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 "조선인민에게 다음과 같이 포고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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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팩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11> [이계홍 작가, 언론인]
 
해방 후 왜곡된 역사 속에서,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는 효용을 다했다. 그러나 예고된 갈등이었다. 일본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35년, 8.15 광복과 분단체제, 그 이후 70년의 강고한 구 체제 시스템 속에서 우리 내부 깊숙이 침투해 들어와 알게 모르게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안에 우리 내부의 모순과 고뇌가 응축되어 있다. 이 모순과 고뇌를 탐구하려면 어떤 방법이 있을까.

한 개인사를 통해 시대와 사회를 비추는 거울 역할을 하는 것이 문학의 영역일 것이다. 그동안 우리는 외세 열강의 틈바구니에서 생존이 우선이었던 관계로 자기 자신을 앞세우지 못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잊어버렸고 안일했다. 그러다보니 역사는 박물관에 소장된 문화재인 양 화석화되고, 현대의 역사는 더군다나 묻혔다.

기자 출신 이계홍 작가의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그런 배경에서 나왔다. 이 소설은 2016년 10월호부터 2019년 6월호까지 문예월간 '월간문학'에 연재되었던 소설이다. 월간문학 연재를 마친 뒤 많은 부분을 수정 보완해 프레시안에 재수록한다.

이 연재물은 이른바 '팩션(Faction)'이다. 팩트와 픽션의 사이 어디에서 역사적 사실에 상상력을 덧붙인 '논픽션' 형식의 소설이다. 필자는 취재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말 일본 육사 출신 젊은 생도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어지러운 시대, 그 안에서 제국주의 광풍에 휘말린 젊은이들의 시각을 잡아내려 했다. 이계홍은 "일본의 극우 정권이 일제강점기의 역사적 사실들까지도 왜곡하는 역사 모독에 대해 하나의 담론시장을 형성하자는 데 목적이 있다"고 했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은 총 33회로 나뉘어 연재될 예정이다.(편집자)

바로가기 : 실록소설 '행군-어느 민족주의자를 위한 변명' 처음부터 보기

11장, 사랑과 이별

“태화짱이 가면 난 어떡해요? 나 어떻게 살아요?”
언덕 아래 폭격을 맞아 폐허가 된 도시를 내려다보며 소노 아사코가 눈물을 글썽였다. 키 큰 스기나무가 몇그루 서있는 양지쪽에 아사코와 홍태화는 어깨를 나란히 붙인 채 앉아서 도시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도쿄의 겨울은 그렇게 춥지 않지만 태평양에서 불어온 바람은 드셌다. 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몸을 움츠리며 오종종하게 걷는 모습이 을씨년스러워 보였다. 패전 뒤끝이어선지 표정들이 한결같이 어둡고, 그래서인지 더 추워보였다.
“태화짱이 떠나간다니 난 슬퍼요.”
사실 아사코는 요근래 그에게 모든 것을 걸면서 지내왔다. 아버지의 전사 소식을 들은 이후 집안은 늘 슬픔에 잠겨있었고, 그런 가운데 마음이 여린 두 모녀는 가느다랗게 숨만 내쉬었다. 공습경보가 울리면 기계적으로 방공호로 뛰어들고, 해제가 나서 집안으로 들어와도 늘 허기지듯 슬픔 속에 갇혀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렇게 모든 것이 힘겨웠지만 그를 만나자 생기가 돋았다. 종말에 다다른 듯 자포자기 상태에 빠져있는데, 홍태화를 만나면서 그녀 가슴이 봉긋해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듬직한 어깨와 잘생긴 얼굴, 절망적 상황과는 아랑곳없이 언제나 넉넉하게 짓는 웃음이 그녀 마음의 허기를 메워주었다. 그는 이제 그녀의 거대한 일부가 되어있었다. 
“안아줘요.”  
홍태화는 아아코 머리에 손을 넣고 그녀를 감싸안았다. 안고 있지만 그 역시 알싸하게 슬픔이 가슴으로 번져들고 있었다. 떠나야 하는 당위와, 남아야 하는 감성이 충돌해 한걸음도 나기지 못하고 있었다.
“나랑 여기서 오래오래 살면 안돼요?” 
“리즈 짱, 슬퍼하지만 말아. 오빤 가봐야 돼.”
아아코는 미국인 아버지가 가장 예쁘고 매력적인 순간만을 기억하라는 뜻으로 지어준 ‘리즈’를 중간이름으로 넣어 사용하고 있었는데, 그래서 소노 리즈 아사코라는 풀네임은 그녀의 가족사를 상징했고, 사랑의 증표가 되었다. 일본인 엄마와 미국인 아버지 사이에서 간절한 사랑으로 태어난 아사코, 그래서 그녀 이름엔 중층적인 나라의 정체성이 담겨져 있다. 아버지가 전사한 후 그들 모녀는 리즈란 애칭을 사용하지 않았으나 홍태화가 그것을 되살려주었다. 그가 때로 리즈라는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아사코는 아버지를 만난 착각에 빠졌다. 그래서 아빠, 하고 안기고 싶은 충동을 때때로 느꼈다. 그런 그를 떠나보낸다는 것은 견딜 수 없는 아픔이자 고통이다.
“조선은 지금 혼란스럽다고 하죠? 안정될 때까지 아사코랑 살면 안돼요?”
그녀가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했다. 
“아사코는 전쟁 복구가 되면 여학교 복학을 하고, 학업을 계속해야지. 시도 써야 하고. 그 사이 난 조선에 들어가서 자리를 잡고, 그런 다음 데리러 올게.”
하지만 귀국하면 돌아온다는 기약은 없다. 어쩌면 조선 처녀에게 그를 빼앗길 지도 모른다. 그런 불길한 예감은 늘 그녀 가슴을 지배했다. 전쟁 통에 아버지를 잃고, 종전이 되어 첫사랑을 잃는다면? 그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지겨운 전쟁이 끝났으니 희망이 살아나야 하는데, 또 잃을 것이 있다는 것은 그녀에겐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홍태화는 장지성의 편지를 되새겼다. 하루속히 귀국하라는 것이었고, 신생조국은 젊은 청년을 부른다고 했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져있는 그에게 정신 차리라는 충고로 들렸다. 오민균 조병헌 이성유가 군에 입대해 건군 대오에 끼어들었으며, 벌써 군사영어학교가 개교해 젊은 장교를 부르고 있는데, 넌 거기서 무엇에 갇혀있느냐고 꾸짖는 것 같았다. 미나미 여사의 몸의 상처를 수습하느라 귀국대열에 합류하지 못하고, 두 모녀 뒷바라지를 하다 보니 늦어진 것이지만, 남의 시선으로 보면 소녀에게 흠뻑 빠져 헤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엄마도 부상에서 회복됐으니 이제 귀국해야 돼.” 
“엄마는 일본과 조선이 전쟁을 일으킬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럴 리 없지. 일본이 적국인 미국과 전쟁을 치렀어도 리즈 엄마와 아빠가 사랑하고 있었듯이 그건 나와 아사코 사이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아.”
“엄마는 조선의 남과 북이 나뉘어서 서로 총부리를 겨눌지도 모른다고 했어요. 그런 곳에 태화짱을 어떻게 보내요? 태화짱의 아이를 낳고, 함께 아이를 돌보고, 함께 유모차를 끌고 시장에 가고, 함께 식사를 하고, 함께 영화보러 가고, 함께 온천을 가고, 함께 태평양제도로 나가 자유를 한껏 맛보고... 그러고 싶어요.”
그는 말없이 여린 그녀 감성만큼이나 가냘픈 그녀 두 어깨를 깊숙이 끌어안았다.
“꼭 돌아올 거야. 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야 해. 사랑 때문에 사나이가 해야 할 일을 못한다면 그 인생이 무의미하지. 더 큰 사랑을 얻기 위해 남자는 큰 일을 도모하는 거야.”
“그건 나도 알아요. 하지만 난 언제나 슬픔만을 먹고 살아야 하잖아요.”
“슬프지 않게 해줄 거야. 잠시 헤어져 있는 것 뿐이야.”
“잠시가 두려워요. 그게 영원으로 가버리면 어떡해요?”
아사코가 마침내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기 시작했다. 홍태화는 그녀의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혀로 핥았다. 짭짤한 맛이 스민 눈물은 계속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사코, 반드시 데리러 올게. 약속해.”
“꼭 오겠다고 약속해요.”
그녀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홍태화가 손가락을 걸어 약속을 다짐했다. 
“우린 잠시 헤어지는 거야. 잠시 헤어지는 것은 더큰 사랑을 얻기 위해서지.”
“우리 아빠도 금방 갔다 온다고 했어요. 아버진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데 엄마를 위해서, 엄마의 나라를 위해서, 사랑을 위해서 간다고 나섰다가 영영 못돌아 왔죠.”
“난 그렇게 허약한 사람이 아니야. 사랑하는 나의 예쁜 아사코가 있는데 오지 않을 이유가 없지.”
“태화짱이 오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나쁜 운명이란 것이 있잖아요.”
“나쁜 운명... 그래, 하지만 걱정 마. 나는 운명을 개척하는 불사신이지 쓰러지는 나무가 아니야. 내가 이 스기나무처럼 의연하게 서서 아사코를 지켜줄 거야.”
“그래요. 당신은 그럴 거예요. 하지만 이별이 야속해요. 오늘밤은 저랑 함께 자요.”
“집에 가서 짐을 꾸려야 해. 이시하라 상을 뵈어야 하고.”
“아녜요. 당신과 자고 싶어요.”
그녀가 그의 턱밑까지 바짝 얼굴을 들이밀더니 그의 입술을 더듬어 깊숙이 키스를 했다. 꽃잎처럼 부드러운 아사코의 입술은 차가왔으나 금방 온기가 돌았다. 
“책임지지 못할 일을 하면 안돼.”
홍태화가 그녀를 안은 채 나직이 말했다.
“그럼 날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인가요?”
“책임을 지니까 그렇지. 죽을 때까지.”
“그걸 어떻게 약속해요?”
“절대로절대로 함께한다고 어머니 앞에서 약속할게.”
그는 일어나 아사코를 두 팔로 번쩍 안아올렸다. 그의 목에 팔을 건 아사코가 의외로 가벼웠다. 그녀 눈에 눈물이 맺혀서가 아니라 그녀 몸이 깃털처럼 가벼워서 그는 울음을 쏟고 말았다. 전쟁의 상흔은 열일곱살의 소녀에게도 에둘러가지 않았다. 전쟁은 그녀가 지닌 아름다운 진액을 뽑아가버린 것 같았다. 영양 상태는 고르지 못하고, 나날이 공포스런 삶을 살았으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피폐했을 것이다. 
서편 하늘이 선홍빛으로 붉게 물들어가고 있었다. 황혼은 슬프도록 아름다웠다.  

