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 ‘경평’축구 부활하나?

입력 2014.11.08 (00:06) 수정 2014.11.08 (0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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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앵커 멘트>

'경-평 축구대회'라고 들어보셨죠?

남북 분단 전까지 서울의 옛 명칭인 경성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린 축구 대회인데요.

이를 부활하자는 취지에서 남북 유소년 축구팀이 경기도 연천에서 경기를 펼쳤습니다.

남북 경색 국면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스포츠 교류를 김종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7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남북 유소년 축구 교류전, 우리나라 풍생중과 북한 4.25 체육단 유소년 축구단의 경기는 북측이 3대 0으로 이겼지만, 승부를 떠나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북한 선수들의 참가와 한국 방문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양측 협의의 결과였습니다.

<녹취> 김경성(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 "7년만에 민간 단체가 추진한 대회에 북측 선수단이 참가했다는...대회가 주는 의미가 크다"

북한 선수들을 보면 체계적으로, 또 일반적으로 걸어갈 때도 줄을 맞추고 열을 맞춰서 걸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체조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만 선수들이 하나된 모습으로...

<리포트>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남한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다시 그라운드에 섰습니다.

상대 팀은 북한 선수들, 양측 선수들은 모두 가슴에 한반도기를 달고 전-후반 90분 동안 함께 뛰었습니다.

10년 넘게 중단됐던 남북 축구 교류를 '남북통일축구'란 이름으로 되살린 것입니다.

결과는 사이좋게 0대 0 무승부, 하지만 경기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녹취> 중계 멘트 : "승부를 떠나서 멋진 경기를 펼친 양팀 선수들입니다."

2000년대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한반도의 긴장 완화 분위기가 반영되면서, 남북 축구 교류는 한 단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남북 축구 교류전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9년,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에서 첫 경기를 개최했습니다.

이른바 경-평축구라고 불린 교류전의 시작입니다.

이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20차례 넘게 경기가 열렸습니다.

<녹취> 김지현(숭실대 홍보팀장) : "어마어마한 관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첫 대회를 휘문고등학교에서 했을 때는 만 여명이 모였고, 두번째 동대문구장에서 했을때는 2만명이 넘게 모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단일 종목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은다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남북은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했고 남북 축구 교류도 한동안 까맣게 잊혀졌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국가대표 경기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 한치도 물러날 수 없는 승부에서 득점 없이 비겨 공동으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2년 뒤인 1980년, 남북은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한국팀은 전반전에 먼저 한 골을 내줬지만, 후반 10분을 남겨놓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이어 성공시켰습니다.

<녹취> 당시 중계 : "2대 1로 역전시킨 가운데 북한팀을 당당히 눌러 이겼습니다!"

6.25 전쟁 이후 40년 가까이 치열한 경쟁 구도에 있던 남북 축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1990년에 마련됐습니다.

1990년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이 단일팀 구성에는 실패했지만 첫 공동 응원을 펼쳤고,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남북 통일축구경기가 열렸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북한팀이,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남한이 승리하면서, 축구 교류전이 다시 정착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녹취> 당시 북한 관람객 : "이것은 승부를 가르는 경기보다도 통일을 위한 북남 축구 선수들의 통일축구 경기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이겨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관계에 따라 좌우되던 축구 교류전은 서서히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2002년 대회 이후에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2000년 중반 이후 남북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바로 유소년 축구팀입니다.

남북체육교류협회는 남북간 계약서에 따라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유소년팀의 방문 경기를 10차례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곧 중단됐습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에 이어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건각들이 오랫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북한 국가대표 산실인 4.25 축구팀...

2009년부터 올해 초까지 남북 축구 교류전은 중국에서 치러졌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인터뷰> 김용진(한국축구과학회장) : "(중국)쿤밍같은데서 교류전이 있었는데 가장 이해관계가 덜 부각되는 그런 상황에서 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지만 길게 보면 우리가 우리 땅을 놔두고 다른 곳에서 한다는 좀 구차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이어 최근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36년 만에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에서 만난 남과 북의 대표팀은 그라운드에서는 양보 없는 치열한 경기를 펼쳤지만, 관중석은 달랐습니다.

아시안 게임 기간 북한 선수들을 응원해온 남북 공동응원단은 승부와 무관한 응원 구호로 화제가 됐습니다.

<녹취> "우리는 하나다!!"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선보였고, 한반도기도 다시 나부꼈습니다.

여자 축구 메달 시상식, 남북 대표팀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적인 장면을 선보였습니다.

