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이여성] (3) 남에서도, 북에서도 환영받지 못한 민족적 사회주의자

일본에서 만난 ‘사회주의’
원했던 민족적 사회주의, 그리고 통일 조선
여운형과의 만남, 꽃피우지 못한 좌우합작의 꿈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이여성
“촛불혁명 이후 한국, 이여성의 사상을 발굴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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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여성, ‘사회주의’와 만나다
일본 유학 중 소프라노 박경희 씨와 결혼
상해로 피신했다 귀국 후 기자 생활

이여성은 1세대 사회주의자였다. 장규식 중앙대학교 교수는 초기 한국 사회주의를 1922년 코민테른 4차대회에서 반제국주의 민족통일전선론이 제기된 후, 조선공산당 창당 전후 활동한 그룹을 1세대, 1928년 6차 대회 후 ‘계급 대 계급’ 전술에 따라 당 재건, 혁명적 노농운동을 한 그룹을 2세대, 조선공산당 북조선 분국과 조선신민당을 이끈 그룹을 3세대로 구분한다. 1세대 사회주의자는 주로 민족주의와 사회주의의 접점을 모색한 특징이 있다.

대구형무소 출소 후 1922년 이여성은 동경 기독교계 학교인 릿쿄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 식민시대 조선에는 교육기관이 부족했기 때문에, 고등교육은 일본에서 유학하는 것이 오히려 용이했다. 김약수는 1920년 한발 먼저 일본대학에서 수학 중이었다. 김약수가 창간한 신문 <대중시보>(大衆時報)에서 그는 “언론의 효과를 일층 나타내기 위하여서는 조선보다 동경, 오사카 등지가 나으리라는 생각으로 이여성 군과 나는 동경에 들어가 처음은 대중시보를 창간하다가 말기에 북성회의 조직에까지 이른 것이다”라고 썼다. 김약수는 일본에서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여 사회주의 모임에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었고, 뒤이어 일본에 유학 온 이여성도 김약수의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인다.

▲일제 조선총독부가 작성한 ‘조선인에 대한 시정관계잡건-재경 조선인 상황’ 문서. 이여성은 27세 학생으로 기록돼 있다. 이 문서에는 이여성뿐만 아니라 박열 등 조선 독립운동가들과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같은 조선 독립운동을 지지한 일본인들도 기록돼 있다.

이 시기, 이여성은 기독교적 사상을 넘어섰다. 1923년 1월, <조선일보>에 전선의 운명론이란 제목으로 게재된 이여성의 글에는 이렇게 쓰였다. “신인(神人) 관계의 추상적 윤리설에 대해 그 무지를 통적(痛摘)코자 하나이다.···신(神)의 존부를 회견(懷譴)하는 현대인은 이제로부터 신을 축(蹴)하고 자아를 기(起)하며 신의 영자(影子)인 운명을 척(擲)하고 자아의 노력에 소(訴)코자 하는 것이외다.”

이여성은 재일 조선인 학우회, 북성회, 일월회 등 다양한 조직 활동을 시작하며 사회주의 사상을 받아들였다.. 김인덕 성균관대 연구교수에 따르면, 1912년 결성된 학우회에는 안재홍, 송진우, 김성수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이여성은 김성수가 인수한 중앙학교를 졸업했다. 이여성은 훗날 안재홍과는 좌우합작운동을, 송진우와는 동아일보를 함께 하는 인연이 이어진다. 이여성은 학우회 활동의 일환으로 부산에서 함흥까지 이어지는 순회강연에 나섰다. 1923년 7월, 대구 조양회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이여성이 연사로 나섰는데, 이 때문에 검거돼 대구 검사국에서 20일간 조사를 받았지만, 기소되지는 않았다1.

북성회 해산 뒤 이여성은 사회주의자 써클 일월회 창설에도 함께했다. 일월회는 1월에 사망한 혁명가 카를 리프크네히크와 레닌을 기려 지은 이름이다. 재일 조선인 단체의 중추로, 여러 단체를 지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여성 조직 단체인 삼월회2도 일월회의 지도를 받았다. 삼월회에는 소프라노 박경희(朴慶姬, 1901~?)도 소속돼 활동하고 있었다. 박경희는 평양 출신으로, 동경음악대학교에서 유학 중이었다. 실력 있는 소프라노였지만 일본에서 ‘사의 찬미’로 유명세를 얻은 윤심덕의 그늘을 벗어나지는 못했다3.