“난 아사코짱을 찾느라 골목을 돌아다녔어. 그런데 황혼빛이 너무 고와서 한동안 넋을 잃었네. 서편 하늘만 바라보았지. 슬퍼서 눈물이 나오려고 했어. 그래 재미있게 시간 보냈나요?”
미나미 여사는 한 손으로 허리를 받히고 힘겹게 현관 앞에 서서 두 사람을 맞았다. 나았다고했지만 그녀 몸이 온전히 성한 편은 아니었다.
“언덕에 올라갔다 왔습니다.”
“잘했어요. 저녁 노을은 슬프지만 아름답죠. 저녁을 지어놨으니 먹고 가요.”
“네, 고맙습니다, 어머니.”
“엄마, 내일 태화짱이 귀국하시겠대요.”
아사코가 말하자 미나미 여사가 놀란 듯하다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담담하게 받았다.
“돌아갈 줄 알았어요. 해방이 되었으니 당연히 고국으로 돌아가야죠. 그동안 아사코 짱이 너무 태화짱을 붙들었던 거야. 내 몸 챙기느라 그리 된 거구. 태화짱이 이렇게 보살펴 주지 않았다면 난 일어나지 못했을 거예요. 얼마나 고마운지....”
“아닙니다, 어머니. 회복하시겠다는 간절함이 어머니를 완쾌시킨 거지요.”
“고마워요. 하지만 아사코짱이 또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미나미 여사가 쓸쓸하게 웃었다.
“시간은 얼마 걸리지 않을 겁니다. 꼭 데리러 올 거예요. 자리를 잡으면 데리러 옵니다.”
“그럼 난 아사코짱과 헤어져야 하는군요? 하긴 인생은 이별을 준비하는 행로니까...”
“아닙니다. 어머니도 함께 모시겠습니다.”
미나미 여사가 서편 하늘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녀는 애써 눈물을 감추고 있었다. 
“저 황혼의 서편에 조선이란 나라가 있겠지요? 태화짱, 가끔 그곳이 그리운 때가 있어요. 태화짱 고국이라서 그러겠지요? 젊은 생도들도 돌아가 있을 것이고... 우리 아사코를 데리러 온다지만 아직 처녀티를 벗지못한 아이가 적국이나 다름없는 조선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 수 있을까, 걱정으로 마음이 아팠어요? 우리가 너무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데, 그게 용납이 될까요?”
“어머니, 아사코가 무슨 죄가 있나요. 아사코 역시 피해자잖아요. 국민은 똑같이 피해를 입고 상처를 받은 사람들이죠. 아사코에게 죄가 있다면 홍태화를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그걸 제가 감당할 겁니다. 가장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여성으로 만들 거예요. 그리고 저희 부모님은 아사코를 친딸 이상으로 사랑하실 겁니다. 이렇게 곱고 착한 아사코를 소중하게 받아들일 거예요.”
“그래요. 고마워요. 나도 그렇게 생각해요. 예의바른 홍짱을 보면 홍짱 가문의 품격을 알 수 있어요. 전라도 나주가 고향이라고 했지요? 평야가 드넓고, 그런만큼 평화를 사랑하고, 겸양과 품위를 지킨다는 고장...”
“그리고 불의에는 참지 못하는 고장입니다.”
“그런 고향에서 살 작정인가요?”
“아닙니다. 부모님을 뵙고 서울로 올라가려고 합니다. 동기들이 부르고 있으니까요.”
“그럼 오민균 생도도 만나겠군요?”
“네. 오 생도는 지금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습니다.”
“고마운 청년이에요. 선물을 하나 준비할테니 전해줄 수 있겠어요?”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미나미 여사는 미군기의 폭격으로 건물이 무너지고 그녀 옆구리의 살점이 뜯겨져나간 악몽을 되새겼다. 상처 부위의 괴사가 심해 고름이 질질 흐르는 환부를 입으로 빨아내 말끔히 씻어내고 요드징크로 소독한 다음 거즈를 붙여주던 오민균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어떤 일본 청년도 그런 엄두를 내지 못할 치료를 오민균은 서슴없이 행동으로 옮겼다. 그에게 몸을 맡기고 있을 때,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겨 얼굴을 감추고 울었다. 너무 고마워도 눈물이 나왔다. 그토록 간절한 정성에 낫지 않을 상처가 어디 있으랴. 다른 조선인 생도들이 폭격으로 파괴된 집들을 손보던 모습도 떠올랐다. 그런 그들에게 일본은 왜 잡아가두고 묶고 감시하고, 전선으로 보내고, 소녀들은 병사들의 밥으로 던졌을까....  
“어머니, 선물을 주시려면 지금 주셔야 합니다. 저는 내일 아침 떠납니다.”
“집에서 자고 가요. 마지막 밤이잖아요. 우리 아사코짱이랑 첫날밤을 보내요.”
아사코가 어느새 나서서 그의 팔을 잡았다. 놓지 않겠다는 결의가 묻어나는 행동이었다. 미나미 여사가 다시 애원하듯 말했다.
“그건 수치스런 일이 아녜요. 일본에서는 사랑하는 사람에겐 모든 것을 주어요. 아니, 함께 나누죠. 벌써 아사코짱도 원하고 있잖아요. 우리 아사코 짱, 이제 남자를 받을 수 있죠.”
홍태화는 긴장한 모습이었으나 차분히 말했다.
“어머니, 조선 사람은 결혼 전까진 사랑하는 사람의 순결을 지켜주는 전통이 있습니다.” 
“그건 모순이에요.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모든 것을 나눠 가져야지 버려두다니요. 그건 쓸데없는 극기예요. 잔인하지 않나요?”
“그게 더 큰 사랑의 증거라는 것이지요, 저희 나라 풍습은 그렇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두 그건 자연스런 행동이 아니에요. 난 아사코짱 아빠를 두 번째 만남에서 함께 잤어요. 아사코짱 나이때였어요. 지극히 사랑하는데 왜 고통받고 서로 몸을 괴롭혀야 하나요? 우리 아사코짱도 전쟁통에 영양상태가 좋지 못해서 발육이 좀 늦지만 이제 두달 후면 열여덟살이 돼요. 사랑하는 남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어요. 조선의 그런 풍습은 여자를 속박하기 위해 만든 덫이에요. 여자는 정숙하라, 정숙의 증거는 몸이 순결해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도 몸을 지켜라, 그렇지 못하면 주홍글씨라는 화인을 달고 다닌다... 그건 권위적 남성 본위의 군림의 태도예요. 그런 태도가 폐쇄적인 사회를 만들고, 억압적인 사회를 만들죠. 사랑하면 모든 것을 나눠 갖는다는 것, 그것이 전부라는 것, 그런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나요?”
일본의 성 개방성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막상 부딪치자 홍태화는 얼굴이 붉어졌다. 마음 설레는 한편으로 책임감이 더 느껴졌다.  
“하지만 어머니, 저는 조선의 풍습을 지키고 싶습니다. 그것이 미풍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그렇게 길들여져 왔고, 교육받아 왔습니다. 대신 어머니께 절대로 아사코를 놓지 않겠다고 약속하겠습니다. 그 말씀 전해드리기 위해 찾아온 것입니다.”
홍태화가 미나미 여사 앞에 무릎을 꿇더니 엎드렸다. 홍태화는 한동안 일어나지 못했는데 그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바닥에 그의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다. 아사코가 그에게 달려들어 그를 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해요, 사랑해요. 죽을 때까지.”
미나미 여사도 울고 있었다. 서편쪽 노을은 더욱 선홍빛으로 물들었다.

 검은 손 흰 손-암살의 상시화

고하 암살 이후 국내 정정은 극심한 격랑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의 암살은 좌익의 소행이라느니, 경교장 세력의 소행이라느니, 전문 테러리스트 소행이라느니 말이 많았지만 확실하게 진상이 드러나는 것은 없었다. 
암살은 노출되기보다 감춰지는 것이 기본 속성이지만, 우익의 거두가 암살되었다는 것은 암울한 미래를 예고하는 신호탄을 올린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특히 임정측이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 미묘한 파장을 일으켰다. 이념적 동질성을 갖고 있는 고하가 그 세력에 의해 암살을 당했다? 그것은 어떤 무엇으로도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비극적이고 상황이 암울하였다. 이념 지형이 같아도 파가 다르면 죽일 수 있다? 그건 너무 비정하고 잔혹하다. 
백범 김구가 머문 경교장에서 행한 고하의 발언이 나온 직후 암살당했다는 것이 임정 계열에 의심의 눈초리가 집중된 원인이었다. 경교장 회의는 좌우익을 망라한 제 세력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혐의자가 꼭 누구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었다. 
신탁통치 찬반 대립이 한국현대사를 참혹하게 굴절시킨 중대한 전환점이었다는 점에서 이때의 상황을 좀더 살펴보기 위해 당시 경교장 회의에 참석했던 젊은 청년목사 강원룡의 목격담을 인용한다.<역사의 언덕에서-나의 현대사체험, 강원룡, 한길사, 2003>

