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학림 칼럼] 86~91년 화성연쇄살인사건은 무엇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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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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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학림 논설실장


종전의 화성연쇄살인사건은 10건의 살인 사건이었다. 교도소에 있는 범인 이춘재의 자백에 따라 4건의 추가 사건을 합쳐 총 14건의 살인으로 확대됐다. 94년의 처제 살해까지 합치면 이춘재는 모두 15명을 살해한 셈이다. 이것은 그 자체로 전율스러운 것이다. 우리는 공포에 사로잡힐 뿐 이것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사건의 실체 속에는 무서운 것들이 더 있다. 이춘재가 숨은 그 공백과 공허를 애꿎은 희생양들로 메웠던 ‘공권력의 폭력’이다. 그 와중에 애먼 용의자로 몰린 4명이 극단적 선택과 고문으로 죽었다. 이춘재는 도대체 몇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가. 죽은 사람의 경우 지상에서의 고통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아직 살아있는 사람들의 고통은 무엇으로 다 말할 것인가.

화성사건, 암울한 시대 상황과 겹쳐

이후 연쇄살인사건 몇 건 연이어져

극악 사건, 환경·시대와 연결돼 있어

화성 범인 규명, 한국사회 큰 짐 던 것

새로운 사회 만들어 나가는 게 과제

대결·파국의 정쟁 일삼을 때 아니다

화성사건은 한국의 대표적 미제 사건이자 연쇄살인사건이다. 그 사건은 왜 일어났고, 유독 그 사건만은 어떻게 해서 풀리지 않았던가. 14건의 사건이 일어난 1986년부터 1991년까지를 주목해야 한다. 그 연대는 한국 민주주의의 이정표를 세운 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빛나는 시기를 포함하고 있으며, 그 결과 88 올림픽의 해에 5공 청문회가 열려 독재자를 국민 앞에 불러세워 추궁했다. 하지만 시대적 내면에서 86~91년은 극심한 진통의 시기였다. 새 시대가 시작됐으나 구 시대에 머물러 있던 과도기, ‘가짜 시대’였던 것이다.

1987년 6월 전까지 청년들에겐 희망이 보이지 않았다. 그 당시는 전두환 독재의 말기로 5·3 인천 항쟁,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 대국민 사기극인 평화의댐 건설 발표, 박종철 사망, 형제복지원 사건, 4·13 호헌 조치 따위가 줄을 이은 그야말로 암울한 시대였다. 청년들의 내면은 헛헛했다. 64년작 김승옥의 ‘무진기행’을 읽고서는 시대의 불투명한 안개 속으로 빨려들어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싶을 정도였다. 그 밑바닥 같은 시대 상황 속에서 20대의 혈기 방장한 ‘한 짐승’이 화성 들판을 욕정의 시뻘건 눈으로 헤매고 있었을 거다. 그 짐승이 희롱한 것은 죄 없는 생명이었으며 암울한 시대였다. 과연 어땠는가. 오대양 사건, 칼 비행기 폭파 사건을 치르고 88년 노태우 정권이 출범한 뒤에도 한국사회의 공안통치는 계속 이어졌다. 90년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됐으나 화성에서는 살인 사건이 계속 벌어지고 있었고, 91년엔 김지하가 ‘죽음의 굿판’이라 칭할 정도로 불 속에 젊은 생명을 던지는 분신 정국이 한국 사회를 집어삼키고 있었다.

화성사건은 우리 사회의 시대적 트라우마 같은 거였다. 니체는 말했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들여다봤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고 있다.” 아, 이것은 무서운 말이다. 그 심연에서 괴물들이 우리 사회를 조롱하듯이 화성 사건을 이어 계속 튀어 나왔다. 1999~2000년 9명을 살해한 정두영, 2003~04년 20명을 살해한 유영철, 2004~06년 13명을 살해한 정남규, 그리고 2006~08년 10명을 살해한 강호순은 우리 사회의 심연이자 괴물이었다.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잔인한 악마성의 정점을 찍은 살인마도, 살인을 쾌락과 동급에 놓은 쾌락살인마도 나왔다. 연쇄살인마는 사이코패스적인 유전적 요소에 개인 성장사의 환경적 결핍과 시대·사회적 결함이 맞아떨어질 때 등장한다고 한다. 이들은 우리 사회가 정치적으로 강퍅하면서 급속 근대화로 내닫던 1970년대에 유년시절을 보낸 뒤, 1997년 IMF 이후 대한민국의 삶이 파탄지경에서 급속 재편되고 있을 때 범죄로 돌출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세상에 연결되지 않은 것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생각건대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핵심은 인간의 내면은 습자지처럼 쉽사리 젖고 물들면서 상처로 찢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유년의 상처와 기억은 전 생애를 통틀어 그 사람의 밑뿌리에 자리 잡는다고 한다. 그만큼 우리의 개인적 환경과 사회적 환경은 중요하다. 화성연쇄살인사건의 진범이 분자 단위의 과학적 수사 기법에 의해 확인된 것은 우리 사회의 큰 짐을 내려놓는다는 의미가 있다. 풀리지 않는 숙제를 푼 것이다. 미제 사건은 해결이 유예된 것일 뿐 불가능의 영역이 아니다. 우리가 풀어야 할 문제는 반드시 풀어야 하고, 또 그럴 수 있다는 것이다.

2019년의 대한민국은 안녕하신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한국사회가 여기까지 도달한 것은 쉽지 않은 과정이었다. 우리가 이룬 소중한 것을 서로를 위해 소중하게 나눠야 한다. 대결과 파국의 정쟁을 일삼을 때가 아니다. 영화 ‘살인의 추억’의 마지막 장면은 ‘당신’을 응시하는 장면이다. ‘당신’들의 소모적인 싸움을 후속 세대들이 다 지켜보면서 영향 받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과연 정치는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우리는 언제 헛된 정쟁의 짐을 내려놓을 것인가.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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