박경희가 남긴 글에는 이여성이 피신을 위해 일본을 떠나 상해로 향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박경희가 쓴 ‘동란의 상해, 일음악가가 애아시체를 안고 울든 기록’4에 보면 이여성은 1920년대 중반 이미 상해로 피신했고, 박경희도 이여성을 따라 상해로 향했다. 제적등본 상에는 이들이 상해에서 혼인을 맺은 것으로 나온다.

이여성의 상해 피신 이유는 특별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지만, 신용균 교수는 1925~1926년 일제의 조선공산당 대규모 검거 사건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예를 들어 홍양명(洪陽明, 1906~?)은 당시 일본에서 사회주의 활동을 하고 있었는데, 1928년 체포된 뒤 훗날 전향했다. 1932년 홍양명이 남긴 글(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5)에는 이여성이 처한 당시 상황과 이여성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있다. 1929년 이여성의 귀국에 대해서 신용균 교수는 아내의 건강 악화와, 중국에서 활동하던 김원봉을 만난 후 국내에서도 검거를 피할 수 있으리라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한다.

▲동아일보에 실린 이여성의 그림. [사진=네이버 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30년 1월, <조선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할 때 그는 서울 중학동6에 정착했다. <조선일보> 부사장 안재홍은 1932년 재만주동포구호의연금 유용사건으로 구속되고 나서 고리대금업자 임경래가 사장으로 오자 조선일보를 떠났다. 1932년 10월 <동아일보>에 들어갔을 때 과거 인연이 있었던 송진우, 김성수 등과 다시 관계를 맺었다. 그리고 일장기 말소사건으로 <동아일보>가 무기 정간당하자 1936년 12월, 동아일보도 사직했다. 언론인으로서 활동하는 동안 이여성은 괄목할 업적을 남겼다. 그는 조선의 역사와 문화, 민중의 삶에 깊은 애착을 기반으로, 실증적 연구 방법을 도입한 저작물을 남겼다. 대표적인 것이 <약소민족운동>, <수자조선연구>, <조선복식고>이다.

▲이여성은 복식, 그림에 대한 글 이외에도 다양한 글을 동아일보에 연재했다. 이 글은 1935년 1월 1일부터 23일까지 14회 연재한 ‘공업조선의 해부’ 기사다.

이여성이 원했던 민족적 사회주의, 그리고 통일 조선
여운형과의 만남, 꽃피우지 못한 좌우합작의 꿈
남한에서도, 북한에서도 버림받은 이여성
“촛불혁명 이후 한국, 이여성의 사상을 발굴할 때다”

해방 직전, 이여성은 다시 정치 일선에 나선다. 여운형과의 만남이 계기가 됐을 것으로 여겨진다. 이여성은 1944년 여운형이 추진한 건국동맹에 가입했다. 여운형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한 자료는 특별히 없지만, 신용균 교수는 둘 다 언론 활동과 체육 활동에 힘을 쏟았다는 공통점, 사상적으로도 동질성이 있다는 점 등으로 친분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각인 각파의 대동단결’이라는 건국동맹의 활동 방향은 민족통일전선을 추구했던 이여성의 사상과도 들어맞는다. 1945년 일제 패망이 가까워지자 이여성은 여운형의 지시를 받아 국호, 국기 제정과 정치, 경제, 문화 등 건국을 위한 전문적 조사 연구 작업을 진행했다.

해방 후 이여성이 추구한 길은 좌우합작운동이었다. 그는 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조선인민당, 민주주의민족전선, 사회노동당, 근로인민당의 간부를 맡았다. 건준에서 여운형의 지시를 수행하는 등 핵심 인사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16일 휘문중 교정에 들어서는 (좌측부터) 이상백, 몽양 여운형, 이여성. [사진=몽양기념사업회]

인공(조선인민공화국)은 해방 후 민족 국가 건설을 위한 조직이었지만, 미군정의 반대로 특별한 역할을 하지는 못했다. 1945년 12월 13일자 <동아일보>에 보면, 인공 문제로 당시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한국민주당, 이여성의 성명이 나와 있다.