내가 신탁통치 소식을 처음 듣게 된 것은 1945년 12월28일 오후 배재중학교 강당에서 연말 자선음악회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규갑(목사)이라는 어른이 음악회 준비로 바쁜 우리들에게 급히 달려왔다. 그는 “지금 모스크바에서 우리나라를 신탁통치하겠다는 결정이 났다고 한다. 이런 때 지금 음악회가 뭐냐?” 하고 호통을 쳤다.
(중략) 음악회를 마친 우리는 빨리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 경교장으로 김구 선생을 찾아갔다. 경교장은 신탁통치 소식을 듣고 찾아온 각 정당과 사회단체 인사들로 초만원이었다. 참석 인사들은 소속 당이나 단체를 불문하고 모두 신탁통치 절대 반대의 입장을 표명하고,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하는 문제들로 흥분의 도가니였다. 
이 신탁통치 반대를 위한 비상대책회의는 29일까지 계속되었고, 그 과정에서 ‘신탁통치반대 국민총동원위원회’가 결성되었는데, 나는 12월 29일의 회의에도 참석했다. 회의에는 한민당 국민당 인민당 공산당 등 좌우를 망라한 정당과 사회단체, 종교계와 언론기관 등의 대표들이 참석해 열기를 뿜었다. 
그러나 그 회의에 이승만 박사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무렵 이 박사는 신탁통치 반대성명에도 소극적이었다고 기억되는데, 이런 사실로 미루어볼 때 나중에 반탁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그것을 반공과 연계시켜 지지기반을 확고히 한 이박사가 과연 처음부터 반탁의 입장이었는지는 의문이다. 
여하간에 경교장회의의 열기는 대단했다. 참석자들은 좌익이고 우익이고 가릴 것 없이 신탁통치 반대를 외치며 고함을 지르고 일어나서 주먹질을 하는 등 모두 울분으로 감정이 북받쳐 있었다.(중략)
지금 돌이켜보면 당시 참석자들 대부분이 냉철하게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한 채 신탁통치 반대가 곧 독립 쟁취라는 단순한 생각에서 지사적인 의분을 터뜨리는 데 그쳤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회의를 지배한 것은 감정적인 말의 난무였다. 
그런 분위기와 달리 신중한 자세를 보여준 사람이 고하 송진우였다. 송진우는 큼지막한 몸집에 맞게 흥분된 분위기 속에서도 아무 얘기도 안하고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앉아 있었다. 송진우가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신탁통치 반대의사를 강력하게 표명하기 위해 임정이 주권을 행사, 미군정에서 일하고 있는 모든 공무원이 군정을 거부하고 임정의 명령에 따르도록 하고, 상인들도 모두 철시해 반탁운동을 벌이자“는 의견이 대세로 자리잡아갈 무렵이었다. 
“여러분의 생각이 모두 애국심에서 나온 것이란 걸 나도 알고 있지만 나라를 이끄는 지도자들로서 경박해서는 안되겠지요. 여기 누구라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결정된 의정서의 원본을 제대로 읽어본 분이 있습니까? 내가 알고 있기로는 그 내용이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한 후 한국의 정당 사회단체들과 협의해서 남북을 통일한 임시정부를 세우고 5년 이내의 신탁통치를 하는 것으로 되어 있는데, 내가 알고 있는 게 정확하다면 길어야 5년이면 통일된 우리의 독립정부를 세울 수 있는 것을 그렇게 극단적인 방법으로까지 반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어차피 우리가 우리 힘으로 정부를 세운다고 해도 현재 이렇게 분할통치되고 있는 상황이고, 강대국간에 전후(戰後)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우리가 그들과의 합의없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지 않습니까. 신탁통치가 길어야 5년이라고 하니 3년이 될 수도 있는 것인데, 그렇게 거국적으로 반대할 이유가 뭐 있습니까. 물론 나도 신탁통치는 반대합니다. 그러나 반대 방법은 다시 한번 여유를 가지고 냉정히 생각해 봅시다.”
송진우의 말이 끝나자마자 여기저기서 세찬 반발이 일었다. 좌익계 사람들은 물론 임시정부 사람들도 “봐라, 역시 한민당이 신탁통치와 관련이 있다. 이것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것 아닌가” 하며 그를 비난했고 “매국노” “망할놈의 영감” 하는 공격과 야유가 빗발쳤다. 
나도 고하의 발언을 듣고 “뭐 저런 사람이 있는가” 하고 흥분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고하 역시 반탁의 입장이었으나 다만 그 방법에서 견해 차이를 드러냈을 뿐이었다. 그는 임정이 미군정을 배격하고 직접 통치권을 행사하려는 것에 대해서 현실 정세를 고려해 우려를 표시했던 것이다. 
고하의 발언으로 그날 임정과 고하 사이에 심한 격론이 벌어졌다. 고하는 경교장 회의에 참석한 다음날인 30일 새벽 암살됐다. 해방정국에 충격을 준 그의 암살사건은 고하가 신탁통치를 지지한다는 내용의 소문을 임정 쪽에서 퍼뜨리던 차에 일어난 것으로, 경교장 회의에서 그가 한 발언과 관계가 있다고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중략)그 시절을 회고하면서 깨닫는 것은, 한 나라를 운영하려면 감정보다 앞을 내다볼 줄 아는 합리적인 계산이 앞서야 하는데, 당시 지도자들은 대부분 그런 점에서 능력이 부족했던 것 같다. 지금 보면 비난을 받던 송진우 같은 사람이 오히려 합리적인 판단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후 암살은 이 나라의 정치 변동과 역사의 중요한 분기점을 가져오는 기제로 작동했다. 그러나 암살에는 공통점이 나타나는데, 암살 배후가 스모킹 건처럼 연기가 날 뿐, 배후가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하수인(행동대원)이 체포되나 요인을 암살한 중대 범죄임에도 불구하고 극형에 처해지지 않는다는 공통점도 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건이 흐지부지될 때쯤 혐의자가 사회에 나와 활보하고, 제거된 인물은 대부분 민족주의자, 또는 양심세력이라는 점이다. 

“이게 자네 선물이야. 오군 선물 가져오느라 내 귀국이 늦었어.”
홍태화가 오민균에게 예쁘게 포장한 조그만 상자를 내밀었다. 포장을 뜯던 오민균이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영어 콘사이스네요. 요즘 영어사전이 필요했는데 마침 잘됐군요.”
영어사전 안엔 조그만 쪽지가 하나 들어 있었다.

-언제나 사려깊은 오민균 생도님, 
나는 오 생도님의 헌신적인 간병과 치료로 몸이 완쾌되었답니다. 조선청년의 따뜻한 마음이 제 몸 속에 역시 따뜻하게 퍼지고 있어요. 이웃집 사람들도 조선 청년들이 폭격을 맞아 파괴된 집을 수리해주고, 위험한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갈아 끼우고, 헤진 다다미를 바느질해준 고마운 마음을 늘 가슴깊이 새기고 있답니다. 
신생 조국에서 모두들 훌륭한 지도자로 나서리라 믿습니다. 오 생도가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했단 말을 듣고, 남편이 쓰던 영어사전를 보내니 제 마음으로 알고 받아주세요. 
홍짱과의 우정이 영원하기를 바랍니다. 안녕히.  

-쇼와 21년(1946년) 1월  
아사코 짱 엄마로부터  

편지를 다 읽고 난 오민균이 가죽 표지로 된 영어 콘사이스를 손으로 가볍게 쓰다듬었다. 미나미 여사의 체온이 그대로 느껴졌다. 홍태화가 이번엔 두툼한 편지봉투를 그에게 내밀었다. 이시하라 상이 보낸 편지였다.

-오민균 생도에게
그동안 신생 조국 건설에 매진하느라 정신없었지요? 나는 요즘 조선의 분단 상황과 오스트리아 분단상황을 보고 가슴 아파하고 있소. 오스트리아보다 조선의 통일이 일견 쉬워보이오. 그런데 걱정이 되어서요. 오스트리아는 전범국가로서 복잡한 인종적 구성원과 복잡한 영토문제에다 전승국 4대 강국의 이해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소. 그러나 한국은 단일종족에 단일언어, 단일풍습을 지니고 있어서 통일에 훨씬 유리한 조건이오. 
오스트리아는 한때 세계 최강대국이었다는 것, 잘 알겠지요? 19세기 오스트리아를 지배하고 있던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태리 북부, 동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하던 방대한 제국이었소. 1차대전 패배 이후 동맹국인 독일과 함께 전후 배상으로 힘들었는데, 2차 대전이 터지자 히틀러가 자기 모국인 오스트리아를 독일에 병합했지요. 병합 이유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같은 게르만민족이라는 우생학적 자부심으로 세계를 제패한다는 야망을 불태웠지. 1차대전 때 독일이 오스트리아의 동맹군으로 나선 것만 보아도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관계를 알 수 있지 않소? 그러나 나치가 들어가서 자유를 말살하고, 국민을 옥죄고, 국가 동원체제로 몰아가니 나치에 협력한 지배층을 빼고 국민은 모두 힘들었소. 한반도가 일제식민지가 된 것 이상으로 말이오.
독일에 병합된 오스트리아는 2차 대전 종전이 되자 독일과 같은 전범국가가 되어서 미영불소 전승국이 독일을 반으로 가를 때, 오스트리아 역시 네 토막 내버리지. 그리고 전승국은 모스크바 삼상회의에서 오스트리아에 10년간의 신탁통치안을 발표했소. 
오스트리아보다 상대적으로 내부 사정이 덜 복잡하다고 본 일본식민지 한반도는 5년 이내의 신탁통치안을 제시했는데, 오스트리아는 조건없이 받아들인 반면, 한국은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소. 내가 판단하기로 오스트리아의 내부사정은 조선의 사정보다 훨씬 복잡한데도 내부적 결속과 에너지를 결집해 10년안에 예정대로 통일하리라 확신하오. 
그러나 한반도는 힘들 것 같소. 왜냐. 그들 내부의 다툼 때문에. 조선인은 작은 차이에도 물불 안가리고  싸우니까. 합리나 이성이 아니라 공리공론으로 상대방을 배제하고 부정하니까. 약간의 얼룩을 트집잡아 멱살을 잡는 풍경은 본질을 외면하고, 사태를 극단으로 몰아가고, 협상파는 밀려나고, 강경세력이 애국세력인 양 나서는데, 그런 그들이 저지른 과오 때문에 분단이 영구화로 갈 가능성이 높아요. 외세 때문만이 아니오. 조선지도자들은 차이를 극복하는 계산법을 몰라요. 그래서 지켜보는 나도 답답하오.
정치적 패권을 거머쥐기 위해 설익은 이념을 내세워 싸우는 모습들, 보기에도 민망하오. 두 점령국은 서로 자국에 우호적인 국가를 만들려 할 것이고, 이런 결과로 대립하는 세력들이 친미파, 친소파, 민족파, 중도파, 거기에 좌우대결로 복잡하게 얽히면서 분단은 화석처럼 굳어버릴 거요. 각자의 이익과 신념만을 고집하는 독선이 결국 패망의 길로 가는 것이오. 어느 쪽이든 지는 쪽은 처절하게 무너지는 조선조의 사색당쟁이 체화된 인생관 때문일까요?  
오스트리아를 봅시다. 제 정파가 언젠가는 자신에게도 기회가 온다고 보고 타협하는 것이오. 미래투자를 하는 것이지. 외부의 방해를 내부의 힘으로 극복하는 거요. 우리가 익히 알다시피 진리란 간단명료한 법이오. 갈라졌으면 합하는 길을 찾아야지, 엉뚱한 길목에서 술꾼처럼 싸우면 되겠는가? 
분열분자들은 분단이 고착화되어도 오스트리아와 우리는 사정이 다르다, 상대가 비틀어서 어쩔 수 없었다, 상대방을 압살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다, 어쩌고 이유를 대겠지. 해결할 수 있는 국면을 분탕질해놓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또 그것을 명분삼아 이익을 챙길 거요. 그래서 내 한마디 하지. 조선인들아, 다된 밥에 코 빠뜨리지 마라. 상황을 직시하라. 당신들이 싸우면 괴물이 눈뜬다. 분단은 고착된다.
오 생도, 내가 화가 나서 체신머리없이 흥분했소. 그러나 나는 누구보다 조선을 사랑하고 내 아내를 사랑하오. 아내를 만나기 위해 금명간 제주도를 방문할 계획이오. 강태선 사장과 성산포에 정착했다는 고길자양, 임순심양을 만나러 가겠소. 치밀한 계획과 뜨거운 조국애로 열심히 살길 바라오. 

쇼와 21년 1월 20일 東京에서 이시하라로부터

조선인에 대한 냉정한 평가도 담겼지만 오민균은 편지 내용을 담담히 수용했다. 다른 일본인이 그랬다면 즉각 편지를 찢었겠지만 이시하라 상이니까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어떤 누구보다도 그는 한국을 사랑하는 일본의 지성이었다. 
후의 일이지만, 이시하라 상의 예언대로 오스트리아는 신탁통치 10년만에 통일 독립정부를 선포했다. 반 나치 투사인 칼 레너 주도하에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이를 모태로 제 정치세력의 견해들을 조율해 통일연합회의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다. 레너는 한국의 여운형과 같이 온건 좌파이고, 협상파로서 피점 3개월만에 임시정부를 수립했는데, 결과적으로 보면 몽양의 건준을 그대로 벤치마킹한 건국 기구였다. 
레너는 조국이 미영소불 4 강대국에 의해 국토가 4분할 점령되자 지도자들을 모아 내부의 제 모순과 갈등, 분단고착화의 난제들을 하나하나 처리해나갔다. 국민적 추앙을 자원으로 하여 4강대국과의 끈질긴 협상 끝에 4개국 신탁통치 10년 만인 1955년 5월 마침내 독립적이고 민주적인 영세중립국 통일정부를 구성, 선포했다. 그러나 레너는 통일국가 선포를 내리기 전 개인적 영달을 뒤로 한 채 병사했다. 통일 정부의 과실은 여타 정파들과 국민들이 따먹은 것이다.  
“왜 생각이 많아졌나?”
홍태화가 생각에 잠겨있던 오민균에게 물었다. 오민균은 여러모로 마음이 착잡했다. 전승국은 한국도 일본과 같이 전범국가로 볼 것이다. 조선 청년들이 일본군의 이름으로 전선에 나가 미군과 싸우고, 여자들은 일본군의 사기를 위해 몸을 내주고, 나이든 남자들은 강제징용 현장에서 비행장을 닦고 석탄을 캐고, 군항의 터를 닦았으니 한국인 역시 전범이 되는 것이다. 
이런 사정을 미태평양사령부에 전달할 메신저가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이것을 진지하게 설파할 외교협상가가 없다. 잘못 돌아가고 있는 길을 되돌리는 협상기술자. 대신 내분으로 자꾸 기회만 놓치고 있다.  
미 군정에는 일제 관료와 군 출신들이 대거 기용되었다. 이러니 한국의 참담한 식민지 실상들이 제대로 전달될 수 있을까. 이시하라 상은 이 점을 지적하고 있다는 것을 오민균은 생각하고 있었다. 

