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 포스터.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 포스터.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1993년 <키드캅>으로 데뷔한 이준익의 신작영화 <평양성>이 개봉되었다. 2003년 <황산벌>에서 그는 특유의 풍자와 해학을 선보였다. 나당 연합군에 맞서 싸웠던 계백과 오천 결사대의 영웅적인 항쟁을 건강한 웃음으로 버무린 감독의 솜씨는 갈채를 받았다. 폭군으로 알려진 연산군을 재조명하면서 그는 <왕의 남자>(2005)로 천만관객을 모았다.

그 이후 <라디오스타> (2006), <즐거운 인생> (2007), <님은 먼 곳에> (2008) 등으로 자신의 건재를 알렸다. 대중에게 망각된 스타가 만나는 지방 민초들의 일상을 따뜻하게 그려낸 <라디오 스타>. 찌질한 중년 사내들이 밴드를 재결성하면서 도달하는 인생의 본원적인 의미를 담은 <즐거운 인생>. '사랑'의 모티프로 월남전을 풀어낸 <님은 먼 곳에>.

<구르믈 버서난 달처럼>(2010)에서 이준익은 임진왜란을 목전에 둔 시기에 세상을 뒤집어 평등세상을 만들려는 혁명가의 이야기를 그려냈다. 따라서 그는 역사물과 현대물을 두루 섭렵하는 다양성을 보여준 감독이다. 더욱이 영화에 담긴 사회성 짙은 문제제기는 개인적인 영역과 긴밀하게 결합함으로써 젊은 관객들의 호응을 받기에 충분했다.

<평양성>에서 그는 어떤 재능과 역량을 보여주었는가. 한국인들이 아쉬워하는 역사의 한 장면에서 그가 제시하는 인생관과 역사관은 무엇인가. <평양성>에 그려져 있는,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역사적인 과거를 21세기의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이런 궁금증이 관객의 뇌리에서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꼼꼼하게 살펴볼 일이다.
 
나당 연합군, 누가 마지막 승자가 될 것인가

수나라의 뒤를 이은 당나라는 고창국과 돌궐을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려 한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나당 연합군은 동북아 맹주이자 마지막 걸림돌인 고구려로 향한다. 천리장성을 쌓아 대비하던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대막리지로 절대 권력을 누렸던 연개소문이 죽고 나자 상황이 급변한다.

<평양성>은 이런 상황을 영화 첫머리에 배치함으로써 향후 진행될 전개과정의 일단을 내비친다. 여기서 우리는 영화가 제기하는 문제의식을 쉽사리 알아챌 수 있다. 그것은 당나라군 총사령관 이적과 대총관 김유신의 서로 다른 속내에서 읽힌다. 김유신은 고구려 멸망 이후 신라까지 집어삼키려는 당나라의 강렬한 욕망을 간파하고 대비한다.

당나라는 사사건건 꼬투리를 잡아 신라의 콧대를 꺾고, 여차하면 통째로 신라를 집어삼킬 요량이다. <평양성>은 고구려와 나당 연합군의 결전이 아니라, 연합군 내부의 서로 엇갈리는 이해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어쩌면 이것이 이준익이 영화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고개를 갸우뚱하는 관객이 적잖다.

고구려의 필사적인 항전과 거기서 있을 법한 콧등 시리고 가슴 뭉클한 이야기를 기대한 관객들은 다소 실망할 수도 있을 터. 그러기에 <평양성>은 전작 <황산벌>과는 꽤나 다르다. 출전을 앞둔 계백에게 아이들을 끌어안은 채 "호랑이는 가죽 땜시 죽고, 사람은 이름 땜시 죽는다!"고 절규했던 계백의 아내 같은 호소력 짙은 배역은 찾아보기 어렵다.

고구려군은 어째서 분열되었는가

 이준익 감독의 영화 <평양성> 전투장면.

이준익 감독 영화 <평양성>의 전투장면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연개소문의 아들은 셋이다. 장남인 남생, 차남인 남건과 막내 남산이 그들이다. 이름이 서로 다르듯 그들은 생각도 다르다. 대외적인 위협이 없다면 다양성은 힘이 되지만, 절체절명의 시기에 그것은 분열로 작용한다. 하나의 결집된 힘으로 기능하지 못하는 다양성은 외부세력에 절호의 기회를 제공하며, 그것은 숱하게 반복된 역사가 증명한다.

관객은 645년이란 연대를 두 번 확인한다. 우리 모두에게 '안시성 전투'로 널리 알려진 양만춘의 성공적인 대당항쟁 연도다. 위대했던 승리의 기억을 되살리면서 강고한 투쟁을 선도하는 남건. 당나라를 중심으로 짜인 새로운 국제환경에 적응하려는 남생. 그런 형들 틈에서 괴로워하는 남산. 이들을 둘러싸고 668년 평양성의 전장은 깊어만 간다. 

현재 관점으로 보면 현실·외교주의자 남생에게도 분명 정당성이 있다. 수나라보다 월등 강력한 힘을 가진데다가 신라와 연합한 당나라의 막강한 군사력을 피하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소나기는 피하라'는 옛말도 있잖은가. 하지만 전시에는 예외 없이 주전파가 세력을 잡게 돼있다. 병자호란 당시 주화파 최명길과 주전파 김상헌의 대결을 보시라.

흥미로운 점은 <평양성>에서 남생과 남건의 관계 설정이다. 한쪽은 정치권력을 다른 한쪽은 군사적 실권을 장악한 형제의 모습을 보여준다. 실제로 진행된 고구려 멸망의 역사적 맥락은 전혀 다르다. 남건과 남산의 쿠데타로 실각한 남생이 자발적으로 당나라에 투항하고, 훗날 이적의 앞잡이가 된 인물이 남생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상상력이다.

