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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화려한 휴가' 제작 유인택 대표

"5ㆍ18 당당하게 말할 수 있게 됐기를…"

(서울=연합뉴스) 김가희 기자 = 5ㆍ18 광주민주화운동을 본격적으로 다룬 영화 '화려한 휴가'(감독 김지훈)가 13일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넘어섰다.

'화려한 휴가'는 '디 워'와 함께 침체돼 있던 한국영화계의 구원투수로 맹활약 중이며, 무엇보다 우리 현대사의 아픈 기억인 광주항쟁의 10일간의 기록을 생생하게 재현해낸 영화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전날 전국 관객 500만 명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14일 이 영화의 제작자인 유인택 기획시대 대표를 만났다. 1955년생, 75학번(경복고-서울대 약대)인 그는 젊은 시절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운영위원과 민중문화운동협의회 사무국장을 비롯해 문화운동을 했던 대표적 운동권 인사였다.

유 대표는 1989년 광주항쟁을 처음 다룬 독립영화 '오, 꿈의 나라'를 자신의 연극 공연장에서 상영해 공연법 등 위반 혐의로 기소되자 헌법소원을 내 영화 사전검열이 폐지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에 앞서 1988년 광주에서 공연됐던 마당극 '일어서는 사람들'을 서울에서 처음 공연했다.

1984년 제약회사를 뛰쳐나온 후 맨 처음 한 게 김명곤 전 문화관광부 장관이 연출한 연극 '장사의 꿈'을 기획, 제작한 일이었다.

이후 92년 강우석 감독, 신철 씨와 함께 '미스터 맘마'를 시작으로 영화 제작자로 뛰어든 후 만 15년 만에 처음으로 500만 관객을 돌파한 영화를 갖게 됐다. 그는 '너에게 나를 보낸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 '미인' '해적, 디스코왕되다'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 '맛있는 섹스, 그리고 사랑' '돈텔파파' '목포는 항구다' '신부수업' 등 여러 장르의 영화를 통해 충무로의 대표적인 영화 제작자이자 기획자로 활동해왔다.

"회사 프로듀서가 5ㆍ18항쟁을 다룬 영화를 하겠다고 했을 때 처음엔 말렸다"고 말하는 유 대표에게 영화 인생과 '화려한 휴가'가 가져온 의미 등에 대해 긴 시간 이야기를 나눴다.

다음은 유 대표와의 일문일답.

--'화려한 휴가'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그 전에 만들었던 영화 이야기를 하자. 영화계에서 기획시대는 의미 있는 영화, 운동권 영화 만들어서 망하고 벗기는 영화 만들어 돈 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에로영화와 코미디영화를 만들었던 이유가 뭔가.

▲벗는 영화라고 해서 지탄받을 이유가 없다. 벗는 영화도 얼마만큼 잘 만드느냐가 중요하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의 경우 의미 있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정선경, 김성수, 김서형, 오지호 등의 배우들이 그런 영화를 통해 스타가 되기도 했다.

한국에는 에로영화 시장이라는 틈새시장이 분명히 있다. 그걸 본 거다. 몇몇 (벗는) 영화의 경우 요즘 모바일콘텐츠 회사에서 팔라고 하지만 안 판다. 그 회사들은 분명히 영화 전체가 아니라 야한 장면들만 골라서 편집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영화라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굳이 그 틈새시장을 왜 파고들었나.

▲남들 다 하는 건 관심없다. 남들 안하는 것을 하는 도전 정신, 모험 정신이다. 새로운 분야를 두드리다 보니까 새로운 영역이 나온다. 난 창작자는 아니다. 기획자니까 개척정신이 있어야 희열과 보람을 느낀다. 작품 선정의 기준은 새로움과 대중성이다.

--'화려한 휴가'라는 영화와 결과에 대해 만족하는가.

▲당연히 만족한다. 5ㆍ18을 다룬 영화로 투자자에게 손해를 끼치지 않았다는 건 기적 같은 일이다.

--광주항쟁을 다룬 영화를 언제부터 생각해왔나. 유 대표가 운동권 출신이기 때문인가.

▲아니다. 처음엔 내가 반대했다. 5ㆍ18을 다룬 영화는 험난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게 제작자로서 불을 보듯 뻔하다. 그래서 나보다는 후배 영화인들이 해줬으면 했다. 그런데 '목포는 항구다'의 이수남PD가 어느 날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도 흥행이 됐으니 이제 광주를 말해야 할 때가 아닙니까"라고 말해서 "반대는 안하지만, 글쎄"라고 했다.