며칠 후, 일본 육사 이년 선배인 최주평이 찾아왔다. 
“오군, 군영에 입학했는데 희망이 있겠어?”
장래가 보장되겠느냐는 뜻이었다.  
“그 길밖에 없지 않습니까. 잘못됐습니까?”
“다른 길도 있다. 일단 나를 따르라. 서울역으로 나가자구. 동지들을 만나기로 했어. 가서 한번 만나보자구.”
최주평 역시 여느 청년들과 마찬가지로 진로선택을 위해 서울 거리를 헤맸지만 손에 잡히는 것이 없었다. 그런 중에 친구 중 하나가 “이것저것 다 틀렸다. 평양의 김일성 장군을 모시고 싹 갈아엎어버리자”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풍선처럼 거리는 불안정하게 팽창해가고 있었고, 무슨 무슨 위원회, 무슨 무슨 동맹, 무슨 무슨 구락부 따위가 난립하면서 시야를 혼란스럽게 했다. 깃발만 나부낀 단체들은 놈팡이들의 집합소 같았다. 생각이 있는 젊은이라면 무슨 수를 내야 한다고 믿는 상황이었다.  
“최선배, 난 입교 준비를 하고 있잖수.”
“일단 따라와 봐. 시내 구경하는 셈치고.”
서울역에 당도하니 광장에 최주평의 동기생 이기면 육인봉과 오민균의 동기생 이성유가 와 있었다. 그들은 무슨 결사대처럼 각목을 들고 서있었다. 서울은 찬반탁 회오리에 휩싸여 신변을 보장할 수 없어서 이렇게 모두들 호신용 무기를 들고 있었다.
광장은 사람들이 표를 사기 위해 기다랗게 줄을 서서 기다리지만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가운데, 서울역을 무대로 설치는 삐끼, 쓰리꾼, 건달들이 멋대로 줄을 새치기하며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한 놈이 어느 키 큰 신사의 호주머니를 터는 모습이 포착되었다. 그의 주변에 어느새 바람잡이들이 둘러섰다. 서울역과 영등포역, 인천, 수원역을 오가는 열차를 타고 다니며 손님들의 호주머니를 노리는 일당들이었다. 키 큰 신사가 털리는 것을 알고 자기 호주머니를 쥐고 소리쳤으나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끄떡없이 그를 옥죄어가고 있었다. 최주평이 한 달음에 달려가 휘파람 불며 지휘하는 두목급의 멱살을 쥐어잡았다. 
“이게 무슨 수작이야?”
그러자 순식간에 패거리들이 최주평을 에워쌌다. 이 틈을 타 신사가 재빨리 도망을 갔다.
“우리가 무슨 일 했다고 이러시나? 생사람 잡는 게 아니지. 저 친구는 우리 친구야. 너, 장난하는 거야!”
“헛소리 마! 당장 물러가라!”
“야, 이 새끼야, 우릴 뭘로 보는 거야? 좆으로 보이니?”
그와 동시에 두목이 주먹을 날렸다. 그와 동시에 삽시간에 대여섯 놈이 달려들어 최주평을 공격했다. 오민균이 최주평 앞으로 달려가 서고, 다른 생도들도 최주평을 주위로 원형 대오를 갖추었다. 훈련교범을 통해 육탄전의 위기 대처법을 익혀둔 청년들이었다. 
“물러나! 물러나지 않으면 뼈도 못추린다!”
이기면이 각목을 휘두르자 한 놈이 쓰러졌다. 오민균 이성유는 한 놈씩 잡아 업어치기로 때려눕혔다. 고보 시절, 검도와 유도 대표선수를 지낸 관록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한 순간에 제압ㅎ자 두목이 소리쳤다. 
“군사단체 놈들이다. 튀라우!”
일순간에 불량배들이 바람처럼 사라졌다. 군사단체에 소속된 자들을 불량배들도 두려워하고 있었다. 군사단체 가입은 살벌한 서울에서 버티고 살아가는 보호처가 되었다. 치안부재 시대에 그런 활용도 때문에 단체에 가입한 청년들이 많았다. 흐트러졌던 기차표 사는 사람들이 줄을 맞춰 서면서 너나없이 혀를 내둘렀다.
“눈 깜짝할 새에 몇 명을 조자버리네.”
최주평이 군중을 향해 외쳤다.
“우리는 평양으로 갑니다. 군대를 양성하러 갑니다. 젊은이들은 따르시오!”
그러자 한쪽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청년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틀렸소. 내가 지금 평양에서 오는 사람이오. 그곳은 잘못되어가고 있소.”
“뭐가 잘못되었다는 거요?”
“유산자란 이유로 재산을 몰수하고, 예수쟁이, 지식인들을 주재소로 끌고 가 문초하고 있소. 그들 중 일부는 행방이 묘연하단 말입니다! 잡혀가면 사라지고 있소. 시베리아로 후송된다는 얘기가 있소.”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청년이었다.
“누가 그런 짓을 한답니까?”
“딱 부러지게 나타나는 사람이 없소. 그런데 공포스런 일들이 날마다 벌어지고 있소. 불안해서 살 수가 없소. 거대한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동굴과도 같소.”
“그러니 김일성 장군을 만나서 세상을 바꾸어야 합니다.”
“아니오. 당신들 잘못 알고 있소. 내 얘기할테니 조용한 데로 갑시다.”
그들은 인근 다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을 최명산이라고 소개한 젊은이가 안주머니에서 북한 삐라라면서 구겨진 종이를 그들 앞에 내밀었다. 삐라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었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국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구축하였다. 
(중략)일본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라! (중략)왜놈들이 고대광실에서 호의호식하며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굴욕한 것은 당신들이 잘 안다.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절머리나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구히 없어져버렸다.(중략)
붉은 군대는 조선 인민이 자유롭게 창조적 노력에 착수할 만한 모든 조건을 지어주었다. 조선인민 자체가 반드시 자기의 행복을 창조하는 자로 되어야 할 것이다. 공장 제조소 및 공작소 주인들과 상업가, 또는 기업가들이여! 왜놈들이 파괴한 공장과 제조소를 회복시키라! 새 생산기업체를 개시하라! 붉은 군대사령부는 모든 조선기업소들의 재산보호를 담보하며, 그 기업소들의 정상적 작업을 보장함에 백방으로 원조할 것이다.(중략)세계에는 두 개의 침략국이 있었나니, 그는 즉 파시스트 독일과 제국주의 일본이다. 이 두 국가는 남의 영토를 점령하며 다른 나라 인민들을 정복할 목적으로 연합국들을 반대하며 전쟁하였다. 붉은 군대는 영국 미국군과 협력하여 히틀러를 영영 격멸하였으며 항복시켰다. 
히틀러 독일이 격패를 당하고 항복한 이후에 일본이 전쟁 계속을 주장하는 유일한 국가이었다. 전반적 평화의 회복을 촉진시키기 위하여 소련은 일본과의 전쟁에 들어섰다.(중략)붉은 군대는 조선 내에 있는 모든 반일적 민주주의적 당들과 단체들의 광범한 협동의 기본 위에서 자기 민주주의적 정부를 창조함에 조선 인민들에게 보조를 준다.(중략)
조선의 자유와 독립만세! 조선의 발흥을 담보하는 조선과 소련 친선 만세!       

1945년 8월25일  
붉은군대사령부

날짜를 보니 해방 직후의 것이었다. 삐라는 북한 주둔 소련군 제25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이 발표한 포고문이었다. 
“민중을 생각하는 훌륭한 문건이오.”
이기면이 말하자 너나없이 동의했다. 
“나도 한번 들읍시다.”
다방 건너편 자리에서 그들을 관심있게 지켜보던 청년이 그들 곁으로 바싹 자리를 옮겨 앉았다. 요즘의 서울 분위기는 낯선 자들이 어느새 동지처럼 뭉치고, 뜨내기들이 경계없이 벗이 되었다. 청년이면 누구나 쉽게 합숙소에 함께 묵었다. 대개는 지방에서 꿈을 품고 올라온 청년들이었다.  
“포고문을 듣고 보니 인민을 중심에 두고 있는데, 좋지 않소?”
그가 끼어들자 최명산이 응수했다.
“이게 모두 가짜라니까요.”
“나는 오동태라는 사람인데 나 역시 북에서 내려왔소. 아니 시베리아에서 왔지. 오면서 보는데 북에서는 일본놈들 할딱 벗겨서 쫓아내더군. 일본놈들 개 패듯이 패서 옷도 빼앗고 쫓아버리니 얼마나 후련하던지...”
“시베리아에서 왔다고요?”
오민균이 물었다. 
“그렇소. 일본 관동군이 소련군 포로가 되어서 그라스로얄스크까지 끌려갔을 때, 나는 도망쳐나왔소. 그런 다음 고향인 인천의 방직공장에 취직해 있었는데 동맹파업 주모자로 몰려서 파면되었소. 직장을 잃은 데다 수배까지 받으니 생활난을 겪다가 서울로 나왔소이다. 인천에는 배급도 용이하고 미국영화가 많이 들어와서 사는 놈은 잘 살지만, 우리 같은 노동자 계급은 식민지 전시체제 때와 다름없이 고단한 생활을 하고 있소. 하루하루 밥먹기가 어렵소.”
최명산이 어느새 모임의 리더처럼 나섰다. 
“그래서 우리더러 밥값을 내라는 거요?”
“에헤, 그게 아니지. 나 그런 사람 아니오. 겪어보면 알 것이오.”
“그러면 끼어들지 말고 들으세요.”
“나도 할 얘기가 많소. 있다가 내 얘기 좀 들어주시오.”
오동태를 묵살하고 최명산이 말을 이어갔다. 
“김일성은 당신들이 흠모하는 그 김일성 장군이 아니오. 우리와 별 차이없는 새파란 젊은이요.”
“지도자가 누가 되었든 남과 북은 확실히 차이가 있소. 그들이 우리보다 훨씬 민주적이고, 민족이오.”
이성유가 고개를 갸웃하며 품에 지니고 있던 미 태평양사령부의 포고문을 내밀었다.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부 포고 제1호 