따로 기념 사진을 찍는 남,북한 선수들에게 관중들이 같이 사진을 찍으라고 외치자, 선수들이 모두 함께 어깨 맞대고 여기에 화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 만에 북한 유소년 축구 대표팀이 중국 베이징을 통해 비행기로 남녘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남북 관계를 반영한 듯 북한 대표팀은 공식 기자회견과 외부 일정 등을 대부분 취소했습니다.

30여 명의 북측 선수단은 지정된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녹취> 숙소 관계자 : "(식사는 어떻게 해요?) 먹는 것 뭐 조금씩 뭐 음식은 여러가지 있는데 잘 먹더라고요. 그런데 고기를 거의 안 먹드라구요."

선수들은 한국 방문이 처음인 사람이 상당수 인 듯, 취재진의 질문에 때때로 반응을 보입니다.

<녹취> "(식사 다 같이 하신 것인가요?) 네 다 같이 합니다. (잠은 잘 잤어요?) 네 (박지성 축구센터 가는 일정있는데 몰랐어요?) 모르겠습니다."

연습장에서 만난 선수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오전 오후 두 차례 현지 적응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해 땀을 흘렸습니다.

<녹취> 최경식(전 축구 청소년팀 감독) : "(북한 4.25팀은) 경기에서 아마 양보를 절대 안 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승을 목표로 왔고 아마 좋은 실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해요."

이번 대회는 경기도 연천 주민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민들은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최근 대북 전단 살포 논란 때문인지 축구 교류전이 남북 관계 개선에 한 몫을 하길 바란다는 희망도 밝혔습니다.

<녹취> 강병자(주민) : "(대회계기로)우리 지역도 알리고 연천군도 좀 알리고 여기와서 북한 선수들이 축구 잘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녹취> 변예연(학생) : "이 계기를 통해서 북한이랑 사이가 좋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번 유소년 대회에는 경기, 강원, 인천 축구 대표팀과 북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4개 나라 6개 팀이 참가했습니다.

북한의 유소년 축구팀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07년 이후 7년 만입니다.

통일의 밑거름이 될 유소년들이 참석하는 대회라는 것과 민간 단체 차원의 교류라는 점에서 남북 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북한의 핵심 실세가 체육 분야를 주도하고있기 때문에 남북한의 체육교류는 얼어붙은 관계를 다소 부드럽게 하는 관계 개선에 그여하는 그런 역할을 할수 있다고 봅니다."

연천군의 한반도통일미래센터는 정부가 남북 교류 활성화에 대비해 이산가족 상봉장 용도로 지었고 이번에 북한 대표팀이 처음으로 머물게 됐습니다.

개막식에 이어서 진행된 남북 유소년팀 경기,승부를 떠나 두 팀의 만남 자체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90분 동안 함께 땀을 흘린 선수들은 서로 뜨거운 열정과 함께 가슴 속에 묻어둔 통일에 대한 희망도 나눴을 수도 있습입니다.

<인터뷰> "회 주최측인 민간단체는 이 같은 대회가 남북간 정치적인 대립으로 다시 중단되거나 제3국에서 열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멘트>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일때 정치 경제 군사적 현안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스포츠 분야는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는 독특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남북 축구 교류전이 더욱 활성화되서 보다 진전된 남북 관계를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취재파일 K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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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4-11-07 18:12:02
    • 수정2014-11-08 00:31:19
    취재파일K
<앵커 멘트>

'경-평 축구대회'라고 들어보셨죠?

남북 분단 전까지 서울의 옛 명칭인 경성과 평양에서 번갈아 열린 축구 대회인데요.

이를 부활하자는 취지에서 남북 유소년 축구팀이 경기도 연천에서 경기를 펼쳤습니다.

남북 경색 국면에서도 명맥을 이어온 스포츠 교류를 김종수 기자가 취재했습니다.

<리포트>

7년 만에 한국에서 열린 남북 유소년 축구 교류전, 우리나라 풍생중과 북한 4.25 체육단 유소년 축구단의 경기는 북측이 3대 0으로 이겼지만, 승부를 떠나 큰 감동을 선사했습니다.

북한 선수들의 참가와 한국 방문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양측 협의의 결과였습니다.

<녹취> 김경성(남북체육교류협회 이사장) : "7년만에 민간 단체가 추진한 대회에 북측 선수단이 참가했다는...대회가 주는 의미가 크다"

북한 선수들을 보면 체계적으로, 또 일반적으로 걸어갈 때도 줄을 맞추고 열을 맞춰서 걸어가는 모습을 볼수 있는데, 체조하는 모습도 그렇습니다만 선수들이 하나된 모습으로...

