朴熙道(박회도) 당시 1공수 특전여단장 회고

▲ 8.18 판문점 도끼만행사건

대한민국 지키기 불교도총연합회 박희도(朴熙道) 회장을 만나면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떠오른다. 벌써 38년전 일이라 거의 잊혀진 사건이지만 박 장군이 김일성의 야만적인 도발에 강력 응징했던 문제의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참가한 특전 결사대 총 지휘관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1 공수 특전여단장(준장)이던 박 장군이 한국군의 단독의지로 결행했던 결사대 64명의 특공작전 비화는 사건후 10여년이 지난 1988년 6월,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샘터 발행)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바 있다.

1976년 8월, 김일성의 야만적…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朴熙道(박회도) 당시 1공수 특전여단장 회고
결사대 64명의 응징보복 비화 증언

1976. 8. 김일성의 발악적 도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은 1976년 8월, 김일성 시대의 극악무도한 도발사건의 하나로 7·4 남북공동 성명 이후 문세광(文世光)에 의한 육영수 여사 저격, 남침용 땅굴 발견, 중부전선 아군초소 포격 등 최후 ‘발악적인 사건’이 잇달았다.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에 대한 권력세습을 준비하는 과정에 권력내부의 진통이 일부 외부로 알려지기도 했기에 남한의 자주국방이 정착되기 이전에 일을 벌이고 싶었다고 분석된다.
그해 여름 유엔군측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내 북측 초소와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 절단 작업을 벌였다. 1976년 8월 18일, 미군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가 이 절단작업을 지휘했다. 사전에 북측에 통보한 이 작업에는 경비병 10여명과 한국인 근로자 일부가 동원됐을 뿐이다.
작업이 시작되자 인민군 장교 2명과 사병 9명이 트럭을 타고와 시비를 걸더니 30여명의 인민군이 추가로 밀려와 곤봉과 도끼로 공격하여 보니파스 대위와 바레트 중위를 무참히 살해했다. 그 당시 잔혹한 만행 과정은 즉각 전 세계로 전파되어 걷잡을수 없는 분노와 응징을 유발하고 말았다.

▲ 도끼만행 사건후 판문점앞 땅바닥에 엎드려 메모를 정리하는 외신기자. 오른쪽은 북한 경비병에게 피살된 두 미군 장교의 유해가 본국으로 떠나기 위해 수송기에 옮겨지고 있다.

미루나무 절단 ‘폴 버넌’ 번개작전

문제의 미루나무를 잘라 응징하는 폴 버넌(Poul Bunyan) 작전이 개시됐다. 미 핵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미드웨이호가 한국 영해로 진입하고 괌에서 출발한 B52 전폭기와 최신예 F111과 F-4 전투기도 발진했다. 전쟁을 각오한 일촉즉발의 급박한 상황이었다.

▲ 사지로 부하들을 보내며 굳은 악수를 나누는 박희도 여단장(오른쪽).

미군은 베에라 중령 지휘하에 공병 16명과 경비병 30명이 출동하고 한국 특공결사대 64명이 참여하여 총 110명이 결전에 나섰다. 한국 특공대의 참여는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의지가 반영되어 ‘극비작전’으로 준비됐다.
도끼만행 사건 4일째인 1976년 8월 21일 07시, ‘폴 버넌’ 작전은 전광석화 식으로 전개됐다. 미루나무 큰가지 3개를 절단하고 전원 무사히 지휘캠프로 귀환할수 있었다. 당시 북측에는 150여명의 인민군이 대진하고 있었지만 좌왕우왕 하면서 감히 나서지 못했다. 휴전이후 줄곧 북의 도발에 끌려 다니던 유엔군측이 모처럼 한국 결사대와 함께 강력한 응징 보복력을 보여 주었다.
사태의 심각성에 기가 꺾인 김일성이 유감표시로 사과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미친 개에게는 몽둥이가 제격”이라는 명언을 이 무렵에 남겼다.