조선인민에게 고함!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으로서 나는 다음과 같이 포고함.
일본국 정부의 연합국에 대한 무조건 항복은 우 제국(諸國) 군대간에 오랫동안 속행되어온 무력 조인한 항복 문서 내용에 의하야 나의 지휘하에 잇는 승리에 빗나는 군대는 금일 북위 38도 이남의 영토를 점령한다. 
조선 인민의 오랫동안의 노예상태와 적당한 시기에 조선을 해방 독립시키리라는 연합국의 결심을 명심하고 조선인민은 점령목적이 항복문서를 이행하고 자기들의 인간적 종교적 권리를 보호함에 있다는 것을 새로이 확신하여야 한다.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인 나에게 부여된 권한에 의하야 나는 이에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과 조선 주민에 대하야 군사적 관리를 하고저 다음과 같은 점령 조건을 발표한다. 
제1조 북위 38도 이남의 조선영토와 조선인민에 대한 통치의 전권한은 나의 권한하에서 실시한다. 
제2조 정부의 전 공공(公共) 및 명예직원과 사용인 및 공공복지와 공공위생을 포함한 전 공공사업기관의 유급 혹은 무급 직원 및 사용 중인 중요한 사업에 종사하는 기타의 모든 사람은 새로운 명령이 있을 때까지 그의 정당한 기능과 의무를 실행하고 모든 기록과 재산을 보존 보호하여야 한다.   
제3조 모든 사람은 급속히 나의 모든 명령과 나의 권한하에 발한 명령에 복종하여야 한다. 점령부대에 대한 모든 반항행위 혹은 공공안녕을 문란케 하는 모든 행위에 대하여는 엄중한 처벌이 있을 것이다. 
제4조 제군(諸君)의 재산소유권리는 존중하겠다. 제군은 내가 명령할 때까지 제군의 적당한 직업에 종사하라. 
제5조 군사적 관리를 하는 동안에는 모든 목적을 위하여서 영어가 공식언어이다. 영어 원문과 조선어 혹은 일본어 원문 간에 해석 혹은 정의에 관하야 어떤 애매한 점이 있거나 부동(不同)한 점이 있을 때에는 영어 원문이 적용된다.   
제6조 새로운 포고, 포고규정 공고 지령 및 법령은 나 혹은 나의 권한하에서 발출될 것으로 제군에 대하야 요구하는 바를 지정할 것이다. 

1945년 9월 9일 
태평양방면 미군 육군부대 총사령관 더글라스 맥아더

“문면이 완전 다르지 않소? 미군은 점령국으로 남한에 진주했단 말이오.”
이성유가 동의를 구하는 태도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뭔가 다른 세상에 와있다는 불만이 역력했다. 
“두 포고문을 비교할만큼 지식이 있는 것이 아니어서 나는 판단을 못하겠어. 하지만 뭔가 찝찝하긴 해.”
이기면이었다. 맥아더의 포고문 중 제2조는 일제 시기 복무했던 관료들의 활동의 통로를 열어준다는 뜻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발표된 포고문 2호엔 ‘항복문서의 조항 또는 태평양미국육군최고지휘관의 권한 하에 발한 포고명령 지시를 범한 자, 미국인과 기타 연합국인의 인명 또는 소유물 또는 보안을 해한 자, 공중치안 질서를 교란한 자, 정당한 행정을 방해하는 자, 연합군에 대하야 고의로 적대행위를 하는 자는 점령군 군율 회의에서 유죄로 결정한 후 동 회의가 결정하는대로 사형 또는 타 형벌에 처한다’고 공포했다.  
“자유와 인권을 중시한다는 미국답지 않은 오만한 자세요. 미군이 해방군이 아니라 점령군이라고 분명히 하고 있잖은가. 그들은 우리의 마을과 도로, 산과 들을 갈랐는데 주민의 어떤 누구와도 상의하거나 통고된 바가 없소. 안방은 38 이남인데 변소는 38 이북인 집도 있소. 이 무슨 재변(災變)인가?”
“삭막한 시베리아에서 만주를 거쳐, 평양을 거쳐 인천에 왔는데, 세상이 너무 이상한 방향으로 가고 있소. 내가 왜 내려왔는지 모르갔소.”
다시 오동태가 끼어들었다. 
“북한 인민들 어떻게 지내고 있소?”
“북한 인민들은 일본놈을 용서하지 않아요. 그걸 내 똑똑히 목격했소. 남한사회는 식민지 시절 그대로요. 인천의 공장들을 한번 보시오. 인천의 공장들은 미국이 누구누구를 지정해서 관리권을 주는데 근로대중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인천은 전쟁의 병참 기지가 되어서 전쟁 물자를 만들어 내느라 중화학공장, 제분공장, 방직공장, 정미공장, 제염공장, 선박 수리하는 조선업이 발달했소. 정미공장, 제분공장은 군량을 보급하느라 잘 돌아가는데 지금은 멈추어 섰소. 이러니 파업이 안일어나겠소? 사람이 잡혀가 행방불명이 되고, 시위하느라 사상자가 속출하고, 서로 미행 감시 납치하고 있소. 시베리아에서 목숨 걸고 내려온 고향이 이 모양이란 말이오.”
오동태는 인천에서 상업학교를 다니던 중 태평양전쟁 말기 군에 강제 징집되었다.
그가 배치된 곳은 만주 관동군 중에서도 최북단 소만(蘇滿) 국경지대였다. 병사계에서 서무 일을 보았다. 월급을 나눠주고 사단의 경비 지출을 담당했다. 그런데 하루 이틀 지나다 보니 이상하게 만주가 낯설지 않았다. 
“인천 바닷가는 갈대가 무성한 저지대의 습지가 많고, 잡초가 무성한 황무지가 많은데, 만주 땅이 딱 그러하더라고. 큰 강이 지나는데 뻘밭이 있고, 강의 양안에는 갈대가 무성해. 소만국경이라고 하는데, 그곳에서 일본 소녀 린코(鈴子)를 만나 사랑했지. 위안부였던 것 같은데 일본군 주력이 빠져나가서 자유의 몸이 되어서 군인 가족들과 함께 살고 있었소. 추상같던 부대는 군기가 빠져있었소. 린코와 나는 강가로 산책나가 갈대밭 속에서 금방 숨이 넘어갈 지경으로 뜨거운 사랑을 나누었지. 내일이 없기 때문에 정말로 마지막 불꽃을 태우는 마음으로 서로를 탐했지.”
그는 추억이 서린 듯 눈을 지긋이 감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래서 어땠소?”
청춘의 이야기는 젊은이들 호기심을 촉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어느날 밤이었소. 강가의 갈대밭이 벌겋게 물들었소.”
소만 국경 전 지역에 걸쳐서 소련군이 진격해오고 있었다. 거추장스러우니 갈대밭을 모두 태우고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군의 주력은 인도지나 반도로 차출되어 진공상태였다. 오동태의 부대는 나이든 예비역들이 충원돼 들어와서 복무했기 때문에 전투력이 현저히 떨어져 있었다. 대대병력이 방어 대오도 갖추지 못하고 혼비백산, 패주하기 시작했다. 소련군 탱크가 밀려오고, 야크기가 편대를 이루어 조명탄을 쏘며 기총소사를 퍼붓자 가지고 있던 군기(軍器)를 모두 놓아두고 퇴각했다. 린코(鈴子)가 오동태에 바짝 따라붙었다.
“당신을 따라가면 안되나요? 나는 일본으로 갈 수 없어요.”
“따라와. 일단 이곳을 벗어나자구.”
폭격으로 철로가 끊겨서 도보로 이동했다. 어느만큼 갔을 때 같은 부대 다나카 대위가 잔류 부대를 인솔해 뒤쫓아왔다. 그런데 앞에서도 소련군이 밀려오고 있었다. 앞뒤가 소련군에게 협공을 당한 형세였다. 다 죽게 되는 상황이었다. 다나카가 갑자기 따라온 군인 가족들과 병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남자들은 무장한 채로 남고, 여자와 아이들은 구렁창으로 가라.”
이들이 구렁창으로 내려가자 그가 다시 외쳤다.
“소련군은 잔혹하다. 여자를 보는 족족 강간한다. 내가 죽으면 죽었지 그 꼴을 못본다. 강간당하고 추하게 죽느니, 여기서 자결하라.”
여자와 아이들이 한결같이 절규했다. 그러나 그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또 바다를 건너 수만리 떨어진 일본으로 돌아가기에는 여자와 아이들이 장애물이라고 보고 처치하겠다는 계산이었다. 남자들은 결사대로 최후까지 저항하는 유격대로 재편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남자도 죽는다. 그러나 끝까지 싸우다 죽을 것이다. 그러나 여자들은 텐노헤이카(천황폐하)의 짐이 될 뿐이다. 연약한 어린이와 여자는 고국에 도착하기 전에 모두 죽는다. 여자 어린이까지 윤간을 당하고 죽을 것이다. 그러니 여기서 마음 편하게 죽어라. 고생없이 여기서 편하게 옥쇄하는 것이다.”
자결을 명하자 여자들이 아이들을 껴안고 떨었다. 울음을 터뜨리며 용서를 비는 여자도 있었다. 이때 병사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우미 유카바’를 불렀다. 그러자 모두 따라부르며 비장한 각오를 다지기 시작했다.   
 
우미 유카바(海行かば/바다에 가면)

海行かば 水漬く屍 
우미유카바 미쯔쿠 가바네(바다에 가면 물에 잠긴 시체)
山行かば 草むす屍
야마유카바 쿠사무스 가바네(산에 가면 풀이 돋은 시체)
大君の 邊にこそ死なめ
오키미노 베니고소 시나메(천황의 곁에서 죽어도) 
顧みはせじ
가에리미하세지(돌아보는 일은 없으리)