<평양성>은 왜 역사에 충실하지 않은가

신라의 대총관 김유신은 668년 고구려를 침공한 나당 연합군에 합류하지 못했다. 질병으로 인해 문무왕이 직접 전쟁에 참가하고, 김유신은 경주에 남았다. 그가 태대각간이 된 것도 고구려 멸망 이후의 일이다. 이렇게 <평양성>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와 전혀 다른 사건들을 보여준다. 그것은 장르 규정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코미디와 전쟁'

우리 역사에서 굳이 되새기고 싶지 않은 것이 나당 연합군에게 속절없이 무너진 고구려와 백제 멸망 아니던가. 근대사 관점에서 보면 외세를 끌어들여 형제의 목을 친 전쟁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것은 근대국가와 민족주의 관점에서 볼 때 그러하다. 천년도 더된 삼국 정립기의 역사와 상황을 오직 오늘의 시각에서 재단함은 지나친 편향 아닌가.

그럼에도 <평양성>은 곳곳에서 민족자주의 관점을 드러낸다.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가 신라에 투항하고, 남생이 당나라로 망명하는 등 고구려는 연개소문 이후 극심한 내홍과 분란을 겪고 있었다. 김유신으로 대표되는 신라는 이런 호기를 놓치지 않으려는 자세가 확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화는 고구려와 신라의 생뚱맞은 의기투합을 보여준다.

오래도록 한민족의 맏아들 구실을 해왔던 대제국 고구려의 속절없는 패망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 감독의 의지 때문이다. 역사와 역사드라마, 실제 사실과 영화가 반드시 같아야 할 필요는 없으니까. 그런 점에서 이준익은 우리에게 역사적 사건을 해석하는 다채로운 관점 가운데 하나를 잦은 '웃음'과 함께 무겁지 않게 제시한 것이다.

거시기의 전쟁과 생존전략

 영화 <평양성> '거시기'역을 맡은 이문식.

영화 <평양성>에서 '거시기'역을 맡은 이문식. ⓒ 오마이뉴스 자료사진


<황산벌>을 본 관객이라면 친숙한 인물을 <평양성>에서 찾아낼 것이다. 백제유민들로 이루어진 신라군에 소속되어 나당 연합군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가한 '거시기'다. 그는 예나 지금이나 철저하게 실리를 추구한다. 그의 논리는 영화에서 여러 차례 되풀이되는데, 그것은 전쟁 무용론이다. 전쟁은 어떤 경우에도 민초들과 무관하다는 주장을 펼친다.

'살아남는 것'이 거시기의 지상목표다. 그것을 위해 그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다. 김유신, 김흠순, 김품일 같은 신라 장군들과 이적, 계필하력, 설인귀 같은 당나라 장군이 추구하는 영토 확장이나, 공적을 세워 출세하려는 '문디' 같은 인물과 거시기는 질적으로 다르다. 거시기는 그야말로 삶 자체와 주어진 생명을 최대한 행복하게 누리려는 인간이다.

관객은 자신도 모르게 거시기에 어느 정도 자신을 투영한다. 거시기가 뜬금없이 누리는 영화 속 호사를 부러워하지 않는 이는 없는 듯하다. 그럴 듯한 대의명분으로 포장된 전쟁 이데올로기에 언제나 가장 크게 희생당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거시기는 그 지점을 명확하고도 날카롭게 찔러오는 것이다. 그렇다. 희생양은 언제나 민중 혹은 민초다.

<평양성>에 내재한 긍정적인 요소가 있다면 그 점일 것이다. 도대체 전쟁이란 게 누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하는 문제의식을 확실하게 제기하기 때문이다. 660년과 668년 두 차례 전쟁에 다 참전했던 거시기가 설파하는 반전사상은 일차원적이고 직접적이지만, 그래서 그만큼 절실하게 다가온다. 이준익이 창조한 문제적인 인물 거시기.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는 낫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은 인류를 위협해왔다. 인간 역사에서 죽음을 전제로 한 극한적인 투쟁이 멈춘 적은 없었다. 지금도 인류는 지구촌 곳곳에서 살육을 벌이고 있다. 인간의 인간에 대한 죽임과 죽음을 멈추지 못하는 야만적인 종족 인류. 60년 전에 숱한 민초를 참혹하게 죽음의 땅으로 인도했던 6.25전쟁의 광풍과 후유증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2010년 11월 23일 한반도는 물론이려니와 세계를 경악시켰던 연평도 포격사건. 지금도 남북한은 냉전이 아니라 열전 한가운데 있다. 포격과 더불어 격화된 보수언론의 전쟁 부추기기는 <평양성>의 미덕을 새롭게 일깨운다. 대량살상과 엄청난 파괴를 동반하는 대규모 전쟁 혹은 국지전이 이 땅에서 발생한다면 누가 가장 크게 피해를 보겠는가.

<평양성>은 우리가 당면하고 있는 현실을 돌이키게 한다. 전쟁 없는 한반도의 평화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성찰하도록 이끈다. "가장 나쁜 평화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는 낫다"는 말이 있다. 평화야말로 21세기 한반도 최고의 가치다. 막무가내로 전쟁을 부추기는 보수언론과 야만적인 수구 정치가들은 <평양성>을 보고 반성하기 바란다.

대한민국 민초들은 전쟁을 하고 싶지 않는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야 한다. 무력도발을 응징하기 위해 대규모 전쟁마저 불사해야 한다는 전근대의 저급한 선동은 부디 그만두기 바란다. 남북전쟁을 충동하는 짓은 단일민족을 입에 달고 다니는 보수주의자들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될 것임을 뼛속 깊이 깨달아야 한다. <평양성>의 소중한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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