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 거리를 걷다]9. 동양의 정물화 ‘기명절지화’ 유행을 일으킨 장승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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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2019.10.14. 오후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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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영옥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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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화파식의 부귀, 행복, 장수 등 기복적이고 세속적인 목적의 그림이 유행한 것은 단지 교류의 영향만은 아니라고 본다. 이것이 당시 지배적인 미술 수요층으로 부상한 중인 부유층의 미감에 보다 들어맞았기 때문이다. 이는 장승업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요구한다.

조선 말기 화가 장승업은 영혼이 자유로운 화가의 이미지로 대중에게 각인이 되어 있다. 임권택 감독이 메가폰을 쥔 영화 〈취화선〉(2002)의 영향 탓이 크다. 그런 이미지를 증폭시키는 장치는 술과 여자다. 장승업의 삶에도 이는 어김없이 따라붙었다. 장지연張志淵(1864~1921)이 《일사유사逸士遺事》에서 “성품이 또한 여색을 좋아하여 노상 그림을 그릴 때는 반드시 미인을 옆에 두고 술을 따르게 해야 득의작이 나왔다고 한다”고 밝힌 것이 그러하다. 고아 출신이라는 점, 그런데도 그림 재주가 뛰어나 화명을 떨쳤고, 급기야 그것이 임금 귀에까지 들어갔다는 점, 궁궐로 불려 들어가 그림을 그렸으나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몰래 뛰쳐 나왔다는 에피소드 등 드라마틱한 요소들이 이어지며 장승업의 삶에는 구속을 싫어하는 자유인의 이미지가 겹쳐 있다.

# 술상을 차려 놓고 기명절지화를 그리다
장승업, '기명절지도'. 간송미술관 제공


그러나 장승업의 그림 세계엔 자신이 살았던 19세기 후반인 구한말~개항기의 격변기에 사회적으로 부상하며 미술시장의 주 수요층으로 떠오른 중인층과 농업 및 상업으로 돈을 번 신흥 부유층의 취향이 반영돼 있다. 생전 그와 교유했던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1864~1953)은 《근역서화징槿域書畵徵》에서 이렇게 밝혔다. “술을 좋아하고 거리끼는 것이 없어서 가는 곳마다 술상을 차려놓고 그림을 그려달라고 하면 당장 옷을 벗고 책상다리하고 ‘절지折枝와 기명器皿’을 그려 주었다.”
안중식과 조석진 합작 <기명절지도>, 1902, 비단에 채색, 각폭 138.0×33.0㎝, 아모레퍼시픽미술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그가 주문받아 그린 그림의 종류가 기명절지화器皿折枝畵였던 사실이다. 기명절지화는 중국 고대의 청동기나 도자기에 꽃가지, 과일, 채소 등을 곁들인 일종의 정물 그림으로, 구한말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크게 유행한 ‘동양식 정물화’라고 할 수 있다. 기명절지화의 유행을 일으킨 주인공이 장승업이다. 그는 전술했듯이 오경연의 집을 출입하며 중국에서 가져온 유명 서화를 많이 볼 수 있었지만 특히 기명과 절지 등을 깊이 연구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리하여 장승업은 청대 양주화파와 해상화파에 의해 개성적으로 그려진 기명(그릇)과 화훼(화초) 그림을 수용하여 기명절지화 양식을 창안했다. 장승업이 창안한 기명절지화는 그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조석진‧안중식, 그리고 두 사람의 제자인 관재貫齋 이도영李道榮(1884~1933) 등 세대를 이어 전파되며 근대 화단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 청동기 괴석 복숭아 모란 등의 그림에 담긴 부귀영화의 꿈

보통 기명절지화에서는 계절이나 정물의 상호연관성에 구애받기보다 길상의 의미를 강조해 기명이나 꽃 종류를 선택한다. 청동기 괴석 복숭아 모란 등의 경우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식이다. 기명절지화가 갖는 화려한 색감과 장식성, 행복과 장수, 출세를 비는 길상성 등은 이 시기에 미술시장의 새 수요층으로 자리 잡는 중인 부유층, 지주층의 세속적인 취향에 제대로 들어맞았던 것이다.

19세기 말 장승업에 의해 크게 유행하게 된 갈대밭 기러기 그림인 노안도蘆雁圖가 안중식과 조석진을 거쳐 근대화단으로 이어지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 갈대의 한자어인 ‘노蘆’가 중국어에서는 ‘늙을 로老’와 발음이 같고, 기러기의 한자어인 ‘안雁’이 평안의 ‘안安’과 발음이 같아 이 두 소재를 합하면 늙어서 평안하라는 뜻이 되어 사랑받은 주제였다.