군가는 느리나 구슬프고 장엄했다. 노래가 계속 이어지는 동안 마침내 여자들이 차례로 서로 찌르고 비명에 갔다. 칼이 깊숙이 들어가지 못하고 쓰러지면 병사들이 달려들어 대검으로 가슴을 찔러 죽음을 도왔다. 철없는 아이가 본능적으로 도망을 가면 쫓아가서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모두가 제 정신이 아니었다. 완전 광기였다. 극단으로 몰리면 이런 일도 서슴없이 저질러지고 있다는 것을 보고 오동태는 온 몸이 오싹했다. 일본놈들의 잔인성은 자해ᐧ자결하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죽음의 제전이 끝날 때까지 병사들이 계속 ‘우미 유카바’를 부르는데 그중 한 병사는 스스로 자기 배를 갈랐다. 아아, 이렇게도 처절한 죽음이 있구나. 저 노래 속에 무엇이 담겨있길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라져가는가. 여학생들이 불러주는 저 노래를 듣고 가마카제 특공대 소년병들이 출격해 미군함에 애기(愛機)를 쳐박아 산화하고, 소련군 탱크에 TNT를 둘레메고 덤벼들고, 남양군도에서는 절벽에서 꽃잎처럼 수백 명이 한꺼번에 떨어졌다. 그 가운데는 조선인 위안부들도 수십 명씩 함께 떨어졌다. 물정 모르고 남의 전쟁에 끼어들어 스스로를 내던진 것이다.   
‘우미 유카바’는 죽음(옥쇄)을 미화하는 노래였지만 일본의 제2의 국가(國歌)나 다름없었다. 태평양전쟁 말기 NHK 라디오 방송에서 병사들이 패전 끝에 옥쇄(자결)작전을 벌였다고 하면 ‘우미 유카바’를 흘려보냈고, 승전보가 전해지면 경쾌한 행진곡을 내보냈다. ‘우미 유카바’는 장엄한 집단 최면 자폭 송가였던 것이다. 일본은 내놓고 자결을 찬양하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어느새 좌중이 그의 얘기에 몰입되었다. 그가 한숨을 쉬었다.
“린코가 죽었소.”
“린코가 죽다니?”
“우리는 흥안령산맥 최남단 일본군 사령부까지 갔소. 그날따라 린코가 섧게 울더군. 지쳐서 그러려니 여기고 밤에 불러내서 달랬지요. 남녀가 따로 구분되어서 이동숙소에서 잤던 때였소. 그런데 린코가 다나카 대위가 무섭다고 하더군. 술에 취하면 미치광이가 된다고 했소. 그러면서 지금 가봐야 한다고 했어요. 그의 숙소를 찾지 않으면 죽을 것이라고요.”
미심쩍어서 그가 그녀 뒤를 따랐다. 다나카는 병영으로 사용하던 빨간 벽돌 건물을 독채로 쓰고 있었는데, 린코가 들어오자 잔뜩 취한 얼굴로 벼락같이 호통을 쳤다. 
“갈보 무리에서도 빼주고, 자결 무리에서도 빼주었는데, 은혜를 모르는 년, 조센징한테 빠져서 조선으로 들어간다고?”
“이제 나는 자유인이에요!”
린코가 대들었다. 그녀의 태도가 너무도 당당해서 오동태는 숨이 막혔다.
“조선에 들어가면 너는 매국노야!”
“내 사랑을 막을 수 없어요! 당신은 나를 탐하지만 내 마음은 오상한테 가있어요!”
그가 질투심으로 눈을 이글거리더니 권총을 뽑아들어 그녀를 향해 쏘았다. 비명 한마디 지르지 못하고 그녀가 쓰러졌다. 순간 오동태가 단검을 뽑아들고 뛰어들어 그의 가슴과 목을 찔렀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는 소련군의 야포 소리와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끊임없이 들려왔다. 
오동태는 넋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말문을 잃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소?”
“사람의 목숨이 꼭 성냥개비 부러뜨리는 장난같이 느껴졌소.”
그는 그 길로 홀홀단신 남하의 길을 택해 달렸다. 사흘을 굶주리며 나무뿌리, 풀뿌리를 뜯으며 끝이 안보이는 광야에 이르렀을 때, 일본군 사단사령부가 나타났다. 그곳에서 육탄으로 소련군 탱크를 저지하는 결사대가 결성되어 있었는데 오동태도 결사대에 편입되었다. TNT를 주렁주렁 몸에 매달고 소련군 탱크에 부딪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뇌관을 잘못 건드려 소련군 탱크에 도착하기도 전에 폭발해 일본군 막사가 날아가버린 경우도 있었다. 오합지졸들의 말로가 그랬다. 
그는 소련군에 생포되어 열차 편으로 이송되었다. 기차는 몇날 며칠동안 수피가 하얀 자작나무 숲을 달렸다. 그라스로얄스크 일원에는 일본군 수십 만명이 포로로 잡혀들어와 있었다. 
생사에 미련도 기대도 없이 오동태는 두달 째 혹독한 노동에 시달리는 수용소 생활을 했다.  어느날 밤 망루를 지키던 초병이 잠들어 있을 때(그들은 형식적으로 근무했다), 트럭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재빨리 뒤에 올라탔다. 북쪽이나 서쪽으로 간다고 생각되면 차에서 내리고, 남쪽으로 가는 차를 보면 무조건 갈아탔다. 
“나 카레이스키, 카레이스키!”하고 그동안 익힌 소련 말로 운전병을 향해 말하면 소년티가 완연한 어린 병사들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도 청을 들어주었다. 전쟁 포로 숫자가 많고, 도망병도 속출해 속수무책이었고, 왜 전쟁을 하는지도 모르는 자가 많아 그들 역시 될대로 되라는 식이었다.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남하하는 조선인들이 백명, 이백명씩 떼를 지어 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도 거기에 합류했다. 이윽고 함경도에 도착했다. 북한 보위부대원들이 월남인들을 가로막고 학교 건물에 수용했다. 
“너희는 일본 군대였으니 모두 적이다. 친일 세력은 모두 처단한다.”
오동태가 하소연했다.
“나는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갔습니다. 억울합니다.”
“간나 새끼, 끌려가지 않은 청년들도 많아. 너희는 쥐새끼같은 기회주의자 아니간?”
이때 한 한인 청년장교가 나오더니 수용자의 출신 지역을 체크했다. 만주에 가족이 있다는 사람이 5백명, 북한이 고향이라는 사람이 1천명, 남한이 고향이라는 사람은 120명 정도 되었다. 만주 출신은 알아서 가도록 방면하고, 북한 출신은 억류했다.
“남반부가 고향인 자는 날 따라오라우.”
그를 따라가자 기차 역부였다. 그가 검은 천으로 창문이 가려진 기차에 모두 타도록 명령했다.
“이게 마지막 기차가 될 기야. 나두 본래는 목포가 고향이디. 고것만 알구 가라우.”
기차를 타고 평양에 도착했다. 시내가 무거운 것에 짓눌린 듯 잔뜩 공포스런 분위기에 오동태는 으스스 전율했다.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이상한 전율감이었다. 그들은 일본인을 가혹하게 다루고 있었다. 처절한 복수극이었다. 일본 여자들은 불려가 강간을 당했다. 그는 대구가 고향이라는 괴청년 둘과 보름만에 수용소를 탈출했다. 육로를 밤낮없이 걸어 황해도 해주에 이르러 밀선을 타고 인천항에 들어오자 경찰이 그들을 체포했다.
“너희는 지령을 받고 내려온 북쪽의 공작원이다. 밀정의 말로가 어떤 것인지 알겠지?”
그리고 매타작이 시작되었다. 따지고 묻는 것 없이 무작정 몽둥이질이었다.  
“우리는 강제로 끌려가 시베리아에서 죽도록 고생하고 돌아온 사람들이오!”
“이 새끼들, 거짓말만 늘었군. 이실직고하면 면죄가 되나 불지 않으면 골로 간다. 너 어느 부대 소속이냐? 침투로가 어디인지 불라!”
실제로 버티다 둔기로 맞고 하얀 골이 빠져나와 즉사한 청년도 있었다. 북쪽도 잡아가두긴 마찬가지였지만 남쪽은 더 거칠고 험악했다. 고문이 일상사처럼 자행되었다. 수사는 순전히 고문에 의존했다. 
소학교에 수용된 나날은 악몽이었다. 자고 나면 사라지는 사람이 많았다. 어느날 밤 그는 뒷문으로 빠져나와 수렁같은 뻘바닥을 북북 기어서 탈출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공원으로 신분 세탁해 방직공장에 취직했다. 하지만 억울해서 견딜 수 없었다. 
“험한 꼴이라고는 다 겪은 내가 왜 여기에서 또 당하는지 몰랐소. 내가 내 고향에 왔는데 왜 또 당해야 하지? 이런 조국을 만나려고 숱한 죽음의 고비를 넘어왔는가, 숱한 죽음의 뒤편에서 살아온 대가가 이것인가. 억울하게 죽은 자들을 대신해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지만 허무해서 견딜 수가 없었소. 그들을 지켜주지 못한 미안함도 있소. 죽음은 넝마 같은 것, 그래서 이제는 생사도, 미련도, 집착도 없습니다. 다만 이 시간 현재 배가 고플 뿐이오.”
오민균이 호주머니를 털어서 그에게 지전과 동전을 건넸다.
“고맙소. 이것을 얻기 위해 말한 것은 아니었소. 거렁뱅이가 되었다는 것이 비참하오. 하지만 여러분은 북녘으로 갈 때가 아니오. 여기 남아서 나랑 무언가를 도모합시다.”
그러면서 최명산을 손가락질로 가리키더니 결론을 내렸다.
“저 청년의 말이 맞소. 그것은 경험해본 자만이 아는 것이오. 죽어도 내 땅, 내 고향에서 죽어야지, 또다시 낯선 땅에서 비명횡사하면 무슨 의미가 있소?”
그는 이정길로부터 연락처를 챙기더니 표표히 밖으로 사라졌다. 그의 뒷모습이 쓸쓸했다.  
그의 말에 홀린 듯이 빠져있던 그들은 한동안 멍하니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너무나 잔혹한 세상이다. 어떤 절망이 청년들의 가슴을 매운 바람처럼 휩쓸고 지나가고 있었다. 
“우리 이러면 안되지.” 이기면이 나섰다. “가라앉으면 침몰합니다. 마음을 다잡고 얘기의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우리가 어떻게 하면 순수무결하게 새 나라를 건설하느냐를 생각해보자, 이 말이오 자, 저 불란서를 한번 보자구. 그들은 역사 정리를 제대로 하고 있어. 침략자 독일에 협력한 비시 정권 담당자들, 부역 언론들, 독일 병사에게 몸을 판 창녀들까지 싸그리 단죄하고 있어. 그게 나라의 재구성이란 거야. 그런데 우린 뭐지? 더 기가 막힌 것은 치안과 행정을 자주적으로 이끌던 건국준비위원회를 미 군정이 강제해산했단 말이다. 그 결말이 뭐지? 민족세력은 철저히 배제되고, 변신한 친일파에게 모든 권한과 이권이 넘어가고, 치안권까지 위임되고... 이렇게 양심세력을 조롱해도 되는가? 기존의 편견이 더욱 강화되는 역화효과처럼, 방귀뀌고 성내면서 그것들이 더 군림하는 세상이야. 공자 말씀에 과이불개 시위과의(過而不改 是謂過矣)라는 것이 있지. 잘못을 저지르고 고치지 않는 것이 더 큰 잘못인데, 독립이 밥먹여 주냐며 그런 사람들을 잡아가두고 패고, 어디론가 보내버리고 있다. 행불자가 얼마나 많은가. 이런 공포사회가 과연 정의로운 세상인가. 이래 가나 저래 가나 매한가지다. 북으로 올라가자.”
그러자 최명산이 받았다.
“아까 오동태란 자로부터 듣지 않았나. 지금 북한사회는 모두 장님이 등불 켜고 나대는 꼴이라니까. 길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헤매고 있소. 이념이 무엇인지, 사상이 무엇인지, 미국놈이 어떤 놈이고 소련놈이 어떤 놈인지 모르고 설치고들 있소. 아라사놈들은 또 여자라면 환장하는 상놈의 새끼들이오! 그 자들이 우리를 위해서 왔다고?” 
“그럼 남은 어떻소?”
“남은 미국놈들이 망쳐놓고 있소. 남은 남대로 문제고, 북은 북대로 문제요!”
이기면이 분노한 목소리로 외쳤다.
“미점령군은 여전히 위세를 부리는 조선총독부를 신뢰하오. 그들의 태도에서 미일간의 흥정이 있다는 걸 알 수 있지. 총독부는 수천 명의 무장해제된 일본군을 경찰병력으로 대체했는데, 이것도 미군과의 합의해서 나온 결과물이오. 악질 경찰들을 가두지 않고 재등용하고, 일본군 출신을 경찰로 전환하고 있는 현실이 무엇이오 백성을 좆으로 생각하는 점령군의 모습이오.”
조선총독부는 전후 처리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오끼나와에 있던 미24군단과 부단히 무선교신을 했다. 조선총독부는 “일본군의 무장해제와 일본인 철수작업이 평화적으로 진행되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다. 그런데 군수품의 상당량이 도둑맞았고 경찰서 습격을 받았으며, 조선인 경찰관들이 도망을 가버려서 무법질서의 상황이며, 그 사이 폭동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고 미태평양사령부에 보고했다. 
그들이 허위 보고를 한 것은 무장해제된 일본군을 경찰로 전환시키기 위해서였다. 해방공간의 혼란한 상황의 치안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조선 백성을 계속 탄압하는 도구를 복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일본으로 돌아가도 그들의 친위 세력이 조선을 다스리도록 한다는 복안도 있었다. 다시 말하면 일제의 또다른 얼굴인 셈이었다. 그리고 북한지역에서는 맨몸으로 쫓겨났지만, 남한사회에서는 터럭 하나 다치지 않고 물러갈 수 있는 안전판을 구축하는 셈이었다. 
이렇게 소개한 이기면이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니 그자들이 오만해해질 수밖에! 총독이란 새끼가 그렇게 장난했지. 9월 8일 미군이 인천에 상륙했을 때, 경찰이 환영나온 한국인에게 총을 쏴 몇 사람을 죽이고, 수십 명에게 부상을 입힌 것 알지? 그런데도 묵인되었어. 한국인이 불량하다고 총독부가 미군에게 미리 일방적으로 정보를 제공했기 때문이지. 우리가 협상 주역으로 나서지 못하고 대신 저놈들이 미군의 카운터파트로 나서니 이런 꼴을 당한 것이야. 여전히 우린 일제 식민지 백성일 뿐이야. 이게 누구 때문이지?”<이완범(한국학대학원교수)‘미군과 소련군은 해방군이냐 점령군이냐?’ ‘한국해방 3년사-광복과 분단’ 참조>
“우리 스스로의 역량이 없으면 어떤 천사도 우리를 보살펴주지 않지.”
최주평이 말했다. 최명산이 받았다. 
“내가 북녘의 소련군 치하에서 살아본 경험을 말하겠소. 소련군사령관 치스차코프는 포고문을 통해 해방된 조선인민 만세!를 외쳤지. 그래서 미군은 점령군이요 소련군은 해방군이다, 라는 말이 돌았지. 그러나 이런 도식은 피상적 관점이오. 소련은 점령군이라는 사실을 위장하기 위해 백성을 현혹하는 선전술을 편 거요. 순박한 백성들은 포고문 문맥 그대로 소련은 한국인에게 덕담을 해주고, 분할점령할 의도를 갖고 있지 않다, 대신 미군은 점령군으로 왔다, 이런 식으로 이해했소. 그러나 시일이 지나자 그것이 아니란 걸 알게 되었소. 모두가 허구야.” 
“우린 미국이 왜놈들을 비호하니까 문제요. 일본은 패전국의 신분을 잊고 한반도 정책에 감놔라 배놔라 깊숙이 관여하고 있소. 그게 누구 때문이요? 미국 때문이 아닌가. 북쪽은 소련군에 의해 일본놈들이 분쇄됐는데 남쪽은 미군의 비호를 받은 왜놈들과 친일파에 의해 묘하게 굴절되어버렸소. 그렇다면 누가 도덕적 우위에 있소? 물어보지 않아도 빤하지 않나. 이러니 왜놈들이 조선민중을 좆으로 아는 거요. 도대체 역사란 우리에게 무슨 소용이 있소? 정의 때문에 역사가 존재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거꾸로 가고 있소. 미군이 조선총독부에게 행정공백과 치안을 대신 맡아달라고 임무를 부여했기 때문에 파생된 문제요. 죽어가는 왜놈들이 몽양 선생에게 치안유지와 안전 귀국을 구걸하더니 미군사령부와 내통한 뒤로는 표변해버렸소. 그리고 온갖 이간질로 국내 정정을 분탕질해버렸소. 쓸데없는 진영싸움으로 유도했소. 그 사이 그자들은 재산과 돈을 빼돌리고, 수백 톤의 금괴도 빼돌렸다는 소문을 들었소. 우리가 물정 모르고 다투는 사이, 그놈들은 귀국동포 수천 명이 탄 귀국선을 바다에 수장시켜버렸소. 그러고도 코웃음치고 있소.”
“전승국 미국이 우리를 대신해 진상규명과 배상을 요구한 게 있소?”
“한통 속이라니까. 그들 역시 범죄자, 또는 공모잔데 어떻게 돕겠소? 일본은 그들이 수중 매설한 기뢰폭발로 인해 배가 반토막이 났다고 보도했으니, 그들이 범죄자가 된 것이오. 결국 서로 책임전가하면서 책임회피를 하는 것이지. 조선민족을 우습게 아는 꼴이지. 그러니 수천 명이 죽었는데도 두 나라 모두 눈 하나 깜짝 안해. 개새끼들!”
“이래저래 우리 백성들만 개피보는구만.”
“그래요. 그저 팔자소관이거니 여기고 살아가라는 거요. 개인의 팔자는 민족의 운명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군. 치욕스럽소. 이렇게 우리가 나약한가? 나는 북으로 가겠소.”
이기면이었다.
“혼란스러워도 남한사회가 낫소. 미국놈 부랄 하나 잘 잡으면 적산가옥 불하받고, 성냥공장 비누공장도 물려받을 수 있잖소. 기회의 땅이오. 나는 꿈을 품고 월남했소. 나와 함께 행동합시다. 서북청년단에 가입합시다.”
최명산이 힘주어 말했다.
“귀하가 말한 게 사실인지 아닌지 직접 북을 보고 확인하겠소. 나를 따를 사람은 지금 나서시오. 다방구석에 박혀 회색의 논리나 펴는 창백한 지성은 더 이상 용납될 수 없소.”
이 말 저 말 듣던 오동태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더니 군말없이 다방문을 나섰다. 모두가 뜬구름을 잡고 있는 것이었다. 
최명산은 나머지 청년들을 향해 열을 뿜었다.
“정말 북의 사정을 모르겠소? 다들 모르는데 답답하군. 내가 북녘 땅에서 겪은 두 가지를  말하면 당신들 생각이 달라질 거요.” 최명산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신의주학생 의거부터 얘기하겠소.”
치스차코프 포고문에는 소련이 북한 주민을 위한다고 했으나 내밀하게 공산주의 체제를 구축해나가고 있었다. 소련군은 행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긴다고 하고는 그들이 실권을 행사했다. 소련군과 함께 귀국한 공산주의 세력을 지원하면서 친소련 정부를 수립하는데, 그 과정이 비밀스럽고 음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나는 평안도자치위원회 자치위원이랬는데 허수아비였소.”
“거기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먼저 자치위원회가 구성되었소. 고당 선생이 몽양의 연락을 받고 이 조직을 건준으로 전환했는데 구성원이 혼재된 상태에서 자체적으로 자치위원회를 만들어서 행정공백을 메웠소. 존경받는 유지들이 자치위원이 돼가지구 치안과 민원을 해결해나갔소. 우리야 고을 치안을 유지하다가 상해 임시정부가 들어오면 가져다 바치면 된다고 보았지. 어떤 기구, 어떤 단체 소속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던 거야. 그런데 어느날부터 자칭 공산주의자들이 활개를 치더니 상황이 복잡하게 돌아갔지. 혼재된 조직 안에서 그들은 순수 공산주의자가 아니야. 순전히 얼치기들이야.”
처음엔 민족주의 진영이 명분도 있고 주민의 신망을 얻어서 민심을 수습해 나갔다. 그런데 소련군이 시·군까지 들어오면서 토착 공산주의자 몇이 환영대회에 나갔다 오더니 외치는 것이었다.  
“너희들은 다 죽었다! 당장 재산 내놓지 않으면 모두 몰아낸다!”
소련군이 이를 부추기며 한 수 더 떴다. 
“그자들이 상점을 약탈하고, 주민의 손목시계를 빼앗고, 여자들을 데려가 욕보이는 거야요. 고국으로 돌아가는 일본 여자들을 주로 강간하는데 보기에 안좋더군. 거부하면 죽이니까 일본 여인들 고분고분 응하는데 인간으로서 동정이 갑디다. 예의를 아는 우리가 그것을 용인할 수 없지. 고래서 자치위원들이 전면에 나서서 막았지. 불상놈들아, 사람의 도리를 하라우! 유지들이 꾸지람을 하자 그 자들이 말을 듣는 척하다가 밤이 되면 똑같아지는 거야요. 육식을 하는 놈들이라서 그런지 욕정을 참지 못하구 여자를 탐하고, 나아가서는 공장 기계와 물품을 빼돌리구, 불평불만분자를 찾아내서 어디론가 보내버리는 거야. 차가운 시베리아로 보내버린다는 소문이었소.”
소련군은 계획을 세워 한반도 진격을 추진했던 것이 아니라 부대를 급조해 전선에 투입한지라 수용소에 갇혔던 불량배, 동부 시베리아를 떠도는 유랑 건달들이 꽤 소속되어 있었다. 지식과 교양 정도는 기대할 수 없는 병사들이었다. 
이런 내용은 중앙일보 대기자 김국후의 ‘평양의 소련군정’‘秘錄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에 그대로 기록되었다. 장달수의 ‘한국학 카페 자료’도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일부 서머리하면 다음과 같다.