하지 사령관은 “조선의 안정과 독립을 위하여 나가는 진로에 계속적으로 생기는 오해와 지연을 금할 필요가 있어 나는 주도한 생각과 숙고를 한 후 여러분에게 이 성명을 발표한다···조선인민공화국은 정부도 아니고 그러한 직능을 집행할 하등권리가 없다. 남부조선에서 작용하는 유일한 정부는 연합군최고지휘관의 명령에 의해 수립된 군정이 있을 뿐이다”라며 “조선 내에 있는 미국인과 군정은 정당이나 정강을 가지고 시비를 하자는 것도 아니요 탄압하자는 것도 아니다”라고 밝혔다.

훗날 이승만의 단정수립론을 지지한 한국민주당도 “우리당으로서 이미 인민공화국해산명령을 발동하도록 임시정부에 건의까지 하였으니 금일 군정청으로서의 조치는 당연하다”라고 호응했다.

이여성은 하지 사령관의 성명에 대해 “인민정부의 수립은 조선의 현실정태에 미루어 가장 필요하고 필연적인 일”이라며 “해방조선의 신정치는 자체의 특수성을 잘 파악해서 선처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도 통일의 완성에 만사는 해결된다···군정당국에서도 통일공작에 적극적으로 협력해야 한다”라는 반박 성명을 냈다.

▲1947년 몽양 여운형의 장례식에 참석한 시민들. [사진=몽양여운형기념사업회]

미군정의 지지에 따라 정부 수립 주도권은 임시정부에 있었다. 이여성은 정부통합운동을 포기하고 정당통일운동에 나섰다. 인민당, 한국국민당, 조선공산당, 한국민주당, 임시정부와 회의를 열고 신탁통치에 관한 입장을 밝힌 4당 공동코뮤니케를 발표하는 성과도 냈다. 4당 코뮤니케는 좌우 주요 정당의 유일한 합의였는데 한민당 등 보수파의 입장 전환으로 하루 만에 파기됐다. 이번에는 신한민주당도 참가 시켜 5당 회의를 수차례 더 열었으나, 합의 도출에는 실패했다. 정당통일운동에 실패한 이여성은 미소공동회의 대응에 주력했다. 미소와 좌우익의 대립이 임시정부 수립에 악영향을 주는 상황이었다. 미소공위는 결렬을 거듭했고, 이승만은 정읍발언을 통해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였다.

2차 미소공동회의가 열리던 즈음 여운형이 암살된다. 여운형의 암살은 가시적 성과 없이 유지되던 좌우합작운동에 큰 타격이 된다. 국사편찬위원회 作 <국사관논총>에 따르면, 1947년 7월 19일, 극우단체 청년 한지근(韓智根)이 여운형을 암살7했다. 한지근은 법정에서 “좌우를 막론하고 박헌영·여운형·송진우 등 국내를 혼란하게 하는 지도자는 다 죽여야 나라가 바로 서겠기에 감행한 의거인데 무슨 잘못이냐”라고 말했다.

암살 직후, 미군정은 테러 배후에 대한 조사보다 여운형 계열 인사 탄압에 나섰다. 1947년 8월 12일, 미군정은 8·15기념식을 앞두고 좌익세력이 폭동을 일으키려고 한다는 구실로 좌익계열 정치인을 대량 검거했다.8 이때 이여성도 검거됐다. 좌익 세력은 8월 15일 해방기념대회를 명목으로 대규모 군중 투쟁을 계획했지만, 미군정은 선제적으로 민전 산하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들에 대해 대대적 검거를 시작했다. <국사관논총>에 따르면, 이 일로 8월 11일부터 23일경까지 약 2천 명이 체포됐고, 그중에는 이여성을 비롯해 백남운, 장건상, 이기석 등 좌익 세력 요인들도 포함됐다. 좌익계 인사들은 남한 사회에서 사실상 추방된 셈이다. 좌익 탄압은 1948년 12월 국가보안법 제정으로 이어졌다.

이여성이 언제 풀려났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후 남측에서의 활동 기록도 없다. 다만 1948년 4월, 민전과 근민당 간부들이 평양으로 향했고, 그 길로 평양에 남았기 때문에 이여성도 그즈음 월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신용균 교수는 이여성의 월북이 북한 정권 수립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여운형의 암살과 중도좌파에 대한 탄압으로 활동할 공간을 잃은 상황에서, 북한이 오히려 학문의 자유를 보장받을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여긴다. 남한 단독선거를 반대했지만, 1948년 초에도 이미 단독정부 수립이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다만, 가족을 모두 두고 혼자 월북한 점으로 볼 때 완전한 분단으로 교류가 끊기는 상황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으로 추측한다.