개항기에 ‘머리칼을 머리 꼭대기에 맨’ 조선인과는 전혀 다른 이목구비와 옷차림을 한 서양인들이 출현하여 미술시장의 수요층으로 새롭게 등장했다면, 역관‧의관‧서리‧향리 같은 중인과 상업이나 농업으로 부를 취득한 신흥 부유층은 미술시장의 흐름을 좌우할 정도로 핵심 수요층으로 성장했다.
이도영 <나려기완도(羅麗器玩圖), 1930년, 종이에 채색, 각 폭 137.3×32.3㎝, 경기도박물관. 이도영이 1930년 서화협회전람회에 출품한 기명절지화이다. 민속적 정체성을 추구한 이도영의 예술세계를 보여준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em>


조선 시대 들어 왕과 종친에 이어 경화세족 京華世族(대대로 한양에 세거하며 관직과 부를 누렸던 양반 가문)으로 확산하던 서화 수장 문화는 18세기 이후 중인층이 모방하며 확산했다. 중인 수장문화의 막을 연 이가 영조 때 의관을 지낸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1727~1797)이었다. 19세기 들어서는 중인층 가운데서도 부를 성취할 기회가 많은 의관‧역관을 중심으로 서리 등 하급 관리층으로까지 퍼졌다. 그리하여 신위는 중인 서리의 집까지 골동품으로 채워졌다며 개탄하기도 했다.

# 중인도 누리는 양반의 특권…꿈틀거리는 계층 상승 욕망

1876년 일본과의 수교 이후 실권을 잡은 흥선대원군도 양반에게 줬던 복식 상의 특전을 파기하고 면세권을 철회하며 상인들에게도 검은 신발을 신도록 허락하는 등 양반과 같은 특권을 누리게 했다. 다시 말해 개항 이후에는 갑오개혁(1894)을 통해 신분제가 공식 폐지 이전부터 중인층이 사회적 지위와 부가 상승하는 기류 속에서 컬렉터로서의 파워 역시 커질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당시 가장 인기 있었던 화가였던 장승업의 주변에 포진하며 후원자 역할을 했던 이응헌, 변원규, 오경연, 오경석 형제 등 하나 같이 역관을 한 중인 출신이었다. 조선 시대에도 그림값은 싸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시대 가장 인지도와 역량이 있는 ‘스타 화가’에게 그림을 주문할 수 있는 서화 향유층이 기존의 권문세가에서 중인층으로 확산하거나 이동했을 것이며 이는 곧 당시 미술시장을 지배하는 수요층의 미감의 바뀌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장승업에게 술대접하며 그림을 주문했던 이들 가운데는 물론 왕과 고관대작, 문인 사대부도 있었다. 그러나 중인들이 이처럼 후원 층의 중심으로 들어와 있었고, 지방에서 농업으로 부를 취득한 부농까지 가세해 그에게 그림을 주문했다. 중인과 평민 부유층은 그들의 사랑방으로 장승업을 불러들여 원하는 장르의 그림을 그리게 할 수 있었다.

이는 곧 시장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장승업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미술시장에서의 전반적인 현상으로 봐야 한다. 민화 시장이 구한말 이후 번성했던 것도 그런 수요층의 대중화와 관련이 있다. 18세기에 가장 인기 있었던 화가인 겸재 정선을 후원했던 가문이 경화세족의 하나인 노론계 ‘안동 김 씨’였던 것과 비교하면 주력 미술 수요층의 교체에 반영된 시대상의 변화가 확연히 느껴진다.

중인층의 미감은 이전까지 사대부의 취향과는 달랐다. 보다 현실적이었다. ‘문자향 서권기’의 문인화가 아니었다. 조선 후기의 문인들이 문방구 위주의 그림을 그린 데 반해, 장승업은 고동기古銅器에 다양한 소재를 더하고 수묵에 채색을 곁들여서 길상성과 장식성을 강조했다. 장승업이 창안한 기명절지화는 그의 인기와 더불어 근대 화단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장승업이 산수나 도석인물화 그림보다 장식성이 있으면서 부귀와 출세와 장수와 아들을 많이 낳는 등 세속적인 욕망을 투영한 기명절지화나 화조화를 많이 그렸다는 것은 그만큼 이런 장르에 대한 주문이 많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 진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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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국민일보 미술·문화재 전문기자입니다. 깊이 들여다보고 관점을 달리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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