소련의 한반도 점령을 위한 대일 전쟁은 세계전쟁사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최단기간에 끝났다. 소련군은 대일 선전포고를 한 다음날인 1945년 8월 9일 나진 웅기 청진 함흥 등에서 일본군과 약간의 전투를 벌였을 뿐, 거의 무혈 입성했다. 일본군은 제대로 총 한방 쏘지 못하고 무장해제를 당하고, 사령관을 비롯 지휘관 모두 체포되었다. 
소련 국방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1945년 8월 31일 현재 일본군 전사자는 장교와 병사를 포함해 1만3295명, 포로병 13만8687명이다. 소련군 사망자는 1446명(장교143명, 하사관 527명, 병사 776명)으로 일본군 전사자의 10분의 1에 불과했다. 
소련군은 일본군 평양수비대 사령관 다케나토 중장 등 북한 주둔 장성 27명을 포로로 잡았고, 이들 장성들과 포로병들은 시베리아로 압송해 군사재판에 회부했다. 이들은 사형을 선고받아 처형됐거나 장기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 포로들은 시베리아 집단농장에서 강제노역을 하다가 제한된 일부만 송환되고, 나머지는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1945년 8월 26일 평양인민위원회 위원장 조만식은 토착 공산주의자이자 부위원장인 현준혁과 친소파 공산당 대표 김용범, 박정애를 대동하고 소련군 점령군사령관 치스차코프 대장의 숙소를 찾았다. 조만식은 치스차코프에게 “소련 군대가 조선에 온 목적이 무엇인가? 해방군인가, 점령군인가?”라고 물었다. 치스차코프는 “나는 순수 군인이므로 정치 문제는 잘 모른다. 곧 입성하는 정치장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나 상의하라”며 이들을 돌려보냈다. 
며칠 후 평양에 도착한 제25군 군사정치위원 레베데프 소장을 만난 조만식이 역시 똑같은 질문을 했다. 레베데프가 대답했다.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왔다. 점령군이 아니다.”
레베데프는 그러면서 ‘조선민중에게 고한다!’라는 포고문을 제시했다.
“그렇다면 좋다. 친일파가 준동하고 있는 가운데 공장 가동이 중단돼 노동자들이 굶주리거나 떠돌고 있다. 식량 또한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토지 제도 미비나 문맹자 문제도 산적해 있다. 우리의 기본 정치노선은 민주주의여야 하고, 자본주의에 입각한 경제제도를 채택해야 한다. 교육을 통해 인민을 깨우쳐야 하고, 피압박 민족의 한을 자주 독립국가 건설로 풀어야 한다. 이 모든 것을 위해 종교 집회 결사의 자유 등이 보장돼야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나.”
조만식이 묻자 레베데프 소장이 불쾌한 표정을 지었으나 정치장교답게 흉중의 속마음을 감추고 정중하게 답했다.
“옳은 말이다. 앞으로 서로 협력해서 그런 사업들을 줄기차게 펴나가자.”
이에 앞서 레베데프는 스탈린과 소련군 총참모장 안토노프 장군의 공동명의로 된 ‘소련군의 북한 점령에 따른 7개항의 지시’ 비밀문서를 극동전선총사령관-제25군 군사회의 경로를 통해 전달받았다. 그가 전달받은 비밀지시 사항은 다음과 같다.