수백만 명의 관계자들이 아직 생존해 있고, 5ㆍ18은 한국 현대사의 큰 산맥이기에 두 시간 분량의 대중영화에서 잘못 다뤘다가는 비난의 소지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쯤은 가능하다고 봤고, 문제는 시나리오라고 말했다.

--영화는 전적으로 민초들의 이야기로 풀어갔다.

▲5ㆍ18항쟁은 영웅이 없다는 게 상업영화로서 문제였다. 그래서 윤상원 열사를 떠올렸다. 고인의 가족에게 영화화에 대한 허락을 받았지만 막상 시나리오를 써놓고 보니 먹물(지식인 집단을 그는 이렇게 불렀다)들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때도 '이재수의 난' 때도 지식인이나 양반 계급의 이야기는 재미가 없었다. 고인 가족에게는 굉장히 죄송했지만 그때까지 진행했던 '윤상원 프로젝트'를 뒤엎었다. 그리고 민초들의 이야기로 다시 썼다.

--'화려한 휴가'라는 제목이 처음엔 부담됐다. 젊은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그 사건을 직ㆍ간접적으로 겪고 들었던 세대들은 그게 공수부대의 광주 진압 작전명이라는 걸 알고 있지 않았나. 섬뜩한 느낌도 들었다.

▲김지훈 감독이 쓴 거다. 처음엔 가제였는데 시나리오 작업 거쳐 촬영에 들어가면서 계속 '화려한 휴가'라고 부르다 보니 제작진의 입에 붙었다. 그리고 그런 처참한 사건에 '화려하다'는 어휘가 들어가면서 아이러니한 느낌을 준다고 생각했다.

--제작과정 중 가장 힘들었던 부분은.

▲투자 결정이 늦어졌던 것이다. 5월 열흘간의 기록인데 단풍 떨어지는 배경으로는 못 찍는 거 아닌가. 소재가 그렇다보니 제작비도 쉽게 마련하지 못했다. 손익분기점이 400만 명이 넘어가면 위험하기 때문에 이 안으로 맞추려고 노력했다. 이런 문제 때문에 하지 않으려 했는데 결국 하게 된 것을 보고 '운명이구나' '이게 내 팔자구나' 싶었다. 회사에 빚도 많아서 '어쩌면 이게 영화 인생의 마지막 작품, 은퇴작이 될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했다.

다만 완성해서 광주 시민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면 좋겠다, 투자자들에게 손해만 입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런 생각으로 했다. 다행히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것 같아 좋다. 나를 아는 사람들이 "유인택이 영화계에 뛰어들어 결국 해냈구나"라며 박수를 쳐줬을 때 최고의 찬사였으며 보람을 느꼈다.

--30억 원을 들인 금남로 세트장 문제는 어떻게 됐나. 광주시에서 협조하는 듯했으나 그렇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광주 분들이 지금까지 나온 영화를 보고 실망을 많이 해서 그런지 선뜻 나서지 않았다. 영화 보고 생각하자는 판단이었다. 그런데 광주 세트장에 개봉 전 이미 5만 명이 다녀갔고, 지금은 주말에 2천 명 가량이 찾아온다고 한다. 요즘 광주시 관료들에게 내가 이렇게 말한다. 중고등학생들도 이 세트장을 배경 삼아 캠코더로 자기들끼리 영상물을 만들고, 뮤직비디오도 여기서 찍고, 그래야 되는 것 아니냐고. 이제 광주항쟁에 대한 부채의식을 넘어 자랑스러운 우리 역사로 뛰어넘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영화 지원을 담당했던 홍진태 광주시 문화정책실장이 서울에 파견나와 있는데 궁금해 못 견디겠다며 첫 시사회인 언론시사회에 참석했다. 나도 그분의 반응이 제일 궁금했다. 그런데 "광주 영화네. 광주 시민이 좋아하겠네"라며 "광주 시민이 27년간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고 좋아하셨다.

--너무 대중영화에 충실하게 만들어서 그런가. 정치적 논란이 거의 없다.

▲논란이 될 수 없는 게 진보적 성향이든, 보수적 성향이든 일단 영화를 보고 나서 첫마디는 "잘 만들었다"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광주 시민이 "됐다"고 했다. 그 항쟁의 당사자들이 "이 영화, 됐다"고 하는데 소위 내가 말하는 먹물들이 뭐라 왈가왈부할 수 있겠나.