“결사대 임무 맡겨 감사합니다”

‘폴 버넌’ 작전에 앞서 박희도 제1공수 특전여단장은 지휘계통을 건너뛰어 합참본부의 지시로 작전명령을 수령했다. 극비사항으로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참가할 특공대를 편성하라는 요지였다. 작명은 박 여단장, 작전참모 박중환 중령, 결사대장 김종헌 소령의 직속상관 김택수 중령 등 3명만이 알고 있었다.
‘1당 100’의 특전용사 64명이 선발됐다. 장교 9명 사병 54명 등으로 공격조, 경계조, 지원조로 편성했다. 장남이나 독신 장병은 선발에서 제외했다. 모두가 죽음을 각오하고 사지(死地)로 가는 길로 받아 들였다. 특공대장은 육사 24기 김종헌 소령이 지명됐다. 그는 육사생도 시절 럭비선수에 태권도 3단의 강골이었지만 마침 신혼초였다. 그에게 특공 결사대장을 맡기자 “여단장님, 감사합니다”라고 거수경계로 답했다. 공수 특전용사의 기본이 이러했다. 김소령은 작전 성공후 미군측의 항의로 징계처분을 받기도 했지만 뒷날 장군(준장)으로 전역했다.
당시 유엔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의 명령은 단호했다. 미루나무 절단작전은 미군이 맡고 한국군은 경호를 맡는다. 무기는 절대로 휴대할수 없다. 단지 몽둥이 하나씩 휴대할수 있다. 작전은 미 베에라 중령이 지휘하니 한국군이 따라야 한다는 요지였다. 이에 한국 결사대는 분통을 터뜨렸다. “도끼만행에 몽둥이만으로 대적하라는 명령이 말이 되느냐”고 했지만 스틸웰은 “규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공작전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때 노재현 합참의장과 이세호 육참총장이 비밀리에 특전여단을 방문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보낸 격려금 50만원을 전달하며 “북이 도발하려거든 철저히 응징하라”고 밀명했다. 박 장군은 이때 전쟁을 각오해야 한다고 다짐했다.

▲ 미군 공병들이 전기줄톱으로 나무를 잘라내고 있다. ▲ 잘라온 미루나무 토막 위에 놓인 현장사진

트럭 샌드백에 M16, 방탄조끼엔 권총

결사대 64명은 자랑스런 특전사 부대표시와 마크를 지우고 성명과 계급표시도 없앴다. 총기 대신에 몽둥이 하나씩 휴대했다. 그렇지만 사지로 출동하면서 맨몸으로 갈수는 없었다.
트럭 적재함의 양측 샌드백을 방호용 벽으로 이용키로 발상했다. M16 소총을 분해하여 샌드백 속에 감추고 각자 방탄복 조끼 안에 권총과 수류탄을 숨기니 몸집이 벌통처럼 불어났다. 미군측에게 발각되면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 절단된 미루나무가 밑둥만 드러나 있다.

출정에 앞서 박장군이 명령했다. “적이 위해를 가해 올 조짐이 보이면 즉각 선제(先制) 타격하라.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고 간단명료하게 지시했다. 이어 결사대장 김소령에게 “지금부터는 귀관이 책임지라”면서 죽음의 길로 출동시켰다.
당초 작전내용은 미루나무 절단 5분, 철수 10분의 ‘번개작전’이라고 했지만 실전에서는 지연되어 7시 45분에야 종료됐다. 물먹은 미루나무 절단작업이 늦어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측 인민군들은 대응할수 없었다.
작전이 전개된 시각 박장군이 자유의 다리 북방에 위치한 미 9보병연대 전방 상황실에 들렀더니 무전 모니터링 소리가 왕왕 시끄러웠다. 8군 사령관, 미 2사단장, 베에라 대대장간 교신이었다. 당시 미 2사단장은 헬기를 타고 공중에서 지휘하고 있었다.
무전기에서 “한국군 미쳤나”, “모두 때려부수고 있다”, “수류탄을 갖고 있으니 사용치 못하게 하라”는 소리가 나오고 우리측 결사대가 “갓뎀”이라며 흥분한 목소리도 나왔다. 박장군이 초조하여 한국군 1사단 상황실로 가니 “왜 때려 부수고 그래...”라며 걱정하는 말을 했지만 작전상 대답할 처지가 못됐다. 이때 1사단도 공동경비구역 좌측에 수색대를 매복, 대기시켜 놓고 있었다.
다시 미 9보병연대 상황실로 가니 축제분위기로 바뀌었다. ‘석세스풀’(successful)이 나오고 “한국군 특수대 넘버원”이 나왔다. 키티호크 캠프(현 특수대 보니파스 캠프)도 역시 축제분위기로 바뀌었다. 비록 미군이 주도한 ‘폴 버넌’ 작전이었지만 한국 결사대가 너무나 통쾌한 응징 보복에 성공했던 것이다.