1항 북한 영토안에 소비에트(의회)및 그 밖의 소비에트 정권의 기관을 수립하지 말 것. 
2항 북한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할 것.
3항 붉은 군대의 점령지역에 반일적인 민주주의 조직 및 정당이 결성되는 것을 방해하지 말고 그 활동을 원조할 것.
4항 북한 주민들에게 붉은 군대가 북한에 진입한 것은 일본침략자의 분쇄가 목적이지, 소비에트 질서의 도입이나 한국 영토의 획득이 목적이 아니다 라는 점을 설명하라.
 
이외 몇 가지 더 포함된 이 문서는 1993년 9월 20일 러시아정부로부터 비밀 해제되어 공개되었다. 이것을 일본의 마이니찌 신문이 같은 해 9월 26일자로 특종 보도했다. 
이 자료에 따르면, 소련은 북한에 동유럽형 민주연합정권을 수립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스탈린이 촉구한 ‘반일적인 민주주의 정당 및 조직의 광범위한 블록(연합)을 기초로 한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을 확립한다‘는 것은, 부르주아 민주주의 정권이라는 서유럽 형태의 정권이라기보다 코민테른이 제시한 프로레타리아 혁명단계의 권력 형태를 지칭한 변형된 수사였다. 소련도 미국과 마찬가지로 초창기 한반도에 대한 구체적인 통치 정책이 수립되어 있지는 않았다. 그래서 지원자로 나서겠다는 것을 천명했다. 
두 강대국의 냉전이 강화되기 전까지는 이렇게 민주주의 인민정부 수립을 지원하는 스탠스를 취하고 있었다. 이를 달리 해석하면, 이때 남북 지도자들이 오스트리아의 예에서처럼 갈등을 조율하고 단합한 가운데 합의의 과정에 도달했다면 분단고착화를 막을 수 있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레베데프는 조만식을 첫 면담할 때까지 순수하게 한국의 정권수립을 지원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소련의 정책노선은 이중성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때까지 협력, 또는 지원자의 보폭을 유지하고 있었다. 세상은 몇가지 요인에 의해 선한 길을 가기도 하고 극단의 길을 가기도 한다. 그것을 이끄는 힘은 착한 지도자들의 몫이다.
소련군은 입국 초기 조만식의 평남건국준비위원회와 현준혁의 조선공산당평남지구위원회의 합작을 지원하여 평남인민정치위원회를 출범시키는 등 민족주의자와 공산주의자 그룹의 통합을 지원하고 자치 조직을 허용했다. 
레베데프는 인품이 훌륭한 항일투사 조만식이 북한 사회에서 절대적 신망을 얻고 있다는 점을 확인하고, 그를 지도자로 내세울 복안을 가졌다. 고당의 조선민주당 당원은 5,500명인데 비해 현준혁의 조선공산당은 4,000명 수준이어서 그는 민주주의 국가원수로 내세울 자격과 조건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동유럽 위성국가를 세울 때와 같이 소련은 점령지의 지도자를 발탁할 때, 민족주의자나 토착 공산주의자를 선택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따라 조만식이 배제된 것이다. 조만식은 국민의 신망을 받는 지도자여서 소련이 함부로 핸들링할 수 있는 인물이 아니라는 고민이 있었다. 그런데 그들 입장에서 다행히도 고당이 찬반탁 공간에서 뚜렷한 반공 노선을 걸었다. 소련 군정은 조만식을 회유했지만 소신을 돌리는 데는 실패했다. 결국 그는 연금 상태가 되었다. 
소련측은 현준혁 박헌영 김일성의 성향을 살폈다. 현준혁은 토착공산주의자인데다 민족주의자 고당과 제휴한 회색분자이고, 경성제대 법문학부 출신의 해박한 이론가여서 이론가보다 투쟁적인 군인을 선호하는 소련당국으로서는 일차적으로 배제 대상이 되었다. 박헌영 역시 토착공산주의자로서 원칙적이고 고집스럽고 강경하다는 데 일차적 거부감을 주었다. 
뒤늦게 평양에 입성한 김일성의 지위도 유동적이었다. 나이가 젊은데다 경험부족, 대중적 신망 등이 불확실했다. 조만식보다는 충성적이고 소련군 위관 출신이란 점이 인정되었지만, 조선사회에서 나이가 벼슬인 전통적 풍습에 따라 서른세 살의 젊은 나이와 대중적 인지 부족 등이 소련의 이익을 대변해줄 적임자가 될 것같지 않았다. 그런데 어느 순간 비밀지령이 내려와 레베데프는 일사천리로 작업을 진행했다. 
"김일성이라는 이름은 북한 인민에게 항일의 민족영웅으로 널리 알려진 인물이다. 지도자로 내세우기가 좋다. 가짜냐 진짜냐의 여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정보가 빈약한 조선 민중은 젊은 김성주를 김일성이라고 이름을 바꿔 불러도 믿을 것이다. 그는 학식과 공산주의 이론을 갖추지 못했지만 정치적 신념이 강한 항일 빨치산 출신이고, 충견처럼 소련에 충성할 것을 다짐했기 때문에 그를 지도자로 내세울 조건은 충분하다. 그를 전설적 영웅 김일성으로 환생시켜 공개석상에 내보내는 것은 민도가 낮고, 정보가 전무한-그래서 소문이 무성한-조선사회에서는 유용한 대중조작의 상징인물이 될 수 있다." 
소련의 비밀 경찰의 보고 내용 중 하나다. 이러는 과정에서 신의주 학생의거가 터졌다. 거리에 레닌과 스탈린 초상이 내걸리고, 프롤레타리아 만세 현수막이 나붙으면서 야릇한 공포심이 거리를 지배하던 때 일어난 사건이다. 갑자기 사람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자치위원회가 공산당 본부로 간판이 바뀌고, 명문 수산기술학교가 폐쇄되고, 금융조합 건물을 정치훈련소로 전용하는 것 등의 사태는 민심과는 상반되는 일이었다. 공장의 주요 기기가 뜯겨나가고, 여자들이 납치되고 있었으니 불안감은 증폭되었다. 
이때 신의주고보 학생들이 ‘로스케놈들 물러가라’며 항의시위를 벌였다. 이들이 거리로 쏟아져나온 1945년 11월 23일 낮 오포가 터뜨려질 때쯤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났다. 최명산이 본정통 사무실에서 급히 뛰쳐나가보니 거리에 학생 수십 명이 쓰러졌는데, 그중 세명은 즉사했다. 임시 설치된 공산당 본부엔 더 많은 희생자가 났다.
“나는 무서운 줄도 모르고 공산당 본부로 달려갔소.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지. 거기선 기관총을 장전하고 학생시위대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갈겨대고 있었소. 운동장에는 소련 군인들이 까맣게 깔려있고, 부상자들을 어디론가 들것에 실려나가는데 소련군 장교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너는 뭐냐’고 물어요. 나는 대답 대신 ‘이게 무슨 짓이냐!’고 고함을 질렀댔시요. 그러자 그가 통역을 데리고 와서 내가 무슨 말을 하느냐고 묻는 거야요. 통역은 고국으로 돌아갈 일본 여자였는데, 갈보였소. 여자가 나에게 ‘학생들의 지휘자냐’고 물어요. 나는 분한 생각으로 ‘내 형제들이 죽었다’라고 외쳤지. 여자가 소련군에게 뭐라고 쏼라쏼라 하자 그가 단박에 내 가슴에 총을 겨눠요. 아, 죽었구나. 이때 오히려 내가 태연해지더군. 극한상황에선 생사를 뛰어넘는다는 것을 그때 알았소. 나는 가슴을 쩍 벌리고 야, 씨발놈아, 쏠테면 쏘라! 이따위 총부리 겁 안내! 그랬더니 일본 여자가 또 뭐라고 쏼라 대는 거야. 그러자 소련군 장교가 나를 체포되어온 사람들 속으로 밀어넣는 거야요. 그리고 매타작이 시작되는데 뒤통수를 맞고 까무라쳤지.”
서울역 앞의 다방인지라 주위가 시끌벅적했지만 최명산의 얘기가 진지해서 모두 귀를 기울였다. 어지러운 세상에서 누구나 하나씩의 커다란 사연들을 갖고 있는데, 그것은 해방공간이라는 특수상황이 안겨준 하나의 ‘서사’였다. 
“깨어보니 헛간 같은 곳이더군. 아마도 내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헛간에 버리고 간 모냥이라. 재가 가득 쌓인 헛간에서 깨어났는데, 그때 와락 무섬증이 들더군. 사람들이 어디론가 끌려간 것보다는 행운이라고 여기면서 숨어서 집으로 돌아왔시오.”
이때 자치위원회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대신 보안서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나와 보고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존경받는 유지의 동태를 살펴서 보고하라는 지령이었다. 고을 어른을 밀고하라는 지령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양심상 수용할 수 없었다. 그는 고민하다 평양을 거쳐 황해도 해주-서해 노선을 타고 남하했다. 
“이런 목숨 건 남하인데, 정작 와보니 당신들 개판이오. 정신들 차리시오.”
젊은 생도들은 할 말이 없었다. 
“북한은 전체가 감옥처럼 숨죽이고 있지만, 남한은 마치 소돔 성 같소. 모두가 새 시대에 조응할 준비가 돼있지 못한 거야요. 나는 여러분에게 감히 말하는데, 평양으로는 가지 마시오. 서울은 줄만 잘 서면 입신출세할 수 있는 곳이요. 현준혁 위원장 보시오. 암살당했잖소.”
최명산이 긴 숨을 몰아쉬며 생도들을 주욱 훑었다.
“그가 왜 죽었습니까.”  <계속>


이계홍 작가, 언론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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