 근촌 백관수, 가인 김병로 등이다. 한때 공산당 핵심이었던 김준연도 전향해 한민당에 참여하고 있었다.
반면 대구를 중심으로 한 영남은 사회주의 저항 세력이 중심 축을 이루었다. 김단야(김천) 박열(문경) 김두봉(동래) 김원봉(밀양) 박문규(경산) 이관술(울산) 이재복(영천) 하재팔(대구) 박상희(구미) 안영달(경남) 황태성(대구) 등이 그들이다. 제주4.3 무장대사령관을 지낸 김달삼도 청소년기까지 대구에서 살았고, 인근 원주와 충주에는 이만규 김삼룡, 양양에는 최용달이 있었다. 칠곡 출신인 이쾌대 역시 형인 이여성과 함께 건국동맹(건맹)-건준-인공에 합류했다.
"각 인물 계보를 보면 참 흥미있다. 한 사람의 이념체계만 확인하면 그가 어디 출신이고 친구가 누군지를 알 수 있지. 고구마 줄기처럼 줄줄이 엮여져 나와. 넌 날 찾아왔으니 내 계보가 된 거야. 조병헌, 이성유, 장지성, 홍태화 생도들까지 가담하면 이정길파가 생기는 거지, 하하하."
"난 간다면 몽양선생 계보로 갈 거야."
"그래니 내 똘마니야, 하하하."
오민균은 이정길로부터 이런 저런 얘기를 듣고 국내 정치 상황을 어느 정도 짚었다.
"몽양 선생은 사무실에 나오시나?"
"모처에 계셔."
"모처라니?"
"요양 중이셔."
"요양 중? 그렇게 한가로우신가?"
"한가로우신 게 아니라 큰 일날뻔 했다구."
"뭐, 큰 일?"
"테러를 당하셨어."
테러를 당했다는 말에 오민균은 놀랐다. 국민들로부터 추앙을 받는 몽양 선생이 테러를 당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다음호에 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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