<리포트>

지난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이룬 남한 축구 대표팀 선수들이 다시 그라운드에 섰습니다.

상대 팀은 북한 선수들, 양측 선수들은 모두 가슴에 한반도기를 달고 전-후반 90분 동안 함께 뛰었습니다.

10년 넘게 중단됐던 남북 축구 교류를 '남북통일축구'란 이름으로 되살린 것입니다.

결과는 사이좋게 0대 0 무승부, 하지만 경기 결과에 집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녹취> 중계 멘트 : "승부를 떠나서 멋진 경기를 펼친 양팀 선수들입니다."

2000년대 들어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는 등 한반도의 긴장 완화 분위기가 반영되면서, 남북 축구 교류는 한 단계 도약의 발판을 마련했습니다.

남북 축구 교류전의 역사는 일제 강점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1929년, 경성중학이 주축이 된 경성팀과 숭실학교가 주축이 된 평양팀이 서울에서 첫 경기를 개최했습니다.

이른바 경-평축구라고 불린 교류전의 시작입니다.

이후 서울과 평양을 오가면서 20차례 넘게 경기가 열렸습니다.

<녹취> 김지현(숭실대 홍보팀장) : "어마어마한 관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첫 대회를 휘문고등학교에서 했을 때는 만 여명이 모였고, 두번째 동대문구장에서 했을때는 2만명이 넘게 모였다고 합니다. 그 당시 단일 종목으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모은다는게 쉽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6.25 전쟁 이후 남북은 치열한 체제 경쟁에 돌입했고 남북 축구 교류도 한동안 까맣게 잊혀졌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 국가대표 경기는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전이었습니다.

남과 북은 서로 한치도 물러날 수 없는 승부에서 득점 없이 비겨 공동으로 금메달을 수상했습니다.

2년 뒤인 1980년, 남북은 아시안컵 준결승전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한국팀은 전반전에 먼저 한 골을 내줬지만, 후반 10분을 남겨놓고 동점골과 역전골을 연이어 성공시켰습니다.

<녹취> 당시 중계 : "2대 1로 역전시킨 가운데 북한팀을 당당히 눌러 이겼습니다!"

6.25 전쟁 이후 40년 가까이 치열한 경쟁 구도에 있던 남북 축구에 획기적인 계기가 1990년에 마련됐습니다.

1990년에 열린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는 남북이 단일팀 구성에는 실패했지만 첫 공동 응원을 펼쳤고, 같은 해 10월에는 서울과 평양을 오가는 남북 통일축구경기가 열렸습니다.

평양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북한팀이, 서울에서 열린 2차전에서는 남한이 승리하면서, 축구 교류전이 다시 정착되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녹취> 당시 북한 관람객 : "이것은 승부를 가르는 경기보다도 통일을 위한 북남 축구 선수들의 통일축구 경기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이겨도 관계없다고 생각합니다."

남북 관계에 따라 좌우되던 축구 교류전은 서서히 정부 주도에서 민간 주도로 바뀌기 시작했지만, 2002년 대회 이후에는 한동안 침체기를 맞았습니다.

2000년 중반 이후 남북 스포츠 교류의 물꼬를 튼 것은 바로 유소년 축구팀입니다.

남북체육교류협회는 남북간 계약서에 따라 2006년부터 2008년까지 유소년팀의 방문 경기를 10차례 치렀습니다.

그러나 이마저도 곧 중단됐습니다.

2008년,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망 사건에 이어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으로 남북 관계가 다시 얼어붙었기 때문입니다.

남북의 건각들이 오랫만에 다시 만났습니다. 북한 국가대표 산실인 4.25 축구팀...

2009년부터 올해 초까지 남북 축구 교류전은 중국에서 치러졌습니다.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수준이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분석입니다.

<인터뷰> 김용진(한국축구과학회장) : "(중국)쿤밍같은데서 교류전이 있었는데 가장 이해관계가 덜 부각되는 그런 상황에서 했기 때문에 굉장히 중요하지만 길게 보면 우리가 우리 땅을 놔두고 다른 곳에서 한다는 좀 구차스러운 면이 있습니다."

이어 최근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36년 만에 아시안게임 축구 결승에서 만난 남과 북의 대표팀은 그라운드에서는 양보 없는 치열한 경기를 펼쳤지만, 관중석은 달랐습니다.