월북 후 이여성은 정치 일선에 나서기보다는 조선 미술사, 건축사 등 학술연구와 저술에 매진했다. 1956년에는 조선역사가민족위원회 중앙위원이 됐고, 1957년에는 김일성대학에서 강좌를 맡았다. 1958년에는 석굴암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고, 이후 드러난 공적 활동은 없다. 이 때문에 이즈음 김일성으로부터 숙청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현은미가 쓴 ‘조선독립의 물꼬 튼 영원한 민족주의자 이여성’에는 이여성의 딸 이미생 씨의 증언이 나온다. 1960년경 귀순한 김일성대학 교수가 증언하기로, 역사학 강좌장을 맡던 이여성은 “전체주의 체제하에서 학문발전이란 기대할 수 없다”는 발언했다가 순천의 도자기 공장에 화공으로 쫓겨 갔다고 했다. 이여성이 숙청되는 시기, 북한에 있던 김약산, 김약수도 숙청됐다. 길은 달랐지만 각자의 방법으로 조선 독립과 민족해방을 위해 투신했던 이여성, 김약산, 김약수는 김일성의 권력 장악 과정에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신용균 교수는 이여성을 민족적 사회주의자라고 규정한다. 사회주의자이면서도, 노동자의 국제적 계급투쟁을 말했던 마르크스의 사상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약소민족국가의 해방이 중요한 사회주의자의 과제라고 여겼고, 국제 공산주의를 추구하는 코민테른의 12월테제9에 단호히 반대했다. 식민지 조선 민중의 해방, 민족국가건설이 목표였다. 하지만 격변의 시기, 그의 신념은 빛을 보지 못했다.

신용균 교수는 한국 사회가 4·19 혁명, 5·18민중항쟁, 6월항쟁을 거쳐 21세기 촛불혁명을 겪은 지금에서야 이여성의 사상을 다시 제대로 살펴볼 기반이 다져졌다고 주장한다. 신 교수는 “전후 남한 역사 발전은 분단으로 인해 왜곡된 것들을 극복하는 과정이다. 곧 한국의 민주화 과정이다. 지금에 와서야 겨우 해방 공간에서 여운형, 김규식이 이야기했던 정치적 자유, 경제적 평등, 좌우 남북 합작이 주장했던 통일. 이런 문제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공간이 열렸다”라며 “해방 공간에서 좌우합작운동이 힘을 받지 못하고 극좌와 극우로 분열된 것이 한국의 비극이다. 분단은 공간뿐만 아니라 자유롭고 다양한 사상마저도 추방시켰다”라고 말했다. (계속)

#참고문헌
국사편찬위원회, 『국사관논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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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규식, 「20세기 전반 한국 사상계의 궤적과 민족주의 담론」, 『한국사연구회』, 150호,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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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양명, 「쟁쟁한 당대 논객의 풍모」, 『삼천리』, 제4권 제8호, 1932.
“전선의 운명론”, 이여성, 조선일보, 1923.1.25
“학우회강연단 제이대불기소 칠월삼십일일에”, 동아일보, 1923.8.2
“통일에 군정청협력하라”, 동아일보, 1945.12.13
“하지성명의 반향 강권발동이 적절”, 동아일보, 1945.12.13
“인민공화국존재는 조선독립달성을 방해”, 동아일보, 1945.12.13
“선거법회부직시공포 민의의입법부창설”, 동아일보, 1947.8.14
“좌익요인검거는 치안교란의 혐의”, 동아일보, 1947.8.14
“유명인 죽음 마케팅 ‘사의찬미’ 대성공 두려웠던 日이 발표한 노래는?”, 김문성 국악평론가, 동아일보, 2018.2.8

#도움
신용균 고려대학교 연구교수
최재성 성균관대학교 연구교수
이중희 계명대학교 명예교수
김윤오 칠곡문화원장
이한용 느티나무 헌책방(바우북) 대표
김인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강성희 칠곡군 신리 웃갓마을 주민