북측 도로차단기, 초소들 박살

불안과 초조를 지나 10시가 되자 땀에 흠뻑 젖은 64명의 결사대가 전원 무사귀환을 신고했다. 이때 결사대장 김소령이 여단장에게 “적군 한명도 처치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보고했다. 적이 남북 분계선을 넘어오면 선제타격 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한명도 넘어오지 못했던 것이다.
이어 결사대장이 실전과정을 자세히 보고했다. 미군이 미루나무 가지 2개를 절단했을때 인민군 군관 1명이 접근하면서 결사대 측에 항의표시 몸짓을 보여 우리측이 ‘삿대질’하자 금방 물러났다. 이 시각에 결사대는 미 비에라 중령이 서 있는 위치에서 보이지 않는 북측의 6초소와 7초소를 박살내고 전화선을 절단하고 도로차단기도 트럭으로 격파했다.

▲ 북괴는 판문점 안의 군사분계선 남쪽에 있는 저들의 초소를 철거했다.

7시 40분경, 3번째 가지를 자를때 결사대장 김소령의 ‘부셔라’라는 명령이 떨어지자 북측 5초소와 8초소도 순식간에 박살이 났다. 5초소 옆 차단기가 남아 있었지만 이미 비에라 중령의 철수명령이 내렸다. 그러나 결사대 김대위가 권총을 빼내 미군 운전사에게 겁박하여 기어이 북측 차단기를 부숴 버렸다.
작전 종료 귀환후 백발의 스틸웰 장군이 찾아와 64명의 한국 결사대와 일일이 포옹하고 격려했다. 박장군은 유선으로 상부에 보고한 후 서울로 달려 국방부 장관과 참모총장에게 직접 보고하니 특공 결사대의 무공을 적극 격려했다.
특공대장 김소령과 김대위는 스틸웰 사령관의 명령을 위반했다는 죄목으로 군법회의와 징계위원회를 거쳐 처벌을 받아야만 했다. 이에 유병헌 합참의장이 스틸웰 장군에게 “우리는 원칙과 절차를 거쳐 장교 2명을 처벌했다”고 밝히자 이번에는 무기휴대 책임을 물어 박장군마저 책임을 추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8월20일, 육군 3사관학교 제13기생 졸업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서종철 국방부 장관이 대독한 유시를 통해 “미친개에는 반드시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뒤 정부 대변인 문공부 장관은 “북괴 두목 김일성이 전 인민군, 노동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 등에게 전투태세 명령을 하달함으로써 흉계를 드러냈다”고 발표했다.

一死報國, 必死則生의 특공정신

박장군은 ‘돌아오지 않는 다리에 서다’에서 공수 특전단 정신은 죽음을 각오하는 ‘필사즉생’(必死則生)이라고 했다. 박장군은 1967년 미국 북 캐롤라이나 특수전 학교에 유학하여 ‘미국의 힘’이 ‘그린베례’에 있다고 실감했다.
귀국후 제1 공수특전단 대대장을 맡아 ‘안되면 되게 하라’, ‘없는 것을 있게 하라’는 특전단의 행동강령을 철저히 체득했다. ‘사나이 태어나서 한번 죽지 두 번 죽나’가 바로 사생관이다.
박장군은 육사 생도시절 ‘일사보국’(一死報國) ‘필사즉생’의 교육을 받고 월남전에 참전하여 재구대대장을 역임한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뒤 제1공수 특전여단장을 거쳐 26사단장, 특전사령관, 3군 사령관을 역임한 후 1985년 12월 육군참모총장으로 육군의 수장을 맡았다.

▲ 박 장군(오른쪽)이 군사령관 재직시, 집무실을 방문한 리차드 스틸웰 장군(왼쪽)

박장군은 미루나무 절단작전에 결사대가 참가한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의지였으며 결사대가 스틸웰 장군의 지시를 어기고 무기를 휴대하고 적 초소를 박살낸 것은 독단적인 결심이었다고 회고했다. 이 때문에 당초 스틸웰 장군은 박장군에게 “군복을 벗기겠다”고 말했지만 나중에 박장군이 사령관을 맡았을 때는 퇴역하여 사무실로 방문하여 그때 그사건에 관해 격려해 주더라고 했다.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을 잊을수 있는가”라고 물으면 절대로 잊을수 없다고 대답해야 한다. 그때의 김일성이나 김정일을 거쳐 3대째 권력을 세습한 김정은 시대나 한치도 달라지고 개선된 점이 없기 때문이다.

[본 기사는 월간 경제풍월 제181호 (2014년 9월호)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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