사실 자체검열을 수없이 거쳤다. 시나리오가 나왔을 때 그 당시 집회의 사회자였던 김태종 씨, 김선출 씨, 윤상원 열사 동생인 윤태원 씨 등에게 보였고, 촬영분이 나왔을 때도 관계자분들에게 보였다.

--'화려한 휴가'의 성공이 준 가장 큰 의미는 무언가.

▲이제 부채의식 없이 5ㆍ18을 이야기할 수 있게 된 점이다. 광주 사람이든, 경상도 사람이든, 서울 사람이든 자연스럽게 광주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나. 아이들이 물었을 때 부모들이 편안하게 대답해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5ㆍ18을 당당하고 편안하게 이야기하며, 이제 우리가 '민주'라는 단어에 콤플렉스를 갖지 않듯 광주항쟁도 자랑스럽게 우리 역사로 말할 수 있게 됐다.

또 영화적으로는 새로운 광주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물꼬를 텄다고 생각한다. '화려한 휴가'를 계기로 가슴 한켠에 응어리로 남아 있는 부채의식이 영화계에서도 없어질 것 같다. 이미 또 다른 영화도 다른 회사에서 준비 중이고.

--유 대표를 말할 때 형인 유인태 의원을 빼놓을 수 없다. 이 영화에 정치적인 목적이 있는 것 아니냐는 시각도 이 때문일 텐데.

▲이렇게 말하면 놀라겠지만 형 전화번호도 모른다. 제사나 명절 때밖엔 보지 않는다. 연락할 일이 있으면 형수님이나 보좌관을 통한다. 내가 정치인들을 많이 아는 건 민통련 운영위원으로 활동했고 문화운동을 했기 때문이다. 당시 문익환, 백기완, 이부영, 이해찬, 박계동 씨 등등이 활동하지 않았나. 또 고등학교 동문 중 많은 수가 정계와 연관이 있다. 형과 상관없이 내가 아는 사람들이다. 그럼에도 내게 정권 초기에는 줄을 대달라는 사람들이 있었고, 내가 그렇게 하지 않자 등을 돌린 사람들도 있다. 이번에 영화 만들 때도 형이 CJ에 압력을 넣었을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는데 웃고 만다.

--'화려한 휴가'가 '디 워'와 함께 침체에 빠져 있던 한국영화를 구한 셈이 됐다. 심 감독과 인연은 있나.

▲심형래 씨가 '티라노의 발톱'을 만들었을 때 방배동 사무실로 날 초대했다. 그때 내가 영화제작가협회 일을 했을 때였는데, '메이드 인 코리아' SF영화를 만들겠다는 의지가 대단했다. 나 역시 코미디 영화, 야한 영화를 만들면서 갖가지 말을 들어 심 감독이 어떤 심경이었을지 난 이해가 된다. 또 그분 역시 한 우물만 판 것 아닌가. 그분도 지천명의 나이로 알고 있는데 나도 50대이니 '50대의 성공'이라고 할까. 그래서 기분이 더 좋다.

'실미도' '태극기 휘날리며' '왕의 남자' 등 천만 관객이 넘는 영화 중 세 편이 40대 감독과 제작자가 만든 작품이다. 우리 사회가 너무 젊어지려고 하고 있는데 일을 해내는 건 40대, 50대가 아닌가. 심 감독도 20년은 더 하실 수 있다고 본다. 참, 내가 그때 심 감독에게 "제작은 해도, 감독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말했는데 이젠 그 말을 거둬들여야겠다(웃음).

--유 대표가 앞으로 20년은 더 할 수 있다는 말로 들린다. 앞으로 계획은.

▲문화로서 한국영화가 해야 할 일을 찾을 것이다. 산업으로서 영화 제작을 따라가는 건 내게 맞지 않는다. 그러려면 진작 SK나 KT 등 통신업체들과 뭔가를 했어야 할 것이다. 코미디 영화를 전문으로 제작하는 채플린 엔터테인먼트를 별도로 만들어놓고 지금 개점휴업 상태다. 좋은 코미디 영화를 만들고 싶다. 박철민 씨의 연기가 화제인데, '목포는 항구다'의 박철민 연기와 '화려한 휴가'의 박철민 연기가 뭐가 다른가. 우리에게 그만큼 코미디 영화에 대한 편견이나 선입견이 존재하는 것이다.

kahee@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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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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