아시안 게임 기간 북한 선수들을 응원해온 남북 공동응원단은 승부와 무관한 응원 구호로 화제가 됐습니다.

<녹취> "우리는 하나다!!"

남북의 화합과 통일을 기원하는 현수막을 선보였고, 한반도기도 다시 나부꼈습니다.

여자 축구 메달 시상식, 남북 대표팀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감동적인 장면을 선보였습니다.

따로 기념 사진을 찍는 남,북한 선수들에게 관중들이 같이 사진을 찍으라고 외치자, 선수들이 모두 함께 어깨 맞대고 여기에 화답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달 만에 북한 유소년 축구 대표팀이 중국 베이징을 통해 비행기로 남녘땅을 밟았습니다.

그러나 최근의 남북 관계를 반영한 듯 북한 대표팀은 공식 기자회견과 외부 일정 등을 대부분 취소했습니다.

30여 명의 북측 선수단은 지정된 숙소에서 식사를 하고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녹취> 숙소 관계자 : "(식사는 어떻게 해요?) 먹는 것 뭐 조금씩 뭐 음식은 여러가지 있는데 잘 먹더라고요. 그런데 고기를 거의 안 먹드라구요."

선수들은 한국 방문이 처음인 사람이 상당수 인 듯, 취재진의 질문에 때때로 반응을 보입니다.

<녹취> "(식사 다 같이 하신 것인가요?) 네 다 같이 합니다. (잠은 잘 잤어요?) 네 (박지성 축구센터 가는 일정있는데 몰랐어요?) 모르겠습니다."

연습장에서 만난 선수들의 표정은 매우 진지했습니다.

모든 선수들이 오전 오후 두 차례 현지 적응 훈련에 빠짐없이 참석해 땀을 흘렸습니다.

<녹취> 최경식(전 축구 청소년팀 감독) : "(북한 4.25팀은) 경기에서 아마 양보를 절대 안 할 것입니다. 분명히 우승을 목표로 왔고 아마 좋은 실력을 보여주지 않을까 그런 예상을 해요."

이번 대회는 경기도 연천 주민들에겐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주민들은 북한 선수단을 환영하는 현수막을 내걸었습니다.

최근 대북 전단 살포 논란 때문인지 축구 교류전이 남북 관계 개선에 한 몫을 하길 바란다는 희망도 밝혔습니다.

<녹취> 강병자(주민) : "(대회계기로)우리 지역도 알리고 연천군도 좀 알리고 여기와서 북한 선수들이 축구 잘하고 갔으면 좋겠어요."

<녹취> 변예연(학생) : "이 계기를 통해서 북한이랑 사이가 좋아지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어요."

이번 유소년 대회에는 경기, 강원, 인천 축구 대표팀과 북한, 중국, 우즈베키스탄 등 4개 나라 6개 팀이 참가했습니다.

북한의 유소년 축구팀이 한국을 방문한 것은 지난 2007년 이후 7년 만입니다.

통일의 밑거름이 될 유소년들이 참석하는 대회라는 것과 민간 단체 차원의 교류라는 점에서 남북 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인터뷰> 정성장(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 : "북한의 핵심 실세가 체육 분야를 주도하고있기 때문에 남북한의 체육교류는 얼어붙은 관계를 다소 부드럽게 하는 관계 개선에 그여하는 그런 역할을 할수 있다고 봅니다."

연천군의 한반도통일미래센터는 정부가 남북 교류 활성화에 대비해 이산가족 상봉장 용도로 지었고 이번에 북한 대표팀이 처음으로 머물게 됐습니다.

개막식에 이어서 진행된 남북 유소년팀 경기,승부를 떠나 두 팀의 만남 자체가 주목을 받았습니다.

90분 동안 함께 땀을 흘린 선수들은 서로 뜨거운 열정과 함께 가슴 속에 묻어둔 통일에 대한 희망도 나눴을 수도 있습입니다.

<인터뷰> "회 주최측인 민간단체는 이 같은 대회가 남북간 정치적인 대립으로 다시 중단되거나 제3국에서 열리지 않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습니다."

<앵커 멘트>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일때 정치 경제 군사적 현안에서 한 발 떨어져 있는 스포츠 분야는 남북 교류의 물꼬를 트는 독특한 역할을 해왔습니다.

남북 축구 교류전이 더욱 활성화되서 보다 진전된 남북 관계를 만드는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취재파일 K 다음주에 다시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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