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뜨락] 이종완 농협중앙교육원 교수

나이를 먹을수록 살아있음이 기적임을 느낀다. 하루하루는 기적으로 채워진 선물이다. 일상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기념일이다. 사람들은 이런 기념일로는 모자라 또 다른 이름의 기념일을 만들어 자축하며 산다.

서양 풍속에서 유래된 결혼 25주년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의식인 은혼식(銀婚式)도 그 중 하나이다. 주변에서 은혼식 때 가족이 모두 몰디브를 다녀왔다는 분도 있고 명품 핸드백을 선물했다는 분도 있다. 기념일은 개인의 에피소드를 만들고 개인의 역사로 남는다. 혹여 결혼기념일을 깜박하고 챙기지 못하면 결혼생활을 하찮게 여기는 당사자로 낙인찍혀 배우자로부터 바가지 세례를 받기도 한다.

며칠 전 학생들과 중국 연수를 간 아내로부터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라는 문자를 받았다. 아내의 중국연수단이 춘추시대 월나라와 남송의 수도였던 소주 유적지로 향하는 길목에 웨딩드레스가 즐비한 곳을 지나게 되었단다. 웨딩드레스를 보자 자연스럽게 결혼기념일이 화두가 됐던 모양이다. 누군가 아내에게 결혼기념일이 언제냐고 물어와 아내가 무덤덤하게 ○월 ○일 이라고 답하니 오늘이 결혼기념일이라며 깜짝 놀라더란다. 결혼년도까지 확인하고는 올해가 은혼식인데 어쩌면 그렇게 무심할 수가 있느냐며 엄청 놀림을 받았다고 한다.

아내는 문자로 "우리의 결혼기념일에 축하 깃발을 올릴까요, 조기(弔旗)를 달까요?" 라는 질문을 장난스럽게 던져왔다. 바빠서 곧바로 답을 주지 못하자 "답이 없는 걸 보니 가슴에 근조(謹弔) 리본까지 달아야 하나…" 라는 문자가 왔다.

결혼기념일을 챙기지 못했음을 백배사죄하며 은혼식을 맞이하는 아내의 심정을 물으니 "25주년을 이렇게 편안하고 행복한 마음으로 맞이할 수 있는 지금의 상황이 참 고맙고 감사해요. 앞으로 또 다시 시작되는 25년도 열심히 살아서 결혼 50주년에도 오늘과 같은 편안함과 행복함을 누릴 수 있는 감사한 삶이 되도록 하루하루 더욱 공을 들여서 살아야겠어요"라는 문자가 왔다.

이에 "앞으로의 25년은 당신이 나를 지금껏 사랑했던 것보다 내가 당신을 훨씬 더 많이 사랑하며 사는 시간으로 만들겠다"는 내 마음을 전했다. 우리 부부의 은혼식은 앞으로 더욱 사랑하며 살기로 하는 맹약(盟約)의 반지를 아내에게 바치는 이벤트로 마무리 됐다.

안도현 시인은 "글을 쓸 때 최소 50번 이상 고치고 많을 때는 200번에서 300번까지도 수정한다. 혼자 보는 일기도 아니고, 둘이 읽는 편지도 아니고, 무한의 독자가 읽는 거라 수정에 수정을 거듭한다"고 한다. 인생은 연습이 없기 때문에 삶도 고치고 또 고치며 살아야 한다. 과정의 즐거움이 빠지고 결과만 얻으려하면 그게 바로 고통이라고 했다. 아내와 함께 25년간 채웠던 행복과 즐거움을 뒤돌아보는 시간만으로도 은혼식이 내게 준 큰 선물이다.

정진홍 작가는 "오늘 내가 남긴 흔적이 나의 역사이자 미래다.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는다. 삶의 흔적은 그 만큼 냉정하고 냉혹하다. 삶의 흔적은 남기기는 쉬울지 몰라도 지우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특히 감추고 싶은 흔적은 더욱 그렇다. 참으로 두려운 흔적이 아닐 수 없다"고 했다.

결혼 50주년인 금혼식을 채우게 될 앞으로의 25년은 감추고 싶은 흔적을 만들지 않으며 살고 싶다. 어떤 흔적을 남기며 살 것인지 고민이 깊어진다. 금혼식이 되는 날까지 채우게 될 인생의 스토리만 생각해도 가슴이 뛰고 벅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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