  1. 學友會講演團(학우회강연단) 第二隊不起訴(제이대불기소) 칠월삼십일일에, 동아일보, 1923.8.2
  2. 삼월회에는 박경희와 더불어 대구 출신 독립운동가 정칠성도 참여했다
  3. <동아일보>:[김문성의 盤세기]대박난 ‘사의찬미’… 흉내낸 ‘애상부’는 쪽박
  4. 상해에서 박경희는 처음 임신했으나, 사산했다.
  5. ···이군은 다독다방면임과 그 근면과 정력인 점에 잇서 조선의 인테리중 단연 제1류에 속할 인물이다. 그가 예술을 말하고, 정치를 말하고, 스포쓰를 말하고, 說去 說來하는 것을 드를때 그는 확실히 시대감각에 예민한 朝鮮에 잇서 가장 진보된 인테리의 하나이라는 것을 누구나 수긍치 아니치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凡然한 상식인은 안이다. 그는 확실히 朝鮮의 사회적 발전단계에 보조를 함께한 정열의 소유자엿고 과학을 밋는 학도적 양심의 소유자엿다.···그의 東京유학시대에 잇서서는 사회과학의 전도적 역할 또는 조선의 좌익운동의 뇌류를 일웟다고 할 일월회 의 창설자의 1인으로 또 그 기관잡지 「사상운동」의 경영자-여기에도 그는 만여원의 거액을 부담하엿다-로 또 名편집자로 가장 유력하게 활약하엿다. 그는 각금 연설회에도 참가하엿다.···그때 나는 엇던 노동조합의 대회에서 그가 「릿쿄대학」의 교복을 입고 일월회의 대표로써 축사를 한 것을 들엇다. 내가 그를 처음 대하기는 이때엿다. 그의 첫 인상은 그가 일에 대하야 진실하고 진정에 대하야 열정을 가지고 또 어느 편이나하면 사무적인 침착한 태도를 가진 얌전한 청년이엿다. 그는 그 후 얼마잇다가 왼일된지 그 애인-현재의 부인인 알토 가수로 유명한 박경희씨와 함께 상해로 건너가버렷다.
  6. 이후 1938년 서울 옥인동으로 이사했다. 옥인동 가옥은 2층 양옥집이다. 지금은 옥인동 집터에 아파트가 들어섰다. 옥인동 가옥에서 이여성은 <조선복식고>를 쓰며 연구했던 전통 의상을 이화여전 학생들에게 입게 하고 사진 자료로 만들었다. 이때 찍은 사진 일부가 <조선복식고> 원고에도 포함됐다.
  7. 국사편찬위는 <국사관논총>에서 여운형 암살에 대해 “미·소 양측 대표간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못하고 미소공위 사업이 다시 정돈되는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발생했다는 점에서 ‘반역사적’ 성격을 내포하고 있었으며, 미·소 양대국간의 냉전을 더욱 촉진시키고 미소공위를 결렬시키는 일 요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라고 평가한다.
  8. 1947년 8월 14일자 <동아일보>를 보면, 이인 검찰총장은 “현 질서를 파괴하고 치안을 교란케 한 혐의로 좌익계열의 정당단체 간부를 대량 검거해 취조 중이며, 엄정한 처단이 있을 것”이라고 밝힌다. 같은 날 신문지면상 머리기사는 미군정이 이승만, 김구와의 면담자리에서 남측의 단독선거와 관련한 선거법 공포 지연을 우려했다는 내용이었으며, 후면에는 “여운형씨 살해사건에 대하여 좌익에서는 우익에 책임을 전가시키려 가진 역선전을 다하나 체포된 범인의 진술에 따라 좌익계의 동지살상은 백일하에 폭로되었다”는 서북청년단의 성명도 실렸다. 서북청년회는 김구와 이승만의 자금 지원을 받은 단체다. 서북청년단은 4·3제주항쟁, 보도연맹사건 등에서 민간인 학살을 한 단체로, 훗날 김구도 암살한다.
  9. 조선농민 및 노동자의 임무에 관한 테제. 1928년 12월 코민테른이 채택한 조선공산당 재조직에 관한 결정서로, 과거 민족주의 세력과 협력을 주장한 것과 달리 조선 내 민족 부르주아도 협력 대상에서 배제한다는 방침이다. 이로 인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세력의 집결체였던 신간회도 해체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